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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이조참판 행 사헌부장령 정공(鄭公)의 신도비명 (정이주)

간이집 제2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공의 휘(諱)는 이주(以周)요, 자(字)는 방무(邦武)요, 별명(別名)은 유성(由盛)이요, 호는 성재(醒齋)이다.

정씨는 광주(光州)에서 나와 나라의 망족(望族)이 되었는데, 시조(始祖)와 멀어지면서 파(派)가 더욱 나누어졌으니, 가령 공 같은 분도 스스로 파를 나누어 새로 족보를 만들 만한 분이었다고 하겠다.


공의 7세조(世祖)인 정신호(鄭臣扈)는 고려의 전직(殿直)이었고, 6대조인 정윤부(鄭允孚)는 본조(本朝)의 개성 윤(開城尹)이었고, 5대조인 정귀진(鄭龜晉)은 강원도 관찰사로서 그의 문장이 세상에 널리 유행하였고, 고조고(高祖考)인 휘(諱) 지하(之夏)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었고, 증조고(曾祖考)인 휘 찬우(纘禹)는 청도 군수(淸道郡守)로서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을 증직받았고, 조고(祖考)인 휘 순인(純仁)은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증직받았다.


공의 고(考)인 휘 경(褧)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서 우뚝 솟구쳐 수립한 바가 있었으므로 동료들로부터 중한 기대를 받았는데, 일찌감치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서 강호(江湖) 사이에 노닐기만 할 뿐 벼슬길로 나설 뜻이 전혀 없었다. 이에 외구(外舅)인 의정(議政) 유순정(柳順汀)과 표형(表兄)인 의정 윤개(尹漑)가 번갈아 가며 천거하여 금오랑(金吾郞)에 의망(擬望)하자,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깊이 유감으로 생각하면서 집에 찾아가도 만나 주지 않기까지 하였다. 뒤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증직받았다.


공의 비(妣)인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는데, 고려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인 채연(蔡淵)의 후예요, 성균관 진사 채순(蔡恂)의 딸로서, 가정(嘉靖) 경인년(1530, 중종25) 1월에 공을 낳았다.


공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총명한 데다가 학문에 힘을 기울여서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드날렸다. 그런데 과거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은 유독 뒤늦어서, 무오년(1558, 명종13)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시험에 입격하였다. 그러다가 을축년(1565, 명종20) 연간에 태학생(太學生)들이 요승(妖僧) 보우(普雨)의 죄를 청하는 글을 올리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공의 손으로 작성된 것이었고 또 마침내 윤허를 얻게 된 상소문 역시 공이 작성한 것이었으므로, 임금의 뜻을 되돌린 공을 모두 공에게 돌렸었다.


무진년(1568, 선조1)의 문과(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종7품의 관직임)을 제수받고 몇 개월 있다가 추천을 통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정9품의 관직임)에 보임(補任)되었다. 그러나 공은 이미 7품의 관직에 조용(調用)되었던 만큼 이는 원래 바람직한 인사 행정이 못 된다고 하고는 구태여 사국(史局)에 비루하게 들어갈 필요가 없다면서 거부하였다. 이런 행동을 보인 경우는 국조(國朝) 이래 단 두 번밖에 없었는데, 공이 바로 그 하나에 속한다.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전직(轉職)되었다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옮겨진 뒤 공조ㆍ형조ㆍ예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그러고 나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경사(京師)에 다녀왔는데, 돌아올 때의 짐보따리에 한 자루의 향(香)이나 한 권의 책도 구입해 온 것이 전혀 없었다. 이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서적 같은 것이야 사 가지고 온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 있는 서적도 제대로 다 읽지를 못하고 있다.” 하였다. 그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오던 날, 행장(行裝)에 아직 남아 있던 물건들을 죄다 꺼내어 아랫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열읍(列邑)에서 주는 예물(禮物)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은 만리 여행길에 뜻밖에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으니,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쟁신(爭臣)의 기풍이 꽤나 돋보였다. 당시에 임금의 외척(外戚) 한 사람이 등과(登科)하였으므로 바야흐로 상이 친림하여 합격자 발표를 하고 호명을 하였는데, 대소(大小)의 신료(臣僚)들이 서로 다투어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인사하느라 반열(班列)이 텅 빌 지경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공만은 홀로 단정하게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미움을 받아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 소명(召命)을 받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조정 안에는 붕당(朋黨)의 폐해가 빚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전조(銓曹)의 낭관(郞官) 한 사람이 공을 끌어다 자기들의 세력을 중하게 할 목적으로 세 차례나 공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공은 답례로나마 한 번도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보여 주었다.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있다가 바뀌어 형조ㆍ예조ㆍ호조의 정랑(正郞)이 되었다. 그때에 국가에서 대대적으로 군적(軍籍)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영남(嶺南) 지방의 경우는 평소 토호(土豪)의 소굴로 소문난 곳이라서 장정(壯丁)을 수괄(收括)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공을 특별히 그곳의 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그런데 과연 공이 내려가서 유지(有旨)에 걸맞게 일을 처리하였으므로, 강포하고 교활한 토호들이 납작 엎드려 복종한 결과 은폐되거나 누락되는 폐단이 결코 없게 되었다.


당시에 본도(本道)의 사인(士人) 한 사람이 바야흐로 간관(諫官)의 신분이 되어 돌아와서는 공을 일부러 찾아보았는데, 이는 자기의 집을 보호해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이에 공이 면전에서 꾸짖어 말하기를, “그대처럼 임금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까지도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니, 그 사람이 안색이 변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자기 집의 양정(良丁) 몇 사람을 써 주고 떠나갔다. 그러고는 마침내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고는 은밀히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모함하는 말을 얽어서 탄핵하게 하였다.


이에 상이 연석(筵席)에서 대신(大臣) 노수신(盧守愼)에게 하문하기를, “정모(鄭某)가 강직하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바인데, 지금 이처럼 논핵(論劾)을 받기까지 하고 있다. 경은 남쪽 지방 사람이니, 혹시라도 이에 대해서 들은 말이 있는가?” 하였는데, 노수신이 대답하기를, “신은 그가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여 한정(閑丁)을 많이 얻었다는 말만 들었을 뿐, 다른 것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럴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에 공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면서 군적을 정리하는 일이 결국 두서(頭緖)를 잃게 되고 말았으므로,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기며 탄식하였다.


얼마 있다가 또 순무어사(巡撫御史)로 본도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자 장리(將吏)들이 소문만 듣고서도 두려움에 몸을 떨었으며, 토호 가운데에는 법제를 어기고 지은 집을 자진 철거하는 자까지 나오게 되었다.


조정에 들어와서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었다. 그때 마침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대립하는 가운데 조정이 불안해질 조짐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으므로, 공이 대사간(大司諫) 정지연(鄭芝衍) 및 부제학(副提學) 이이(李珥)와 함께 의논을 통한 뒤에, 두 사람 모두 외직(外職)으로 내보낼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분위기를 진정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그사이에 격렬하게 논하며 한쪽 편을 들어 공격하는 자가 나와 극력 저지하는 바람에 그 일이 그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한 뒤에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와 사성(司成), 사섬시 정(司贍寺正)을 역임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명을 받들고 경기 순무어사와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 그리고 강원도의 경차관으로 나갔는데, 공이 가는 곳마다 온갖 폐단이 말끔히 정리되곤 하였다.


공은 대간(臺諫)으로서 정언(正言)을 세 번, 지평(持平)을 네 번, 장령(掌令)을 여섯 번이나 지내었다. 조정에서도 물론 기강과 언론에 대한 책임을 공에게 빈번히 맡겼지만, 공 역시 그때마다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면서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공의 올곧은 도[直道]가 당시 세상에 용납되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 배척을 받고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부임하게 되었다.


공은 임지(任地)에 도착하자마자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면서 관직 생활을 물로 씻어 낸 듯 청렴하게 일관하였고, 궁핍한 환경을 만족스럽게 여기면서 부세(賦稅)를 모조리 감면해 주었으므로, 이민(吏民)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세시(歲時)에 안부를 물으며 선물을 보낼 적에도 오직 외롭고 빈한하게 지내는 친척과 고구(故舊)에게만 하였을 뿐 세력가나 현달한 이들에게는 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초 공의 성격이 괴팍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급기야 공이 인끈을 풀고 돌아올 적에도 자신의 행장(行裝) 속에 전에 못 보던 옷상자가 둘이나 있는 것을 보고는 크게 노하여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는가 하면, 집에 도착한 날에도 이웃집에서 곡식을 꾸어 온 다음에야 비로소 밥을 지을 수가 있었다. 공이 살던 옛집은 춘천(春川)에 있었는데, 너무도 초라하여 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생을 마칠 계획을 세우고는 필마(匹馬)에 몸을 싣고서 동쪽으로 돌아왔던 것인데, 사방에 벽만 을씨년스럽게 서 있을 따름이었건만 정작 공 자신은 편안하게 여기며 태연자약하기만 하였다.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16) 2월에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 54세였다. 그해 5월 모일에 가평군(加平郡) 원남면(遠南面) 간좌(艮坐)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의 5대손이요, 부사과(副司果) 정응서(鄭應瑞)의 딸인데,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정사호(鄭賜湖)는 계유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정축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재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 있다. 처음에 진사 채무외(蔡無畏)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어 참봉(參奉) 유필영(兪必英)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측실(側室) 소생으로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은 정장원(鄭長源)이다.


그다음 정명호(鄭明湖)는 경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있다가 일찍 죽었다. 사예(司藝) 김사섬(金士銛)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정두원(鄭斗源)이다.


그다음 정운호(鄭雲湖)는 무자년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처음에 충의위(忠義衛) 이순인(李純仁)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어 유학(幼學) 강윤(康允)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딸은 현감(縣監) 정회(鄭晦)에게 출가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니, 정팽동(鄭彭仝)과 정두동(鄭斗仝)이다.


정두원(鄭斗源)은 판관(判官) 심제겸(沈悌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부인은 임진년의 난리를 피하려고 온양(溫陽)에 있는 정회(鄭晦)의 집에 우거(寓居)하다가 갑오년 5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북쪽으로 영구(靈柩)를 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서 청주(淸州) 땅 산외(山外)의 간좌(艮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말이 적고 묵중하였다. 어려서부터 붕우와 어울릴 때에도 실없이 농담을 하거나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이 한 번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을 금옥(金玉)보다도 더 중하게 여기기까지 하였으니, 공을 대하면 누구라도 감히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 여러 차례나 사화(士禍)를 겪은 터라서 사람들이 이학(理學)을 운위하는 것을 금기로 여기고 있었는데, 공은 홀로 발분(發憤)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해 나가면서 《대학장구(大學章句)》나 《근사록(近思錄)》 등 성리학(性理學)과 관련된 서책들에 대해서 매우 투철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을 적에 공과 더불어 통독하고 나서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지금 같은 세상에서 이런 유자(儒者)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고 하기도 하였다.


집에 있을 적에 제삿날이 돌아오면 목욕재계를 하고 반드시 성의와 공경을 다하였으며, 세척하고 자르고 익히는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직접 그 자리에 임하곤 하였는데, 몸에 병이 있어도 이를 거른 적이 없었다.


관직에 몸을 담고 있을 때에는 크건 작건 간에 한결같이 봉공 멸사(奉公滅私)의 정신으로 임하면서 그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정(私情)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였다. 그래서 공 자신이 남에게 청탁하는 일이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감히 청탁하여 공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공이 물러 나와서는 방에 조용히 앉아서 좌우에 도서(圖書)를 펼쳐 놓고는 하루 종일 탐독을 하였으며, 오직 솔과 대를 다시 심어 기르면서 그사이에서 한가하게 소요하기만 하였을 뿐, 사람들과 바쁘게 왕래하면서 어울리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공은 집안일에는 일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집이 기울어져도 기둥을 받쳐 놓고 그저 비바람만 피할 뿐이었으며, 자손을 위해서 한 이랑의 전장(田庄)도 마련해 놓지를 않았다. 그리고 공은 평소에 잡기(雜技)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만년에 들어서는 거문고를 배워 거기에 자못 취미를 붙이기도 하였다.


공은 학식도 있고 절조(節操)도 있고 위엄도 있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참신한 기풍을 불어넣기에 충분하였고, 변경에 나아가서는 적을 제어하며 승첩을 거두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공을 알아주는 사람은 드문 대신에 공을 시기하는 자만 많았고, 거기에 또 운명까지 불우한 나머지 지니고 있는 실력의 십분의 일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그 덕이 후손에게 돌아가 이루어지게 된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도 하겠다.


부인 역시 인자하고 온후하여 음덕(陰德)을 많이 쌓았으므로, 사람들이 반드시 보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들을 하였다. 그런데 과연 후사(後嗣)가 된 아들의 지위가 천관(天官 이조(吏曹))의 소재(少宰 참판(參判))에 이르렀기 때문에 어버이에게도 추은(推恩)을 하게 되었는데, 공이 아들의 직질(職秩)에 비례하여 증직(贈職)이 되면서 부인 역시 여기에 함께 참여하여 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더 귀하게 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공의 후사(後嗣)인 관찰사가 나에게 찾아와, 일찍이 부자(父子) 사이에서 노닐지 않았느냐며 나에게 비명(碑銘)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의리상으로 볼 때 내가 어찌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이에 가장(家狀)을 근거로 하여 공의 시말(始末)을 적은 다음,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



세상은 온통 모서리 깎아 둥글둥글 만드는데 / 擧刓廉爲圓兮
공 홀로 방정한 모습 견지하였고 / 獨持方也
뒤질세라 냄새나는 벼슬을 좇는 세태 속에 / 逐臭者之競兮
공만은 끝까지 향기를 잃지 않았어라 / 不易以芳也
탁류가 쏟아져 발을 오염시키자 / 濁流染足兮
훌쩍 떠나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 去而之淸也
사는 집 스스로 성(醒)이라 명명하였나니 / 繄自命其居兮
옛사람이 남긴 풍도 간직하려 함이러라 / 古遺醒也
그 경륜 세상에 한번 시험했더라면 / 以是嘗世兮
얼마나 멋진 솜씨 선보였을꼬 / 適畫其至也
공이 남긴 그 음덕 후손이 이어받았나니 / 收餘于後兮
끝없이 발전할 줄 나는 확신하노라 / 吾知其未已也


[주-D001] 탁류가 …… 함이러라 :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온 세상이 모두 탁한데 나 홀로 맑고, 사람들 모두 취했는데 나만 정신이 또렷하네.[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라는 말이 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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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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