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옥 ⾦鎭⽟ 숙종 41년(1715) 11월 10일∼숙종 44년(1718) 2월 11일김진옥(1659∼1736)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자는 백온(伯溫), 호는 유하(柳下) 또는 온재(韞齋)이다. 고조할아버지는 김장생(⾦⾧⽣)이고,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김익희(⾦益 熙)이며, 아버지는 승정원 좌부승지 김만균(⾦萬均)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
조정만 趙正萬 숙종 36년(1710) 6월 6일∼숙종 38년(1712) 5월 20일조정만(1656∼1739)의 본관은 임천(林川)이며, 자는 정이(定⽽), 호는 오재(寤齋)이다. 아버지는 전주진관병마절제도위 조경망(趙景望)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1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유생이 되고, 1694년 의금부
소두산 蘇⽃⼭ 현종 10년(1669) 7월 16일∼현종 13년(1672) 7월소두산(1627∼1693)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洲), 익산 출신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소동명(蘇東鳴)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52년 사마시 진사에 합격하고, 1660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감찰로 관직을
이민서 李敏敍 현종 8년(1667) 8월 18일∼현종 9년(1668) 12월 22일이민서(1633∼1688)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이중(彝中), 호는 서하(西河)이다. 친아버지는 전라감사를 지낸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이고 훈련원 도정(都正) 이후여(李厚 輿)의 양자가 되었다. 증조할아버지 이극강(李克綱), 할아버지 이성록(李成
이하악 李河岳 현종 4년(1663) 9월 24일∼현종 5년(1664) 3월 13일현감 이하악(1610∼1677)의 본관은 용인(⿓仁)이며, 자는 여수(汝壽)이다. 아버지는 이후지(李後地)이다. 163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41년 영릉참봉을 시작으로 1647년 중부참봉, 1649년 산릉도감 감조관, 1650년 보은현감, 1653년 충주목사, 1654년 영천군
이유겸 李有謙 효종 원년(1649) 8월 6일∼효종 1년(1650) 1월 12일현감 이유겸(1586∼1663)의 본관은 우봉(⽜峯)이며, 자는 수익(受益), 호는 만회(晩悔) 이다. 할아버지는 관찰사 이지신(李之信), 아버지는 증 승지 이길(李劼)이다. 1623년 인조 즉위 후 직언하다 죄를 입은 유생으로 김효성 등과 함께 선정되어 6품을 부여받
장유 張維 인조 7년(1629) 9월 15일∼인조 8년(1630) 8월장유(1587∼1638)의 본관은 덕수(德⽔)이며,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 또는 묵소(默所)이다. 할아버지는 목천현감 장일(張逸), 아버지는 판서 장운익(張雲翼)이며, 우의정 김상용(⾦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와 예조판서 장선징(張善澂)의 아
도곡집 제8권 / 응제록(應製錄)전 참판 한성우에게 내린 치제문 신묘년(1711, 숙종37) 〔前參判韓聖佑致祭文 辛卯〕선왕께서 훌륭한 사람들을 등용하시니 / 宣后宅俊충정공이 보필하였고 / 有弼忠靖또한 문원공이 있었으니 / 亦維文元그 학문 성인을 바라는 것이었네 / 其學希聖경은 이 두 대현을 이어서 / 卿承兩大대대로
승지 증(贈) 이조 판서 나은(懶隱) 이공(李公) 시장(諡狀)- 이동표(李東標, 1644~1700)-사신(詞臣) 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연암집 제9권 별집 /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금상(今上) 8년 갑진년(1784)에 영남 유생 아무개 등 몇 사람이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소장을 올려 다음과 같
연려실기술 별집 제13권 / 정교전고(政敎典故) / 형옥(刑獄)○ 인조 조에 우후(虞侯) 김준민(金俊民)의 종 금이(金伊)가 준민의 집에 들어가서 팔다리를 부러뜨려 죽였는데, 그 아들 성일(成一)ㆍ성구(成九)가 장사를 지내지 않고 도적 괴수의 동정을 살피다가, 시장 가운데서 김이와 그 부모를 잡아가지고 자기들이 손수 도
김 삭주(金朔州) 형제의 복수전(復讎傳)송자대전 제214권 / 전(傳)김성일(金成一)의 자는 응건(應乾)인데, 광주(光州) 평장동(平章洞) 사람으로 담양부(潭陽府)에서 대대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준민(俊民)은 벼슬이 우후(虞候)였고, 어머니는 하동 정씨(河東鄭氏)였는데, 용(龍)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고 공을 낳았기
蓬海錄- 安村集 권3박광후(朴光後, 1637~1678), 자는 사술(士述)이며 호는 안촌(安村)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丁巳九月二十七日。與高斗經,柳漢徵,柳應壽,三從弟光一同行。十月十一日。到長鬐縣。尋先生謫廬。兩三茅屋。依在山下。中有稍大一家。以山竹作編爲籬。高可三四丈。南有一小門。僅僅出
1. 머리말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시문집 《고산유고(孤山遺稿)》를 번역한 것이다.고산은 주지하듯이 일찍부터 국문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특히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비롯한 일군의 시조(時調) 작품에서 보여 준 뛰어난 문학적 성취는, 그를 송강(松江) 정철(鄭澈,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論)을 씀1. 머리말이 책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문집과 저술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4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고봉집(高峯集)》은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하여 펴낸 바 있다. 1970년에 간행된 석인본을 대본으로 한 기왕의 국역서
고봉전서(高峯全書) 보유 - 조순(趙淳) 고봉 선생이 서거하신 지 431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에는 그동안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자취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지나갔고 왕조도 점차 쇠퇴하여 마침내 경술년의 국치(國恥)를 당하였으며 광복 후에도 국토가 양단되고 국론이 분열되어 마침내 내
문인 정철(鄭澈) 송강(松江)소자(小子)가 선생을 사모한 지 오래되었으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그 까닭은 흐려져 가는 사류(士類)의 추향을 누가 밝히고 저하되어 가는 세상의 도의를 누가 높이겠는가를 생각할 때 높이고 밝히실 분은 오직 우리 선생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가신 후로는 이 세상에
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 26) 봄, 명(明) 나라 군사와 우리 군대가 진격하여 경성(京城)의 왜적에게 육박해 들어가자 경성의 왜적들이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에 창의사 김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추격하여 영남에 들어간 뒤 진주(晉州)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해 6월 갑진일에 왜적이 무리들을 총동원하여 진주를
송자대전 제1권 / 시(詩)○오언 고시(五言古詩) 부 사언(附四言) 박 상사 사술 광후 이 익양 사군의 시에 차운한 시에 화운하여 언실의 담대가 보인 정중한 뜻에 사례하다〔和朴上舍士述 光後 所次翼陽使君韻 以謝偃室澹臺鄭重之意〕 옛날 우리 자양옹께서 / 昔我紫陽翁대은병 봉우리에 거처할 적에 / 身居大隱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