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조(高敬祖, 1528~?)의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이원(貽遠), 호는 구암(龜巖)이다. 조부는 형조좌랑(刑曹佐郎)을 지낸 고운(高雲), 부친은 고중영(高仲英)이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사촌이다. 김지달(金之達)의 딸인 영광김씨(靈光金氏)와의 사이에서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고성후(高成厚), 차
신련(辛璉)의 본관은 영산(靈山)이며, 자는 기지(器之)이다. 조부는 신무승(辛武昇), 부친은 충의위(忠義衛) 신수견(辛壽堅)이고, 부인은 정언징(鄭彦澄)의 딸이다.《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따르면, 신련은 1540년(중종35) 진사에 입격하였고, 1549년(명종 4) 병과 20위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류수(柳洙)의 본관은 서산(瑞山)이며, 자는 중기(仲沂), 호는 보천(葆川)이다. 조부는 유정(柳汀), 부친은 봉훈랑(奉訓郞) 유희송(柳希松)이고, 동생은 《해동명현록》에 실린 유사(柳泗, 1502~1571)이다.《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유수가 1534년(중종 29) 식년시에 병과 12위로 급제하였고, 12년 뒤인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이 임진왜란을 대비해서 무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장소와 관련한 지명에 관한 이야기. 김덕령(金德齡)[1567~1596]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무등산 원효계곡 상류의 주검동(鑄劍洞)에 대장간을 세우고 칼과 창을 만들어서 군사들을 훈련시켰다는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마을 이름의 유래와 견훤에 관한 이야기. '견훤과 생용마을'은 생용마을에 태어난 후백제의 견훤(甄萱)[재위 892~935]과 관련된 지명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이다.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범희인(남, 82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다,
광주 서구문화원은 지역의 역사를 정리하고 인물 자료 등을 누리집에 올려 지역 역사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이러한 자료들은 지역 역사전문가들이 쓴 책이나 광주시, 광주관광재단 등의 누리집, 그리고 수많은 문화강좌와 자료집을 정리하여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광주시 누리집, 광주관광재단 공식블로그, 광주
명암재는 광주광역시의 남구 대촌동 관할 도금 · 칠석동과 나주시 남평읍 수원리 경계에 있는 죽령산(竹嶺山 184m)에 있는 십여 질이나 되는 큰 명암바위 밑에 김형이 지은 서실이다. 서실을 짓고 '巖巖忽自鳴因以爲名' 시를 지어 바위를 읊으니 바위가 문득 스스로 울기를 수일을 하다가 그쳐
선암仙岩마을은 송정동 영광통에서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을 지나 매일유업과 호남대학교 사이의 대로변 우측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전체적인 마을 형상은 마을 뒤편은 어등산이 감싸고 어등산 남록이 마치 소쿠리 모양을 이루며 마을 앞에는 황룡강이 흐른다. 그래서 배산임수의 풍수지리적인 조건을 두루 갖춘 마을이라고 할
주(州)의 북쪽 20리의 거리에 위치하여 장경공(壯景公) 최사전(崔思全)을 비롯한 손암(孫菴) 최윤덕(崔允德), 가의(嘉義) 최응원(崔應遠)을 제향한 장소이다.고종 계묘년에 장의(掌議) 2인, 색장(色掌) 2인 원생(院生) 5인이다.- 광주읍지(1924) 무양서원 (武陽書院)은 고려 인종(재위 1122∼1146) 때 어의(御醫)이면서 명신
주(州)의 서쪽 40리 나주 경계에 있다. 두 고을이 합설하여 유애사(遺愛祠)를 만들었는데 문간공(文簡公) 이민서(李敏敍), 병산(屛山) 이관명(李觀命),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삼산(三山) 이병상(李秉常), 송호(松湖) 유언호(兪彦鎬)를 향사(享祀)한다.장의(掌議) 1인, 색장(色掌) 1인 원생(院生) 25인이며 고종 무
류사경(柳思敬, 1556~?), 湖節1上-070-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류사경은 문화류씨이며 자는 덕신德新, 호는 육유당이다. 우의정을 지낸 류량의 8대손, 유혜의 아들이며 광주 이장(光州 泥場), 현 남구 양과동에서 자랐다. 문장에 뛰어났고 절개(節槪)가 있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회재 박
노준공(1340∼1397)은 광주 출신으로 그의 후손들이 일곡동 일곡마을에 자작일촌하고 있다. 호는 심계(心溪), 시호는 절효(節孝), 본관은 광주이다. 고려 말 밀직사를 지낸 사청(士淸)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기개가 높아 학문에 열중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광주에서 최초로 효자 인물로 《동국여지승람》에
1390-1453동구 객사 광산관 북쪽 * 희경루 방회도 참여인사. 이 그림 하단에 적은 발문에 앉은 자리도 언급하고 있는데 관복의 인물 가운데 오른쪽이 모임을 주관한 전라도 관찰사 강섬(52세), 가운데가 광주목사 최응룡(54세), 왼쪽 세명 가운데 앞쪽부터 정자공 임복(47세), 남효용, 유극공이다. 위쪽 세 사람은
동구 객사 광산관 정문 광주는 호남의 대표 도시로 자리 잡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시대 관아 건물들은 단 한 채도 보존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중에 가장 늦게 까지 남았던 관 누정으로 객사인 광산관 정문이었던 2층 누각인 황화루이다. 1870년대 초반까지 남아 있었다. 조선 초기 1483년에 지어져 약 400
광산구 비아동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회산晦山 강세영(姜世永)이 지어 지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어진 정자로 보인다. 그의 친구 범원식范瑗植이 부탁해 후석 오준선(1851~1931)이 기문을 써주었다. 정자 주인 강세영의 시에 ‘비아飛鵝 학림鶴林 두 지역이 서북으로 둘러 앉고’라는 글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