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암동 선암마을

선암仙岩마을은 송정동 영광통에서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을 지나 매일유업과 호남대학교 사이의 대로변 우측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전체적인 마을 형상은 마을 뒤편은 어등산이 감싸고 어등산 남록이 마치 소쿠리 모양을 이루며 마을 앞에는 황룡강이 흐른다. 그래서 배산임수의 풍수지리적인 조건을 두루 갖춘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을 바로 앞에는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고 연방죽과 모정쉼터가 있어 주민들의 힐링처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선운지구로 지정되어 아파트가 병풍처럼 건립되어 마을의 조망권이 훼손되고 있지만 오히려 안산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

고려시대에는 선암동 지역에 부곡이 있었던 것 같다. 부곡은 중국에 있었던 제도로서 고려시대 주. . .현 행정단위에 포함되지 않는 특수행정구역이었다. 부곡에는 향. 소와 함께 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부곡의 기록은 고려사에 그 지명이 군현편에 나온다.

전남지역에는 84개의 부곡이 있었으며 광주지역에는 3개의 부곡이 있었는데 선암 송정일원에 서쪽 30리 소지면 소재의 경지부곡, 서창의 벽진부곡, 양과동 양과부곡 선암역 건너편 평동의 평리부곡이 있었다.

경지부곡은 현재 지명이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없으나 광산구 내에서 소자所字 지명이 있는 곳으로서 공장지대가 있는 곳은 소촌 공단이 있다. 첨단 산업단지도 그 지명이 고려시대 삼소동三所洞이었기에 첨단산업단지로 개발되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소는 수공업자들이 사는 곳을 의미한다.

소촌동의 소는 원래 한자로 소촌所村이었는데 후일 소촌素村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따라서 소촌동 일원에 경지부곡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속현제도가 사라지고 중앙에서 모든 현에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고 면리제가 실시되면서 고려시대에 존재했었던 향. . 부곡이 폐지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부곡민은 대체로 화척 진척 양수척처럼 조정시책에 반한 행동을 했거나 불효불충했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또한 부곡이 있는 곳은 대체로 바닷가나 강가에 집중되어 있었고 내륙에는 드물었다.

조선시대에는 선암마을을 역촌 또는 역말이라고도 불렀다. 조선 전기 때부터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모든 지방에 중앙에서 수령을 파견하고 그 아래에 수령을 보좌하는 토반세력인 향리를 두었다.

또한 중앙의 명령이 잘 전달 되도록 각 지역의 요충지에 역과 참을 설치하여 효과적인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맥락을 같이하여 당시 선암역(선암동 434번지)이 설치되고 주변에는 역샘(선암동 383번지)과 역장 집이 있었다.

황룡강을 따라 뱃길도 열려있어 강변에는 구장터라고 하여 장시(場市)도 열렸다. 이런 지역의 중심지 기능도 광주의 관문으로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 일본인들의 진출로 인해 호남선 철도역인 송정역이 아랫들녁판에 생기면서 쇠락해져 상실되고 말았다. 현재까지도 당시 관터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선암마을은 법정동으로는 용운동에 속한다. 이 지역을 굽어도는 황룡강의 용()자와 운()수리의 운자를 따서 용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기개와 서기를 나타낸 것이라고 전해온다. 서봉이나 선암동의 마을 이름은 절 이름에서 비롯되었고,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선암역과 절의 이름을 따서 선암으로 불렀다.

선암마을은 원마을, 구장터, 뱃머리로 나뉘고 원마을에는 연산군 때 선암사 주지가 심었다는 수령 500년 생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가 선암마을의 할머니 당산나무였다.

조선시대에 기록된 읍지에서는 무진주의 서쪽 40리에 위치한다는 소지면所旨面에 속한다. 광주읍지의 선암마을 기록에 의하면 광주의 2개역인 경양역과 함께 선암역이 있었으며 일종의 여관이었던 원도 있었다.

광주는 전남 동쪽보다 서쪽 생활방편을 많이 유지해 문화형태가 우도에 가깝지만 나주길이 광주에서 40리 거리에 있는 선암역을 통과하고 남평과 광주 경계에 있는 광리역 길이 광주를 거쳐 선암역으로 통하고 있다.

역은 주로 지방관리들이 한양 나들이를 할 때 숙식을 제공하고 관리들이 타고 여행할 말을 대여해 주는 관청이었다. 또한 역에서는 문서수발 및 인근 수령들의 치정정보를 수집하는 역할도 했다. 관리들이 역에서 빌려 탈 수 있는 말의 숫자는 차등이 있어 전라우수사의 경우 5, 군수가 탈 수 있는 말은 3필 훈도나 교수는 2필의 말을 이용할 수 있었다.

전라도 좌도역에 속하였던 광주 경양찰방역은 현재 북구 우산동 서방시장 부근에 있었으며 관할 역은 7개 역이었으나 어등산 기슭의 선암마을에 있었던 선암역은 경양찰방의 관할이 아닌 장성 청암역 찰방의 감독을 받았다.

역은 행정구역에 관계없이 병부(현재의 국방부)의 직할기관으로 독립적인 관할 구역과 근무자를 두고 있었는데 운영 역시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선암역의 경우 역 운영경비에 쓰도록 5(수확량에 따른 땅의 단위로 1결은 314천평)의 땅이 주어졌고 근무자들의 생활을 위한 급료로 역장에게는 2, 통신문 전달자인 급주에게는 1.5결이 지급되었다. 이외에도 역에 따린 역졸이나 노비 생활을 위해 그들이 직접 경작하는 12결의 둔전과 말 먹이용으로 47결의 초지도 있었다.

선암역에 딸린 경작지만도 70여결에 달해 오늘날의 선암동, 운수동, 서봉동 일대는 모두 선암역에 딸린 땅이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소지면이었던 선암마을에는 당시 가구수는 72호에 304명으로 역에 소속된 노비는 17명이었다. 역에 속한 양인은 역촌 땅을 경작하고 일정한 소작료를 역에 내거나 역졸이 부족할 때 보조자로 사역을 하면서 살았다.

또한 선암역에는 관리들에게 빌려주는 6필의 말을 길렀다는 기록서울대 규장각 소장의 청암역촌의역삼등마도색성책이 있다. 여기에는 선악, 금용 두 사람이 3필씩을 기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천민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역과역을 잇는 길을 관로라고 했으며 일반박성들은 이용을 꺼리는 길이었다. 반면 백성들이 이용하는 길은 민로라고 하여 따로 있었다. 이런 민로의 중간에 고갯길이나 나루터, 30리 간격의 주요교통의 요지에 원을 설치하여 여행의 편리를 도모 하였다. 당시 원의 이름은 장록동의 장록원이나 함평 고막원 등은 현재의 지명에 그대로 남아있는 사례이다.

원의 운영은 고려시대에는 주로 절에서 운영하다가 조선 초기에 관청이 지도 감독을 맡았다. 원집 운영자는 주민 중에서 신망이 두터운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고 운영비로 45부의 토지를 지급하였다. 원집 운영이 피폐해 지면서 원의 대부분 주막으로 바뀌게 되었다.

고려시대 이후 광주? 전남지역에는 원이 258곳에 달하였지만 조선 중기까지 운영했던 원은 177곳이었다. 광주지역에 있었던 원은 13개소였으며 서창의 극락원, 평동의 장록원, 삼도동의 수려원, 황룡강변의 증원, 영산강변의 혈보원, 신가동의 가동원, 본촌동의 진국원, 하남동의 장덕원이 중요한 원이었다. 이 무렵 나주에서 장성을 가려면 평동을 거쳐 삼도 삼거리를 지나 본량의 북창을 거쳐 임곡의 황룡강을 따라 갔다. 또한 나주에서 광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동곡에서 서창에 있던 극락나루를 건넜고 다시 한양을 가려면 신가동 풍영정 나루를 건너 장성 남면 영신역촌을 거쳐 목호재를 넘었다.

1890년대 일본인들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선암역과 선암나루 그리고 중보 장터에 주막이 있었다. 황룡강을 사이에 두고 그 맞은 편인 평동의 지죽동 지로마을에 뱃머리 주막, 장록원 마을에 삼정 주막도 있었다.

오늘날 선암역촌과 어등산 중턱의 탑동 장이 섰던 강변의 중보마을이 합해져 광산구 선암동이 되었다. 주변은 서봉동과 강모퉁이에는 시인묵객이 쉬어 갔던 월파장서루가 있었으며 황룡강과 평림천이 합류하는 깐치넷다리는 지금은 송산교라고 부른다.

마을 앞 황룡강변에는 선암도仙岩渡와 화로진火老津이 있었다. 황룡강 물을 막아 농사를 짓던 보가 있어서 중보라고 부르는 동네 밑에 갱변 또는 배나드리라고 부르던 선창 겸나루터였다. 송정리에 역이 생기기 전부터 중보마을에는 장이서기 시작했고 이를 선암장터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8세기 후반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구황작물이나 담배 고추 등 상품작물의 재배가 증가하고 장시가 전국적으로 1천개여개소로 확대되면서 광주지역에도 7개 장시(읍장-큰장 작은장, 극락장, 용산장, 선암장, 비아장, 임곡장) 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이 가운데 4개가 광산지역에 있었으며 선암장도 사람들이 붐비면서 번성하였다.

선암장은 현재의 중보에 있었으며 원래 광주 서부의 중심 장으로서 장성과 나주를 잇는 직선로 상에 위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역과 원이 있었던 만큼 교통의 요지로 손꼽혔다.189410월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접주인 오권선이 이끄는 농민군이 나주를 공격하기에 앞서 이 일대에 집결했던 것도 이런 전략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3년 목포 송정리간 호남선 철도가 완공되면서 그해 10월 송정리역의 영업이 시작되면서 선암장은 쇠퇴하고 대신 송정장이 철도의 혜택을 받으며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예로부터 장은 강이나 하천을 끼고 자리잡은 곳이 대부분이다.

광주의 장을 보면 큰장과 작은장은 광주천변에, 대치장은 지금은 작은 개울로 변해버린 천변에 서창장은 극락강변에, 선암장은 황룡강가에 있었다. 동국문헌비고65 시적고3. .향시조에는 선암장이 두 고을에 걸쳐 소개되고 있는데 광주와 나주의 선암장이 그것이다.

당시 광주의 선암장은 2일에 열렸고 나주의 선암장은 8일에 열렸는데 이것은 18세기 말엽까지 장터 앞을 흐르는 황룡강을 두고 2.12.22일에는 광주쪽 강변에서, 8.18.28일에는 나주쪽 강변에서 장이 섰다는 뜻이다. 또 각각의 선암장은 열흘장이었지만 이렇게 강을 오가며 열린 하나의 장으로 보았을 때는 5일장과 별 다름이 없었다.

이런 현상은 얼마 뒤에는 하나의 장으로 통합되거나 소멸되었으며 1833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부터는 오직 광주 쪽 기록만 나타나고 있다. 송정리장이 3, 8일에 열린 것도 선암장에서 장날을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선암마을에 분포한 문화유적으로는 기단부와 상륜부가 유실되었지만 고려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는 선암사지 3층석탑이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다. 3층석탑은 자유당 시절 정모 국회의원에 의해 송정공원으로 옮겨졌으나 그 뒤 마을에 횡액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주민들이 진정을 계속하여 이씨라는 분이 힘을 써 다시 찾아왔다.

이 탑의 특징은 초층 옥개석 위에 직경 5cm, 깊이 8cm 정도의 수혈공이 있었다. 이는 고인돌이나 선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성혈(cup mark)로서 그 속에 곡식과 계란을 담아놓고 아낙네들이 득남을 빌었다고 한다. 김학휘 향토사학자가 오래 전에 이곳을 지나다가 석탑 주변에서 하수도 공사를 할 때 옹기로 된 하수관이 다수 출토되어 석탑 주변에 석탑과 관련된 요사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을의 북동쪽 능선 위에 위치한 오순근씨 집 뒤편 대나무 숲을 중심으로 능선 일대에는 도자기를 구을 때 사용했던 기대들과 파편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또한 일명 진사터라고 부르는 곳에는 기와편도 다수 발견되고 있어 선암마을은 조선시대 이후까지도 시대의 단절 없이 주민들이 거주해 왔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마을입구 연못인 선암제仙岩堤와 마을방풍림이 식재되어 있는 선암방축 仙岩防築이 조성되어 있다. 마을 어귀에는 박현주부인조씨기적비가 동쪽을 향해 서 있고, 노거수가 있는 방축 곁에는 지주이면서 주민들에게 덕을 베푼 박경주유혜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조씨 부인은 6.25 전란 때 자식이 없는 과부가 되어 시부모를 모신 열녀였다. 박경주 유혜비는 지주이면서 소작료를 받아 계속 농토를 늘려가면서도 자신이 받아들이는 전체 소작료는 농지가 늘기 전과 같은 수량만을 거둬 소작인들이 박씨 땅이 늘어나기를 빌었다는 사연이 담긴 석비인데 선암마을 최초 노블리스 오브리주의 실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선암마을 앞에는 비교적 풍부한 유량을 가진 황룡강이 흐르고 있어 소위 배산 임수와 장풍득수의 풍수적 조건을 두루 갖춘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증권이나 펀드운영으로 국내금융업계에 잘 알려진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의 부모님들 묘가 선암마을 뒤편 어등산 자락 황룡강이 바라다 보이는 능선 산록에 위치해 있다.

최근에는 광주 핵심도심인 상무지구와 광산구를 연결시켜주고 서남해안으로 통하는 동맥역할의 어등대로와 맞물린 8차선 광로 건너편에 인구 15천여 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공동주택 단지인 선운지구가 조성되어 선암마을은 도심 속의 살기 좋은 전원마을로 각광을 받고 있다.

나주혁신도시와 평동공단, 서해고속도로의 접근성이 양호하고 마을 바로 옆에는 선운초.중학교, 보문고, 호남대학교가 위치하여 교육적 환경도 좋은 편이다. 마을 안에는 빌라들을 비롯한 유치원 등 교육관련 시설들이 들어서 인구 유입이 빨라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 인구의 증가가 가속화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인구 증가에 따른 개발이 활기를 띠어 과거의 자연마을의 원형이 급속히 훼손되거나 변모를 거듭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영광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1989년에 서봉동59-1번지에 호남대학교 광산캠퍼스가 선암동과 서봉동 경계지점에 세워졌다.

마을의 옛 지명들 속에는 마을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이름들이 많다. 솔땟거리 서쪽에 각시처럼 예쁘게 생겨서 부르게 된 각시바우와 마을 계곡위에 있는 선녀바우, 마을 주민들의 주된 식수원이었던 개금시암이나 구덕시암, 선암역을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던 관터, 안말 남쪽에 당산나무와 함께 있었던 바위인 당산독배기, 구장터 서쪽 황룡강가에 있는 마을로 선암장이 섰던 깽빈마을, 선암진터로도 부르는 깽빈 남쪽에 있는 나루터였던 배낫드리터가 있다.

승주 선암사의 원 사찰로 알려진 탑골에 있는 선암사탑, 선암 서쪽 밭에 밀양박씨가 과거에 급제하여 솟대를 세워 놓아 붙여진 거리인 솔땟거리, 선암동쪽 운수리 경계에 있는 모퉁이로 장승이 서 있어서 부르게 된 장성 모팅이 등 재미있고 흥미로운 우리 땅이름들은 물론 옛 조상들의 정서가 물씬 배어있는 지명들이 많아서 예스러운 모습의 흔적도 간직하고 있지만, 이러한 지명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선암마을에 처음 자리를 잡고 살았던 성씨는 연안 차씨들이 원래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현재 차씨들은 대부분 이 마을을 떠나고 대신 충주 박씨들이 다수를 이루며 거주하였다. 1980년대 초에만 해도 이 마을에는 충주 박씨 19호를 포함하여 96가구 558명이 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충주 박씨들 마저 타지로 이주를 많이 하여 소수의 가구만 남아있다. 현재는 도시화의 급속한 진행으로 여러 곳에서 다양한 성씨들이 유입되어 다채로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선암마을의 민속축제인 당산제는 매년 정원 대보름이면 마을 안에 있는 당산나무에 제를 지내고 그 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곤 했다. 그런데 당시의 할머니 당산나무는 수령이 너무 오래되어 고사 직전에 놓여 있어 199999일 마을 주민들이 당시 150만 원의 가격으로 어느 목공에게 팔아 그 돈의 이자로 10여 년 동안 당산제 제물 준비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아 2009년 이후부터는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있으며, 현재는 당산나무가 서있었던 자리에 애기 당산나무를 심어서 관리하고 있다. 한편 선운지구 개발 이전 도로변에 있었던 징광프레스 공장 자리에는 할아버지 당산과 선돌도 함께 있었지만 선운지구 편입 문화재발굴조사 이후 사라지고 볼 수 없다.

마을내의 종교시설은 선암 중앙교회, 복바위절이 있다. 마을 앞에 있는 연방죽과 시정은 마을 주민들의 쉼터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연방죽 주변에는 2014년 마을 기금으로 잔디광장이 마련되어 마을주민들의 정서함양의 행사장으로 부각되고 있다.

마을 입구의 우측 소나무 숲에는 수십 년 전부터 명당자리를 찾아 천년을 산다는 학 무리들이 둥지를 틀어 아침과 저녁이면 마을 하늘 위를 떼를 지어 빙빙 돌면서 유유히 날아가는 모습은 선암마을의 또 다른 구경거리이다.

마을 뒤편의 어등산은 일제하에서 싸운 호남 정미의병 활동의 산실로도 유명하지만 광산구민들의 건강 지킴이 산으로도 유명하다. 어등산으로 가는 등산로는 여러 곳이 있지만, 선암마을에서 책상봉을 지나 오르는 길은 보문고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합쳐지는데 좌우에 나무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등산을 즐길 수 있다.

어등산 등산로 가운데 사계절 내내 계곡물이 흐르는 곳을 볼 수 있는 등산로는 선암마을에서 오르는 등산로가 유일하다. 마을 좌우측과 뒷동산에는 차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여 소슬바람이 불면 댓잎 스치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숲에서 내뿜는 청정한 공기는 여느 산 숲이 부럽지 않아 힐링의 숲으로도 손색이 없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