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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處士) 묵재(默齋) 김공(金公)의 행장

갈암집 별집 제6권 / 행장(行狀)

본관은 전라도 광주목(光州牧) 평장리(平章里)이다.
증조는 휘가 부의(富儀)인데 성균관 생원이었고, 자호를 읍청당(挹淸堂)이라고 하였다. 비(妣)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고, 계비는 가평 이씨(嘉平李氏)이다.
조부는 휘가 해(垓)인데 통사랑(通仕郞) 행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行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을 지냈고, 승의랑(承議郞) 홍문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추증되었으며, 자호를 근시재(近始齋)라고 하였다. 비는 단인(端人) 진성 이씨(眞城李氏)이다.
부는 휘가 광계(光繼)인데 동몽교관을 지냈고, 자호를 매원(梅園)이라고 하였다. 비는 유인(孺人) 광주 이씨(廣州李氏)이다.


공의 휘는 렴(????)이고, 자는 여용(汝用)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인데, 신라 왕자(王子) 흥광(興光)의 후손이다. 신라의 정치가 쇠하자 왕자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로 피신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살며 관향(貫鄕)을 삼았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가 된 분이 있었고, 그 후에 대를 이어서 그 직위를 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사는 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으나 세대가 멀어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천리(天理)가 벼슬이 재상에 이르러 비로소 한양에 옮겨 살았고, 8대조 휘 무(務)가 또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으로 옮겼다. 증(贈) 이조 참판 휘 효로(孝盧)가 예안현(禮安縣) 오천리(烏川里)에 터를 잡아 살았는데, 이분이 가선대부(嘉善大夫) 강원도 관찰사 휘 연(緣)을 낳았으니,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김씨는 대대로 영남의 저명한 성씨였는데, 읍청공에 이르러 퇴계 이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사문(師門)에서 인정을 받았고, 묻고 논란한 여러 설들이 《도산문집(陶山文集)》 안에 많이 보인다. 근시재 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온화하고 순수하였으며, 학문이 정밀하고 깊어서 처음 벼슬할 때부터 훌륭한 명성이 날로 드러났는데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니 원근의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들 탄식하고 애석해하였다. 매원공은 덕을 좋아하고 노성(老成)하여 능히 그 가문을 이었으나 아들이 없어서 공을 후사로 삼았으니, 공은 실로 근시재의 둘째 아들인 처사 휘 광실(光實)의 셋째 아들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품성이 있어서 어버이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웠으며, 백부의 후사(後嗣)가 되어서는 교훈을 새겨 익히고 부모의 뜻을 받드는 데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관례를 하고 나서 석담(石潭) 이공 윤우(李公潤雨)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이공이 매우 아껴서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에게 받은 《역경(易經)》을 그에게 주었으니, 그 기대한 뜻이 적지 않았다. 갑신년(1644, 인조22) 가을에 부모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경사에 갔는데, 하루는 홀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기에 집안에 필시 큰 우환이 생긴 것이라고 여기고 즉시 재촉해서 여장을 꾸려 길에 올랐는데, 며칠을 가서 태석인(太碩人)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訃音)을 들었다. 공이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급히 달려갔다. 도착해서 예법대로 곡하고, 단문(袒免)하고, 성복(成服)하였고, 중문(中門) 밖의 여막(廬幕)에서 지내면서 상복을 벗지 않고 잤으며, 하관(下棺)할 때 받드는 것과 제전(祭奠)의 예를 모두 예법에 따라 하였다. 매원공을 섬기면서 온화한 얼굴로 뜻을 받들어 털끝만큼도 뜻에 맞지 않게 한 적이 없었고,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는 의절(儀節)과 음식 공양을 반드시 정성스럽고 삼가서 마음을 다해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였다. 병술년(1646) 여름에 매원공의 병세가 위독하자 공이 근심하여 침식도 잊은 채 직접 탕제를 올리며 잠시도 해이하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곡읍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3년을 마치도록 매우 슬퍼하였으니, 상례를 치르고 제사 지낸 정성이 모두 사대부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 본생부모(本生父母)의 상을 당해서는 예법보다 더 심하게 슬퍼하였고, 빈궁(殯宮) 곁에 집을 지어 기거하였으며, 장사와 제전의 제수를 힘을 다해 마련해서 대종(大宗)으로 출계(出繼)했다고 하여 형제들과 차이를 두지 않았다. 연상(練祥)이 지나기 전에 종가(宗家)에 기제(忌祭)나 절사(節祀)가 있으면 하루 전에 사당 앞 행랑에 와서 기거하면서 제수를 올리는 일을 감독하고, 종제나 조카 중에서 복(服)이 조금 가벼운 자를 시켜 사당에 들어가 제사 지내게 하고, 제사를 마치고 나면 공이 당에서 내려와 맞이하여 절하고서 제사 지내는 데 무사하였는지를 물은 뒤에 상차(喪次)로 돌아갔다. 복제(服制)를 마친 뒤에 제사가 있으면 미리 청소하고 재숙(齊宿)하면서 빈객을 만나지 않고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시제(時祭) 때에는 제사를 마치고 나면 집안의 친척과 마을 사람들을 맞아서 음준례(飮餕禮)를 행하고, 남은 음식은 마을의 장로(長老)와 늙은 서인(庶人)에게 나누어 주어서 집에 두고 하룻밤을 묵힌 적이 없었다. 무술년(1658) 가을에 도산(陶山)의 동주(洞主)가 되어 모든 법규를 따르고 조치하는 것들이 두루 하고 상세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경내(境內)의 유사(儒士)를 불러 모아 노선생(老先生)의 문집(文集)을 강(講)하니, 이에 소문을 듣고 먼 곳에서 찾아온 자들이 많아 재사(齋舍)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이 모두 예로써 접대하고 그들과 주고받은 말은 도덕과 인의, 풍아(風雅)와 화초(花草)에 관한 얘기 아닌 것이 없었고, 강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파하였는데, 선성(宣城)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미담(美談)이라고 일컫고 있다. 기해년(1659) 12월 모일에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춘추가 48세였다. 이듬해 경자년 4월 모일에 현의 북쪽에 있는 태자산(太慈山) 선영 곁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광주 이씨이니, 바로 석담 선생 증 이조 판서 윤우의 따님이다. 18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아름다운 덕과 순수한 행실이 있었고,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드는 것과 종족 간과 동서 간에 처신한 것이 모두 도에 합당하였다. 공보다 33년 뒤에 80세로 세상을 떠나서 공의 묘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불행히 재차 대가 끊어져 아우의 아들 순의(純義)를 후사로 삼았으니,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이름이 대(岱)이고, 차남은 교(嶠)이며, 딸은 사인(士人) 남여형(南汝衡)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남녀가 몇 명 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총명함과 기억력이 동류(同類)들보다 특출나게 뛰어났다. 처음에 기억하고 두루 보는 데에 힘써서 많이 듣고 박식해지는 공부를 하였고, 역사서를 읽으면서 날마다 1000자를 외웠으며, 사장(詞章)으로 발휘된 것들은 법도에 맞고 한아(閒雅)하였다. 누차 향공(鄕貢)에 올랐으나 성시(省試)에서 번번이 낙방하자 이에 탄식하기를, “내가 이미 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글을 지어 득실을 다투는 자들과 한 사람의 눈에서 결판을 구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그 방을 묵재(默齋)라고 이름 짓고, 잠(箴)을 지어 벽에 붙여서 그 뜻을 담았으며, 그곳에서 글을 읽으며 여유롭게 자득(自得)하여 말하지 않고 몸소 행하는 뜻을 독실히 하였다. 평소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갖추고서 가묘(家廟)에 전알(展謁)하고, 물러나와 한 방에 앉아서 좌우에 도서를 비치하고 엄숙하게 종일토록 책을 대하였다. 객이 오면 반드시 당(堂)에 내려가 접대하면서 조용히 얘기를 나누었는데 속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마음이 맞고 뜻이 같은 벗을 만나면 머물게 하여 함께 잠을 자면서 경서의 뜻을 강론하기도 하고 시를 외기도 하며 고금의 사변에 대해 담론하기도 하였는데, 종일토록 하고 또 밤새도록 하면서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동종(同宗)의 자제와 마을의 후생으로서 와서 배우는 자가 많았는데, 지성으로 가르쳐서 성립시키려고 하였고, 한 가지라도 취할 만한 장점이 있으면 기뻐하는 감정이 안색에 나타났고, 그를 드러내고 칭송하여 남들이 모를까 염려하였다. 또 과실이 있으면 조용한 곳으로 불러서 자상하게 가르치고 경계시켜 반드시 고치게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족당(族黨)과 인척(姻戚)에 대해서는 궁핍한 사람을 구휼해 주면서 자기의 역량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였고, 남에게 다급한 일이 있거나 곤경에 처했다는 말을 들으면 힘을 아끼지 않고 마음을 다해 돌봐 주었다. 만약 먼 지방에서 나는 맛있는 음식을 구하면 반드시 먼저 일가의 장로(長老)에게 올리고, 다음으로 아우와 조카들에게 주고, 다음으로 이웃의 노친(老親)이 있는 자에게 주었다. 숙부인 상사공(上舍公)의 연세가 이미 많아서 질병으로 몹시 쇠약하였는데, 공이 부친을 섬기듯이 섬겨서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신중히 명을 받들었다. 계모(季母)와 맏형수가 의지할 데 없는 과부가 되자 집안일을 돌봐 주어 쓸쓸하게 혼자 사는 괴로움을 잊게 해 주었다. 외삼촌인 이공 환(李公煥)이 나이 80에 외아들을 잃고서 홀아비로 살며 매우 곤궁하였는데, 공이 매번 사람을 보내 문안하고 음식물을 보내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이공이 시를 지어 곡하기를, “인편이 있으면 반드시 편지를 보내고, 노자가 있으면 반드시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보냈네.” 하였으니, 이는 지성스럽게 돌봐 준 뜻을 잊지 못한 것이다. 남이 초상을 당하면 반드시 남보다 먼저 조문하여 위로하고 부조하였고, 향리의 미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공평한 마음으로 대하여 차별을 두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덕에 감복하고 그 은혜를 감사하였다. 공은 대가(大家)의 후손으로서 물려받은 재산이 매우 넉넉하였는데, 가장이 되어 집안일을 주관하게 되자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여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는 것을 의리로 여겨 재물을 후손에게 남겨 줄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중년이 되어서는 겨우 자급할 정도이고 남은 재물이 없었다. 종부제(從父弟) 이(怡)가 일찍이 가정에서 처신할 도리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묻자 대답하기를, “가장이 된 자는 가장의 도리를 다하고, 자제가 된 자는 자제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니, 각각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 서로 책망하지 않는다면 가정에서 처신하는 도리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그 마음에 보존된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말로 나온 것이 능히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이 또한 “여기에 있어도 원망이 없고, 저기에 있어도 미워하는 자가 없다.”라는 말에 가까운 것이니 아, 어질도다.
현일의 선인이 처음에 근시재 선생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이 아들 하나를 낳고 세상을 떠났으니 그 아들이 바로 고(故) 능서랑(陵署郞) 상일(尙逸)이다. 나에게는 백형(伯兄)이 되고 공에게는 외형(外兄)이 되는데, 공과 한 살 차이였고, 서로의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나의 중씨형(仲氏兄) 이하는 김씨 부인 소생이 아니지만 공과 뜻이 맞아서 매우 기뻐하였고, 형제처럼 붙어 다녔다. 현일이 공보다 15세 연하라서 항상 형으로 섬겼는데, 공은 나를 한결같이 붕우로 대하였다. 처음에 서로 알 때에 내가 선군(先君)의 곁에 시립(侍立)해서 바라보니 공의 용모가 수려하고 풍도(風度)가 고상하고 순결해서 훌륭한 군자의 모습이었다. 이때부터 이미 마음이 기울어 교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그 뒤에 도산(陶山)과 역동(易東)의 회합 때 현일이 말석에 끼어 공맹(孔孟)의 학풍이 살아 있는 고장에서 강학하는 유풍을 보고서 더욱 감탄하고 흠모하였다. 이때부터 서로 왕래하면서 훈도되고 본받았으며, 편지를 왕복하면서 지성스럽게 권면하고 장려해 주신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항상 뜻을 가다듬고서 공에게 의지하여 소인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불행히도 공이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리고 양가의 형들도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허둥지둥 길을 잃고서 갈 곳을 몰라 헤매다가 마침내 경솔하게 국법을 범하여 스스로 귀양 가는 화를 초래하였다. 실의에 빠지고 곤궁하여 뜻과 사업이 황폐하고 실추되어 부형(父兄)과 사우(師友)들이 책망하고 기대한 뜻에 부응하지 못했으니, 매번 생각할 때마다 달연(怛然)히 두려워 두문불출하고 조용히 지내면서 감히 스스로 보통 사람에 견주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공의 사자(嗣子) 순의가 아들 대를 보냈는데, 집안에 전해 오는 행실기 한 통을 안고서 천리를 멀다 않고 장독(瘴毒)이 있는 호남의 바닷가로 나를 찾아왔다. 그 편지에서 말하기를, “선인(先人)이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도를 받아 효제(孝悌)를 돈독히 행하여 그 근본을 세웠고, 또 사방으로 벗을 취하여 그 덕을 이루었습니다. 더불어 사귀며 왕래한 사람이 매우 많았고, 사적을 자세히 알고 믿을 만한 사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인이 저희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을 때 제가 나이가 아직 어려서 글을 부탁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다가 세대가 바뀌게 되니 지금은 살아 있는 선인의 벗이 아무도 없고, 오직 집사만이 대대로 통가(通家)하였고, 또 선인께서 무양(無恙)하실 때 친하게 지낸 옛 벗으로서의 정이 있으시니, 반드시 우리 부친의 드러나지 않은 덕을 잘 말씀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감히 재배하고 청합니다.” 하였다. 현일이 편지를 뜯어 보고 초연(愀然)히 말하기를, “그대가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대 집안이 우리 집안과 정의(情誼)가 특별히 두텁고, 또 그대 조부가 우리 백씨, 중씨와 교유하여 도의(道義)와 덕업(德業)으로 서로 기대하고 허여하였는데, 불행히 하늘이 수(壽)를 주지 않아서 양가의 정황이 모두 이와 같다 보니 내가 항상 슬퍼하고 탄식하며 돌아가신 분을 다시 살려 내지 못하는 애통한 마음만 간절하였다. 지금 그대가 선인의 드러나지 않은 덕을 천양하라고 부탁하였는데, 평생 흠모하던 정성을 생각할 때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현일은 이름이 죄적에 올라 있어 현재 두문불출하고 크게 뉘우치고 있으므로 감히 한마디 말을 내서 사람들의 비난을 초래할 수 없으니, 어찌 갑자기 파계(破戒)하여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비록 나 자신은 애석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선인의 덕에 누가 되지 않겠는가.” 하니, 김군이 일어나 절하고 또 청하였다. 현일이 굳게 거절할 수 없어 받아서 상자에 보관해 둔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제 다행히 성은을 입어 방귀전리(放歸田里)하라는 명을 받고서 비로소 그 집안에 전해 오는 행실기에 의거하고 내가 직접 듣고 본 것을 참고하여 우선 위와 같이 기록하고, 당세의 문장가가 필삭(筆削)하기를 기다린다. 삼가 쓴다.
[주-D001] 여기에 …… 없다 :
이 말은 원래 《시경(詩經)》 〈진로(振鷺)〉에 나오는 말로, 하(夏)나라의 후예인 기(杞)와 상(商)나라의 후예인 송(宋)의 제후들이 주(周)나라의 제사에 참석하여 돕는 것을 노래한 것인데, 그들이 자기 나라에서도 미워하는 자가 없고, 이곳 주나라에서도 싫어하는 이가 없어서 길이 영예로울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시 본래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가장이 된 자와 자제가 된 자가 각각 자기의 도리를 다하면 집안에서의 처신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인용한 것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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