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처사(處士) 이공(李公) 행장

갈암집 제28권 / 행장(行狀)


공의 휘는 순일(純一)이고, 자는 성지(誠之)이며, 그 선조는 광주인(光州人)이다. 그 시조는 순백(珣白)으로 고려 때에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이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높은 벼슬을 지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휘 광제(光齊)라는 분이 있었으니, 영묘조(英廟朝)의 명신(名臣)으로서 벼슬은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고 경창군(慶昌君)에 봉해졌다. 증조의 휘는 방형(邦衡)으로 헌릉 참봉(獻陵參奉)을 지냈으며, 조의 휘는 지남(地男)으로 성균관 생원이었다. 부의 휘는 관(灌)인데, 양자(養子)를 가서 중부(仲父)인 생원 휘 운남(雲男)의 후사가 되었다. 학행과 풍절(風節)이 있었으며 동암(東巖) 이공 발(李公潑)의 문인(門人)으로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좌되어 온성(穩城)으로 장류(杖流)되었다. 임진년 난리가 일어났을 때 용서를 받아 돌아왔다가 적의 예봉(銳鋒)에 죽으니, 그때 나이 23세였다. 비(妣) 조씨(趙氏)는 판윤(判尹) 유(踰)의 후손이며 참봉 원(愿)의 따님이다. 만력(萬曆) 정해년(1587, 선조20) 8월 기묘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난 지 3년 만에 부친이 유배를 당하는 화를 만났는데, 밤낮으로 울부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또한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나이 겨우 6세였는데, 곡읍(哭泣)하면서 슬퍼하는 것이 성인(成人)과 다름이 없었다. 정유재란 때는 공의 나이가 겨우 10여 세였는데, 모친을 모시고 피난을 하면서 험난한 지경에 빠지거나 생사의 고비를 드나들면서도 매우 정성을 갖추어 공경스럽게 봉양을 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난리가 조금 진정되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황폐한 터와 무너진 벽에 잡목이 가득하였다. 이런 때에 본생(本生) 조부모(祖父母)의 상을 당하고 또 소후(所後) 조비(祖妣)의 상을 당하였는데, 폐허가 된 와중에서도 예를 갖추어 장사와 제사를 지내니, 친척들과 이웃들이 칭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이미 지성(至性)이 있었는데, 일을 살필 나이가 되어서는 집안의 비상(非常)한 화(禍)를 애통해하면서 언제고 피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종자(從者)의 말에 따라 11월 24일을 기일(忌日)로 정하고 매번 제사를 올릴 때가 되면 반드시 소식(素食)을 하면서 그달을 보냈다고 한다. 늘 말하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해골을 수습하지 못하였고 기일도 자세히 알지 못하니, 천지 사이의 한 죄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한(恨)을 품었고 죽어서도 원통함을 품게 되었다. 나의 자손들은 반드시 이 뜻을 체인(體認)하여야 할 것이며, 내가 죽거든 장사 때에는 회곽(灰槨)을 쓰지 말고 제사 때에는 유밀(油蜜) 같은 좋은 음식을 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밤이면 반드시 경건하게 묵도(默禱)하면서 말하기를, “불초(不肖)한 자식이 이렇게 천지에 사무치는 슬픔을 안게 되었습니다. 만약 꿈에서라도 신명(神明)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돌아가신 아비가 뼈를 묻은 곳과 돌아가신 날을 알려 주신다면, 망극한 심정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습니다.” 하였으며, 날마다 이렇게 하기를 죽을 때까지 하였다.


공은 어린아이 때부터 자친(慈親)의 뜻을 조금도 어겨본 적이 없었으며, 성장해서는 출타할 때나 귀가할 때 반드시 고하였고 돌아올 날짜를 예정했을 때는 조금도 기일을 어기지 않았다. 식사 때에는 반드시 곁에서 모시면서 먼저 맛을 보고 난 뒤에 드렸으며, 만약 병환이 드셨을 때는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고 거처할 때도 편안히 앉아 있지 못하였다. 언젠가 갑자기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시어 백약(百藥)이 효과가 없자 온 집안이 황급히 여겨 무당을 시켜 기도를 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제가 직접 조상들께 빌어 보겠습니다.” 하고는,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돈한 채 사당 앞에 서서 울면서 사연을 고하였는데, 그 내용이 애절하여 신명을 감동시킬 만한 바가 있었다. 고하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병환이 조금씩 차도가 있기 시작하여 반나절이 지나자 완쾌되니, 사람들이 성효(誠孝)에 감응한 것이라고 하였다.


정해년(1647, 인조25) 가을에 모친이 천수(天壽)를 누리고 하세(下世)하시니, 공의 나이 61세였다. 가슴을 치고 울부짖으며 애통해하여 기절했다가 깨어났으며, 성빈(成殯)한 뒤에는 의복(衣服)과 침식(寢食)을 한결같이 예법(禮法)에 맞게 행하였다. 한겨울의 심한 추위 속에서도 홑옷만을 걸친 채 밤낮으로 분주하게 주선하면서 장사(葬事)를 준비하였다. 종제(從弟) 순형(純馨)이 울면서 설득하기를, “노년(老年)의 상제(喪制)는 마땅히 권도(權道)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대사(大事)를 스스로 다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먼저 스스로 몸을 상하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나는 추위를 겁내지 않는 편이다.” 하면서, 끝내 바꾸지 않았다. 매번 석곡(夕哭)을 한 뒤에야 비로소 여차(廬次)로 돌아왔으며, 수질(首絰)과 요질(要絰)을 벗지 않고 잠을 잤다. 새벽이 되면 다시 빈청(殯廳)에 들어가 바닥에 엎드려 슬피 곡하고 인하여 종일토록 띠자리 위에서 지내니, 몇 개월 사이에 형용(形容)이 수척하여 거의 지탱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친한 이들이 더러 권하기를, “애통하여 몸이 수척해질 수는 있으나 자신의 생명을 해칠 정도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옛날부터 분명한 경계가 있다. 더구나 연기(年紀)가 그토록 높으니 이처럼 몸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하면, 공은 울면서 사례하기를, “거적자리에서 자고 흙베개를 베지 않고 여차에서 편안히 거처하면서 예제(禮制)를 따르지 못한 것이 또한 이미 많았는데, 어찌 생명을 해치게 될 것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장지(葬地)를 정하지 못해 다음 해 봄에야 비로소 장사를 치를 수 있었다. 졸곡(卒哭)을 마치고 나자 비로소 거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셨는데, 그래도 채소와 과일은 먹지 않았다. 또 노환(老患)으로 여묘(廬墓)를 하지 못하는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겨 한 달에 두세 번은 묘소를 찾았으며, 상(喪)을 마칠 때까지 아무리 심한 추위나 더위에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매번 성묘를 할 때마다 눈물이 빗물처럼 떨어지니, 묘 앞의 절하는 자리의 사초(莎草)가 그로 인해 말라죽었다.


기축년(1649, 인조27) 봄에 병으로 온몸이 모두 마비되고 타는 듯하여 직접 제전을 드릴 수는 없었지만, 매일 한 차례 부축을 받으며 영연(靈筵)에 나아가 살피고 돌아왔다. 이해 겨울에 상기(喪期)가 끝나자 공은 눈물을 흘리고 호곡(號哭)하는 등, 슬픔을 이기지 못하면서 이르기를, “내년은 내 선인(先人)께서 화(禍)를 당하신 해이니, 어찌 무사히 상기를 마쳤다고 하여 갑자기 길사(吉事)로 나아가면서 나의 한없이 망극한 슬픔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심상(心喪)의 상제를 행하였다. 거처하는 곳에는 북창(北窓)을 가리지 않았으며, 조석으로 기장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 채소는 먹지 않았다. 장자(長子) 원우(元雨)가 울면서 간하기를, “대인(大人)께서는 고령의 몸으로 막 모상(母喪)을 마치시면서 몸이 심하게 축나셨는데, 이제 또 이처럼 고집하며 바꾸지 않으시니, 그러시다가 몸을 보전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편모께서 이미 돌아가셨고 너희들도 벌써 장성하였으니, 내가 정을 펴지 못한 상태에서 정을 펴다 죽은들 무엇이 한스럽겠느냐.” 하였다. 경인년(1650) 겨울에 병환이 심해졌는데도 오히려 조석(朝夕)으로 참알(參謁)하는 것을 폐하지 않았다. 신묘년(1651) 원일(元日)에 친히 제사를 드리고 마침내 조석으로 참알하는 것과 북창을 가리지 않는 일 등을 그쳤다. 그러나 아직 상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하여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셨다. 병환이 점차 깊어지자 원우가 다시 울면서 간하니, 이에 마침내 심상(心喪)의 담제(禫祭)를 행하고 비로소 평상(平常)을 회복하였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즉위한 지 3년 되던 해는 그 선공(先公)이 돌아가신 지 1주갑(周甲)이 되는 해이다. 공의 찢어지는 듯이 애통한 심정은 부음을 처음 들었을 때와 같았으므로, 마침내 6월 모일(某日)에 따로 축문을 지어 곡하며 신주(神主)에 바쳤다. 이는 어떤 사람이 선공이 해를 입은 날이라고 전해 준 것이 6월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공은 늘 죄인으로 자처하여 모든 거상(居喪)하는 의절(儀節)이 자신도 모르게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곤 하였다. 또 몸을 영화롭게 하여 명예를 얻어 세상에 드러나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았다. 다만 서적(書籍)을 가지고 자오(自娛)하면서 《소학(小學)》, 북정편(北征篇), 애일가(愛日歌) 등의 글에 대해서는 외우고 읊조리면서 한시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무심히 세상에 뜻이 없는 자처럼 하였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 대가(大駕)가 파천(播遷)을 하게 되었을 때 공은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관군의 세력을 도왔고, 또 군량을 모아 경창(京倉)까지 운반하기도 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에 그 공을 포상하는 은전이 내렸으나 공 자신은 그것을 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렸다. 숭정(崇禎) 병자년(1636, 인조14)에는 북쪽의 군대가 창궐하여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포위되어 있을 때 공은 한두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켜 공문(公門) 밖에서 모였는데, 날마다 얼어붙은 땅에서 지내고 음식을 상에 올려놓고 먹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주상(主上)께서 고립된 성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참고 계신다. 우리 소인(小人)들이 비록 나라의 녹을 먹은 적은 없으나 그래도 이 땅의 음식을 먹었으니, 어찌 차마 따뜻한 방에서 지내며 소반 위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한창 의병을 모을 즈음에 군령을 어긴 한 아전이 있었다. 공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고 성난 소리로 말하기를, “이렇게 위난(危難)한 때는 군신(君臣)의 대의(大義)에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의 차이가 없거늘 네가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니, 보는 이들이 모두들 격동되고 감탄하여 모집에 응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에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눈물을 훔치면서 북향하여 죽음을 무릅쓸 뜻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내 길을 떠나 반 정도 올라갔을 때 대가(大駕)가 성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돌아왔다. 경인년(1650, 효종1) 여름에 고을의 대부가 그 행의(行誼)를 조정에 아뢰려고 하였으나, 공이 듣고는 굳게 사양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 계사년(1653) 여름에 후임 태수(太守)가 이르렀을 때 사대(使臺)에 자세히 보고하여 조정에 전하도록 하였으나 답을 얻지 못하였다. 무술년(1658, 효종9)에 집안에서 병환으로 졸(卒)하니, 2월 7일이었다. 향년 72세였다. 이해 9월 모일(某日)에 순천부(順天府) 동막리(桐幕里)의 해향(亥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처(妻) 방씨(房氏)는 직제학(直提學) 사량(士良)의 후손이며 처사(處士) 덕참(德驂)의 따님이다. 공보다 18년 앞서 졸하였으며 같은 언덕에 봉분을 달리하여 장사 지냈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원우(元雨)이다. 차남은 주우(柱宇)인데 장가를 들기 전에 요절하였다. 막내는 성우(聖雨)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남해 현령(南海縣令)에 이르렀다. 딸은 사인 이상하(李相夏)에게 시집갔다. 원우는 3남을 두었는데, 두광(斗光), 두채(斗采), 두망(斗望)이며, 성우는 자식이 없어 족자(族子) 두성(斗成)으로 후사를 삼았다.


공은 천성적으로 효성이 독실하였으며 또 강개한 뜻이 많았다. 매번 충신이나 의사가 목숨을 바쳐 절의(節義)를 세운 일을 볼 때마다 반드시 감격하고 오열하였으며 그 일을 상상하며 흠탄(欽歎)하곤 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문문산(文文山 문천상(文天祥))이나 육수부(陸秀夫 육유(陸游))의 전기를 읽고서 크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하였다. 일찍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정충비(旌忠碑)를 지나면서 말에서 내려 재배(再拜)한 뒤에 절구(絶句) 한 수를 읊조리기를, “남쪽에 세워진 천년의 빗돌, 그 위풍 만고토록 유구하네. 말을 멈추고 내려 절을 하자니, 감격의 눈물이 마구 쏟아지네.〔南柱千年石 威風萬古長 停驂一下拜 感淚爲滂滂〕” 하여, 그 경앙(景仰)하는 뜻을 나타내었다.


‘불기심(不欺心)’ 세 글자를 평생 가슴에 새기고 늘 그것을 말하여 자손들을 경계하였다. 집안을 다스릴 때는 내외(內外)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남녀가 설만한 옷차림으로 만나지 못하였다. 《열녀전(烈女傳)》을 번역하여 써서 집안의 부녀자들에게 주어 송습(誦習)하게 하고 잡설(雜說)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고아나 과부가 억울하게 법망(法網)에 걸리면 수고를 꺼리지 않고 힘을 다해 구제하고자 하였으며, 어쩌다 빈궁한 사람이 혼인(婚姻)이나 장사(葬事)를 제때에 치르지 못하고 있으면 구휼해 주고 보조해 주는 데에 또한 그 힘을 아끼지 않았다. 재산을 늘리는 등의 일에 대해서는 피하고 꺼리기를 마치 몸이 더럽혀질 것처럼 하였다. 집안에는 비축된 양식이 없어 처자가 기한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처신하는 것이 느긋하였다.


공은 대대로 호남(湖南)의 낙안군(樂安郡)에서 거주하였고, 현일(玄逸)은 동쪽 구석에서 나고 자랐는지라 실은 공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경오년(1690, 숙종16) 여름 벼슬살이 때문에 서울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공의 손자 두망이 집으로 나를 찾아와서 그 형 두광이 공의 행적의 대체(大體)를 기술한 것을 현일에게 주면서 행장을 엮어서 글 잘하는 이에게 지(誌)를 청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였다. 현일이 능력이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그 청이 갈수록 정성스러웠다. 말뜻이 애절하고 성의가 간절한 데다 또 천리 밖에서 멀리 나를 찾아온 뜻을 저버려서는 안 될 듯하여 마침내 그 일을 맡기로 허락하였다.


현일이 삼가 생각건대, 공의 자효(慈孝)한 성품과 제행(制行)의 독실함은 모두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거니와, 그 충의(忠義)롭고 장렬(壯烈)한 기상 또한 충분히 쇠퇴해진 풍속을 진작시키고 유약한 사람을 흥기시킬 만하다. 고인(古人) 중에서 찾아본다면 왕위원(王偉元), 송충가(宋忠嘉)와 같은 무리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이른바 “의도하는 바가 없이 행하여, 그 본심을 잃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행적을 차례로 기록하고 이처럼 그 본말을 자세히 논하는 것이니, 삼가 당세(當世)의 입언(立言)하는 군자가 다행히 채택하여 영원토록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삼가 행장을 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