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58
게시물 검색 폼
  • 전 주사김공태선덕혜불망비
    광주시 북구 망월동 산 175(경렬사 입구)1927년이 전주사김공태선덕혜불망비(前主事金公泰先德惠不忘碑)가 몽리인 일동이 건립했다.
    2018-11-13 | NO.53
  • 전교서해송공옥기적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5 (광주향교 뒤)2010년
    2018-11-30 | NO.52
  • 전라남도지사전공석홍거사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아래1987년전남도지사 전석홍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1987년에 성균관부관장 광주향교전교 하동 정해규가 글을 썼고 죽산 안병식이 글씨를 썼다. 광주공원 비석군 입구 왼편에 별도로 있다.
    2018-10-19 | NO.51
  • 전부일장군송덕비
    광주시 남구 임암동 임정마을복지회관 옆2000년전부일(1924~2004)은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여 박정희 4공화국 때 초대 병무청장을 지냈다. 이후 10976~1980년 유신정우회 9,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18-06-26 | NO.50
  • 전읍장묵암장안섭기적비
    광주시 서구 세하동 동하마을 만귀정 입구 도로변이 전읍장묵암장안섭기적비前邑長默菴長安燮紀跡碑는 송정읍장으로 있으면서 지역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록해 1954년(단기 4287년)에 세웠다.대표적인 일화는 단돈 당시 70원으로 광산구 청사 부지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옛 광산구 청사는 일제 강점기 때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곡물보관창고였다. 1935년 10월 광산군이 광주시에서 분리되었지만 군 청사를 마련하지 못해 당시 광산군청사는 광주시 동구 대의동(옛 국세청 자리)으로부터 14년간을 옮겨오지 못했다. 이래서 생활상의 불편에 시달린 민원은 들끓고 군민의 불같은 여망에 따라 군청사 이전추진회가 결성되었다.  위원회 간부들이 동분서주한 결과 건축비는 겨우 보조를 통해 마련했지만 부지는 자체에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해방 직후 혼란기에 1,000여평이 넘는 토지의 구입자금 마련의 길은 짙은 안개속처럼 막연하기만 했다. 그래서 눈독을 들인 것이 지금의 자리였다. 그때 동양척식회사는 신한공사로 개칭되어 엄존하고 있었다. 당시 추진위원장으로 있던 정순조(제2대 국회의원)와 당시 송정읍장인 장안섭은 신한공사 전남책임자인 김흥우를 찾았다. 그 세사람은 서로 호형호제하는 절친한 사이였다. 김흥우는 일제강점기 때도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그 계통에서 현직을 지낸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로서 성품도 호탕한 쾌걸이었다. 교섭은 단 한번의 만남으로 해결됐다. 김흥우가 말하길 "국민을 위하는 좋은 일에 민족착취기관의 재산을 내놓는데 무슨 주저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래서 목조창고 수동(내부만을 개조, 오랫동안 군청사로 사용함)을 포함한 '金싸라기'같은 땅 천여평이 광산군 재산으로 거저 얻어진 것이다. 그 사례는 청주 한병(그때 시가 70원), 그것을 들고간 두 사람을 맞아 김흥우가 대접한 '안주값'은 그집에서 내놓은 청주 세병값을 합해 1,800원이었다고 한다. 2019.1.6. 수정
    2018-11-20 | NO.49
  • 전의관박태용시혜불망비, 의관국재박공유적비
    광주시 남구 노대동 5271965년, 1978년광주시 남구 노대동 801965년, 1978년박태용 시혜불망비오 유적비는 노대마을 입구에 있다. 노대동 휴먼시아아파트7단지에서 화순방향으로 가는 길목의 노대마을 입구 상가(식당) 끝 석축 위에 세워져 있다. 원래의 비는 '前議官朴台鏞施惠不忘碑'이며  임술년(1922) 10월에 유사 최성좌 김윤홍 서우섭의 이름으로 세워졌다. 시혜불망비 앞면에 적힌 글귀는 秋熟監O 惟精惟O 咸曰嗟哉 是父是子 非今伊始 自公先人 玆庸代石 勒功祀事이다.이 비는 마모가 심하여 다시 건립된 비는 '議官菊齋朴公遺蹟碑'로 을사년(1965) 봄에 파평 윤기중의 찬과 무오년(1978) 봄에 여산 송하영의 글씨로 밀양박씨 문중에서 세웠다.유적비에 새겨진은 명문은 다음과 같다.宗己巳十二月八日生公于光州孝德洞公性至孝以孝廉薦除宜陵參奉妣利川徐氏有婦德以高諱璣彦俱贈秩考諱貞寶號松湖師事蘆沙奇先生洛鄕子孫遂爲湖南人高祖諱裁明曾祖諱泰成祖元於公十一代祖也三傳諱承軍穹至兵郞歛跡出於密城君諱彦忱李朝文景公馬谷林先生諱忠公諱永日名台鏞字聖彬菊齊其號也密陽之朴氏自幼有懷獻之異稱長益勤子職晨昏定省扶持抑搔如小學之儀及所內外艱衰毁骨立朔竪必拜豈不以祈寒著雨廢服關亦如之公人歲隨塾師登山見衆草求之咸育乃乎句曰士德至厚不獻惡草生師奇之曰此兒必以德名世也且有文才不喜著述曰人無操行而徒尙文飾反不學之爲愈也嘗於亂徒劫掠四隣猝入公家問其姓名相戒羅拜曰早知先生之宅何敢至此衆皆謝之公亦善諭而資厚之家勢饒富常以勤儉守成田地之借人耕者遍在四方秋期權租必縮量每當佳節以栗米施與貧乏者或有貸者欣然應之及其還償不受邊利或有不値者亦不介意嘗涉獵醫書人有告病者輒藥而救之賓明滿座雖累月留連者侍之如初或有老病無歸者衣食之藥餌之俾得安過其愛人接物類多如此鄕黨之人論資善家必推公爲首頌德立石相望閭里 高宗癸巳以德行薦溫陵參奉丁酉陞資中樞院議官乙酉洪萬植諸公殉節設位哭之及屋社不關世事飮酒自放遂命諸子就學於當世碩德曰勿梁倭賊洋夷之敎只作吾儒之讀書鬼而己尤可見公之志操也 以辛巳閏六月十四日歿享年七十三訃音所至親戚知舊齎咨執紼者數百人墓光州孝德洞老大村井上嶝卯坐配大邱裵氏己巳生庚子六月十一日卒墓和順細良里深洞巽坐有二女適金海金甲錫全州李源植繼配光山金氏戊子生五衛將士行女有淑德克宜家人辛巳閏六月二十六日卒墓光州老大新基後麓巳坐擧二男三女長曰東煥次曰東柱女適咸安尹錫表光山金鍾斌耽津崔奇泳孫曰魯甲魯乙魯春魯雄長房出曰魯祥魯吉魯豊魯忠次房出曾玄不錄曰金君亨在以貞齋尹泳琪所撰行狀來曰吾與公之二胤東柱遊者四十餘載情均骨肉而詳公之德行也願惠以大筆揄揚余於金君交之有舊而吾黨中慷慨士也且尹公在魯勝之誼其風流志尙尤可槪巳則其言俱可徵辭之不獲銘曰道君子爲善告人薦聞于朝望重於隣某山某水尙孝故里維桑維梓積德遺址卓彼懿蹟俾也可忘有石斯語百世流芳光復後二十一年 乙巳墓春 忠南魯城 坡平 尹器重 撰                         戊午仲春 全北金堤  礪山 宋河英 書
    2018-06-10 | NO.48
  • 전참봉정락교시혜비
    광주시 서구 화정로309번길 45(농성동)극락, 서창, 송정, 동곡, 하남, 비아 면 등 6개 면의 소작인 일동이 1937년 2월 세운 ‘전참봉정공낙교시혜비’가 서있다. 비문에는 “배를 두드리며 격양가를 부르는 그 풍족한 재벌 마음에 들었네. 빈민구호의 방법을 찾아 공정한 처리로 가감하였네. 원근에 은혜를 베풀어 칭송이 서로 다름이 없었다. 한 조각 좋은 빗돌을 세우니 우리나라에 길이 빛나리”라고 적혀 있다. 전 참봉 정락교鄭洛敎 시혜비施惠碑는 서구 농성동 농성공원에 있다. 정락교(1863~1938)는 양림동의 큰 부자로 알려져 있는데 사직공원 올라가는 길목 양림동 파출소 뒤 동산에 1932년 양파정을 중건했다. 정락교는 세상을 떠난 광주의 이름난 부호이다. 본관은 온양이며 호는 양파(楊波)이다. 광주 남구 양림동 출신이다. 광주 일원에 많은 농토가 있어 이를 관리하기 위한 ㈜양파농장을 경영하였으며 시문과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광주에서는 구전으로 당시 사동의 최명구(崔命龜)가 1만석꾼 부자고 호남동 현준호가 7천석, 정낙교가 6천석 부자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을 만큼 광주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1914년 양림동 언덕에 광주천을 굽어보는 곳에 양파정을 지었는데 1932년 중건한 뒤 광주에 기증했다. 양파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이며, 바닥은 나무마루가 아닌 시멘트가 깔려 있다. 그는 이 정자에서 매년 전국 한시대회를 열어 양파정 시단을 형성하였다. 그가 정자를 짓고 쓴 기문에는 ‘초목과 다름없는 나이가 어언 오십 일세의 노년기를 맞이하게 되어 자기 스스로 깊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만일 이처럼 특별한 결심이 없이 하루하루의 세월을 보낸다면 외로운 이 몸이 세상의 세고에 골몰하는 하나의 늙은이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이는 다름 아닌 혼란한 모든 세상사를 깨끗이 잊고 이 몸을 이곳에 길들여 나의 노년을 마치려는 나름대로의 깊은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평생의 숙원을 이룩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이 시간부터 나의 뜻에 따라 꽃을 가꾸고 나무를 심으며 물가에 낚시하고 산천을 돌아다니며 자유로운 취미를 만끽할 수 있고 또 여러 벗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으며 각자의 뜻에 따라 각자의 즐거움을 느끼는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였다’고 적고 있다. 양파정은 지역문인들의 사랑방이었을 뿐 아니라 소년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광주 소년들이 모여 일으킨 한국소년운동 출발지가 양파정이다. 서구 농성동 농성광장에는 광산군 극락, 서창, 송정, 동곡, 하남, 비아 면 등 6개 면의 소작인 일동이 1937년 2월 세운 ‘전참봉정공낙교시혜비’가 서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惠及避邇 頌無異同 혜급피이 송무이동 원근각지에 은혜가 미치어 누구나 칭송하는 일이 다름없어賑恤有方 加減執中 진휼유방 가감집중 흉년에 가난한 백성을 도와주니 공정하게 베풀도다.擊壤鼓腹 宜其素封 격양고복 의기소봉 격양가 부르며 배부른 것은 재물을 베푼 군자의 덕이니一片樂石 光于海東 일편락석 광우해동 한 조각 좋은 빗돌을 세워 우리나라에 길이 빛나리라.[수정]2019.4.23.
    2018-05-25 | NO.47
  • 정명월김부인계붕남거사지공응현부인공덕불망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846(원효사 명부전 옆)1934년이 정명월김부인계붕남거사지공응현부인공덕불망비(淨明月金夫人桂鵬南居士池公應鉉夫人功德不忘碑)는 崔達錫  짓다.
    2018-11-13 | NO.46
  • 정방기-백우 하남 정공방기 송덕비
    광주시 서구 원마륵2길 11(마륵동)백우하남정공방기송덕비白友河南程公邦基頌德碑는 마륵동 원마륵마을 입구의 마륵동노인회관 건너편에 있다. 정방기程邦基는 서구 마륵동 출생으로 가난한 이웃을 위해 베풀고 돌보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1981년 마륵동 주민들이 이를 칭송하기 위해 세웠다. 글은 조카인 정학구程學求가 지었다. 2017년 10월 대형 빌딩을 신축 공사 중이어서 따로 보관되어 있지만 공사가 끝나면 새로운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2018-05-25 | NO.45
  • 정부인하동정씨선덕비
    광주시 동구 운림동 6591940년이 정부인하동정씨선덕비(貞夫人河東鄭氏善德碑)는 서산정씨정려각瑞山鄭氏旌閭閣 내에 위치해 있으며 비깃을 갖추고 있다 석질石質은 화강암제로 글씨는 음각陰刻으로 되어 있다
    2018-11-11 | NO.44
  • 정삼품제조최공명구기념비
    광주시 북구 생룡동 125-1(우치공원 주차장 맞은편)1964년이 정삼품제조최공명구기념비(正三品提調崔公命龜紀念碑)는 최명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광주군 우치면 죽헌농계원 일동이 세웠다.
    2018-11-13 | NO.43
  • 정순조-동우 정순조선생 기공비
    광주시 광산구 신촌동 산 4-1(송정공원)정순조鄭純朝(1888. 12. 7. ~ 별세)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부산제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법성금융조합 이사, 국민회 광산군 지부장, 전남도 주조조합연합회장,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해방 이후 송정읍장이던 장안섭과 함께 1948년 광산군청사를 확보하는 데 노력해 당시 창고건물을 인수했다.2019.1.8. 수정
    2018-12-17 | NO.42
  • 조철영-민고혁창사적비
    민고혁창사적비(民庫革刱事蹟碑)<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서쪽 1리의 거리에 있는 비석으로 졸은(拙隱) 박현(朴絢)의 기문(記文)이 있다.기문(記文)졸은(拙隱) 박현(朴絢) 지음우리 고을에 별다른 민막(民瘼)의 폐단이 없다는 일은 온 나라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일 뿐 아니라 이 고을의 사람들에 있어서 스스로 민막(民瘼)이라는 말을 듣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 신축(辛丑)년에 신전(莘田) 조후(趙候) 철영(徹永)이 고을의 목사로 부임 한 후 수십차례 의 민전(緡錢)을 내어 이 고을의 백성을 구제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비로소 이 고을에 이러한 민막(民瘼)의 음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흡사 강보의 어린 아이가 비록 자신의 기포(飢飽)와 한난(寒暖)에 대한 그의 느낌을 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의 어머니가 스스로 어린아이의 뜻을 헤아려 그의 몸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나 다름없는 매우 자애로운 일임이 분명하다.지난 옛날부터 이 고을의 어려운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민고(民庫)의 시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의 조후(趙候)가 이 고을의 정사(政事)를 펼치면서 더욱 민고(民庫)의 규모를 확충하여 여러 궁민(窮民)을 보살피는 많은 선정이 있기 때문에 이 고을의 주민들이 더욱 이에 대한 깊은 감동을 가지었다. 이 때문에 서로간의 아낌없는 헌성으로 오늘의 이 비석을 세워 영구보존의 모든 조치를 다하였다.그리고 오늘의 이 비가 비록 조후(趙候)의 공적(功績)을 기리는데 그 목적이 있다할지라도 이 고을을 비롯한 다른 군현(郡縣)의 여러 수령(首領)들이 모두 조후(趙候)의 이러한 일을 본받아 올바른 선정(善政)을 펼치도록 하려는 또 하나의 소망이 없지 않다.
    2018-06-18 | NO.41
  • 조탑사녀씨명개록지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864 원효사1944년이 조탑사녀씨명개록지비(造塔士女氏名開錄之碑)는 《무등산》(1988)에 기록이 있다.
    2018-12-01 | NO.40
  • 죽헌장동명 · 남파장량환공적비
    광주시 광산구 동산동 산 255-1, 연동마을 입구1979년이 죽헌장동명 · 남파장량환공적비(竹軒張東命 南坡張良煥 功績碑)는 평동저수지를 조금 지나 광산구 동산동 연동마을 입구 도로변에 있다. 1979년 흥성장씨 문중에서 세운 공적비이다. 비문은 국한문혼용체로 쓰여 있다.⽵軒 張東命과 南坡 張良煥은 어렸을 때 효성이 純篤하며 事親之事에는 孟宗 王祥의 본을 받아 適⼝之味를 腹⾏順志하며 敦睦義⽅에 敬直하고 爲先之事에는 都私⾨에 先導者가 되어서 祭閣建⽴과 伐⽯立碑에 最善의 勞⼒을 傾注하여 功績이 顯著하기로 衆⼝稱頌하고 名傳千秋하노라.⻄紀 ⼀九七九年 ⼰未 ⼆⽉ ⾨⼈ ⼀同
    2018-11-10 | NO.39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