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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15건)

눌재 박상의 어머니 이천서씨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전해 내려오는 눌재 박상과 어머니 이천서씨 부인에 관한 이야기.눌재 박상의 아버지 박지흥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통분해 호남으로 내려왔고, 입암산 산신령의 도움으로 광주에 터를 잡게 되었다. 박지흥이 광주에 터를 잡고 이천서씨(利川徐氏) 부인과 재혼해서 박정(朴禎), 박상(朴祥),
가문을 일으킨 이천서씨 부인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눌재 박상과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이 태어날 수 있었던 배경과 박상의 강직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박상의 어머니는 18세에 처녀로 50세인 박상의 아버지와 혼인하여 박상을 낳았다. 박상의 어머니인 이천서씨(利川徐氏) 부인의 혜안 덕
광주 서구문화원, ‘의향정신 찾아 떠나는 여행’ 가져
광주 서구문화원은 한국학호남진흥원의 문화원 동행사업으로 23일 광주지역 내 의로움과 의병정신을 간직한 장소들을 방문하고 현장특강을 듣는 등 광주정신의 뿌리를 찾는 답사를 진행했다.이번 답사는 의로움과 당당함으로 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에 대한 현장 탐구를 통해 선현들의 용기와 희생이 오늘의 광주 공동체를
눌재 박상과 우부리 그리고 김숙화
연산군의 말년은 '도가니'였다. 과거로 인재 뽑듯 '흥청과(興淸科)'를 두고 각처 기생을 끌어왔다. 임금을 포기한 '흥청망청'이었다. 애첩의 세도는 가관, 장녹수(張綠水)는 온갖 송사에 간여하여 뇌물 받고 종친 재산까지 빼앗았다.김숙화(淑華)도 만만치 않았다. 논 50결과 한달 갈이 밭을 하사받았다. 요즘 80정보, 24만
주곡(舟谷) 박치화(朴致和)
주곡(舟谷) 박치화(朴致和, 1655~1722)는 찬성공(贊成公) 박지흥으로부터는 8세손이요, 하촌공(荷村公) 박정으로부터는 7세손이다. 박태현(朴台鉉)의 둘째 아들로, 1655년 광주 하동(河洞, 현재 세하동 동하마을)에서 태어났다. ​주곡(舟谷)은 태어날 때부터 영민(英敏)하고 두뇌가 명석(明晳)하여 어린나이에 이미 오경(五
육봉 박우(1476~1547)
박우朴祐(1476~1547)의 본관은 충주.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 박광리朴光理의 중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소朴蘇이고, 아버지는 진사 박지흥朴智興이며, 어머니는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광주 출신으로 1476(성종7년)년 광주시 서구 절골, 불암마을에서 태어났다. 형은 하촌 박정, 눌재 박상이며 아들은 선조시절에 정승
방하동(芳河洞), 거기는 꽃다운 강물이 흐르고
방하동(芳河洞), 거기는 꽃다운 강물이 흐르고        오소후 아버지 눈썹 같은 구름을 따라 걸었다 한 계곡을 지나자 난향에 취해 견딜 수 없었다또 한참 후    어머니 젖가슴 같은 둥근 구릉을 지났다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향기 거기서, 오래 머물며 주저했다
박지흥-찬성공 박지흥 묘역
광주시 서구 서창동 산 92 부근(송학산)서창 절골마을의 입향조인 박지흥의 묘소가 있다. 그의 아들이 눌재 박상이며 손자가 사암 박순이다.
눌재 박상朴祥(1474~1530)
박상朴祥(1474~1530)은 진사 박지흥의 차남이며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던 조선 중종 때의 관료로 사림 운동에 전력한 학자이자 정치가였으며 호남 사림의 대부이다.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이다. 눌재는 1474(성종5년)년에 광주 방하동 본가에서 성균관 진사였던 부친 지흥과 모친 계성서씨 사이에
박대수
박대수朴大壽(1533~1612)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의 참모관이 되어 왜군을 무찌르는데 훌륭한 전략을 내놓았고 광주 의병소 시절엔 고경명과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던 애국지인이다.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인수仁叟, 호는 송계松溪이다. 진사 박지흥의 증손이며, 하촌 박정의 장남인 박호손朴虎孫의 아들이다. 1533년 서창
눌재로
눌재로는 남구 압촌동에서 서구 서창동과 벽진동에 걸쳐 있는 도로다. 눌재로는 남구 압촌동 지석제 부근의 회재로와 맞닿는 부근에서 시작하여, 벽진동의 벽진고가교까지 6,224m의 도로로, ‘우부리 격살 사건’, ‘신비복위소’ 등으로 의로움을 몸소 실천한 눌재 박상(1474~1530)을 기린 도로다. 눌재로를 통해 서구에서 선정
충주박씨찬성공휘지흥 제각복원사적비
서구 사동길 118(서창동)충주박씨찬성공휘지흥제각복원사적비忠州朴氏贊成公諱智興祭閣復元史蹟碑는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 안쪽의 추원재 바로 앞에 있다. 1989년에 세웠다. 눌재 박상의 봉산재를 지나 50여미터만 더 가면 있다. 회암懷庵 박지흥朴智興(1411~1488)의 재실은 오랜 세월이 흘러 훼손되어 다시 개축하려 했으나
추원재 (박지흥)
서구 사동길 118(서창동)추원재追遠齋는 절골마을에 들어온 충주박씨의 입향조 회암懷庵 박지흥朴智興(1411~1488)의 재실이다. 박지흥은 정지 장군의 손녀인 하동 정씨와 결혼 후 이곳으로 낙향했으나 2년 후 상을 당하여 개성 서씨와 재혼했다. 개성 서씨의 사이에서 세 아들이 있다. 하촌荷村 박정朴禎(1467~1498), 눌재訥
추모재 (박정)
서구 사동길 118(서창동)서구 송학산 북쪽 기슭의 사동마을은 오래 전부터 절골마을로 불리었다. 회암 박지흥(1411~1488)과 자녀들이 살았던 초당 터다. 눌재 박상과 영의정을 한 사암 박순의 탯자리이다.조선시대 말까지 방하동芳荷洞에 있는 추모재追慕齋는 당시에 눌재 박상의 큰형인 하촌荷村 박정朴禎(1467~1498)
봉황정
서구 사동길 118(서창동)서구 서창동 절골마을 봉산재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절골마을에 터를 잡았던 박지흥朴智興(1411~1488)의 추원재追遠齋와 박정朴禎(1467~1498)의 추모재追慕齋가 있다. 그 앞은 마을 정비사업으로 쉼터를 만들었는데 새로 지은 정자 이름이 봉황정鳳凰亭이다.아마도 박지흥과 박정, 부자간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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