문화유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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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전당
    서구 치평동만전당晩全堂은 서구 치평동과 덕흥동에 걸쳐 있는 지역인 극락면 평촌리에 평강平康 채두영蔡斗永이 지어 지냈던 정자이다. 『조선호남지』(1935) 권2에 실려 있다. 채두영의 아들 채동연蔡東延(1825~1883)은 1879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전북 군산의 임피臨陂에서 살았다.평강 채씨는 강원도 평강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2018-05-23 | NO.27
  • 만취정
    서구 매월동 (동산부락)만취정晩翠亭은 1925년에 김용희金容希(?~?)가 매월동 화개산 기슭에 처소로 지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20리에 있다. 『조선호남지』(1935)에는 서창면 동산리라고 했다. 김용희가 풍욕자적風浴自適하며 지내던 정자이다. 후석 오준선이 기문을 썼고 현와 고광선이 상량문을 썼다. 주인 김용희, 후석 오준선과 만초 이복규의 시가 있다.김용희는 면암 최익현의 제자로 면암이 거의했을 때 병으로 참여하지 못해 원통해 하며 두문 불출하면서 만취정에서 독서와 학문연구에만 정진했다. 만취정, 논어의 지知인仁용勇, 즉 지혜로운 사람은 유혹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마음이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아니하며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아니 한다[知者不惑 仁者不憂勇者不懼]는 실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김용희는 정자에 지은 시에서 만취晩翠라는 이름은 ‘송백(松栢 소나무와 오동나무)이 늘 푸르듯이 절조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뜻을 이렇게 읊었다.동산복축가첩지 東山卜築可捷遲 동산 위에 정자 지어 이곳에 거처하며정식송청수호지 庭植松靑受護持 뜰 앞에 솔을 심어 정성껏 돌봤다네임하횡금문숙처 林下橫琴聞肅處 거문고 옆에 끼고 노래하는 그 곳이요석두고침취면시 石頭高枕醉眠時 돌머리 베개 삼아 자우르는 그때로다.노룡굴곡운장체 老龍屈曲雲藏砌 늙은 용이 휘몰아치는 구름 섬돌 가에 숨고백학편표설만지 白鶴翩翲雪滿枝 흰 학이 나비처럼 날아 눈 쌓인 가지에 앉듯면사아손성만달 勉使兒孫成晩達 후손에게 경계하여 늘그막에 명성 얻기를영언춘색불위이 永言春色不萎移 이를 본받아 길이 지켜 변함이 없었으면시에서 당시의 일제강점기라는 격동기에 겪어야 할 후손들에게 ‘만달晩達’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것은 육친의 덕이 없어, 또는 자신의 부덕으로 나라를 잃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고, 노력을 엄청나게 해도 돌아오는 공덕과 대가는 별로 없이 고생이 많다는 이야기다. 특히 사회적 관계에서 장애가 많아 좌절과 불운이 연속되며 안정되지 못한 생활을 영위해 나아가야 할 후손들을 걱정하고 늘그막에 벼슬이나 명성과 인망이 높아지길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2018-05-23 | NO.26
  • 문화정
    서구 마재로3(금호동)서구 금호동의 마재근린공원 가운데 위치하며 중흥아파트 쪽문 가까운 곳에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정자이다. 1999년 마재근린공원이 조성될 사이에 만들어졌으며 누군가 ‘문화정文化亭’이라는 현판을 만들었다. 이왕 마재정이라 했으면 더 좋았을 듯 싶다. 다른 곳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풍금사거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비교적 넓은 공원이며 지역민의 휴식처이다. 풍금사거리 바로 앞에 있으며, 서구문화센터 옆에 위치한다. 여기 마재근린공원에는 서구의 유일한 시비라 할 수 있는 정덕채 시비가 함께 있다.
    2018-05-23 | NO.25
  • 봉암대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서강처사瑞岡處士 팔봉八峰 한기와韓基窩가 지었다고 한다. 그는 전남 영광군 홍농면 칠곡리 칠암, 홍농산 홍문동 홍문폭포虹門瀑布가 있는 곳에 홍문취헌虹門翠軒에서 송사 기우만 등과 학문을 논하며 지냈던 인물로 구한말 지식인이었다.봉암대鳳巖臺, 한기와가 읊은 시만 전하고 있다.높은 산등성이에서 읊조리는 나의 생각이여봉암대 위의 바위는 높고도 높네아침 해 선명한 별 오동에 올라 환하고단산 굴의 상서로운 빛은 땅 속의 숨은 것을 열어 놓았네.세상에는 할 수 없어 몸이 출몰을 하고누가 능히 옛날을 생각해 도리의 말을 하는가동방東方에 군자의 시기가 늦으니인조仁鳥가 온다면 반갑게 보리라. 시에서 인조仁鳥는 어진새[仁鳥]라고 불리며 상서로운 새이다. 덕치德治로 백성을 교화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하였을 때 나타나는 새들의 왕이라고 한다. 유가 사대부로서의 자세와 사명의식에 충실한 강직한 선비의 자세가 묻어있다.
    2018-05-23 | NO.24
  • 봉황정
    서구 사동길 118(서창동)서구 서창동 절골마을 봉산재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절골마을에 터를 잡았던 박지흥朴智興(1411~1488)의 추원재追遠齋와 박정朴禎(1467~1498)의 추모재追慕齋가 있다. 그 앞은 마을 정비사업으로 쉼터를 만들었는데 새로 지은 정자 이름이 봉황정鳳凰亭이다.아마도 박지흥과 박정, 부자간에 한 번씩 노닐다 담소를 나누며 즐기다 가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빛고을산들길이 지나가는 곳이다.
    2018-05-23 | NO.23
  • 서창루 세동각 세하당
    서구 눌재로 420(세하동)1998년 조성된 기존의 서창향토문화마을이 2017년에 정비사업을 통해 서창한옥문화관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내부의 한옥 건물에 대하여 정인서 서구문화원장의 제안으로 지역의 명칭을 따라 건물 이름과 방 이름을 정하여 생명을 갖도록 했다.서창루西倉樓는 서창지역이 옛 세곡창고였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고, 세동각細洞閣은 삽봉 김세근 장군이 이 마을로 들어와 살았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세하당細荷堂은 세하동 마을 명칭에서 가져왔다.한옥문화관 내부에는 방마다 박상, 박순, 박광옥, 박호련, 김세근의 이름을 붙여 서창지역의 역사적 이름들을 기억하도록 했다. 문화관의 두 개의 출입문도 하나는 공자의 수신편에 나오는 첫 구절인 격물이 이상적인 정치의 첫 단계로서 사물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는 의미를 가진 격물문格物門, 다른 하나는 논어의 첫 편인 학이편은 배움의 기쁨을 말하고 있어 세상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는 배움을 이야기하는 학이문學而門으로 지었다.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옛 문화와 정신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2018-05-23 | NO.22
  • 석서정
    지난 2006년에 완공된 광주천 정화사업을 벌이면서 옛 정자 중 하나인 석서정을 복원했다.석서정은 1800년경에 편찬된 광주읍지에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정조 연간 이전에 사라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석서정 터는 신증동국여지승람(1481) 광산현 고적조에 현 남쪽 2리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정자가 많던 조선시대에도 광주의 명승 가운데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유명했다는 석서정은 고려 우왕 재위기간(1375~1388)에 광주 목사 김상이 광주천의 물길을 바로잡아 주민들의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지금의 양파정 앞 광주천 가운데 석축을 쌓고, 큰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석서정이라 명명하고 양쪽으로 다리를 놓아 건너 다녔다. 이처럼 광주천이란 자연과 맞서 싸워야했던 옛사람의 근심과 분투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내용은 동문선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이색(李穡·1328∼1396)의 석서정기(石犀亭記) 기문(記文)을 보면 자세히 서술돼 있다.이색(李穡, 1328-1396)의 자는 영숙(穎叔)이며 호는 목은(牧隱)이다. 문집은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2018-07-10 | NO.21
  • 석하정
    서구 양3동충장로에서 포목상을 하던 심덕선이 1935년 양동 발산마을 위에 세운 정자이다. 발산마을은 현재 폐가와 공가가 많아 재개발대상인 가운데 최근 예술마을로 조성하는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발산마을이 옛날에는 경관이 수려한 언덕이어서 이곳에 정자를 세웠던 것이다.석하정石下亭은 양동이나 유동 쪽에서 보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우아하게 보였다고 『광주1백년』 저자인 박선홍은 이야기한다. 이 정자의 이름을 석하石下라고 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인 심의종沈宜鍾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호를 따른 것이었다. 심의종은 천성이 효순孝純하고 경학을 탐구하여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였던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1811∼1876)의 문인으로 『광주읍지』에 전하고 있다. 지응현池應鉉(1869~1959)의 붕남실기鵬南實記에 실린 29명 가운데 석하石下 심의종沈宜鍾의 글(정미, 1907)이 있다.이재홍과 함께 포목상으로 이름을 날린 심덕선은 충장로 4가에 남창상회南昌商會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심덕선은 광주 북동 출신으로 일찍이 행상부터 시작해 광주장, 송정장, 장성장을 돌며 어느 정도 자본이 모아지자 충장로 점포를 낸 것이다.그는 호남 일대에서 큰 판로를 가진 거상이 되었는데 1927년 1월에는 경영체제를 합명회사의 형태로 바꾸었다. 1936년부터는 광주 임동의 가네보방적鐘淵紡績 공장에서 생산했던 면직물의 총판매를 맡게 되어 남창상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충장로4가에 도매부, 소매부의 넓은 점포와 창고는 물론 수기동에 있었던 3채의 대형창고에도 중국산과 일본산 비단과 옷감, 광목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심덕선은 사회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계유구락부癸酉俱樂部의 핵심멤버로 참여하여 민중계몽운동과 빈민구제사업에 앞장서기도 했다. 석하정은 1950년대에 철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8-05-23 | NO.20
  • 수월당
    서구 매월동 513 (전평제)서구 풍암유통단지를 지나면 바로 오른 편에 아담하고 아름다운 저수지인 전평제가 있다. 이곳에는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3)이 지었다는 수월당水月堂이 저수지 서편 고목을 옆으로 하고 자리하고 있다. 1943년에 매월동, 벽진동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재해방지를 위해 축조했던 저수지가 도심근교에서 방치되었다. 1999년 국토공원화 시범사업으로 쉼터를 조성, 2002년에 조성 완료하여 지역민의 좋은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전평제는 1568년 박광옥이 당시 선도면船道面 개산蓋山마을 앞에 있다. 현재 매월동 회산懷山마을에 살면서 인근 주민들의 물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방죽을 막아 개산방죽介山防築이라 한 데서 유래되고 있다. 수월당도 그때 방중 가운데에 지어졌던 유서 깊은 정자다.박광옥은 방죽 위에 수월당을 짓고 고경명과 고경순, 이일원李一元, 이군현李君賢 등이 시회詩)를 열고 음풍농월을 즐겼다. 이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는 장소로도 이용했다. 정내 현판에는 “고이순高而順 고경명이 수정水亭에 찾아와 사성 고경순과 더불어 술자리를 마련하고 이순이 먼저 시 한 수를 쓰고 이어서 사성이 지었는데 이근현이 뒤에 와서 시첩을 벽 위에 걸어 두었다. 중촌 2월 9일”이라고 전하고 있다,정자는 무실 팔각정으로 수월당 정이름의 현판과 내부에는 수월당복원문水月堂復元文 현판이 헌액되어 있다. 전평제에서 바라보이는 개금산은 무등산에서 장불재로 내린 용맥 하나가 안양산으로 가고 또 하나는 너릿재로 비룡하여 달리다가 칠구재가 있는 분적산을 세우고 다시 효덕동을 지나 금당산으로 힘차게 낙맥하니 나쁜 기운은 다 떨쳐내어 고은 자태로 화방산을 만들어 이곳까지 이르고 있다.박광옥은 이 우뚝한 산을 “아름답고 돈이 많이 모인다하여 마치 금으로 덮인 것 같다”는 뜻으로 개금산蓋金山이라고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고 선도향약船道鄕約을 실시하는 등 주민들을 교화하는 일에 힘썼다. 그가 지은 시에서 “농사 지어 납세하니 세금독촉 아니오고 / 말과 행동 삼가하니 이 한 몸이 편안하네.[樂業無逋租 安身戒守甁]”하는 대목에서 향약과 교화와 관련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수월당은 아니지만 이름을 그대로 받아 광주시 서구청에서 정자를 복원해 전평제를 찾는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수월당에 올라서 읊었을까?춘심벽초편교원 春深碧草遍郊原  봄이 깊은 들판에 파란 풀이 가득한데부앙료탐만화원 俯仰聊探萬化源  쳐다보고 굽어보며 조화의 근원 찾네사진천홍무일구 謝盡千紅無一句  온갖 꽃들 다 지도록 시 한 구도 못 짓노니수지진악재무언 誰知眞樂在無言  참 즐거움 무언 속에 있는 것을 뉘 알리오회재집 제3권
    2018-05-23 | NO.19
  • 술헌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술헌述軒은 『광주읍지』(1924)에 주의 서북쪽 20리의 회산마을에 있다.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五衛將(조선때 종2품 벼슬, 후에 정3품)을 지낸 강길회姜吉會가 건립했다. 사복시정司僕寺正 강주귀姜柱貴의 증손이고, 강재문姜在文의 아들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 많은 훼손이 생겨나자 그의 아들 회산晦山 강세영姜世永이 중수하고 원운 시를 남겼다. 주인 강길회의 제영이 남아 있다.푸른 수풀 언덕 위에 맑은 수석 가득하니지난 시절 남긴 유업 이어가기 어렵도다골짝 위에 맑은 난초 그지없이 향기롭고언덕 위의 곧은 녹죽 한이 없이 자랐도다그지없는 정성으로 詩禮 전통 이어가고한가로운 마음으로 魚樵 생활 즐겼도다아름다운 이 가운데 한가로이 노닐면서티끌없는 맑은 雲霞 하염없이 바랐도다
    2018-05-23 | NO.18
  • 야은당
    서구 눌재로 420(세하동)야은당野隱堂은 야은野隱 김용훈金容燻(1876~1948)을 기리는 정자이다. 자字는 봉현奉賢, 호號는 야은野隱, 우호又號는 우재愚齋이다. 광주향교의 『광주지』(1968)에는 김용훈을 기리는 서호영당瑞湖影堂이라 불렀다. 지금은 서창한옥문화관과 함께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이 운영되는 정자로 활용되고 있다.삽봉 김세근의 9대손인 김용훈은 1893년에 1차 과거시험인 향시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1904년에 통훈대부 강릉참봉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이듬해 을사늑약의 쓰라린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일제강점기의 혼란에 관직을 포기하고 서구 세하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야은당은 1936년 그가 60세 되던 해에 자제들이 그의 취지와 절의를 사모하여 모든 고난을 다 버리고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것이라 한다. 세동마을 입구의 서창한옥문화관 옆에 있는 이곳은 후석 오준선이 1919년 3월 상순에 그의 처소에 들러 야은당기野隱堂記를 남겼다. 주불공사를 지낸 석하石下 김만수金晩秀(1858~1936)와 소호 조영희, 양정 기남도, 의제 기우정 등이 시를 지었고 주련은 석촌 윤용구가 썼다. 도리석초, 도리기둥의 앞면 3칸 옆면 2칸의 정내 중앙에 내실을 두었으며 팔작지붕이다. 꽤 오래 된 듯 보이는데 아직 비지정문화재에 속한다. 커다란 배롱나무가 인상적이다. 시가나 문장, 노래 따위를 지어 서로 주고받으며 부른다는 내삼문인 창수문唱酬門을 지나야 안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김종 전 조선대 교수가 ‘창수문’ 현판 글씨를 썼다. 오준선은 기문에서 “야은野隱은 본분을 지키는 꾸민 데 없고 진실한 사람으로 산이나 강이 아닌 이러한 평야에 그의 몸을 숨기는 이 일이 그의 실제에 가장 적합한 처사이다.”라고 적고 있다.
    2018-05-23 | NO.17
  • 양파정
    양파정은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다. 양파(楊波) 정락교(鄭洛敎, 1863~1938)가 지은 누정이다. 이 누정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에 지었으며, 1932년에는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인 정낙교의 원기(原記)와 원운(原韻)을 비롯하여 당시 유명한 문인들의 시문을 판각한 30여 점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명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누정에는 원래 석서정(石犀亭)의 옛터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정낙교가 이미 폐정된 이곳에다 누정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楊波亭重建記居高明處臺榭禮經爲順時而言也 거고명처대사례경위순시이언야높고 밝은 누대에 거처하는 것은, 예문과 경전에서는 시대를 순응(세상을 살피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視壅則志滯故必有遊息之物 시옹즉지체고필유유식지물시야가 가리면 뜻이 막히는 까닭에 반드시 휴식할만한 건물이 있었으니, 柳柳州爲爲政而發也 유유주위위정이발야유종원이 위정자를 위하여 지었던 것(정자)에서 시작되었다. 余嘗三復斯言以爲非惟居官 여상삼복사언이위비유거관내가 일찍이 세 번씩 반복 음미하면서 생각해 보니 오직 관료뿐만 아니라 雖處於家者亦不容無此矣 수처어가자역불용무차의비록 가정생활을 하는 이라도, 또한 이러한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此吾亭之所以作也 차오정지소이작야이것이 내가 정자(양파정)를 짓게 된 이유라 創新在甲寅四月重建在壬申五月 창신재갑인사월중건재임신오월이 정자가 처음 세워진 것은 갑인(1914, 당시 정자는 石犀亭)년 4월이며, 다시 세운 것은 임신(1932)년 5월이다.噫歷年十九亭之欹傾頹廢若是焉 희력년십구정지의경퇴폐약시언아∼ 슬프구나 19년 세월을 지나다 보니, 이렇게 정자는 기울어져 퇴락하였는데, 況人事之變遷當何如哉略加修治 황인사지변천당하여재략가수치하물며 인생사 변천은 어떻겠는가? 내 생각은 대략 보수하는 것이었지만, 是吾志而重建乃己亦其勢也 시오지이중건내이역기세야다시 지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이미 대세였다. 從玆以往家居慮欝輒杖策登眺雲烟開斂 종자이왕가거려울첩장책등조운연개렴 이로부터 집에 생활 하면서 울적한 생각이 들면 지팡이 짚고 (정자에)올라 조망하면 구름과 노을이 펼쳐졌다 걷히고朝暮萬像溪流橫帶漁釣交錯萬室之邑百貨之肆 조모만상계류횡대어조교착만실지읍백화지사아침과 황혼녘의 온갖 모습과 흐르는 시내에는 어부들의 낚시대는 서로 이어졌으며, 읍내의 수많은 집들과 상점들이 줄지어 撲其下間曠之趣紛華之像可謂兼有而不相妨矣 박기하간광지취분화지상가이겸유이불상방의아래쪽으로 밀치는 듯하나, 훤한 정취와 화려한 형상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 방해가 되지 않으니.或曰人之憂樂在於其心 혹왈인지우락재어기심누가 말하기를 사람들의 근심과 즐거움은 그 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니心靜則雖一水一石吾得而樂焉 심정즉수일수일석오득이락언마음이 안정되면 비록 물 한 방울 돌멩이 하나에서라도 즐거움을 얻는 것이고 心不靜則雖溪山之勝波斯之繁豈得而樂之哉 심불정즉수계산지승파사지번기득이락지재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비록 강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서양의 화려함이라도 어찌 즐거움이 되겠는가? 라고 하기에余曰子之言是矣反而思之又有一焉 여왈자지언시의반이사지우유일언나는 그대 말이 옳다라고 말하면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또 하나 있으니盖樂者登之可以增其樂憂者登之可以忘 개락자등지가이증기락우자등지가이망대략적으로 즐거운 사람이 이 정자에 오르면 그 즐거움이 증가되고, 고뇌하는 사람이 이 정자에 오르면 근심을 잊으며, 其憂官居者公餘一登足以宣其欝 기우관거자공여일등족이선기울지친 관료가 공무 중 여가를 내어 한번 오르면 충분히 울적함을 떨치고 家居者乘間輒往足以樂其志 가거자승기간완족이락기지일반 가정에서도 틈을 타 이따금 오르면 그 마음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며, 遠方羇旅之道於此者與鄕鄰韻士之登此者皆得以快心目焉 원방기려지도어차자여향린운사지등차자개득이쾌심목언먼 지방의 나그네와 가까운 이웃 시문객 들이 여기에 오르면 모두 눈과 마음이 상쾌해 지리라. 然則吾亭不爲無助於憂者樂者出者處者遠近者之淸償矣 연즉오정불위무조어우자락자출자처자원근자지청상의그렇다면 나의 이 양파정은 고뇌하는 사람과, 즐거워하는 사람, 세상에 나가 활동하는 사람이며,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는 사람과 멀리 사는 사람이며, 가까이 사는 사람에게 청초한 감상을 주는데 도움이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리라而所謂順時游息者與衆共之豈得而獨專哉 이소위순시유식자여중공지기득이독전재소위 시류를 따르기 위한 휴식공간을 대중과 공유하는 것이니, 어찌 나 홀로 독차지하여 즐기겠는가? 라고 했더니聞者黙然無以應遂記其說如此 문자묵연무이응수기기설여차묵묵히 듣던 이가 대꾸하지 않기에 이와 같이 한 말을 기록하게 하였으니, 惟願吾子孫克軆此意嗣而葺之以永其事也오직 나의 자손들은 진실로 이러한 뜻을 체득하여 이어서 엮어갈 것이며 이 정자가 영원히 남아 있기를 소망하노라. -壬申五月下澣 鄭洛敎 記1932년 5월 하순에 정락교 지음.
    2019-08-01 | NO.16
  • 여재각
    만산마을 뒤. 1960년. 광산이씨문중 건립. 여재각은 원산동 만산마을 뒤편에 있다. 광산이씨 문중에서 1960년에 건립한 문중의 재실이다. 건물은 세멘트 기단위에 정평 주초를 놓고 정면 4칸 측면 1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재실내에는 여재각이란 현판 이외에는 별다른 제액은 없다. 여재각에서는 병조 판서 이일영(李日暎), 필문 이선제(李先齊), 양심당 이시원(李始元), 세심당 한원(翰元)의 분암(墳庵)으로 이들을 제향(祭享)한다. 제일은 매년 음력 10월13일에 지낸다. 원주의 기둥에 쓰여진 주련(柱聯) 문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祖宗衣履曹藏處(조종의이조장처)   선조의 옷과 신발 함께 이곳에 저장하고子姓羹牆永慕時(자성갱장영모시)   자손들이 사모하며 길이 여기서 추모하네!俎豆千年長不替(조두천년장부체)   제사를 천년 동안 길이 폐하지 않고箕裘百世永相傳(기구백세영상전)   가업을 백세가 다하도록 길이 서로 전하리!止門宛甫客聲在(지문완보객성재)   문 닫고 채전 일구니 손님이 찾고入室油然孝弟生(입실유연효제생)   방에 들어오니 효제마음 솟는구나! 
    2018-10-21 | NO.15
  • 영락정
    서구 유덕로12번길 12유촌마을 북쪽에 1948년 정종태程宗太 김정곤金晶坤 정원채鄭元采 정찬규鄭燦奎 등이 선도적으로 노력하고 동민들의 협력으로 지은 영락정泳樂亭이 있었다. 원래 이 자리에 영풍정泳豊亭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허물어졌고 마을 사람들이 영락정을 세웠다고 한다. 앞면 2칸, 옆면 2칸 건물로 내부 전체가 벽이 없는 마루로 되어 있었다. 정내에는 영락정이라는 현판과 희사자의 명단이 판각으로 걸려 있었다. 영락泳樂이라는 하는 것은 최초 건립 당시만 해도 맑은 호수가 정자 아래에 넘쳐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겼다고 한다.정자 양쪽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 백년 된 노거수가 있고 극락강의 맑은 흐름이 먼 빛으로 바라보인다. 2008년까지만 해도 한 마을답사팀의 기록에는 사면정자로 남아있었으나 이 정자는 다시 퇴락해 2014년께 8각 정자로 다시 지어졌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정자 형태이다. 바로 인근은 공장과 창고가 즐비해 조망은 좋지 않다. 현판은 보이지 않았다.
    2018-05-23 | NO.14
  • 영모재
    광주읍지(1924)에 영모재永慕齋는 주의 서쪽 30리인 조교동造橋洞에 있다. 진사 둔암 김덕일 및 참의 소천 김성도가 건립했다. 연재 송병선 및 송사 기우만의 기문을 비롯하여 교리 이병관, 진사 임원철의 차운 등이 있다.
    2018-05-23 | NO.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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