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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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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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림동 고난의 길
    광주시 남구 제중로 77 호남신학대2011년불편하게 놓은 65개의 디딤돌은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아내와 자녀를 잃고 이곳에 묻힌 45명의 선교사들과 850여명의 호남지방 순교자들의 눈물, 아픔, 고통과 피 흘림을 느끼는 고난의 발걸음이다. 이 불편함이 우리의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디딤돌 하나하나마다 선교사와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2018-06-20 | NO.13
  • 어등산 한말호남의병 전적지
    광주시 광산구 어등대로 417 (서봉동)1997년 12월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나주·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으로 매우 편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3-4개 군의 경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관할구역이 애매한데다 주위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었기 때문에 일본군경의 추적을 따돌리고 주변지역의 관측에도 편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고 작은 전투가 어등산과 그 주변지역에서 주로 벌어졌다는 점에서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어등산은 의병장 김준·조경환·김원범 등을 포함한 한말의병이 최소한 50여 명이 전사한 격전지라 할 수 있다. 어등산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은 어등산이 한말호남의병의 숭고한 희생의 터전이었기에 이를 기리기 위하여 1997년 12월 한말호남의병기념사업 광산구추진위원회 주관으로 세웠다.
    2018-11-11 | NO.12
  • 역사가 살아 숨쉬는 다리
    광주시 북구 동림동 118-2옛 산동교 역사가 살아 숨쉬는 다리 비석이 있다. 6·25전쟁 당시 큰 전투가 없던 광주지역에도 산동교라는 전적지가 있어 지역주민들에게 6·25전쟁을 떠올리는 장소이다.산동교는 1950년 7월 23일 군경합동부대가 북한군의 광주점령을 막기 위해 첫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북한군의 남침직후 호남지역에 방어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지역으로 진출하였다.1950년 7월 23일 국군 제26연대 공병대가 새벽 4시에 북한군의 광주 진출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산동교를 폭파하였다. 국군은 임시로 군경합동부대를 편성하여 교량에서 광주 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산등성이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오전 11시 30분경 북한군 제6사단 병력 일부가 탱크 3대를 앞세우고 산동교에 이르렀을 때, 군경합동부대는 2.3인치 로켓포를 발사했으나 탱크는 꿈적도 안했다. 군경부대는 1시간 동안 저지하다가 그들의 화력에 밀려 후퇴함으로써 광주 방어는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실제 방어병력이 전혀 없는 전남지구편성관구 이응준 사령관과 제5사단 이형석 대령 등은 보성을 경유, 순천으로 후퇴했다. 전투과정에서 김홍희 총경이 전사했고, 장명규 경감은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2018-06-20 | NO.11
  • 옛 상무대 표지석
    광주시 서구 상무중앙로 22 부근1952년상무대 옛터 표지석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로 1952년에 세웠다가 지난 1999년 12월 옛 상무대 터 입구 주변에 최초로 이전했다.
    2018-06-26 | NO.10
  • 용마암기적비(용마바위)
    광주시 광산구 지평동 산 43-1(용강골마을)1989년어버이를 봉양하는 여가에 글공부와 말달리기, 활쏘기를 익힌 지 십여년만에 世祖 丁亥(세조 정해)를 당하여 吉州(길주)의 적 李施愛(이시애)가 七州(칠주)로써 반하여 흉악함이 헤아릴 수 없었다. 朝野(조야)가 진동하고 놀라는데 上(상)이 特選(특선)으로 驛馬(역마)를 보내 부르거늘 公(공)이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 뜻이 없은지 오래이지만 國家(국가)가 危急(위급)하여 存(존)하느냐 亡(망)하느냐 하는 때를 당하여 世祿(세록, 代代(대대)로 官祿(관록)을 먹는 집안)의 臣(신)으로서 어찌 앉아서 볼 수가 있으리요 하고 즉시 말을 재촉하여 征伐(정벌)에 따르기로 나서는데, 上(상)께서 便殿(편전)으로 불러들이어 御 (어온, 임금이 드시는 술)을 下賜(하사)하시고 命(명)하여 曺錫文(조석문)의 從官(종관)이 되게 하니 魚油沼(어유소) 李綜(이종) 등으로 더불어 마음을 合(합)하고 힘을 다하여 龍馬(용마)를 몰고 나아가 칼과 창을 휘둘러 施合(시합)을 묶고 말이 뛰는 대로 달려가 홀로 施愛(시애)를 베니 北賊(북적)이 모조리 平定(평정)되었다.凱旋(개선)을 하자 上(상)께서 크게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어주고 敵愾勳(적개훈)에 策錄(책록)하고 碑(비)를 세워 功(공)를 기록했으며 閣(각)을 세우고 形貌(형모)를 그리도록 하며 다음 해 四月에 通政(통정)으로 올려주고 七月에는 嘉善(가선)으로 進階(진계)하여 羅城君(나성군)을 封(봉)했으며 兵曹參判(병조참판)으로 任命(임명)을 했다. 九月에는 辭職(사직)을 하고 돌아와 어버이를 봉양했는데 말과 함께 돌아왔다.睿宗 己丑年(예종 기축년)에 內艱(내간, 母喪(모상))을 當(당)하여 막집에 居(거)하며 喪(상)를 지켰는데 갑자기 말이 슬피 울거늘 公(공)이 달래 보았으나 돌아보고 돌아보며 더더욱 슬프게 울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강가로 달려가 잡을 수도 없이 한 번 뛰더니 강물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다시 나오지 않고 말았다.公(공)이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너를 命(명)하여 나를 돕게 하여 危險(위험)한 속에서도 死生(사생)을 같이 했더니 이제는 그만이로다」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날마다 강가에 가서 그 情(정)과 功(공)을 생각하다가 마침내 큰 바위를 깎아 龍馬(용마)의 形體(형체)를 본떠 彫刻(조각)을 했는데 九分(구푼)이나 비슷하고 다만 소리만 없는지라 먼데서 바라보면 은연중 풀속에 엎드려 있는 듯 하기도 하고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였다. 公(공)도 享年(향년) 오십으로 작고하니 上께서 官(관)을 보내 致祭(치제)를 하고 吏曹判書(이조판서)를 贈(증)하고 諡號(시호)를 襄平(양평)이라 했으며 百世不(백세불조)를 명하고 光廟(광묘, 世祖廟(세조묘))의 庭(정)에 配食(배식)케 했다. 아! 公의 굳은 마음은 돌과 같았으나 危急(위급)함을 보고 나라를 바로 잡고 백성을 救(구) 했으며 急流(급류)에서 勇退(용퇴) 도하여 明哲(명철)한 君子(군자)가 되었다. 무릇 말이 찾아온 것이 어찌 우연함이리요.사람을 따라 나오고 없어지고 한 것이다. 公의 한창 나이에 강가에 나왔다가 公을 도와 적을 토벌하고 公의 公明(공명)이 이룩되자 다시 강속으로 들어갔으니 아마도 龍(용)이 馬形(마형)으로 변하였다가 다시 물로 들어가 龍(용)으로 化(화)하여 간 것이 아니겠는가? 公이 그가 始終(시종) 死生(사생)을 같이 했음을 생각하여 큰 바위에다 形體(형체)를 조각함으로써 龍馬巖(용마암)이란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이다.그 뒤 450여년에 倭人(왜인)들이 그 머리를 깨트렸다가 즉시 피를 吐(토)하고 느닷없이 죽어 버리니 곁에 있던 倭人(왜인)이 겁을 먹고 그 머리를 다시 때웠다고 한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말의 靈(영)이 그랬다고 하지만 어찌 말의 靈(영)만이 그랬으리요. 아마도 이는 公의 靈(영)이 항상 그 위를 배회하면서 不祥(불상)스러운 것을 금하여 靈驗(영험)을 보여줘 後人(후인)을 징계함이니 누가 半千年(반천년)이 지난 뒤에까지도 公(공)의 靈(영)과 말의 魂(혼)이 혁혁하게 없어지지 아니하여 아직도 이 바위를 禁(금)하고 지킬 줄을 알았으리요.이렇게 생각한다면 靈(영)은 반드시 無窮(무궁)토록 傳(전)하리라. 누가 감히 一便(일편)의 바위라 하여 경홀히 보겠는가. 대대로 지켜야 할 것이다. 그래야 羅城君(나성군)의 혁혁한 偉蹟(위적)이 世上(세상)과 함께 傳(전)해 가리니 이는 千古(천고)의 奇蹟(기적)이라. 아! 이제는 公의 모습과 말의 소리는 막연히 멀어졌지만 오직 龍馬巖(용마암)이 남아 있어 사람들이 가리키고 있다.襄平公(양평공)의 後孫(후손) 璟烈(경렬)이 그 先世(선세)의 遺蹟(유적)을 追慕(추모)하여 龍馬巖(용마암)의 아래에다 碑(비)를 세우면서 그 宗人 東烈(종인동렬)을 통하여 나에게 文(문)을 求(구)하니 내 그런 爲人(위인)이 못된다고 사양타 못해 諸賢(제현)들의 證據(증거)가 되는 글을 뽑아 모으고 銘(명)으로 써 붙이노니 하늘이 襄平公(양평공)를 냈음이여땅에서는 龍馬(용마)가 나왔도다.能(능)히 神力(신력)을 이용하여이름 떨치고 功(공)을 이룩했도다.功(공)이 이룩되자 말은 가버리니그를 생각하여 모습을 刻(각) 하였도다.우뚝한 龍馬(용마)의 모습이여千古(천고)에 靈(영)이 남아 있도다.辛酉年(신유년)가을 七月 立秋日(입추일)에 月城(월성) 李瑾雨(이근우) 지음1989년 3월 七松公(칠송공) 14대손 境烈(경열) 謹竪(근수, 삼가 세움)용마암(龍馬巖)은 송산교를 가는 도중 황룡강 강둑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우람한 바위이다. 복룡산 북방 산기슭에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다.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양평공 오자치 장군이 그 애마를 기념하기 위해 손수 자연석을 쪼개 만들었다는 이 바위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송정 일대에 야생마 한 마리가 나타나 민가에 피해를 주었다. 오자치는 이 말을 길들여 어등산·복룡산등을 달리며 무술을 닦았다. 하루는 중방마을에서 복룡산을 향해 활을 쏘아 놓고 그가 타고 있는 말이 화살보다 앞서 달리라고 명령했다. (화살보다 날쌔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산위에 올랐으나 화살이 보이지 않자 성미가 급한 오자치는 타고 있는 말의 목을 베어 죽였다. 이때 화살이 날아와 말의 허벅지에 박히는 것이었다. 오장군은 그제야 자신의 경솔을 뉘우치고 그 밑에 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마행을 새겨 애마의 억울한 넋을 달랬다고 한다.2018.12.01. 수정
    2018-11-11 | NO.9
  • 용연마을 충효비
    광주시 동구 용연동 278-1(용연마을)용연새마을청소년회에서 건립했다.
    2018-11-30 | NO.8
  • 위르겐 힌츠 페터 추모비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구망월묘역2016년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장면을 생생하게 촬영하여 신군부의 광주학살 만행을 전세계 알렸던 위르겐 힌츠 페터 독일 공영방송 기자가 지난 2016년 1월15일 독일 북부 라체부르크에서 79세로 작고한 후, 생전 유언에 따라 고인의 머리카락과 손톱이 그해 5월 16일 유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시 북구 운정동 옛 5.18묘지 입구에 안장돼 추모비가 세워졌다.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 1937년 7월 6일 ~ 2016년 1월 25일)는 독일의 기자이자 언론인이다. 독일 제1공영방송 기자로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을 영상에 담아 언론 통제로 인해 대한민국 내에서는 보도될 수 없었던 광주의 참상을 외국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자신이 촬영한 필름을 큰 금속캔 속에 포장해 과자더미 속에 숨겨서 일본으로 반출한 뒤 독일 함부르크의 뉴스센터에 전달하여 이 영상은 독일에서 수차례 방송되었다. 외국의 다른 언론들도 이 영상을 받아 보도함으로써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일명 '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린다
    2018-12-16 | NO.7
  • 유인밀양박씨효열비
    광산구 본량에 있는 유인 밀양박씨의 효열비이다. 최근에 비신을 교체하였다. 경위도좌표: N 35˚11´19.3″, E 126°40′08.3″  
    2020-05-11 | NO.6
  • 율리전사비
    광주시 광산구 안청동 안청마을1945년栗里田舍碑는 광산 김문옥 짓다.
    2018-12-02 | NO.5
  • 임정마을 벅수
    광주시 남구 임암길 183 인근임정마을벅수임정마을에는 벅수 2기가 있는데, 마을앞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임정마을 앞에는 행림마을과 포충사 사이로 국도1호선이 관통하고 있고 이 길을 통해 대촌동 주민들도 시내 출입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광주시내와 대촌동간의 길은 주로 벅수가 서있는 이 마을의 뒷길을 주로 이용했고, 이 때문에 임정마을은 속칭 ‘들머리’라는 별칭으로도 불려왔다.대촌 쪽에서 보면 좌측에 할멈벅수, 우측에 영감벅수가 서있다. 영감벅수가 서있는 곳은 마을쪽으로 남쪽에 해당된다. 벅수의 크기는 높이 300cm로 전면에 ‘天下大將軍’이란 글귀가 양각되어 있고 소나무의 뿌리를 이용하여 머리를 장식한 봉두난발형이다. 할멈벅수는 가죽나무 기둥 속을 이용하여 제작했는데 크기는 295.5cm로 전면에 ‘地下女將軍’이라고 양각되어 있으며, 벅수의 머리부분은 이 벅수의 여성성을 상징하기 위해 민머리형으로 되어 있다.이 벅수들은 1990년대 중반에 만들어 세웠던 것이 부식되자 2001년 3월 3일 추진위원회(번영회)가 주관하여 다시 제작하여 세웠다. 제작자는 이 마을 사람들로전정명(남, 65세, 번영회장), 김용연(남, 64세), 이재수(남, 54세), 전권섭(남, 43세) 씨 등이다.할멈벅수 앞에는 설명판을 설치해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고 있는데, 벅수를 세우게 된 동기를 풍수지리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마을의 지형은 오공복지(蜈蚣伏地), 즉 지네가 수풀 속에 엎드리고 있는 형국이다. 지네의 상극은 닭이고 닭이 비치면 마을에 큰 재앙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닭의 방향(酉方)인 서쪽에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고 장승을 세워 기를 다스림으로써 마을의 살과액을 막고자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장승이 서 있는 서쪽에는 방풍림(防風林)을 겸한 비보림(裨補林)으로 소나무와 팽나무 수십 그루가 서있다.1990년대 초에 세워진 장승의 영감벅수는 불에 탄 흔적이 있으며, 눈의 한 부분과 이마가 결실되었다. 턱과 코 부위는 수염을 조각하고, 입은 이빨이 서로 엇물리게 조각하여 야무진 인상을 주도록 표현하였으나 눈은 비례를 알맞게 치켜 올려 무서움이 덜하게 되어 있다. 맞은편의 목장승도 동일인의 작품으로 보이며 재료에 비해 코를 유난히 크게 조각하였으며 이빨도 서로 엇물리게 표현하였다. 조사 당시만 해도 이 마을에서는 매년 장승제를 지냈으며, 이 곳 장승의 기능 역시 이정표, 마을간의 경계 표시 이외에 마을의 재액을 막아주는 수호의 기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임정마을의 벅수제는 매년 모시는데 마을민의 질병방지와 농사의 풍년 등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원래는 현재 임정슈퍼마켓 옆에 당산나무 2그루(귀목나무, 버드나무)가 있어서 당산제를 지내고 벅수제도 함께 지냈으나 당산나무가 고사한 이후로 당산제는 지내지 않고, 지네명당의 거센 기운을 누르기 위해 벅수제만을 독립적으로 지내고 있다. 벅수제도 1970년대초에 젊은 사람들이 ‘미신타파’라는 명목으로 땅에 묻어버려 몇 해 못 모시다가 마을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1987년 벅수를 다시 세우면서 부활되었다. 당산제를 지내던 과거에는 정월 보름날 저녁에 지내다가, 1987년 이후 음력 2월 1일 지냈다. 1993년에는 정월 15일 낮에 모셨는데 최근에는 다시 음력 2월 1일 낮 11~12시에 지내고 있다.정월 초순에 제관, 축관, 화주 등 제관을 선정하고, 돈이나 쌀로 호구전을 걷어 경비를 마련한다. 근래에는 마을사람들이 벅수에 걸려 있는 금줄에 돈을 끼워 놓고 각자의 소원을 비는데 이 희사금으로 제비를 충당한다. 제물은 두 벌을 준비하는데 돼지머리, 떡(백설기), 북어, 삼실과, 삼채, 막걸리, 탕, 초와 향 등이다.제의 시간이 가까워지면 벅수 주변과 마을 앞길에서 굿을 쳐서 제의 시작을 알리는데, 이 무렵 화주댁에서 제물을 가지고 나와 진설한다. 제는 영감벅수에서 먼저하고 할멈벅수로 제상을 옮겨서 모시는데 약 30분 정도 진행된다. 제관의 복장은 평상복을 깨끗이 세탁하여 입는다. 제의 절차는 유교식으로 설상 -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일동재배 - 소지- 헌식의 순서이다. 이 마을에서 특이한 것은 여성이 종헌관으로서 제의에 참여하며 잔을 올리고 소지를 담당한다는 것이다. 또한 제를 모실 때 벅수에 감아놓은 금줄에 마을사람들이 돈을 끼워 희사하는데, 이 돈을 ‘복돈’이라고 한다. 헌식은 제물을 약간씩 덜어 짚을 놓고 벅수 부근에 놓아두고 명태는 벅수의 금줄에 묶어 놓는다. 옛날에는 제를 지낼 때 마을 앞을 지나지 못했으며 혹 지날 때는 통행세를 내야만 했다고 한다. 제가 끝나면 술과 음식을 동네사람들이 나누어 먹고 놀며 공동샘에 가서 굿을 친다. 옛날에는 샘굿에 이어 마당밟이를 하고 공동샘을 기준으로 우데미와 아랫데미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였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2018-06-14 | NO.4
  • 전남대 설립과 광주전남향교
    광주시 북구 용봉동 전남대학교 옛 본관 앞2016년
    2018-11-30 | NO.3
  • 제하상(새우젓장수) 모자비
    서구 금호운천길 31 (금호동)제하상모자비祭鰕商母子碑는 병천사 앞에 있다. 병천사秉天祠 삼문 앞 앞뜰에는 붕남 지응현의 공덕을 기리는 공덕비, 기적비 등 14기가 있다. 이 가운데 유심히 눈여겨보면 재미있는 비석이 하나 있다. 앞뜰 남쪽 맨 끝에 새우젓장사 모자를 기리는 제하상모자비이다. 장방형의 좌대 가운데 홈을 만들어 일반 호패형의 비몸을 세웠다. 크기는 높이 140cm, 너비 46cm, 두께 27cm이다. 앞면에 1행으로 ‘祭鰕商母子碑’라 내려쓰기로 새겼고, 3면에 글이 있다. 뒷면은 내력이며 향좌면은 연대(기미, 1919), 비문 지은이는 정봉현鄭鳳鉉, 글씨 쓴 사람은 김교진金敎珍, 비를 세운 유사는 이순범李純範, 향우면은 담양 대전면 중옥리의 전답 면적이다. 지응현의 문집인 『붕남실기鵬南實記』 부록에 실려 있다.祭鰕商母子碑鰕商母子 俱不知姓名 其母子留 鰕八斗米五升綿(*棉, 이하 *는 <鵬南實記)五斤(*升)于池叅奉應鉉宅 出外久不還 叅奉悲其(*其必)死 賣此物買田托玉山里中 以出行日庚子十月十五日 使之歲祭 叅奉之(*之 표기 없음)德義大矣 其母子孤魂悲矣 凡此里中雖歲遠毋或廢祭 己未十月(*戊午四月) 日 河東(*雲籃)鳳鉉誌(*이하 표기 없음) 慶州金敎珍書 有事人 咸平李純範潭陽郡 大田面 中玉里 裳字畓 一斗五升 八五畓 四百四十一坪백하장수 모자 제사비(비문 국역문)백하장수 모자는 모두 성명을 알 수 없는데, 그 모자가 새우 8말, 쌀 5되, 면화 5근을 갖고 참봉 지응현댁에 머물렀다. 밖으로 나간지 오래 되었지만 돌아오지 않아 지참봉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를 팔아서 논을 사서 옥산리 마을에 의탁하였다. (그 모자가) 나간 날이 경자년(1900년) 10월 15일이어서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니 지참봉의 덕의가 이처럼 큰데 그들 모자의 외로운 혼을 슬퍼하여 마을에서 해가 오래되어도 혹시라도 거르지 말고 제를 지내도록 했다. 기미(1919년) 시월 일 하동 정봉현 짓다. 경주 김교진 쓰다. 유사인 함평 이순범담양군 대전면 중옥리 상자답 1마지기 5되지기 85답 441평 새우젓 장사와 지응현, 담양 중옥리 전답에 얽힌 사연은 비석의 국역문과 당시 사연을 소개한 1918년 6월 26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와 황성신문皇城新聞 1910년 4월 24일자에도 관련 기사가 실렸다.
    2018-05-25 | NO.2
  • 충주박씨찬성공휘지흥 제각복원사적비
    서구 사동길 118(서창동)충주박씨찬성공휘지흥제각복원사적비忠州朴氏贊成公諱智興祭閣復元史蹟碑는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 안쪽의 추원재 바로 앞에 있다. 1989년에 세웠다. 눌재 박상의 봉산재를 지나 50여미터만 더 가면 있다. 회암懷庵 박지흥朴智興(1411~1488)의 재실은 오랜 세월이 흘러 훼손되어 다시 개축하려 했으나 여건이 맞지 않아 묘소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이전했다고 비문에 적고 있다.
    2018-05-25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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