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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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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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호정1 觀湖亭
    남구 화장동 (농막마을)  마을 뒤 언덕에 계남桂南 김정수金鼎洙가 지은 정자가 있었다. 농막부락 김인규씨 집 뒷편 숲속에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고 대숲만 썰렁하게 남았다. 관호정의 상량문에 따르면 1932년에 건립되었다.주변에 연방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함지(陷地)가 남아 있다. 영산강이 바라보이고 농막제가 뒤편에 있다. 경당 최윤환이 쓴 김정수의 기적비記跡碑도 있다.농막마을은 1900년경 김채택金彩澤이란 사람이 장흥에서 이주해 오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농사농(農)+막막(幕)=농막으로 농사짓는 마을이란 뜻으로 동쪽 등룡산 자락에서 뻗은 산 능선(28m)이 마을의 동, 남, 북쪽을 감싸 안고 있다. 달 형국을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만 평야지를 바라보고 열려 있어 비보숲쟁이가 조성되어 있다. 정내에는 한말 교육자이자 서화가로 근대 ‘호남화단의 마지막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로 불리는 관호정 계남정사라고 쓴 염제(念濟) 송태회(宋泰會 1873∼1943)의 대서현판이 정면에 걸려있다.주인 김정수의 원운을 비롯한 현와 고광선의 기문, 정순전鄭淳銓, 고광수高光洙 등의 시도 전한다. 차운이 양벽에 갈판揭版되어 있으며 다섯 개의 주련珠聯이 앞 기둥에 부착되어 있었다. 건물은 화강석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위에 정평주초를 놓고 원주의 기둥을 세웠으며 각칸마다 신발돌을 배치하고 있었다. 마루와 대청 사이에는 머름을 배치하였고 평주 위에는 굴도리 고주 뒤에는 납도리가 지나가고 있는 5량가이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골기와 8작지붕이며 정면에 들쇠가 달려있고 중앙칸은 들어열개의 4분합문 좌우각 1간은 2분합문으로 되어있었다.관호觀湖라는 의미는 호수를 바라본다는 물의 철학 ‘가장 좋은 선善은 물水과 같다.’는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노자사상에서 연유한다. 여기서는 원두활수래源頭活水來, 근원에서 끊임없이 활수가 나온다는 의미다. 못에 끊임없이 활수活水가 흘러들어야 맑을 수 있다는 주희朱熹(1130~1200)의 철학사상을 나타낸 것이다.김정수는 이 정자의 일부를 자신의 처소로 할애하여 그 이름을 계남정사桂南精舍라 했다. 관호는 정자의 전체를 말하며 계남정사는 자신의 거실을 지칭하는 별도의 명칭이다. 관호정 주인 김정수는 1934년 강호정원운觀湖亭原韻에서 정자의 모습을 노래했다.   有亭高起壓江城 높이 솟은 이 정자가 긴 강성(江城)을 짓누르니百里明湖鏡裏晴 백리길의 맑은 호수 거울속에 개었도다.雪虐園松猶翠色 흰눈 쌓인 동산위에 푸른 솔빛 울창하고風來庭竹更奇聲 바람 이는 뜰 가운데 대 소리가 차갑도다.鳶飛魚躍觀天理 날고 뛰는 연어(鳶魚)속에 하늘 이치 들어나고鷺宿鷗眠遠世情 /자울으는 노구(鷺鷗)속에 세상 정이 멀어지네.借問仙源何處是 볼 수 없는 선원(仙源)땅을 무엇하러 찾을손가不如修養送平生 한가로운 수양(修養)으로 나의 평생 보내오리.      
    2020-03-11 | NO.255
  • 광풍정 光風亭
    북구 석곡동 환학喚鶴 조여심(曺汝諶, 1518~1594)의 은거터로 그가 학문을 닦으며 유유자적했던 정자가 있다. 석곡동은 무등산 자락 북쪽에 위치한 무등산수박이 유명한 곳이다. 조여심은 학과 같이 살겠다는 뜻으로 스스로 호를 붙였다. 송순, 임억령 등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시우詩友로서 교유했던 서파 오도일이 “성운聲韻이 청절淸絶하고 색택色澤이 낭윤朗潤하여 근세의 문필가가 미칠 바 아니었다”는 시평을 하였다. 오도일은 조여심의 행장을 쓰기도 했다. 그의 정자를 찾는 이들은 조여심의 문장이 뛰어나다는 점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오랜 세월동안 일대에 ‘학선鶴仙’으로 전설처럼 불리고 있었다.조여심은 종형인 관수정觀水亭 조여충曺汝忠과는 완수정翫水亭을 공유하면서 우애가 각별하였고, 종매형인 양곡 소세양에게는 각별했다. 특히 석천 임억령과는 깊은 친교를 유지하며 그의 사상과 문학을 수렴하였다. 조여심의 시풍은 만년의 석천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석천은 무려 20여수의 산거시山居詩를 조여심에게 주었다. 그의 문집 환학당유고에는 창평현에 환학정원운 시를 비롯한 수편의 교유시가 수록되어 있어 교유작가들의 문집에 남아있다. 후손들이 편집한 유일한 작품집인 환학당유고喚鶴堂遺稿가 있고, 당시 환학정을 중심으로 교유했던 임억령, 소세양, 고경명, 기대승, 정철 등의 문집과 창평향교 등에 그의 시문이 남아있다.  
    2020-03-11 | NO.254
  • 괘고정(괘고정수)
    광주시 남구 원산동 579-3 만산마을 입구에 있는 왕버들이다. 이 정자는 실존건물이 아닌 노거수로 이나무를 가리켜 정(亭)이라 한 것은 원래 광산이씨 중조인 필문 이선제( 蓽門 李先齊 ; 1390 ∼ 14543가 손수 심은 것으로 그 모양이 정자의 지붕처럼 뚜렷하고 또 피서의 적지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한다. 높이가 약 15m 가량이며, 가슴 높이의 직경은 약 1.7m 정도이다. 수관(樹冠)의 너비는 13m 내외로 수령은 약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필문 이선제는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쇄락해지리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선제의 후손들은 과거에 등제하게 되면 이 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축하연을 열었기 때문에 괘고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1589년 이선제의 5대손 이발(李潑)이 기축옥사(己丑獄死)로 일컬어지는 정여립모반사건(鄭汝立謀叛事件)에 연루되어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죽임을 당하자 나무가 말라죽기 시작하였다. 그후 이발의 억울함은 밝혀지게 되었고, 죽은지 300여년이 흐른 뒤에 다시 잎을 피워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선조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이 나무를 광산이씨문중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관리하고 있다.*수정 2023.11.21
    2018-10-21 | NO.253
  • 괴양정 槐陽亭
    북구 무등로 1550 (신촌마을)   괴양정槐陽亭은 속칭 비산술산이라는 남평문씨 신재공파 소유의 선산 계곡 위에 있다. 이곳은 북구 석곡월산길 119(망월동) 경렬사에서 광주 4수원지 쪽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신촌마을’ 초입에 표석을 끼고 마을로 들어서면 팽나무. 마을 안쪽 냇가 석곡천이 나온다.신촌마을 앞을 가로 지르는 물가 위에 균산정筠山亭이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그 20여미터 지점에 민가가 있고 그 뒤에 괴양정이 있다. 상량문으로 보면 1891년에 지어졌다. 괴양槐陽이라고 하는 것은 정자 바로 앞에 늙은 괴목이 있어서이다. 앞면 2칸 옆면 2칸으로 콘크리트 바닥으로 변해 있다.괴양정은 서계 문철환文喆煥과 당시 죽파재竹坡齋의 훈장이었던 조카 문기엽文基燁, 문인환文仁煥 등 여러 명이 도와 세운 것으로 휴식처와 후학들의 학구터이다.염재 송태회의 괴양정이라는 현판과 송사 기우만, 균산 문용현, 현와 고광선 등의 기문이 있었다. 지금은 현판은 없고 정자의 유공자 명단을 기록한 방명록만 걸려 있다. 기문에서 죽파서실竹坡書室. 죽파서옥竹坡書屋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때도 조그마한 독서하는 초정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괴양정 아래에 옛날 연못을 인공방죽으로 만들었는데 그 밑에 1920년에 지은 죽파재竹坡齋라는 남평문씨 재각이 있다(현재 죽파재의 건물은 없고 가정집 안에 현판만 보관되어 있다.). 괴양정 바로 위에는 1929년에 설치한 서석단瑞石壇이 있다. 서석단은 남평문씨 신재愼齋 문선文璿과 행주기씨 복재服齋 기준奇遵을 제향한 단으로 1929년에 지어졌다. 단소壇所는 삼문三門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고 내부에는 시멘트로 50cm 높이의 단을 만들고 2개의 단비壇碑를 봉안했다. 문민공복제기선생단文愍公服齊奇先生壇과 사재봉사신재선생단司宰奉仕愼齊先生壇이 새겨져 있다. 
    2020-03-11 | NO.252
  • 국천재 菊泉齋
    기언관奇彦觀(1706~1784)은 고봉 기대승의 6대손으로  광산구 광산동 428번지에 1750년에 국천재(菊泉齋)라는 정자를 짓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강론했다고 한다.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에 그 터와 동백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다.기언관의 자는 백담(伯瞻), 호가 국천재(菊泉齋)다. 본관은 행주(幸州) 기씨로 낙암 기정용(樂菴 奇挺龍)의 조카요 광산 임곡 두정리(光山 林谷 斗亭里)에서 기정후奇挺後(1676~ 1722 :덕성군(進), 19세)의 아들이다. 형조·호조참의를 역임하다 낙향해 백우산(白牛山)에 거처였던 귀전암(歸全庵)을 짓기도 했다.
    2020-04-13 | NO.251
  • 귀락와 歸樂窩
    광산구귀락와는 18세기를 살다간 귀락와歸樂窩 유광천柳匡天(1732~1799)의 서재 겸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이었다. 1732년에 광주 오호리梧湖里에서 부친 사복시정司僕寺正 양기공兩棄公 유휘소柳輝韶와 모친 함평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나옹懶翁 유익서柳益瑞, 조부는 생원 유지채柳之采에 광산에 살았고, 외조부는 진사 이숙빈李淑馪이다.유광천의 손자는 조선 영조 때의 문장가인 유진한柳振漢(1711~1791)으로 자는 중백重伯. 호는 만화당晩華堂이다. 1753년에 호남 지방을 유람하면서 보고 들은 판소리를 한시 <춘향가>로 옮기는 등 시로 이름이 높았으나 벼슬길에는 오르지 않았다. 저서에 ≪만화집晩華集≫이 있다.7세에 이미 글을 읽기 시작하였고, 8세 때에 벌써 시문을 지을 줄 알아 눈이 내리는 광경을 보고 ‘백설이 광야를 뒤덮으니, 뭇 새들 무얼 먹고 사나?’[白雪蔽廣野, 衆鳥何食生]라고 하니 많은 어르신들이 “덕이 있는 말이다.”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22세에 부친상을 치른 2년 후 순창 백방산栢芳山 아래의 사촌社村으로 옮겨 살게 된다. 이는 살아생전 부친의 뜻을 따른 것으로 양기당은 일찍이 이르기를 “사촌의 골짜기는 산이 험하고 들에 면해 있어서 임천이 그윽하니 이원李愿의 반곡盤谷에 견줄만하다. 내가 마땅히 복거하여 여생을 보내리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25세 때 광산구 월봉서원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많은 친구들과 교유했다. 28세 때에 별시 갑과에 급제하는데, 이때 교리 심이지沈履之가 동료들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호남의 재자才子로 13세에 벌써 문장을 지을 줄 알았다.”라고 하니, 그 후 이름이 서울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장령掌令을 거쳐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제수되었고, 헌납獻納.사간司諫에 이어 1796년(정조 20) 승지承旨를 역임했다.그 후 59세 때에 귀락와라는 거실을 지어 보내다 서울로 상경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다가 1799년 68세를 일기를 생을 마감한다. 묘지는 장성 군북郡北 오동촌梧桐村 뒤 언덕에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이조판서 이조원李肇源이 짓고, 행장行狀은 정기鄭琦가 지었다.저서는 1935년에 간행된 시문집 <귀락와집歸樂窩集> 16권 8책의 석판본이 있다. 유광천의 5세손 유영희(柳永禧)가 연보를 작성하고, 6세손인 유병구(柳秉九)와 유병희(柳秉熙)가 편집·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유병구와 유병희의 발문이 있다.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의 문집인 <존재집存齋集>은 24권 12책인데 권21에 존재 위백규의 귀락와 서문이 있다. 택호인 ‘歸樂’의 의미를 ‘나가버린 마음’[放心]을 ‘추스려 되돌아오게 하는 것’[收而反之]에서 얻어지는 즐거움이라는 의미이다. 어떤 것보다도 큰 즐거움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풀이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 등 특수한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지역의 사또가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가야 했다. 그러므로 평산부사이자 초검관인 유광천은 사건 접수를 받자마자 곧바로 사체가있는 장옹암 마을로 달려갔다. 유광천의 검시보고서에는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적혀있다.‘시체는 이춘대의 방에서 동으로는 벽까지 4척 8촌, 서쪽으로는 4척 5촌, 남쪽으로는 2척, 북쪽으로는 5척 5촌이다. 방 안이 좁아 시체를 마음대로 조사하기 어려우므로 마당으로 끌어내 판자 위에 놓고 차례로 옷을 벗겼다. (중략) 알몸을 자세히 살펴보니 대략 23~24세의 중간 몸집의 남자로 키는 주척으로 7척 9촌이고 두발은 흐트러졌는데 2척 5촌이었다. 두 눈을 감고 입은 약간 벌리고 코에서 피가 흘러 나왔는데 전신의 살빛이 누런색이고 배는 팽창하지 않았고 구타 등의 상처도 없었으므로 약물사고로 추측되었다. 독을 먹었는지 의심스러워 은비녀를항문에 집어넣었더니 금방 검은색으로 변하였다. 변을 채취하여 가열했더니 흰색의 소금 결정 등이 나타났다. 간수를 마신 것이 틀림없었다. 증거 확보를 위해 양성한 집의 곳간을 뒤졌더니 두부를 만들려고 만들어 둔 간수병이 발견되었다. 그 옆에 간수를 담아 마셨는지 사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망 원인은 간수를 마시고 죽은 ‘복로치사服鹵致死’가 분명하다.
    2020-03-11 | NO.250
  • 귀전암 歸全庵
    광산구 광곡길 133 (광산동)광곡마을 입구의 칠송정 집 뒤로 10분 정도 올라가면 고봉 기대승(1527∼1572)의 묘지가 있다. 더 올라가면 고봉이 수양하면서 공부하던 암자인 귀전암 터가 있다. 귀전암은 6대 종손 참의공 기언관奇彦觀이 1706년에 중수했으나 퇴락되었다.귀전암은 이황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論辨을 전개하며 조선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기대승의 월봉서원 낙암정 백운정 등과 함께 그의 유적지 중 하나다. 귀전암은 1569년 9월 기대승이 43세 때 대사성에 재직 중 병으로 하직하고 낙향 후 1571년 청량봉淸涼峯 아래에 지었다.1571년 2 월 고봉 기대승은 가묘(家廟)에서 시사(時祀)를 끝내고 저녁 무렵에 귀전암에 가서 구셩하였는데 이때 아들 효증과 유은, 김경생, 이운홍, 곽호 등과 함께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귀전암歸全庵은 ‘온전히 몸을 보전해서 돌아간다[全而歸之]’는 뜻으로 어원은 증자曾子의 “부모가 온전히 낳아 주셨으니, 자식이 온전히 보전하고 돌아가야 한다[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는 말에서 유래했다. 1572년 성균관 대사성에 오를 때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귀전암을 짓기 전에 고마산顧馬山 기슭 남쪽에 낙암樂庵이 완성되었다. 낙암 아래 동쪽에 또 몇 칸의 집을 지어 찾아오는 학자들을 거처하게 하고 ‘동료東寮’라 이름하였다. 기대승은 이황에게 올린 편지에 “집에서 가까운 산기슭에 조그마한 초암草庵을 지었는데 한가하게 노닐며 쉴 곳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낙樂’ 자로 현판을 걸고자 하는데, 이는 전에 보내 주신 편지에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인하여 제 마음에 원하고 사모하는 바를 부치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황이 기문을 지었으며 액자도 써 주었다.현재는 귀전암 터만 남아있는 데 고봉 묘소에서 귀전암 터까지 10여분 걸리며 가는 길에 귀전암 안내판과 터에는 유허비가 있다. 춘담 기동준이 귀전암기歸全庵記를 써 유허지의 비에 남기고 있다.
    2020-04-12 | NO.249
  • 규봉암 누각
    규봉암(圭峯菴) 누각은 문루 겸 종각이다. 무등산 중턱에 있는 규봉암은 조선 전기 세종, 문종, 단종 때의 문신으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영의정에 추증된 습재(習齋) 권극화(權克和)의 서석규봉기(瑞石圭峯記) 에 따르면 신라시대 의상대상(義湘大師)가 지었다고 한다. 현재 무등산 소재 사찰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육각형의 돌기둥인 柱狀節理帶가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어 규봉(圭峯)이라 부른다. 무등산에서 제일 가는 비경으로 손꼽힌다. 누정 정면에는 '무등산규봉암'이라는 글의 현판이 걸려 있고 2층은 범종루가 있는 공간이 으로 아래는 규봉암 출입문 문루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정면 2칸에 측면 1칸으로 아담하게 지어져 있다. 누각을 지나면 자리한 규봉암(圭峯庵), 이 암자는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무등산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규봉의 10경인 은신대(隱身臺), 삼존석(三尊石), 십이대(十二臺) 광석대(廣石臺), 풍혈대(風穴臺), 설법대(說法臺) 등이 있다. 
    2020-03-11 | NO.248
  • 균산정 筠山亭
    북구 무등로 1550(청풍동, 신촌마을) 균산정은 북구 청풍동 신촌마을 초입에 있는 정자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10리에 있다. 균산筠山이란 대나무의 살갗처럼 추운 겨울의 눈보라에도 그의 절개가 변치 않음을 뜻한다. 노사 기정진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남평 문씨 균산筠山 문용현文龍鉉의 유지를 받아 그의 아들  해사海史 문인환文仁煥(1863~1930)이 1921년에 건립했다. 그의 내종지(內從侄)인 전교관(前敎官) 김기홍(金基洪), 종제 국환(從弟 國煥), 족형 체환(族兄 替煥) 등의 협력을 얻어 창건하였고 그 후 1961년경의 지붕 개와(改瓦)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자의 옛터는 균산의 5대조 성제공惺齋公 문필상文弼尙(1671~1735)이 수헌(水軒)이라는 별당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인지라 더욱 그 역사성이 깊다. 훗날 해사는 초막을 지어 아버지의 학문을 이으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균산이 작고한 지 36년 만에 비로소 이 터에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 정자의 이름을 그의 선친 균산의 호를 따라 ‘균산정’이라 명하였다. 도리석초, 도리기둥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앞면 3간 옆면 3간이다. 1961년경 지붕 개와改瓦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자 입구에 단칸 와가瓦家의 정문이 있고 앞면 또는 옆면에 석촌 윤용구의 ‘균산정’이라는 판각이 걸려 있다. 또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1855∼1934)이 균산정기(筠山亭記) 등이 있다. 고광선은 기문에서 균산(筠山)을 두고 "균죽(筠竹)의 아름다움을 찬미함은 그의 본질이 견고하여 비록 차가운 추운 겨울이라 할지라도 그의 본색이 변치않은 높은 절개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절차지공(切磋之工)이나 스스로의 몸을 다스리는 자수지행(自修之行)이 무성한 균죽(筠竹)의 푸른 색채에 견주어 거의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의 높은 경지에 다달았다"고 평했다.광주시 광산구 평동 출신 묵헌(默軒) 이중권(李重權 1869~1932)이 균산정기(筠山亭記)를 남겼다.정자의 한 중앙에는 다른 정자와 달리 네 개의 기둥이 있는 정사각형의 거실을 만들었고 이층 다락이 설치되었다. 주변 좌측에는 석축 토담이 둘러 있고 그 옆에 노암괴석이 있다. 담밖 열 걸음 정도의 거리에 죽파재가 있고 그 위에 괴양정, 서석단이라는 단소가 있다. 정내에는 정자 주인 문인환의 정기亭記와 정운亭韻을 비롯한 송사 기우만의 기문, 지재 송철헌의 명문이 있다. 22개의 판각이 걸려 있다. 앞면 좌우의 기둥에 10개의 주련이 부착되어 있다. 균산정은 경렬사에서 광주 4수원지 쪽으로 가다보면 우측으로 신촌마을 초입에 표석을 끼고 마을로 들어서면 남평문씨南平文氏 신제공파愼齊公派 소유의 선산 밑(비암술산)에 위치해 있다. 현재 남평문씨 신제공파(愼齊公派) 후손들이 관리해 오고있다죽파재竹坡齋를 세운 문용현은 을사조약 이후 국운이 날로 기울어지니 두문불출하고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죽파재가 폐허가 된 후 “이 땅을 묵힐 수 없고 이 물을 폐할 수 없다”는 뜻을 가졌던 문용현의 뜻을 받들어 문인환이 정자를 세운 것이다. 그는 균상정 원운을 남긴다. 두어 칸의 이 정자를 서쪽 언덕 위에 일으키니불지(佛地)하는 대 그늘이 티끌 없이 맑았도다.서석산의 맑은 정기 창문위에 가득하고영천(靈泉)에서 솟을 샘물 뜰을 들러 돌아오네.선인들의 남긴 유훈 띠에 새겨 간직하고높은 선비 옳은 음공(지팡이) 길이 연해 열려있네부모의 뜻이었다고 어찌 감히 말할손가소리없는 슬픔 속에 술잔을 멈췄도다.
    2020-03-11 | NO.247
  • 극락정
    서구 서창동『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 광산현에는 극락원極樂院이라고 하고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일대에는 앞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왼쪽에는 서창교 일대 야트막한 언덕을 끼고 조선 중엽까지 한양길 중 하나였다.극락원은 조선 중엽 이후에는 사라진 역으로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 일대에서는 영산강을 극락강이라 부르는 관행이 남아 극락원이란 단어가 이어졌다.路出光山縣 길을 나섰더니 어느덧 광산현行登極樂亭 내친 김에 극락정을 오르는데江分平野闊 강은 둘로 나뉘고 들은 광활하고雨洗遠峯靑 비는 먼발치 푸른 산을 씻어내네宇宙身如葉 드넓은 세상에 이네 몸은 한낱 작은 잎새風塵鬢欲星 풍진에 살쩍만 희어갈 뿐浮生長役役 떠도는 인생 모질게도 길기만 하여猶記昔曾經 옛일을 가슴에 묻고 다시 길을 재촉할 뿐이네.河陰先生文集 卷之三 題光山極樂亭  경북 상주 출신 하음河陰 신즙申楫(1580~1639)이 호남기행湖南紀行 중 광산의 극락원에 달린 극락정極樂亭에서 읊은 시다.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에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인 서창西倉은 원래 극락원極樂院 자리였다. 고려시대부터 등장한 원院은 하급관리나 여행자를 위한 여관으로, 초기에는 절에서 사회사업의 하나로 운영했다. 조선시대 역원의 운영이 활발하던 시절, 광주에는 경양역과 선암역 등 2개의 역과 함께 10여개의 원이 있었다. 극락원도 그 중 하나였다. 서창도 한때는 ‘극락창’으로 불렸다. 서창 창고 자리에 위치했던 여관 극락원은 그 앞을 흐르는 강 이름마저 극락강(영산강의 별칭)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 강을 건너는 나루는 극락진極樂津, 지금의 서창나루이다.지금 극락원과 극락진은 어디일까? 광ㆍ송간 도로가 지나는 곳에 놓인 다리가 극락교다. 그러나 극락진이 있었던 곳은 그 한참 아래쪽, 지금의 신 서창교 일대다. 신 서창교 입구 부분(서창동 594번지)이 서창 나루터 자리로 극락진이 있었던 곳이고, 그 뒤 야트막한 언덕자리(서창동 산4번지)에 극락원이 있었다. 극락원은 어느 시점엔가 세곡을 보관했던 극락창(후에 서창으로 불림)으로 바뀐다. 서창에 보관된 세곡은 첨단지구 무양공원 근처의 동창東倉의 세곡과 함께 영산강을 이용하여 영산포의 영산창으로 옮겨지고, 서울서 내려 온 대형 세곡선에 의해 서울 경창京倉으로 올라간다. 세곡창고가 극락원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은 나루터도 한몫을 했다. 조선 초기부터 극락진 일대는 광주읍내와 송정리를 잇는 길목으로 각광을 받았다. 실제로 극락진은 남쪽이나 서쪽 지역에서 광주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극락정極樂亭은 극락원에 딸린 누정으로 수많은 선비들이 들려 그들의 속트림의 시문을 남기고 떠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기용되어 선조를 호종,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평양에서 좌의정, 영의정에는 두 번이나 올랐던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1533~1601)도 1587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 순찰시 들려 누정에 오르고 조망하며 그 감흥을 시로 풀어냈다.조선문학의 4대가로 불린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고 계곡谿谷 묵소默所 장유張維(1587~1638)가 1629년 인조반정의 공신 김류의 전횡을 질타했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어 내려가며 극락원에서 머물며 읊었던 시는 시공간을 넘어 당시의 감회를 느끼게 만든다. 極望平郊豁 광활한 들녘 한눈에 들어오고通流二水長 가로질러 흐르는 두 물줄기 장대하여라雲山分歷歷 또렷이 보이는 구름 덮인 산들煙樹暗蒼蒼 푸르스름 어두운 자욱한 물안개 낀 나무들湖海饒形勝 좋은 경치 넉넉한 호수와 바다光羅接土疆 광주와 나주의 접경이라네郵亭駐征蓋 가던 수레 잠시 역참에 멈춰 서니滿路野棠香 길가엔 찔레꽃 향기가 가득하여라谿谷先生集 卷之二十八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지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던 죽소竹所 김광욱金光煜(1580∼1656)은 우부승지를 지내다 1638년 나주목사로 부임 받고 “好在金支使 김 지사 그동안 잘 있었는지 / 春來得寄聲 봄철 들어서야 소식 전할 수 있게 됐소”하며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친했던 계곡 장유의 시가 극락원에 있어 반가운 나머지 차운하여 읊는다.次光州極樂院谿谷韻暫卸征鞍駐 登臨感慨長 詩魂已漠漠 山色尙蒼蒼古壁留殘墨 遺珠落遠疆 悲吟續淸響 無復襲蘭香竹所集 卷之二   극락원 근처에 살았던 전라도 머슴아를 의리의 사나이라고 부르게 했던 인물 제봉 고경명도 서창나루를 오가면서 극락정에 자주 올랐음이 분명하다. 그의 싯구가 이를 알려준다.皀蓋行春到野亭 鶯花遲日鬧林埛 和風颺幙關三面 好雨隨車擁百靈繡畛滿添陂水白 螺鬟齊矗海山靑 遙知嘯傲登臨處 閱遍三農喜色形霽峯集 卷之三 詩 聞地主成德久在極樂亭
    2018-05-24 | NO.246
  • 극복루 克復樓
    광산구 본량동 산3-2 (용진정사 부근)   광산구의 용진정사湧珍精舍는 후석 오준선이 1917년에 지어 국난과 속세를 떠나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다. 고려시대에 지어졌을 용진사湧珍寺에 극복루克復樓가 있었다. 용진사는 북쪽편에서 가학정을 오르는 출발지에 암자처럼 자리하고 있었으나 사라지고 없다.용진사가 고려시대 있었던 사찰로 여겨진 근거는 삼봉 정도전이 전라도관사로 재임 중이었던 우정 조박과 함께 1935년에 용진사에 올라 머물며 시문을 남겼다. ‘樓在湧珍寺(이 누는 용진사에 있습니다)’라며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려 있다.1377년 2월 무열대사와 정도전이 새로 지은 누각에서 만났었다. 유배가 풀리자 봉화로 돌아가는 길에 무열대사 연서당演西堂 굉연宏演(1275∼1339)의 기문을 읽고 정도전이 후설을 썼다. “여황艅艎의 조박趙璞이 극복루기克復樓記를 소매 속으로부터 꺼내어 나에게 보이면서, ‘이 기문은 곧 무설산인無說山人이 지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이 누각을 극복克復이라고 이름한 것은[今玆樓以克復名] 누에서 무엇을 취한 것입니까[何取於樓哉] 나는 말하기를, ‘아니다. 사람의 근심과 즐거움은 마음에 달려 있어 대하는 경치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니, 마음에 근심이 있는 이는 비록 산천의 좋음과 풍월의 아름다움을 만나더라도 바로 상심傷心의 느낌이 될 뿐이다. -중략- 일단사 일표음一簞食一瓢飮으로 누항陋巷에 살더라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은 것이 안자顔子의 극복이다. 요컨대 오직 인仁한 후에야 그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니, 이 누각을 극복루라고 지은 것은 그 근본을 얻은 것이다.’ 했다.”  동문선 제97권에 전하고 있다.정도전은 또 무열대사의 극복루기克復樓記에 감탄하였다. 그 내용은 “마음이 근심스러우면 좋은 산천과 아름다운 풍월에도 상심만 더하는 법, 그러나 욕심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마음이 활짝 열려 항상 즐거운 것이니 극복루는 누추한 곳에서 가난하게 살아도 즐거움을 변치 않았던 안자의 요체를 얻은 것이라 하겠다.”고 적고 있다.
    2020-03-11 | NO.245
  • 근암정사 謹巖精舍
    근암정사謹巖精舍는 북구 두암동에서 비서승을 지낸 김영규金永奎가 지냈던 곳이다. 
    2020-03-11 | NO.244
  • 금석암 錦石庵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곳곳의 누정에 수많은 시문을 남겼던 성임成任(1421∼1484)이 광산光山(광주)의 무등산에 있는 절 금석암錦石庵에 시를 남겼다. 성임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성종 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경국대전(經國大典), 여지승람(與地勝覽) 등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김극기(金克己)도 무등산내에 있었다는 금석암(錦石庵) 에서 유숙하며 시를 남겼다. 김극기의 시에, “이상한 모양이라 이름을 붙이기 어렵더니, 올라와 보니 만상(萬像)이 공평하구나. 돌 모양은 비단으로 말라낸 듯하고 봉우리 형세는 옥을 다듬어 이룬 듯하다. 명승을 밝으니 속세의 자취가 막히고, 그윽한 곳에 사니 진리에 대한 정서가 더해지누나. 어떻게 속세의 인연을 끊을까, 가부(跏趺)하고 앉아 무생(無生)을 배우노라.” 하였다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금석암錦石庵이라는 선시도 있다.老苔班似錦 이끼는 얼룩져 비단결 같고瑞石列如屛 바위는 마치 병풍처럼 둘렀네時有高僧기 거기 노승이 그림같이 기대어長眼養性靈 긴 잠에 졸며 본성을 닦네
    2020-03-11 | NO.243
  • 금은당 錦隱堂
    광산구 지정동 (봉정마을) 봉정마을에 금은당 송철호가 터전으로 삼았던 금은당이 있었으나 나중에 사후 배향하는 사우로 바뀌었다.  마을의 형성은 1830년 도림마을에 살던 나주오씨 오만기吳萬基가 처음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금은(錦隱)의 금(錦)은 나주 옛지명이고 은(隱)은 은거하였다는 뜻으로 이곳은 나주에 속했다. 이 마을 어귀에 금은당이 위치해 있다. 주변에 자생하는 화초가 많아 꿀벌이 떼를 지어 날아들고 마을가운데 큰 정자나무가 있어 봉정蜂亭이라 불렀다. 그 뒤에 정자나무는 고사하고 꿀벌들이 사라지자 봉정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건물의 축조시기는 상량문으로 보아 1922년에 건립되었으며 구조는 시멘트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건물 좌우에는 우물마루를 놓고 중앙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납도리 5량집이다. 내부에는 근차금은당원운謹次錦隱堂原韻 제액과 금은당편상운錦隱堂扁上韻, 금은당원운錦隱堂原韻 등이 걸려있다.
    2020-03-11 | NO.242
  • 금호정사
    서구 금호동 광주읍 명치정明治町의 최원택崔元澤이 지냈던 곳이 금호동의 금호정사錦湖精舍이다. 명치정은 지금의 금남로 일대이다. 최원택의 자는 도경道京, 호는 금호錦湖, 본은 탐진이며 벼슬은 참봉이다. 당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 유인석柳麟錫은 항일투쟁을 위해 순천 낙안 흥양 여수 돌산 광양 장흥 보성 강진 해남 완도에 통고한다.격문의 내용은 “…… 무릇 우리 종실宗室 세신世臣 관찰사觀察使 수령守令 및 선비 농부 공장 상공 서리 승려까지도 일제히 분기하여 마음과 힘을 합쳐 원수 오랑캐를 무찔러 그 종자를 없애고 그 소굴을 불지르며, 역적의 도당을 섬멸하여 그 머리를 베고 그 사지를 찢어서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하여 나라의 명맥을 튼튼히 하고, 비색한 끝에 통태가 와서 인류가 짐승되는 것을 면해야 할지니, 적이 강하다고 걱정하지 말라. 우리는 정의의 군사가 아니냐. 감히 이와 같이 통고하노니, 여러분은 힘쓸지어다.”병오丙午 윤 4월 일 초10일 정축丁丑. 격문을 받고 분발하여 동맹에 가입하기를 자원한 자가 더욱 많았다. 마침내 문인을 명하여 서신으로 맹약을 맺은 동맹록이 만들어졌다. 이때 최원택이 동맹했다는 기록이 있다.금호정사의 원운은 한성부윤 청우당聽雨堂 민경호閔京鎬(1863~1930)가 다음과 같이 지었다. 『조선환여승람』(1935)에 전하고 있어 그 이전에 지어졌던 정자로 보인다. 이 시에는 금부마을, 만호마을, 운리마을, 월산마을 등의 이름이 보인다.錦府西邊是晩湖居然泉石一邱隅洞廻雲裏欽先哲墅近月山懷永圖甕O能淸閒永竹琴書宜對老窓梧有時士友來相訪戀闕論衿素肚輸  
    2018-05-24 | NO.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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