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농암집 제28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 오두인

형조 판서 증 영의정 시호 충정공(忠貞公) 오공(吳公)의 신도비명 병서


금상 15년 기사년(1689)에 중궁이 손위(遜位)하자 판서 양곡(陽谷) 오공 두인(吳公斗寅)이 참판 이공 세화(李公世華), 응교 박공 태보(朴公泰輔) 등 80여 인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글을 올려 극간(極諫)을 하였는데, 오공이 실로 소두(疏頭)였다. 이에 상이 진노하여 세 사람이 모두 형장을 맞고 먼 곳으로 유배되었는데, 오공은 파주(坡州)에 이르러, 박공은 노량강(露梁江)에 이르러 모두 도중에 별세하였고 오직 이공만이 죽지 않았다. 6년 뒤인 갑술년(1694, 숙종20)에 상이 과거의 일을 크게 뉘우쳐 즉시 중궁(中宮)을 맞이하여 돌아오게 하고 복위시켰다. 그러고는 맨 처음에 두 공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생각하여 각별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오공에게는 의정부 영의정을 증작(贈爵)하고 충정공(忠貞公)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박공에게는 이조 판서를 증작하고 정려문을 세워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당을 세워 두 공에게 제사를 올리자는 청을 모두 들어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베 짜는 여인이나 꼴 베는 남자들까지 하나같이 감탄하고 눈물을 흘리며 천도(天道)가 올바로 정해진 것을 경사로 여겼다.

혹자는 두 공이 이공처럼 죽지 않고 살아남아 중궁의 복위를 통쾌하게 보지 못한 것을 슬퍼하자, 군자가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신하가 국모를 위해 죽는 것은 대의이다. 예로부터 그 일을 실천한 자가 거의 없었는데, 두 공이 극간하다가 죽음으로써 그 의리가 비로소 밝아졌다. 간언을 하다가 죽거나 죽지 않는 것은 천명이다. 그러나 죽지 않으면 그 장렬함이 드러나지 않아 사람들을 깊이 감동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두 공의 입장으로서는 반드시 죽어야 하니, 그런 뒤에 당시의 조정 신하들에게 부끄러운 줄을 알게 하고 화를 일으키려는 간인(奸人)의 마음을 막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시의 화가 어찌 그 정도에 그쳤겠는가. 그리고 성인(聖人)이 허물을 짓는 것이 비록 일식, 월식과 같다고는 하나 오늘날처럼 속히 고친 경우는 없었으니, 이 또한 두 공의 죽음이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실로 두 공이 한번 죽음으로 인한 효과이니, 이제 와서 슬퍼하는 것은 말단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오공의 자는 원징(元徵),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고요하며 대범하고 중후하여 겉치레를 일삼지 않았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장력이 있었다. 10세에 황고(皇考) 천파공(天坡公 오숙(吳䎘))을 따라 해서(海西)에 갔었는데, 명나라 부총(副摠) 정룡(程龍)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공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 운(韻)을 명하고 시를 짓게 하였다. 공이 이에 붓을 잡고 즉시 한(漢)나라 명장 정불식(程不識)을 가지고 정공에 빗대자, 정공은 크게 놀라 감탄하고 진기한 재물을 후하게 주었다. 그러나 공이 모두 사양하고 부채 하나만 받으니, 정공은 더욱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 “훗날의 발전을 예측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는 그 시를 《황화집(皇華集)》에 실었다. 이리하여 공의 이름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무자년(1648, 인조26)에 진사시(進士試) 초시에 장원으로 입격하여 마침내 성균관 유생으로 들어가고, 기축년(1649, 인조27)에는 별시(別試)에 장원하여 규례대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병조, 이조 두 조의 낭청에 제수되었으며, 사헌부의 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 사간원의 정언(正言)ㆍ헌납(獻納)ㆍ사간(司諫), 홍문관의 수찬(修撰)ㆍ교리(校理)에 누차 제수되었다.

효묘(孝廟) 때에 각 도에서 노비를 추쇄(推刷)하느라 독찰이 엄중하고 삼남(三南)에 영장(營將)을 두어 훈련을 자주 행하며 또 동조(東朝 효종의 어머니인 조 대비(趙大妃))를 위해 궁전을 수리하려고 하자, 공이 정언으로 있으면서 재앙을 인하여 상소해서 그 폐단을 낱낱이 거론하였다. 이윽고 또 동료와 함께 상차(上箚)하여 노비 추쇄를 늦추고 형옥(刑獄)을 돌보며 간쟁을 받아들이고 신료들을 분발시키라는 뜻으로 요청하자, 상은 공이 충직하여 간신(諫臣)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칭찬하였다. 얼마 뒤에 형옥에 관한 일로 인해 상이 약간 온당치 못하다는 뜻을 보이자 공이 상소하여 자신을 탄핵하였는데, 며칠 뒤에 상이 간관들을 소견(召見)하여 위로함과 동시에 자신이 실언한 데 대해 자책하였다. 공은 즉시 나아가 사례하고 시폐(時弊)를 진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지난번 차자에서 지적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내구마(內廐馬)를 조련하는 장소에 친림(親臨)한 잘못을 말씀드리자 상이 가납하였다. 또한 대사간 유철(兪㯙)의 언사소(言事疏)가 상의 노여움을 사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을 때에, 공은 지평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간쟁하다가 상의 노여움을 사 직책을 면직당하였다.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궁노(宮奴)가 형장을 맞다 죽는 일이 있었는데, 내수사(內需司)에서 형조의 관리를 처벌하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공이 “내관이 형조의 관리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다니, 이러한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며 처벌을 계청(啓請)하자 상이 따랐다.

현종조(顯宗朝)에는 헌납으로 있으면서 동료와 함께 상차하여 몸을 닦고 반성하며 절검하고 학문을 닦고 현자를 예우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시폐 몇 가지를 진술하였는데, 모두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상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려고 하자 공은 옥당에 있으면서 “하늘의 재앙이 거듭 나타나 기근이 들고 역병이 돌고 있으니, 출입하는 일을 삼감으로써 몸을 닦고 반성하는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라고 상소하였는데, 상이 관대한 답을 내렸다. 또한 수감된 죄수를 심리하여 올린 의금부의 죄안(罪案)에 대해 상이 특지(特旨)로 영향력을 행사하자, 당시에 사간(司諫)으로 있던 공이 그것의 불가함을 말씀드림과 동시에 의금부가 불가함을 상주하지 못하여 유사(有司)의 체통을 잃었다고 탄핵하였는데, 상은 이에 노하여 공을 면직시켰다.

뒤에 또 집의로 있으면서 무지개가 나타난 변고를 인하여 상소하여 극력 말하기를, “재변이 매우 심한데 상하가 안일하게 지내어 정령(政令)이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으니, 먼저 학문에 힘쓰고 심성을 수양하여 실천함으로써 몸을 닦고 반성하는 근본으로 삼고 신하들을 불러 자문했던 조종조의 부지런함을 본받아 상하의 마음이 통하게 해야 합니다. 노비를 허위로 기록하여 친족과 이웃까지 침탈하는 일이 오늘날 팔도의 가장 큰 폐단이니, 속히 조사하여 바로잡아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소서. 동조(東朝)의 진연(進宴)과 온천에 거둥하는 일이 비록 모두 부득이한 것이기는 하나 그 또한 일에 따라 줄여 민력(民力)을 돌보소서.”라고 하고, 또 “지체된 옥사를 빨리 처결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고 언로(言路)를 열어 충직한 말이 올라오게 하소서.”라고 청하였는데, 반복하여 간곡하게 올리는 수백 마디의 말에 상도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청(淸)나라에서 우리가 약조를 어겼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어 문책하고 마침내 속죄금을 물라고 요구하자, 양사(兩司)는 모두 대신(大臣)이 사력을 다해 그들의 횡포를 막아 내지 못하여 모욕이 상에게 미치게 했다고 탄핵하였다. 상은 이에 대로하여 간언을 올린 자들을 모두 내쫓았는데, 승지가 하명의 부당함을 지적하여 상주하자 그들마저 처벌하게 하였다. 마침 옥당에 입직하고 있던 공은 그날 밤에 당장 상차하여 간쟁하고 이튿날 다시 동료와 함께 청대(請對)하여 극론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뜻이 사그라지지 않아, 물러나서 다시 상차하여 말하고 뒤에 또 여러 신하들을 복관(復官)할 것을 청하였는데 말이 더욱 간절하였으나 상이 응하지 않았다.

공은 전후로 삼사(三司)의 여러 관직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일을 당하면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도 피하지 않고 논열하였으며 그렇다고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비난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고 오직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데에 주력할 뿐이었다.

중간에는 시강원의 사서(司書)ㆍ문학(文學), 성균관의 직강(直講)ㆍ사성(司成), 상의원(尙衣院)과 제용감(濟用監)의 정(正)이 되었고, 다시 사국(史局)의 관직을 겸하여 인묘(仁廟), 효묘(孝廟)의 실록 편수에 참가하였으며, 삼자함(三字銜 지제교(知製敎)의 별칭)을 띠고 지방에 나가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 해운 판관(海運判官), 북청 판관(北靑判官), 홍주 목사(洪州牧使)를 지내고 중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오고 또 어사(御史)로 호남에 나가기도 하였다.

공이 도사로 나간 것은, 영남 유생이 과거 시험장을 어지럽히는 일이 두 번 발생하자 각별히 공을 보내어 진정시키게 한 것인데, 결국 그로 인해 무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이 고산도 찰방이 된 것은, 일찍이 부화하고 망녕된 고관 한 사람을 배척한 일이 있었는데, 전관(銓官)들이 그 사람을 옹호하고 도리어 공을 내쫓아 공을 억압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또한 공이 북청 판관으로 나간 것은, 사실 공이 장령으로 있을 때의 일이 발단이 된 것이었다. 당시에 서울에서 무뢰배들이 서로 파당을 만들어 칼을 끼고 난투를 벌이자 공이 관리를 시켜 체포하게 하였다. 왕손(王孫) 집안의 종도 그들과 함께 체포할 대상에 들어 있어 공에게 봐 달라고 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고 체포를 더욱 급히 독촉하였다. 하루는 지평 민공 유중(閔公維重)과 함께 조정에서 물러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민공의 어자(御者)를 피가 나도록 구타하였다. 공은 왕손 집안의 종이 공에게 원한을 품고 해코지를 하려다가 엉뚱한 사람을 해친 것임을 알고, 즉시 민공과 함께 부중(府中)에 들어가 그를 신속히 잡아다가 신문하고 다스렸는데 형장을 치다가 그만 죽이고 말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이 노하여 두 사람 모두에게 체직(遞職)을 명하였다가 이내 승정원의 말을 따라 복직시켰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또 동료 대관(臺官)이 상의 노여움을 격발한 일로 인하여 두 사람까지 아울러 체직시키고 지방의 고을로 좌천시켰는데, 대신과 삼사가 연달아 극구 간쟁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공은 그날 당장 부임해 가서 마음을 다해 봉직하고 좌천된 것을 괘념치 않았다.

공이 어사가 되었을 적에는 명을 받들고 여러 진(鎭)의 군수품을 점검하였다. 그때 도신(道臣)이 어떤 한 고을의 수령을 편애해서 전에도 이미 무기에 대한 일로 칭찬하는 보고를 하여 작질(爵秩)을 높여 준 적이 있었는데 공에게도 그를 잘 봐 달라고 청탁하였다. 그러나 공은 고을에 이르러 도리어 심각하게 피폐한 상황을 보고는 즉시 상부에 보고하여 처벌하게 하였다. 간관들이 공이 도신까지 탄핵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여 논파(論罷)하였으나 이내 다시 서용되었다.

정미년(1667, 현종8) 겨울에는 영녕전(永寧殿)의 수리를 맡은 도청랑(都廳郞)으로 공로를 표창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고 즉시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차례로 올라가 우승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소하여,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여 어미를 봉양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함과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탄핵한 결과 마침내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공은 부임하여 세력가를 누르고 외로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자제들을 가르치고 학교를 부흥시켰으며, 자신의 생활을 더욱 검약하게 하고 소비를 절약함으로써 고을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 신해년(1671, 현종12)의 큰 기근을 만나자 창고의 재물을 풀어 백성을 진휼하였는데, 백성들이 그 덕에 굶어 죽지 않았다. 또 조정에서는 다른 고을의 유민(流民)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명하였으나 공은 움집을 더욱 많이 설치하고 그들을 먹여 주었는데, 이로써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도신과 어사가 칭찬하는 보고를 하자, 조정에서는 공에게 말을 하사하고 계속 유임할 것을 명하여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 주었다.

서울로 들어와서는 병조의 참지와 참의, 승지가 되었다가, 병진년(1676, 숙종2)에 명성대비(明聖大妃)의 병이 낫자 약시중을 든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에 승서(陞敍)되고 한성부 우윤, 호조와 형조의 참판, 행 판결사(行判決事)를 거쳤으며, 중간에는 부사(副使)에 충원되어 연경에 가기도 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6)에는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서 역옥(逆獄)의 국문에 참여한 공로로 한 자급이 올라 도승지, 병조와 예조의 참판을 거치고 중간에는 경기 감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계해년(1683, 숙종9) 겨울에는 특별히 공조 판서에 제수되고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체직되었으며, 명성왕후의 상에 산릉(山陵) 공사를 감독한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품되어 한성부판윤 겸 지의금도총관에 제수되었다. 병인년(1686, 숙종12)에는 평안 감사로 나가 부지런히 정사를 보았는데 은혜로우면서도 위엄이 있고 공식적으로 봉납(捧納)하는 것 이외에는 실 한 오라기도 사사로이 더 거두지 않았으니, 평안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공의 청렴함을 칭송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공의 중자(中子) 태주(泰周)가 현종대왕의 딸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정묘년(1687, 숙종13) 여름에 공주가 별세하자, 상이 공에게 각별히 관직을 벗고 돌아가서 장례를 돌보라고 명하였다. 공은 마침내 지중추부사가 되고 기사년(1689, 숙종15) 봄에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젊을 적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조정에 올라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는데, 평소 성품이 겸손한 데다 붕당을 이루어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을 싫어하여 항상 꼿꼿이 자신을 지켰다. 그리하여 당인(黨人)들과 겨루어 밀고 당기며 명론(名論)을 세워 중요 인사가 되려고 하지 않고, 오직 매일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을 볼 따름이었다. 그 때문에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에서는 대부분 한산직(閑散職)에 처하였고, 아들이 부마(駙馬)가 되어서는 조정에서 더욱 겸손하게 처신하여, 조정의 정사와 당시의 논의에 관해서는 하나도 간여하는 일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소인배들이 정권을 잡고 큰 옥사를 연달아 일으켰는데, 지의금부사인 공은 세 번을 불러도 나가지 않는 바람에 옥리(獄吏)에게 내려지고 삭직(削職)되었다. 4월에 상이 하교하여 중궁을 폐위하자 공은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는 네 임금의 후한 은혜를 받아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니,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지금 어찌 죄를 받아 버려졌다는 것을 핑계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글을 띄워 동지 몇 사람을 모아서 함께 상소하자고 논의하였다. 박공(朴公)도 명사들과 모여 이 일에 대해 의논하다가 공이 있는 곳을 듣고는 즉시 와서 참가하였다. 혹자가 염려하기를, “상소의 내용이 너무 준엄하면 이로움은 없고 해만 있을 것입니다.” 하자, 공은,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죽음을 어찌 돌아볼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고 저녁이 되도록 비답이 내려지지 않자 여러 공들이 모두 궐 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 이공(李公)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비록 파산(罷散) 중에 있기는 하나 그래도 외조정(外朝廷)이라고 할 수 있으니, 한 번의 소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기필코 청이 받아들여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공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아마도 공의 말처럼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밤 2경에 상이 갑자기 보여(步輿)로 인정문(仁政門)에 나와 정국(庭鞫)을 설치하라고 재촉하여 명하자, 유사들이 황급히 형틀을 준비하고 궐 내외가 크게 놀랐다. 공과 이공이 먼저 체포되어 들어가고 박공이 그 뒤를 이어 잡혀가자 좌우에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들 놀랍고 두려워 실색하였다. 공은 또 노병으로 몸이 야윈 상태라 사람들이 더욱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의 동작을 보면 평상시와 다름없이 태연하였다. 당시에 상의 노여움이 매우 심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조정 신하들은 빙 둘러서서 보면서 묵묵히 입을 다문 채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고, 대사헌 목창명(睦昌明)은 공의 상소를 도리어 흉측한 것으로 지목하였다. 공은 이때에 문초를 받느라 숨이 거의 끊길 지경이었으나 말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튿날 사형을 감하여 의주(義州)에 안치시키는 처분을 받고 옥을 나오자 서울의 사녀(士女)들이 시끌시끌 길을 메우고 앞 다투어 가마 앞으로 와서 충신의 면모를 보았다. 그리고 공이 별세하자 공을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공은 신장이 6척이 못되었고 얼굴 모습은 온화하며 입은 마치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는데, 하루아침에 변란을 당하자 충절을 세워 신하의 도리를 표방하고 인륜을 부지하였으니, 후손 백대에 전할 만한 분이다. 군자들은 이 일을 보고 공이 평소에 뭔가 지키는 것이 있었다고 믿는다. 상소하는 일을 논의할 때에 혹자는 공에게 처지가 다른 사람과 다르므로 소두(疏頭)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자제들도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간하였으나 공은 모두 물리치고 듣지 않았다. 세상에서는 간혹 공이 그저 벼슬이 높았기 때문에 앞 대열에 섰던 것뿐이라고 보기도 하니, 어찌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분발하여 스스로 그처럼 죽음을 각오했음을 알 수 있겠는가.

공의 증조는 휘 정방(定邦)으로,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를 지냈다. 광해(光海)가 모후(母后)를 폐위하려 할 적에 백관을 위협하여 조정의 논의를 끌어내려 하자, 그가 광해와 대면하여 말하기를, “신은 무부(武夫)라서 《사략(史畧)》 제1권의 ‘순 임금이 끊임없이 선(善)으로 자신을 다스려 어버이로 하여금 간악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하였다.’는 한 구절만 읽었습니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공의 조고는 휘 사겸(士謙)으로, 종친부 전적을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효성으로 이름이 났다. 천파공(天坡公)은 휘 숙(䎘)으로, 벼슬이 경상 감사에 이르렀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문장과 정사로 이름이 났으나 젊은 나이에 별세하여 재능이 다 쓰이지 못하였다. 비(妣)는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고성 이씨(固城李氏)로, 병조 참판 휘 성길(成吉)의 딸이다. 공은 사실 천파공의 아우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증 이조 판서 휘 상(翔)의 아들인데, 이 부인(李夫人)이 아들이 없어 데려다가 후사로 삼은 것이다.

공은 모두 세 번 장가를 들었는데,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판서 성휘(聖徽)의 딸이고, 원주 김씨(原州金氏)는 학생 숭문(崇文)의 딸로 이들은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고, 상주 황씨(尙州黃氏)는 부사 연(埏)의 딸로 정경부인에 봉작되었다. 5남 6녀를 두었다. 생원으로 재주와 덕행이 있었으나 일찍 죽은 아들 관주(觀周)와 군수 남택하(南宅夏)에게 시집간 딸은 민씨 소생이다. 직장(直長)인 아들 정주(鼎周)와 시집가기 전에 요절한 딸은 김씨 소생이다. 아들 태주(泰周), 진주(晉周), 이주(履周)와 현감 김창열(金昌說), 수찬 최창대(崔昌大), 김영행(金令行), 이재(李縡) 등에게 시집간 딸들은 황씨 소생이다. 남택하는 진사 도규(道揆)와 도진(道振) 등 2남과 민승수(閔承洙)에게 출가한 딸 하나를 두었다. 김창열은 2남 2녀를 두었고, 김영행은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공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효성이 돈독하여 대부인(大夫人)을 모시는 50년 동안 조금도 대부인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늙어서는 중부(仲父) 지사공(知事公)을 섬기되 예절을 매우 잘 갖추었다. 공은 평생 가산에 대해 묻지 않았고 뇌물을 받지 않았으며, 집안에 기식(寄食)하는 일가친척이 늘 10여 인에 이르렀고 관직의 규율을 엄격히 지켜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을 청탁하지 못하였다. 공은 늘 국조(國朝)의 전고(典故)와 선배들의 좋은 일을 이야기하길 좋아하였는데, 듣는 사람들은 피곤한 줄도 모른 채 듣곤 하였다.

공은 5월 7일에 별세하여 그해 7월 9일에 양성(陽城) 천덕산(天德山)에 있는 선영 안의 손향(巽向 남동향)의 언덕에 묻혔다. 나 창협은 어려서는 공을 알지 못하다가 공이 별세한 뒤에 비로소 딸을 공의 아들 진주(晉周)에게 시집보냈다. 지금 도위공(都尉公)이 묘 앞에 비석을 세우려고 하면서 나에게 이르기를, “평소에 당신이 사람들에게 묘지명을 써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일가에 대해서까지 모두 거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 아우가 당신의 사위이므로 감히 그 인연을 빙자하여 청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창협은 누차 사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여 삼가 서문을 쓰고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


예로부터 사람을 관찰할 때는 / 惟古觀人

반드시 말년 절개 살펴보았네 / 必觀末節

선비들이 평소에 지낼 적에는 / 士方平居

의기 높지 않은 자 어디 있으랴 / 罔不揭揭

허나 변고 갑자기 앞에 닥치면 / 變故臨之

지조를 지키는 자 드물고말고 / 鮮能自立

공 오직 공손하고 진실했기에 / 公惟恂恂

내면의 마음가짐 굳게 지키어 / 內篤操執

자랑도 겉치레도 하지를 않고 / 不矜不飾

세상길 앞 다투어 아니 달리며 / 不競而馳

물러나 겸손하게 지내노라니 / 退然而居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 없었네 / 衆莫之知

그러나 의를 떨쳐 일어날 적엔 / 及其奮義

저 옛날 맹분(孟賁) 전저(專諸) 무색했으니 / 勇奪賁諸

세우고자 한 의리 무엇이었나 / 其義伊何

국모의 바른 자리 부지함일레 / 坤極之扶

조정 안에 가득한 많은 신하들 / 有臣盈庭

나라의 화 오히려 다행스러워 / 幸國之禍

바로잡지 아니하고 조장을 하니 / 匪匡伊助

불에다가 기름을 붓는 격이라 / 如膏於火

공은 그 불길 속에 뛰어들어가 / 公犯其焰

죽음으로 충절을 세움으로써 / 以死易忠

사람 도리 인륜을 높이 드러내 / 揭是彝常

저 간흉 무리들을 징계하였네 / 懲彼奸凶

이리하여 나라가 유지되었고 / 國與有立

하늘 이치 마침내 아니 어긋나 / 理罔終忒

성상께서 옛 잘못 뉘우치시자 / 宸心悔悟

태양이 찬란하여 세상이 밝듯 / 如日斯爀

꿩 그림 왕비 옷이 환히 빛나고 / 煌煌褕翟

우리 중궁 위의를 되찾았다네 / 復我壼儀

왕께서 감탄하여 이르시기를 / 王曰噫歟

내 마음에 충신을 잊지 못하니 / 忠臣予思

무엇을 줘야 하나 / 何以贈之

상공의 벼슬이요 / 上公之尊

어떻게 표창할꼬 / 何以旌之

정려문을 세워야지 / 棹楔于門

추후에 내린 은전 크게 갖춰져 / 追典大備

영광이 구천까지 미쳐갔다네 / 榮施九幽

흐른 세월 얼마인고 / 自初幾時

목성 운행 반 바퀴라 / 木行半周

그 누가 말했는가 밝은 천도는 / 孰云皓天

천추에 틀림없이 돌아온다고 / 必千秋反

충신이 되려는 자 / 有欲爲忠

마땅히 분발하리 / 尙宜知勉

적성의 언덕 위에 / 豐碑屹屹

큰 비석이 우뚝하니 / 赤城之岡

시 짓고 깊이 새겨 / 作詩深刻

길이길이 전하노라 / 用昭無疆

[주-D001] 흐른 …… 바퀴라 : 

오두인(吳斗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다 죽은 1689년부터 갑술정변이 일어나 그가 신원된 1694년까지 햇수로 6년이 지났다는 말이다. 목성은 12년에 천체를 한 바퀴 돈다고 한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