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서시랑 평장사 태자소사(中書侍郞平章事太子少師) 채공(蔡公)의 뇌사대저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다가, 70세에 벼슬을 사양하고 정신을 수양하여 천연의 수명을 능히 누린 다음, 죽음을 잘한 자는 고금을 통해 구해 봐도 많지 않은데, 우리 소사(少師) 채공은 그것을 향유하였다.공은 휘가 순희(順
갈천(葛川) 임 선생(林先生) 갈명(碣銘)생의 휘는 훈(薰)이요 자는 중성(仲成)이다. 그 선대는 은진현(恩津縣) 사람이다. 자이당(自怡堂)이라고 자호하였는데, 사람들은 갈천선생(葛川先生)이라고 불렀다. 고사옹(枯査翁)은 최후에 스스로 고친 호이다.고려조 태상박사(太常博士) 휘 성근(成槿)의 후예로, 우리 국조(國朝)에
형조 판서 증 영의정 시호 충정공(忠貞公) 오공(吳公)의 신도비명 병서금상 15년 기사년(1689)에 중궁이 손위(遜位)하자 판서 양곡(陽谷) 오공 두인(吳公斗寅)이 참판 이공 세화(李公世華), 응교 박공 태보(朴公泰輔) 등 80여 인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글을 올려 극간(極諫)을 하였는데, 오공이 실로 소두(疏頭)였다. 이에
기해년 만력 27년, 선조 32년(1599년)○ 도원수 권율(權慄)이 병으로 죽었다. 그 뒤에 휘하의 여러 장병들이 행주산성에 비석을 세우고 이름을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라 하였는데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공이 세상을 떠나 이미 초빈(草殯)했을 적에 그의 친척으로 종군하던 사람이 나를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공
10월 18일. 세 개의 해가 함께 나왔다. 국가가 함몰되고 임금이 파천하였으니, 변괴가 나오는 것이 괴이할 것도 없다.○ 전라 감사 권율이 수원 독성에 있으면서 행조(行朝)에 장계하니 임금이 찼던 칼을 풀어 전하여 보내 주며 말하기를, “모든 장수 중에 명령을 받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치하라.” 하다. 이때
기축록 속(己丑錄續) 성명 미상(1700년대)《기축록》에 이어 효종 8년 정유(丁酉 1657)로부터 숙종 28년(1702)까지 45년간에 일어났던 정개청(鄭介淸)의 서원 철훼를 두고 동서(東西) 양파간의 싸움을 기록한 일기이다.이 일기를 쓴 사람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1700년대 전후에 생존하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 외의 사
최치원의 저술과 고뇌, 그리고 역사 탐구 -1. 최치원의 생애와 저술신라 말의 격동기에 살았던 최치원은 여러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재당 시절과 귀국한 뒤 관리로 재직하던 시절, 그리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해인사에 은거하던 시절 등 세 시기로 구분된다.1_ 가계와 출생최치원은 헌안왕(憲安王) 1년(857) 신라의 서
1. 머리말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시문집 《고산유고(孤山遺稿)》를 번역한 것이다.고산은 주지하듯이 일찍부터 국문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특히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비롯한 일군의 시조(時調) 작품에서 보여 준 뛰어난 문학적 성취는, 그를 송강(松江) 정철(鄭澈,
고산유고 제3권 상 / 소(疏) 삼가 아룁니다.신은 돌아갈 길은 머나먼데 질병이 바야흐로 극심하고, 떠나갈 마음은 다급한데 무더위가 바야흐로 혹독하여, 천리 길을 발섭(跋涉 산 넘고 물 건넘)할 계책을 세우지 못하고서, 아직도 체류하며 나그네 생활을 참고 있노라니, 심회(心懷)가 망연(茫然)해지면서 온갖 생각이 모
월봉서원(月峯書院) 묘정비명(廟庭碑銘) 병서 - 고봉전서(高峯全書) 보유 최근덕(崔根德)조선조 명종ㆍ선조 연간에 문운(文運)이 빈빈(彬彬)하고 사류(士類)가 성(盛)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대(前代)에 겪은 사화(士禍)의 남은 불씨가 아직도 척신(戚臣)과 간인(奸人) 사이에 남아 있어서 은밀히 선비를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論)을 씀1. 머리말이 책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문집과 저술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4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고봉집(高峯集)》은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하여 펴낸 바 있다. 1970년에 간행된 석인본을 대본으로 한 기왕의 국역서
이식(李植) 택당(澤堂)공의 휘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이니 세상에서 고봉(高峯)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존재(存齋)라고도 칭한다. 기씨(奇氏)는 관향이 행주(幸州)인데, 행주는 지금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에 예속되어 있다. 선대는 고려 때에 현달하여 장상(將相)과 훈척(勳戚)을 배출한 문벌의 융성함이 국
정홍명(鄭弘溟) 기암(畸菴)선생의 휘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 성은 기씨(奇氏), 관향은 행주(幸州)이다. 행주에 고봉 속현(高峯屬縣)이 있어서 이 때문에 자호를 고봉(高峯)이라 하였다.기씨는 고려조에 무예(武藝)로 입신하여 장상(將相)을 지낸 이가 퍽 많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면(勉)이 공조 전서(工曹典書)
세종(世宗) 가정(嘉靖) 6년 중종대왕(中宗大王) 22년○ 정해(1527) 11월 18일 임진 갑진시(甲辰時)에 선생은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행주(幸州)이니, 지금의 고양군(高陽郡)이다. 대대로 서울에 살았다. 물재(勿齋) 선생 기진(奇進)이 아우 준(遵)과 함께 유학(遊學)
갈암집 제25권 / 묘지명(墓誌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성안의(1561~1629) 광주목사, 1611년(광해군 3)에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소송 처리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에 영천(榮川)으로 돌아가 13년 동안을 한거하면서 일사(逸士)와 교유하였다.공은 휘가 안의(安義)이고 자는
간이집 제2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국가가, 아조(我朝) 선조(先祖)의 계보(系譜)가 무함을 받은 채로 중국 조정의 전책(典冊)에 실려 있는 것과 관련하여, 이를 해명하면서 고치려고 노력해 온 것이 무려 2백 년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황제의 윤허를 이미 받기는 하였으나 이를 개정하여 다시 간행하는 일은 아직
광주정신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의 미시사를 옛 문헌에서 찾아 정리해 지역 역사문화자원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정인서 광주 서구문화원장은 최근 광주시와 광주문화재단의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의 하나로 광주정신을 만들어온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정리한 《광주풍경2: 푸른 역사 뒤에
"광주의 역사를 기억하고 새로운 미래자원으로 만드는 방법은 광주읍성을 잊힌 과거가 아니라 광주 천년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담보한 문화도시 초석을 다지는 핵심 브랜드로 새롭게 창조해야 합니다."30일 광주 서구문화원에서 마련한 ‘광주, 천년의 과거 천년의 미래’ 문화유산아카데미에서 조광철 광주 역사민속박물관 학
전남 영암군의 조선 최초 홍일점 의병 양방매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영암 학회 회원들은 최근 영암군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세우자는 명목으로 이영현 양달사 현창사업회 사무국장, 송성수 금정면 문체위원장 등과 함께 양방매 의병의 유적을 찾았다.이들은 양방매 의병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금정면 청룡리 분토동마을
그동안 자신과 아비가 무함을 받았던 전말을 진달하고, 염치없이 직임에 나아갈 수 없으므로 삭직해 줄 것을 청하는 집의 이보욱의 상소 - 영조 3년 정미(1727) 9월 2일(을묘) 맑음. 묘시에 안개가 끼었다가 진시에 우이(右珥)가 있었음 집의 이보욱(李普昱)이 상소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