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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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서원 의열사 상량문〔義烈祠上梁文〕- 서하집

의열사 상량문〔義烈祠上梁文〕- 서하집 제13권 / 상량문(上梁文) : 이민서(李敏敍, 1633~1688).

향선생을 사(社)에 향사하여 오래전부터 정성을 바치는 사당이 있는데, 열장부(烈丈夫)가 때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독 충(忠)을 나타내는 전례(典禮)가 빠졌도다. 이에 옛 사당을 새롭게 하여 영령(英靈)을 함께 향사하도다.

회재(懷齋) 박 선생(朴先生)은 재야의 현인이며 방국(邦國)의 큰 선비로다. 복자하(卜子夏)와 단간목(段干木)의 절개로 남주(南州)에서 출중하였고, 진원방(陳元方)과 정강성(鄭康成)의 주선으로 상국(上國)에서 빈흥(賓興)하였네. 조정에서 날릴 때에는 기러기 날개를 함께 쳐다보았지만, 길 잃고는 소 잡는 칼을 누차 시험하였지. 골짜기에서 은거한 세월 오래되었고 조정에 출입하여 덕과 명예가 더욱 높았네. 마침 큰 뱀이 형(荊)을 침범하여 육룡(六龍)이 촉(蜀)에 거둥하였네. 촉지무(燭之武)가 늙음을 고했으나 여전히 임금을 잊지 못하였고, 안고경(顔杲卿)이 군사 일으켜 적을 섬멸하기를 맹세하였네. 이 때문에 집안에 거처하며 의병에게 물자를 공급하였는데 몸이 죽어 중흥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충용(忠勇) 김 장군(金將軍)은 산악의 밝은 영기를 받고 초야에 자취 감췄네. 충정(精忠)은 해를 꿰뚫어 전쟁을 만나 의리상 마다하지 않았으니, 화란(禍亂)은 천지에 가득하여 뛰어난 호걸이 아니고선 힘으로 구제할 수 없었지. 처음 일어나자 총애하는 명령이 거듭 내렸고 한번 호령하자 군사들이 다투어 모여들었네.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처럼 작은 응원군조차 없이 홀로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처럼 맹수 같은 용맹을 갖고 충절을 자부하였네. 왕언장(王彥章)이 창을 휘두르고 말을 달리며 나는 듯이 출입하였고, 악무목(嶽武穆)이 등에 새기고 마음에 맹세하여 생사를 잊은 듯하였네. 손랑(孫郞)이 이르자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였고 단도제(檀道濟)가 태어나자 나라에 간성(干城)이 있었네. 세상에 드문 특별한 인재는 하늘이 시대를 위해 낸다는 것을 진실로 알겠으니, 옛날의 명장을 보면 누가 수염이 무리에서 특출한 이만 하랴.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자 열사들의 마음이 해이해졌고 당화(黨禍)가 기승하자 간신이 계책을 얻었네. ‘막수유(莫須有)’ 3자(字)가 애당초 어떻게 사람을 복종시켰으랴. 만약 속죄할 수 있다면 내 몸을 백 번이라도 주겠다 하였으니 옛날에 진실로 이렇게 지극한 울분이 있었도다.

다행히 백 년의 공론(公論)이 정해져서 선조(先朝)의 포증(褒贈)이 통쾌하게 펴졌도다. 내가 누구와 함께 돌아가랴. 돌아가신 분 환생할 수 없어 애통하도다. 선비들 서로 감격하여 백대 만에 오히려 새로워졌도다. 외지고 누추한 곳이라 글 짓는 이 없는 것이 오히려 한스럽고 향사(享祀)가 거행되지 않아 애석하도다. 단 태위(段太尉)의 일사(逸事)를 징험하고 수양(睢陽)의 쌍묘(雙廟)를 모방했도다.

사당을 예전 규모보다 넓히고 충혼을 일실(一室)에서 제사 지내도다. 도(道)는 인의(仁義)에 근원을 함께 두고 사람은 무(武)와 문(文)에 차이를 두지 않았네. 대우전(大羽箭)과 진현관(進賢冠)이 능연각(凌煙閣)에 함께 그려졌고 살벌한 소리와 드문드문한 비파소리가 공문(孔門)에 아울러 있었네. 영렬(英烈)이 외롭지 않아 이웃이 있음을 기뻐하고 천도(天道)가 비록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돌아옴을 믿겠노라. 애오라지 찬송하는 붓을 들어 긴 들보 올리는 일을 돕노라.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 兒郞偉拋梁東
서석산이 높이 하늘에 솟구쳤구나 / 瑞石山高聳碧空
구름 일으키고 안개 낼 뿐만 아니니 / 不獨興雲兼出霧
신령스런 빛과 아름다운 기운이 영웅을 냈도다 / 靈光休氣產英雄


어영차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 兒郞偉拋梁西
큰 들이 평평히 펼쳐져 바라보면 가지런하네 / 大野平分一望齊
거록의 창칼의 모임을 상상해 보니 / 想看鉅鹿刀槍會
천군만마가 소리 없이 북소리를 들었으리라 / 萬馬無聲聽鼓鼙


어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 兒郞偉拋梁南
백 이랑의 모난 못 쪽보다 더 푸르구나 / 百頃方池綠勝藍
서호는 나귀 탄 장군이 정착할 만하니 / 西湖可着騎驢將
물빛과 산빛에 한을 견딜 수 없네 / 水色山光恨不堪


어영차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 兒郞偉拋梁北
만산의 소나무와 회나무가 푸르름 일색이로다 / 滿山松檜靑一色
세상 사람 누가 추워진 뒤의 자태를 알리오 / 世人誰識歲寒姿
도끼로 베어 가는 것이 더 이상 애석치 않구나 / 斧斤斬伐不復惜


어영차 들보를 위로 던지니 / 兒郞偉拋梁上
해와 달 빛나고 은하수도 출렁이네 / 日月照耀星河泳
흙 속의 푸른 피 갑 속의 칼날이 / 土中碧血匣中刀
밤마다 원통한 기운 하늘을 찌르도다 / 夜夜冤氣衝宸象


어영차 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 兒郞偉拋梁下
널찍한 산의 돌이 앞들을 굽어보네 / 山石盤陀俯前野
청금과 만호영이 가득하니 / 濟濟靑襟及胡纓
사방에서 의를 좋아하는 이들 달려오누나 / 奔走四方好義者


삼가 원하건대, 상량한 뒤에 많은 선비들 구름처럼 모여들고 온 나라가 감화되며, 봄가을로 향사하는 일에 희생을 마련하여 정성을 바치고 조석으로 강습하는 법규는 〈백록동규(白鹿洞規)〉와 번갈아 아름다우며, 풍성(風聲)이 묘사(廟祀)와 함께 멀리 퍼지고 문교(文敎)가 치화(治化)와 함께 흘러가게 하소서. 전현(前賢)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라며, 영원한 세상에 함께 힘쓰기를 기대하도다.


[주-D001] 의열사 : 
1604년(선조3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박광옥(朴光玉)의 덕행과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원래 이름은 벽진서원(碧津書院)이었다. 그 뒤 이민서가 광주 목사로 있던 1678년(숙종4)에 김덕령(金德齡)을 추가 배향하는 동시에 중수하였으며, 1681년 ‘의열사(義烈祠)’라고 사액되었다. 광주시 서창에 있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의열사는 철거되고, 1975년 2월 이곳에 충장사를 지어 배향하였다.
[주-D002] 회재(懷齋) 박 선생(朴先生) : 
회재는 박광옥(朴光玉, 1526~1593)의 호이다. 자는 경원(景瑗), 본관은 음성(陰城)이다. 전라도 광주에 세거(世居)하며, 기대승(奇大升)ㆍ박순(朴淳)ㆍ이이(李珥)ㆍ노사신(盧思愼) 등과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고, 고향의 의병도청(義兵都廳)에서 군사 장비와 군량을 조달하였다. 의병 활동의 공로로 다시 관직에 올라 나주 목사로 재임하다가 죽었다. 1602년(선조35) 광주 벽진촌(碧津村)에 세워진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벽진서원으로 고쳐졌다.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주-D003] 복자하(卜子夏)와 …… 출중하였고 : 
박광옥이 벼슬하기 전에 광주(光州)에서 출중한 인사였음을 말한다. 복자하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문학으로 이름난 복상(卜商)으로, 자가 자하(子夏)이다. 단간목(段干木)은 전국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위(魏)나라에 살면서 도를 지킨 채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위나라 문후(文侯)가 그가 어진 것을 알고서 찾아가자 문후를 피하여 담을 넘어 도망쳤다. 《孟子 滕文公下》
[주-D004] 진원방(陳元方)과 …… 빈흥(賓興)하였네 : 
박광옥이 빼어난 학문을 바탕으로 대신의 추천을 받아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된 것을 말한다. 진원방은 후한(後漢)의 진기(陳紀)로, 자가 원방이다. 덕행과 재주로 이름나 그 아우 진계방(陳季方)과 함께 난형난제(難兄難弟)로 일컬어졌다. 정강성(鄭康成)은 후한의 학자 정현(鄭玄)으로, 자가 강성이다. 빈흥(賓興)은 주(周)나라 때 어진 인재를 선발하던 방법의 하나로, 지방의 소학(小學)에서 덕행과 학예(學藝)가 뛰어난 학생을 뽑아서 빈례(賓禮)로 맞이한 뒤에 국학에 입학시키는 방법이다. 《周禮 大司徒》
[주-D005] 길 잃고는 …… 시험하였지 : 
작은 고을의 수령을 자주 역임하였다는 말이다. 공자가 자신의 제자 자유(子游)가 수령으로 있는 무성(武城)에 가서 현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割雞焉用牛刀?]” 하였다. 《論語 陽貨》 박광옥은 운봉 현감(雲峯縣監)ㆍ영광 군수(靈光郡守)ㆍ밀양 부사(密陽府使) 등을 지냈다. 《記言 別集 卷25 羅州牧使朴公墓表》
[주-D006] 마침 …… 침범하여 : 
큰 뱀은 흔히 봉시장사(封豕長蛇)로 쓰인다. 큰 뱀처럼 포학하고 탐욕스러운 부족이라는 말로, 본래 남만(南蠻)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적을 가리킨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4년조에 “오나라는 큰 돼지와 뱀이라서 끊임없이 상국을 침범하고 있다.[吳爲封豕長蛇, 以荐食上國.]”라고 하였다. 형(荊)을 침범한 일은 미상이다.
[주-D007] 육룡(六龍)이 촉(蜀)에 거둥하였네 : 
육룡은 천자(天子)의 수레를 끄는 여섯 마리의 말에 대한 미칭으로, 천자의 수레를 이르기도 하고 천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14년에 안녹산(安祿山)이 낙양(洛陽)을 함락시키고 이듬해 장안(長安)까지 쳐들어오자, 천자가 촉 지방으로 거둥하였다. 여기서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한 것을 비유하였다.
[주-D008] 촉지무(燭之武)가 …… 못하였고 : 
촉지무는 춘추 시대 정(鄭)나라 신하로, 진(秦)과 진(晉)이 정나라를 포위했을 때 정나라 임금이 그를 사신으로 보내려 하자, 그가 “나는 젊었을 때에도 남처럼 일을 못했는데, 지금은 늙기까지 했으니 도저히 해낼 수가 없다.”라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중용하지 못한 것을 임금이 사과하자, 결국 진(秦)나라 군대에 가서 진 목공(秦穆公)을 만나 “만약 정나라를 그대로 놔두어, 진(秦)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할 적에 길 안내 역할을 맡게 하시고, 사신들이 왕래할 적에 부족한 물자를 공급하게 하신다면, 임금에게도 손해가 없을 것입니다.[若舍鄭以爲東道主 行李之往來 供其乏困 君亦無所害]”라고 설득하여 포위를 풀게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30年》
[주-D009] 안고경(顔杲卿)이 …… 맹세하였네 : 
안고경은 당(唐)나라의 충신으로 상산 태수(常山太守)로 있을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당했다. 반란군 사사명(史思明)이 상산을 공격하여 성이 함락되고 자신은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면전에서 준열하게 꾸짖다가 혀가 잘리고 죽었다. 《新唐書 卷192 顔杲卿列傳》
[주-D010] 충용(忠勇) 김 장군(金將軍) :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을 말한다. 1593년(선조26) 어머니 상중에 담양 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 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 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주-D011] 장순(張巡)과 …… 이끌고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인 장순과 허원(許遠)의 병칭이다.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순이 진원 영(眞源令)으로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나라의 시조인 현원황제(玄元皇帝)의 묘(廟)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기병(起兵)하여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舊唐書 卷187 張巡列傳》
[주-D012] 관우(關羽)와 …… 갖고 : 
관우와 장비(張飛)는 촉한(蜀漢) 유비(劉備)의 휘하 장수로서 무예가 출중하였다.
[주-D013] 왕언장(王彥章)이 …… 출입하였고 : 
왕언장은 후량(後梁)의 맹장으로 철창(鐵鎗)은 그의 호이다. 그가 행영(行營)의 선봉이 되어 철창을 사용하는 것이 몹시 빨랐으므로 군중(軍中)에서 왕철창(王鐵鎗)이라고 하였다. 후진(後晉)이 운주(鄆州)를 차지하였을 때 후량의 말제(末帝)가 왕언장을 불러 초토사(招討使)로 삼고 적을 격파하는 데 시일이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물었는데 “3일이면 됩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므로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피식 웃었다. 왕언장이 명을 받고 출병하여 이틀 동안 달려 활주(滑州)에 이르러서 적을 격파할 때까지 걸린 날짜가 모두 3일이었다. 《宋子大全隨箚 卷10》
[주-D014] 악무목(嶽武穆)이 …… 듯하였네 : 
무목은 남송(南宋)의 장군 악비(嶽飛, 1103~ 1142)의 시호이다. 악비가 등에다가 정충보국(精忠報國)이란 네 글자를 새기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이 말하였다.
[주-D015] 손랑(孫郞)이 …… 혼비백산하였고 : 
손랑은 후한(後漢)의 손책(孫策)을 말한다. 후한 말엽에 나라가 어지러워져 군웅이 할거할 때, 당대의 실력자 원술(袁術)이 그에게 강동(江東) 지역을 평정하게 하였는데, 진군하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였다. 평소 강동의 백성들은 손책이 사나운 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처음에 모두 혼비백산했으나 군령을 엄하게 내려 노략을 금하자,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며 귀의하였다. 《資治通鑑 卷61 漢紀53 孝獻皇帝丙》
[주-D016] 단도제(檀道濟)가 …… 있었네 : 
대군(大軍)을 지휘하는 중신(重臣)을 비유한 표현이다.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명장 단도제(檀道濟)가 누차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시기를 받아 억울하게 죽을 때에 “이제는 또 너희들의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려 하는구나.[乃復壞汝萬里之長城.]”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宋書 卷43 檀道濟列傳》
[주-D017] 화의(和議)가 …… 해이해졌고 : 
명(明)나라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 사이에 벌어진 강화 협상을 말한다. 계사년(1593, 선조26)부터 이어져 오던 협상은 풍신수길(豐臣秀吉)의 터무니없는 요구 사항으로 인해 결렬되고 결국 정유재란이 발생하였다.
[주-D018] 당화(黨禍)가 …… 얻었네 : 
김덕령(金德齡)이 당파싸움에 희생된 것을 말한다. 1596년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 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곽재우(郭再祐)ㆍ고언백(高彦伯)ㆍ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鄭琢)ㆍ김응남(金應南) 등이 그의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주-D019] 막수유(莫須有) …… 복종시켰으랴 : 
김덕령(金德齡)의 옥사(獄事)가 터무니없는 무고였음을 사람들 누구나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막수유는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후대에 근거 없이 날조되었다는 의미로 쓰인다. 남송의 악비(嶽飛)가 북송(北宋)을 멸망시킨 금나라와 싸워서 중원(中原)을 회복하려고 하였으나 간신 진회(秦檜) 등 주화파(主和派)에 의해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당하여 ‘막수유’의 죄명(罪名)으로 죽임을 당했다. 충신 악비를 죽이려고 무함하는 진회가, “악비의 아들 악운(嶽雲)이 악비의 장수 장헌(張憲)에게 준 편지가 있는데 사실은 분명치 않지만, 아마 있을 것이다.” 하자, 악비를 편드는 한세충(韓世忠)이 “‘아마 있을 것이다.’라는 세 글자로 어떻게 천하 사람들을 납득시키겠는가.”라고 하였다. 《宋史 卷365 嶽飛列傳》
[주-D020] 속죄할 …… 하였으니 : 
김덕령을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의 몸을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말이다. 진 목공(秦穆公)이 훌륭한 인재들을 순장한 것을 비난한 시에 “저 푸른 하늘이여, 우리의 훌륭한 이들을 죽이는구나. 만약 속죄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제 몸을 백 번이고 내놓으리라.[彼蒼者天, 殲我良人. 如可贖兮, 人百其身.]” 하였다. 《詩經 黃鳥》
[주-D021] 다행히 …… 펴졌도다 : 
《현종개수실록》 2년 8월 30일조에, 충용장(忠勇將) 김덕령을 신원하고 관작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고, 《현종개수실록》 9년 4월 13일조에, 좌랑 김덕령을 제조(諸曹)의 참의(參議)에 추증하였으며, 《숙종실록》 6년 윤8월 24일조에, 이민서가 경연관으로 입시하여 박광옥(朴光玉)과 김덕령의 포상을 건의하자 사액(賜額)하도록 명한 기사가 보인다.
[주-D022] 단 태위(段太尉)의 …… 징험하고 : 
단 태위는 당(唐)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수실(秀實), 자는 성공(成公),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주자(朱泚)가 모반하면서 당시 사농경(司農卿)으로 있던 단 태위의 인망이 높은 것을 생각하여 맞아 오게 하자, 단 태위가 거짓 협력하는 체하고서 하루는 일을 논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상홀(象笏)을 빼앗아 내리치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크게 꾸짖으니 주자의 이마에 유혈이 낭자하였다. 결국 주자에게 살해되었다. 《新唐書 卷153》 《舊唐書 卷128》
[주-D023] 수양(睢陽)의 쌍묘(雙廟)를 모방했도다 : 
당나라 현종(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다른 성들은 모두 함락되었으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수양을 굳게 지켜 2년을 버티었다. 성이 고립되고 원군이 이르지 않아 결국 식량이 떨어지고 사졸이 없어 성이 함락되어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전에 장순이 전투를 독려하면서 눈을 부릅떠서 눈자위가 찢어져 피가 흘렀고, 이를 악물어 이가 부서졌는데, 포로가 된 뒤에 안녹산의 당인 윤자기(尹子奇)가 장순의 입을 칼로 찢어서 보니 남아 있는 이가 서너 개뿐이었다. 장순이 죽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군부(君父)를 위해 의리로 죽지만 너희들은 역적에게 붙었으니 개돼지만 못하다. 어찌 오래 가겠느냐.” 하였다. 《舊唐書 卷187 忠義列傳下》
[주-D024] 대우전(大羽箭)과 …… 그려졌고 : 
대우전은 무관이 쓰는 화살이고 진현관(進賢冠)은 문관이 쓰는 관이다. 당 태종이 정관(貞觀) 17년(643)에 장손무기(長孫無忌)ㆍ두여회(杜如晦)ㆍ위징(魏徵)ㆍ방현령(房玄齡) 등 훈신(勳臣) 24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능연각에 걸어 놓게 하였는데, 문관과 무관의 차등을 두지 않았다.
[주-D025] 살벌한 …… 있었네 : 
공자(孔子)가 한가로이 거문고를 탈 때 살벌한 소리를 내자, 민자(閔子)가 밖에서 듣고 의아하여 질문하였다. 이에 공자는 고양이가 한창 쥐를 잡는 것을 보고 꼭 잡기를 바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심리가 반영되어 살벌한 소리를 냈다고 대답하였다. 《山堂肆考 卷162 取鼠》 한가로운 비파소리는 공자가 증점(曾點)에게 자기 뜻을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증점이 비파를 드문드문 타다가 대답하기 위해 비파를 덜커덩 땅에 놓은 것[鏗爾舍瑟]을 말한다. 증점은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論語 先進》
[주-D026] 거록의 …… 보니 : 
박광옥이 의병을 일으킨 당시를 상상해 본다는 말이다. 후한 영제(靈帝) 때 장각(張角)이 황노(黃老)의 학설을 받들어 한 왕실이 어지러운 틈을 타 난을 일으켰다. 그 무리들이 모두 누런 두건을 썼으므로 황건적이라 불렀는데, 거록(鉅鹿)에서 유비(劉備)ㆍ관우(關羽)ㆍ장비(張飛)가 도원결의(桃園結義)하고 의병을 일으켜 이들을 소탕하였다.
[주-D027] 세상 …… 알리오 : 
암울한 시대에 지조를 변치 않은 고인의 풍모를 후인들이 모른다는 말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ㆍ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줄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하였다. 《論語 子罕》
[주-D028] 흙 속의 …… 칼날이 : 
김덕령이 재능을 펴 보지도 못하고 원통하게 죽었음을 말한다. 원문의 ‘벽혈(碧血)’은 억울하게 죽은 충신의 푸른 피를 말한다.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 장홍(萇弘)이 참소를 당해 촉(蜀)으로 쫓겨나 자결했는데, 그 피가 3년 만에 푸르게 변했다고 하며, 일설에는 푸른 옥으로 변했다고도 한다. 《莊子 外物》 갑 속의 칼은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인재를 비유하는 말이다.
[주-D029] 청금(靑襟)과 만호영이 가득하니 : 
선비와 무인들이 향사하러 가득히 모였다는 말이다. 청금은 푸른 옷깃으로 선비들이 착용하는 옷이고, 만호영(曼胡纓)은 무늬가 없는 갓끈으로 무부들이 착용한다.
* 수정 2023.11.12. '나주 벽진촌'을 '광주 벽진촌'으로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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