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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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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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전들노래 기념비
    광주 북구 용전동 용전마을 입구2000년용전 들노래는 이 고장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의 하나로 1999년 제40호 한국민속 예술 축제에서 종합우수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바 있다. 우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여기에 그 기념비를 건립하나니 원컨대 이와 더불어 고향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그리움이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불로 타오를 지어라.후면전승 김귀천(金貴千)고증 지춘상(池春相)지도 김동언(金東彦)범대순(范大錞) 글 짓고, 청원(靑原) 오세영(吳世永) 글씨 씀.
    2018-11-15 | NO.16
  • 우리의 교육지표
    광주시 북구 전남대학교 인문대1호관 앞2007년1978년 6월 27일, 전남대 교수 11인이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그들은 민주주의에 뿌리 내리지 못한 교육 현실과 그 실패의 집약적 본보기가 ‘헌장’이라고 지적했다. ‘지표’는 “민주주의 교육이 선행되지 않은 애국애족 교육은 진정한 안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4개항 실천 지침을 적었다. 인간화되고 민주화된 교육, 교육자 자신의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정열, 교육 외부 간섭 배제, 3ㆍ1정신 4ㆍ19정신 계승 전파와 민족역량 함양 교육이었다. 송기숙 명노근 등 서명자 전원은 중앙정보부로 연행됐고, 29일 광주지역 대학생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다. 교수들은 모두 해직됐고, 송기숙과 서명에 가담하지 않은 당시 해직교수 성내운(전 연세대)은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시위 학생 30여 명도 구속되고 제적ㆍ정학을 당했다. 이로부터 35년이 지난 2015년 4월 29일 박정희 정권 당시 대표적인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인 전남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판장인 신현범 광주지법 부장판사는 피고인들에 대한 무죄 선고와 함께 법원의 과거 잘못된 재판을 반성했다.
    2018-11-30 | NO.15
  • 의혼비
    광주시 광산구 신촌동 산4-11951년의혼비는  송정공원 내에 있다. 1951년 10월에 광산군민의 이름으로 세운 비이다.
    2018-10-22 | NO.14
  • 전남대 상징탑(용봉탑)
    광주시 북구 용봉로 77 (전남대 역사관 앞)1978년우리 민족의 의식 깊숙한 곳에 가장 신성시되는 두 상상의 동물이 있으니, 바로 용(龍)과 봉(鳳)이라. 그런데 전남대학교에는 이 두 상상 속의 동물, 신조(神鳥)로 추앙받는 이 두 존재가 한 자리에 있다. 이보다 더 신성한 공간이 있으랴. 전남대학교 캠퍼스는 용봉골로 불린다. 대학이 들어선 곳이 용봉부락이었으니 자연히 ‘용과 봉’을 딴 대학의 별칭이 생겼고, 두 동물을 숭상하는 조형물을 세우게 된 일은 당연했다. 전남대가 자리 잡은 이곳은 애초 ‘용주’, ‘반룡’ 등 ‘龍’자가 들어간 마을이 있었고, ‘봉곡’이라는 ‘鳳’ 자를 쓰는 마을이 있었다.일제 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이 마을 이름들의 ‘용’과 ‘봉’을 따서 용봉리가 되었다. 반룡마을은 지금의 경영대와 경영대 뒤를 중심으로 한 큰 언덕에 형성된 마을이고, 용주마을은 지금의 당산나무 주변 일대였는데 두 곳이 모두 용의 기운을 가득 안은 명당이었다 한다.용봉탑은 1978년 6월 8일 완공, 제막됐다. 개교 26주년을 맞아 학교와 학생들의 발전과 웅비를 비는 뜻에서 만들어진 조형탑이다. 높이 13.66M, 폭은 4.45M, 교시인 진리․창조․봉사를 의미하는 화강암 3좌대 위에 세 마리의 용이 몸을 틀어 여의주를 물고 위로 오르고 여의주 위엔 힘차게 날아오르는 봉이 자리하고 있다. 얼핏 미신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대학이 위치한 지명과 연계해 대학과 학생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용봉탑은 그 조형미 자체만으로도 빼어나지만, 사시사철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연출하는 자태도 아름답다. 특히 50여 년간 대학의 심장이었던 구 본부 빨간 벽돌 건물과 용봉탑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폭의 그림이면서 전남대학교를 상징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2018-11-15 | NO.13
  • 정지장군유적정화기념비
    광주시 북구 경렬사길 46(망월동) 경열사1981년경열사 경내에는 이병도(李丙燾)가 짓고 안규동이 쓴 ‘정지장군유적정화기념비’(1981년 7월 1일 건립)가 있다.
    2018-06-11 | NO.12
  • 조선대민주화운동기념탑(2010)
    동구 필문대로 309, 조선대학교옛 경영진의 설립역사 조작과 권위주의적 경영에 맞서 조선대학교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타오르는 불꽃과 범 조선인의 단결된 손으로 상징화 하였으며 오늘의 대학 발전을 이룩한 대학. 동문. 시민사회의 단합된 힘을 세 개의 탑신으로 형상화 하였다.
    2018-06-26 | NO.11
  • 조선대설립동지회기념탑(1994)
    동구 필문대로 309, 조선대학교이 기념탑은 지역인재 양성을 위해 조선대설립동지회 박철웅 선생을 중심으로 재단 설립과 기금운동을 전개하여 조선대의 정신적 지주이며 상징으로 10여만 설립동지 회원들의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학원의 도덕성 회복을 위해 설립됐다.
    2018-06-26 | NO.10
  • 주남마을 위령비
    광주시 동구 월남동 1842010년공수부대가 주남마을에 진을 친지 사흘째 되던 1980년 5월 23일, 11공수부대는 지나가던 버스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이 발포로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15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했다. 마을 주민들과 광주YMCA 그리고 5·18기념재단이 위령비를 세웠다.
    2018-06-26 | NO.9
  • 포충사정화기념비
    광주시 남구 포충로 767(원산동)포충사정화기념비는 포충사 경내에 있다. 포충사는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싸움에서 충절한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3부자와 유팽로, 안영을 모신 곳이다. 기념비는 1978년부터 3개년 간에 걸쳐 호남의 대표적 호국선열 유적지로 포충사의 신 사당을 짓는 등 정화사업을 벌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2018-10-21 | NO.8
  • 풍천대
    광주시 광산구 안청동 안청공원 1920년이 풍천대(風泉臺)는 석음(石陰) 박노술(朴魯述, 1851~ 1917) 선생의 항일의적(抗日義蹟)을 기념하는 삼층석대(三層石臺)이다.석음 선생은 광산구 안청동(安淸洞)에서 태어나 노사(蘆沙) 기정진 선생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은 선비이다.1895년 을미사변때 송사(松沙)선생의 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당시에 많은 감동과 호응을 일으켰던 선생의 격서(檄書)가 존화록(尊華錄)과 석음유고 등에 전해온다.서기 1905년의 강압적인 을사늑약에 이어 서기1910년 경술년에 우리의 주권을 송두리째 빼앗은 합병조약을 강요하는 등 천인공로할 일제의 침략만행에 치를 떨었으며 거듭되는 조국의 비운을 비룡대(飛龍臺)에 올라 통곡하셨다. 참을 길 없는 울분과 비통함을 스스로 달래며 문인들 동지들과의 강론을 통하여 항일구국정신의 선양에 힘을 다했으며 일제(日帝)가 보내온 소위 은사금칙첩(恩賜金勅帖)을 단호하게 물리쳐버린 선생의 쾌거는 저들의 악랄하고도 끈질긴 침략의 마수 앞에 차츰 지쳐만가는 이 지역 대중들의 항일의식 속에 일대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에 대한 일본관헌의 탄압은 서기 1910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 비아병참소(飛鴉兵站所) 장성헌병대 광주경찰서 등에 누차 구인(拘引)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선생의 의지는 누구도 꺽지 못했다."天崩地陷 心不可變 國破身亡 義不可失""천지가 다 무너져도 나의 본심은 변할수 없으며 나라가 부서지고 이 한 목숨 죽는다 해도 조국에 대한 나의 의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장성헌병대에서 저들 앞에 써 던진 시구로서 그 즈음에 널리 전송되었던 것이다. 1917년 6월 광주경찰서에 구인 되어간 선생은 그 사흘만에 의식이 끊어진 몸으로 가마에 실려서 돌아와 그 길로 운명하였다. 망국의 한을 품은 채 6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안청동 율리전사(栗里田舍)에서 운명하기 한달 전에 아들 일규(日圭)에게 "마을앞산 비룡대 위에 조선 삼천리를 뜻하는 삼층석탑을 세우고 싶다는" 분부가 있었다.목숨과도 바꿀수 없는 내 조국 삼천리강토가 왜적에게 짓밟혀 일조에 생지옥이 되고 말았으나 오직 나라를 구하고 주권을 되찾을 우리의 애국정신만은 저 바윗돌처럼 굳세고 단단하고 변함이 없이 지켜나가야 한다는 깊고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그 후 선생의 유지에 따라 문인 여러분과 아들 일규 및 친지들이 정성을 모아 서기 1920년 10월 풍천대(風泉臺)가 준공되었다.이 비를 세울 당시의 도유사는 고광선, 부유사는 오준선, 이희용, 도감동은 이계종, 부감동은 문인환, 이중권이며 장재는 정해붕이 맡았다.풍천대에 써진 글귀는 '조선유민 박노술(朝鮮遺民 朴魯述)'과 '구명 비룡대 비룡재천 이견대인(舊名 飛龍臺 飛龍在天 利見大人)'이 라고 적혀 있다. 풍천은 시경(詩經)의 비풍(匪風)  하천(下泉) 의 고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자는 뜻이다. 조선유민 박노술은 조국 삼천리를 상징하는 삼층석대 위에 "나 박노술은 영원한 조선인으로 살아있음을 새긴다는 의미이다.구명 비룡대 비룡재천 이견대인이란 이 터의 옛 이름이 비룡대이니 역경(易經)에 용이 때를 만나서 하늘에 높이 나니 대인을 보게 된다 했으니 우리에게도 머지 않아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광복된 조국에 태평성대를 이루라는 대염원을 새긴 것이다.※ 추기: 풍천대는 원래 안청동 앞산 비룡대에 있었는데 1992년 4월 하남공단 건설로 공단 내 공원에 이전 중건(重建)하였다.
    2018-06-25 | NO.7
  • 한국전쟁 어린이 추모
    광주시 남구 양림동 210 충현원  '비운의 왕좌'라는 제목으로 세워진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500,000명의 어린이들을 추모함'이라는 글귀가 있다.추모비, 추모탑, 또는 기념물일 수도 있어 분류하기 곤란하다.
    2018-06-25 | NO.6
  • 현충탑
     광주시 광산구 신촌동 산 99-1 송정공원 1977년 6월 6일현충탑은 광산구 출신으로 나라와 겨레를 위해 헌신한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됐다. 높이 11.5미터, 둘레 6미터이며 2개의 탑신으로 구성되었다.현충탑 옆 탑비명에는 "사랑하는 내 조국을 구하려고 져버린 넋들 그리운 고향 동산에 모두 모였네. 내가 겨레의 내일을 보살리기 위하여 여기 광산군민의 정성을 모아 현충탑을 세운다."고 했다.송정공원 내의 위패봉산소가 협소하여 광산구 보훈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2007년 9월 18일 송정공원내 봉안된 위패 542위를 광주공원 내 현충탑이 있는 봉안소로 이전하여 봉안하였다.
    2018-10-22 | NO.5
  • 호가정- 류사 선생 사적비
    광산구 동곡분토길 195 (본덕동)
    2021-04-12 | NO.4
  • 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광주시 남구 양림동 108-102002년사직공원에 있다. 2002년 11월 5일에 세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지난 1950년 6.25전쟁 때 조국을 지켰으며 이역만리 월남전에서 세계의 십자군으로 국위를 선양한 무공수훈자들의 충절은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전쟁으로 점철된 20세기를 보내고 자유 평화와 민주의 시대인 새천년을 맞이하여 오늘 이 자리에 전공비를 세우는 것은 우리 광주지역 무공수훈자들의 공훈을 영원히 보전함으로써 우리의 후손들에게 나라사랑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함이다.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광주광역시지부뒷면에는 국내무공수훈자, 국외무공수훈자, 보국수훈자들이 명단이 새겨져 있다.
    2018-06-21 | NO.3
  • 호남순국열사지비(湖南殉國烈士之碑)
    광주시 남구 포충로 767 포충사 內(원산동 947-4)호남순국열사지비(湖南殉國烈士之碑)앞면에는 호남순국열사지비(湖南殉國烈士之碑)라고 쓰여 있으며  뒷면에는 호남일대에서 한말 구국 의병 활동을 펼쳤던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1851∼1908),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행사(杏史) 양회일(梁會一1856~1908), 일광(一狂) 정시해(鄭時海 1872∼1906) 지강(芝江) 양한묵(梁漢默 1862~1919) 선생 등  살신성인한 의병장 2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이 비석은 구 한말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분들의 것이다. 특히 이  비석은 항일의병들의 치적을 살피던 도중 전쟁이 터지자 급히 그 정신을 새기고  훗날을 기약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이처럼 포충사는 고경명 한분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 나라를 위해 자신을 버린 분들을 만나는 곳이라 할 만하다.
    2018-06-11 | NO.2
  •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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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버광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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