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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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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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사민후치성선정불망비, 목사이후지연청덕유애비
    광주시 광산구 산수동 118-2, 경위도좌표: N 35˚10´41.6″, E 126°44′58.7″  1833년이 비는 마을 우측 황룡가변에 이 마을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영춘정 아래에 있다. 흔히 '민목사불망비'라 한다.하나의 비석을 2인의 공덕비로 삼았다. 앞면 우측에 목사민후치성선정불망비(牧使閔候致成善政不忘碑), 좌측에 목사이후지연청덕유애비(牧使李候止淵淸德遺愛碑)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오직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선정을 베푼 두 목사(牧使)를 기리기 위해 서민적인 돌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전해진다.목사 민치성은 1820년~1822년 재임하였으며 벼슬이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목사 이지연은 1830년 부임하였으며 훗날 우의정을 지냈다.
    2018-11-11 | NO.113
  • 목사서후경순청덕휼민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862년목사서후경순청덕휼민선정비(牧使徐侯經淳淸德恤民善政碑)는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한 서경순(徐經淳)의 선정비로 임술년(1862년)에 건립되었다. 서경순의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성언(聖言)이다. 전라도 김제군수로 있다가 1858년(철종 9)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재직하다가 1860년에 광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그의 선정을 기려 세운 비석이 구미 선산에도 있다. 1855년에는 진위진향사(陳慰進香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연경에 다녀온 적이 있으며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를 남겼다.비음(碑陰)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繄我厚悳  우리 공께서는 삼가시고字民祛瘼  백성을 사랑하여 병폐를 제거하고軍整徭蠲  군정을 정리하고 요역을 덜며杠成舟作  다리를 만들고 배를 만들었네.得之存養  바른 성품을 보존하고 기르시어發于儉約  검약을 드러내었네.銘碑登頌  비에 새겨 송축하니永世普傳  영세토록 널리 전하리.
    2018-06-11 | NO.112
  • 목사신공익전선정비
    광주시 동구 제봉로 42(학동)1640년대 목사 동강 신익전(申翊全, 1605~1660)의 선정비인 천년완골(千年顽骨) 석비가 전남대병원 내 광주시 기념물 제19호인 학동느티나무 옆에 있다.1628년(인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郎)이 되고, 이어 검열·정언·지평 등을 지냈다. 163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부응교·사인(舍人)·사간을 거쳐 그의 나이 41세 때 1645년(인조 23)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예조 참판을 지냈고, 증직(贈職) 영의정(領議政)을 제수받았다.그는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만(汝萬). 아버지는 영의정 흠(欽)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절도사 제신(濟臣)의 딸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신익전은 광주목사 재임 중에 군량미가 빈 것을 채우고 환곡의 문란을 바로 잡았던 일이 있었다.  1648년 전남암행어사 심택(沈澤)은 “정사에 힘을 다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하려고 힘쓰고는 있으나 사사로이 형신을 쓰고 지체된 송사도 많았다”고 신익전에 대해 임금께 아뢴 바있다.신익전의 신도비에 ‘광주 목사로 나갔을 때 숨은 장정을 모두 찾아내어 여러 군대의 궐원(闕員)을 보충하고 경내를 독려하여 기한 내에 조적(糶糴, 환곡을 꾸어 주고 받아들이는 일)의 환곡(還穀)을 수납케 한 것이 거의 수만 곡(斛)이었는데도 감히 뒤지는 자가 없었으며, 죽었거나 딴 곳으로 이사하여 절가(絶家)된 경우가 있으면 번번이 모곡(耗穀, 소모될 것을 감안해서 더 받는 곡식)으로써 상환케 하고, 학교를 세워서 제생(諸生)들을 모아 학업을 장려하여 온 고을이 잘 다스려졌으므로 돌아올 때에는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송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선정비는 이 일을 기념한 것으로  옛 광주사람들에게는 광주의 남문 밖을 진호하는 비석이란 의미로 진남비(鎭南碑)로도 불렀다. 실제로 신익전의 선정을 기리는 비문 뒤편에는 천년완골(千年頑骨)이란 큼직한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 말은 세세토록 이곳을 굳게 하게 지켜주소서라는 뜻이다. 그 앞에 잡귀를 쫓고 도읍의 안녕을 지키는 신성의 의미를 기려 커다란 홍살문도 하나 서 있었는데 1900년대까지만 남아 있다가 철거되었다고 한다.또 그는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으며 외에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겸직하도록 하였고 이어 1654년(효종 5) 다시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어 인연이 깊다. 저서로는 동강유집 19권 3책이 있다.
    2018-07-03 | NO.111
  • 목사신후석유영세불망비
    광주시 북구 복룡길 54(신용동) 복룡마을이 목사신후석유영세불망비(牧使 申候 錫游永世不忘碑)는 신석유(申錫游, 1842∼1886) 를 기리는 비이다.신석유는 1870년 부임했다. 1871년 봄 지금의 북구 신용동 복룡마을 주민들이 영산강 솔무대기 숲 주변에서 잡은 물고기를 마을로 가져와 솥에 끓이다 불이 나 마을이 전소된 일이 있었다. 당시 목사였던 신석유가 마을 재건을 위해 녹봉을 내어주는 등 도움을 주었다.이처럼 하루 아침에 집과 가재도구를 잃은 화재 피해를 입은 주민을 구제하여 1881년 목사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마을주민들이 북구 신룡동 632-1 복룡마을에 선정비를  세웠다. 1970년대에 광주공원으로 옮겼다가 2011년 마을만들기 사업의 하나로 추진된 '복룡마을 노거수공원' 조성 사업 때 광주공원에서 이곳으로 다시 옮겨 복원했다.조선시대 지방관이던 목사나 군수, 현감(현령)에 대한 선정비는 대부분 이임하던 시기에 세운다. 그러나 1871년 복룡마을에 큰 화재가 나 당시 광주목사였던 신석유가 복구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목사에 대한 감사함을 가지고 있다가 그가 광주목사 직에서 물러난 지 10년 후인 1881년에 마을 사람들이 세웠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비이다. 신석유는 자는 성언(聖言), 본관은 평산인이며 재수(在修)의 아들이다. 음직으로 관직에 나아가 1865년 덕산군수, 1867년 장흥부사, 1971년 광주목사를 거쳐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장단진 병마첨절제사(長湍鎭 兵馬僉節制使), 총융청후영장토포사(摠戎廳後營將討捕使)를 지내고, 188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884년 갑신정변 때 좌부승지, 1885년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고, 죽은 뒤 규장각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복룡(伏龍)마을은 ‘마을 지형이 마치 엎드려 있는 용과 같다’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광주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호남정맥 중간 지점인 무등산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지맥으로 영산강을 마주보고 있다.인근 영산강 주변에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으로 보아 복룡마을도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알려진 바로는 금녕김씨(金寧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 효의(孝義 1645∼1708)가 충북 영동에서 무등산 아래 학동(밀양동)으로 옮겼다가 이웃마을인 거상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복룡마을은 몇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침수피해 예방과 풍수리지상 화산(火山, 불태산 용진산)이 마을 앞에 있어 화기가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심었다는 수백 년 된 나무가 즐비해 마을의 상징이었으나 농지정리, 무단벌목 등으로 현재 20여 그루만이 남아 있다.   
    2018-06-13 | NO.110
  • 목사양공응정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목사양공응정선정비(牧使梁公應鼎善政碑)는 광주공원 비석군에 있다. 비의 앞면에 ‘敎英安民 厚俗革弊(영재를 가르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풍속을 도탑게 하고 폐단을 혁파했네)’ 8자(字)가 새겨져 있다. 선조 1년(1568년)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한 양응정(梁應鼎)의 선정비(善政碑)이다. 그의 행장에는 1567년 광주목사였다고 적혀있다. 이 선정비는 원래 융경(隆慶, 명나라 목종의 연호) 경오(庚午, 1570년)에 세워졌으나 이후 병란(兵亂)으로 인해 훼손되고 매몰된 것을 기미년(己未年, 1859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양응정(梁應鼎, 1519∼158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공섭(公燮), 호는 송천(松川)이며, 양팽손(梁彭孫)의 아들이다. 은퇴한 뒤로 나주(羅州)에 살면서 정철(鄭澈)·백광훈(白光勳)·최경창(崔慶昌) 등의 제자를 길렀다. 문장에 능하여 선조(宣祖) 때 팔문장(八文章)의 한사람으로 꼽힌다.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이안눌, 김인후, 임억령 등과 교유했다. 양응정은 1569년(선조 2)에 광주 판관(判官) 양사기(楊士奇), 찰방(察訪) 한무선(韓茂善), 전라도 관찰사 정종영(鄭宗榮, 1513~1589), 의정부 사인(舍人) 이중호(李仲虎), 전라도 도사(都事) 강원(姜源) 등과 함께 무등산을 유람하고 입석대에 금석문을 남겼다.先生遺碑累經兵燹龜頭剝落埋沒泥土鳥(烏)跡茫味本孫零替遺失者奄過百年余守光山先生之九世孫纘永來告訪鎭(적)故余心感愴卽使首校鄭雨鉉採問四家幸得有碑姓諱則字大而手世昭著碑文則字小而日出徽照乃 敎英安民厚俗革弊 八字也事當仍舊更修而碑之全體上缺下碎字 ○ ○ 磨不可 悠久爰故瑞石依原本重建于皇華樓前一鄕之式 百世永傳 己未九月日 知州 鄭基三 記측면 (향교측) 隆慶 庚午 八月 日주: 황화루는 잣고개 부근에 있는 루
    2018-06-11 | NO.109
  • 목사이후세근청덕선정비(청덕휼민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723년광주목사 이세근(李世瑾, 1664∼1735) 선정비는 2개가 있다.목사이후세근청덕휼민선정비(牧使李侯世瑾淸德恤民善政碑)는 물론 목사이후세근청덕선정비(牧使李侯世瑾淸德善政碑)도 계묘년(癸卯年, 1723년) 5월에 세웠다. 2개의 비 가운데 첫번째는 글씨를 새기는 과정에서 마지막 '비'자가 한 줄에 새겨져 있지 않고, 두번째 것은 한줄에 새겨졌다. 추측건대 첫번째 비를 잘 못 만들어 두번째 비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이세근의 본관은 벽진(碧璡), 자는 성진(聖珍)이며, 세자시강원보덕 이상급(李尙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동(李埬)이고, 아버지는 이지걸(李志傑)이다. 1722년(景宗 2년)에서 1723년까지 광주목사로 재임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람됨이 음험(陰險)하고 간사(奸邪)한데 단장하기 좋아하여 날마다 여러 차례 낯을 씻고 목욕하고 분을 바르고 눈썹을 뽑았으며, 의복과 음식이 모두 보통 사람과 다르니, 당시에 그를 인요(人妖)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서로는 역대 왕의 훌륭한 말과 선정(善政)을 모아 편찬한 『성조갱장록(聖朝羹墻錄)』이 있다.
    2018-06-11 | NO.108
  • 목사한후성우애민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669년목사한후성우애민선정비(牧使韓侯聖佑哀愍善政碑)는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한 한성우(韓聖佑, 1633~1710)의 선정비(善政碑)이다. 한성우는 1689년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몰락하고 송시열도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사사되자 그 역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세력이 무너지자 수찬에 재기용된 뒤 교리·응교·집의·사간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대사간으로 있다가 피혐 때문에 사직 상소를 올리고 1699년 7월 광주목사로 부임해 1700년까지 재임하면서 소빈헌과 월소루를 건립했다.주철(鑄鐵)로 된 송덕비를 세웠다고 하나 현재 주철은 사라지고 없다. 비석에 기묘년 11월에 건립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기묘년은 한성우가 광주 목사로 부임해 온 1669년이다. 그렇다면 부임해 온 지 4개월만에 선정비를 세운 셈이다.1701년 전라감사, 1702년에는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했다.
    2018-06-11 | NO.107
  • 목사홍공명원거사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904년목사홍공명원거사비(牧使洪公命元去思碑)는 에 있다. 홍명원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峯)이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홍영필(洪永弼)이다.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1600년(선조 33) 검열(檢閱)·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사서(司書)·수찬(修撰)·헌납(獻納)이 되었다. 그러나 권세를 누리던 신하들을 탄핵하다가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로 좌천되었다. 그 후 동부승지(同副承旨)·좌승지(左承旨)에 이어, 광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를 하사받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홍명원(洪命元, 1573∼1623)은 1615년(광해군 7)에 광주목사로 부임하였고, 이는 임금의 특명이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1616년 잉임(仍任)되어 1618년까지 광주목사로 재임했으며, 1617년 아사를 건설했다. 아사인 하모당과 관련된 시와 기(記)를 지었다.읍지 선생안에 선정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이임과 동시에 선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면 왼편 하단에 萬曆後四丁酉 七代孫 潭陽府使 耆燮  長城府使 章燮 改建라 적혀 있다. 1837년 정유년에 홍명원의 7대손 담양부사 홍기섭과 장성부사 홍장섭이 이전에 있던 것을 치우고 비석을 다시 세웠다는 말이다. 홍기섭은 1835~1839에 담양부사, 홍장섭은 1836~1839에 장성부사를 각각 역임했다.이 비의 뒷면에 숭정기원후 5갑진 11대손 능주군수 홍봉표(洪鳳杓)와 문표, 남표, 학표, 권표 등에 의해 다시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904년 갑진년을 말한다. 옆에 갑술년 3월이라고 표기되어 1934년으로 볼 수 있는데 이 30년의 차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궁금하다.  
    2018-06-11 | NO.106
  • 목사홍공양묵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908년목사홍공양묵선정비(牧使洪公養默善政碑)는  광주목사를 지낸 홍양묵(洪養默)의 선정비로 무신년(1908년)에 광주군수(光州郡守)를 지낸 홍양묵의 종증손(從曾孫)인 홍난유(洪蘭裕)가 다시 세운 것이다. 홍양묵은 홍익한(洪翼漢)의 6세손으로 1810년(순조 10) 음사로 부임했다는 홍양묵은 관련 기록이 거의 없다. 1794년 양구현감이었다는 조선왕조실록 기록과 강주호(姜周祜)와 강주우(姜周祐)의 저작을 묶은 옥천연방고(玉泉聯芳稿)에 ‘삼랑포 군수 홍양묵 운에 화답하다’라는 시가 있을 뿐이다.후면은 다음과 같다.戊申 三月 日 從曾孫 蘭裕 改建崇禎紀元後五甲辰十一代孫綾州郡守 鳳杓 改建甲戌 三月 日 文杓南杓      鶴杓權杓遷建 
    2018-06-11 | NO.105
  • 박호련시혜불망비
    서구 눌재로 258 서창치안센터 맞은 편농선대시주비 근처에는 박호련의 이름자가 선명한 송덕비(朴浩連施惠不忘碑) 2개가 서 있다. 하나는 을축년인 1925년에, 다른 하나는 기사년인 1929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에 적힌 글귀를 보면 박호련은 참봉도 한량도 아니었다. 이 비석들을 세울 쯤에 그런 직함을 쓰기엔 너무 늦은 탓이었다. 짧은 비문도 비석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다행히 박호련에 대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박호련은 본래 이 마을사람이었다. 그의 집은 가난한 동네에서도 눈에 띄게 더 가난했고 버팀목이 되어 줄 부모마저도 가난했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빚뿐이었다. 빠듯한 살림에 갚아야할 빛만 쌓이고 그렇게 앉아 있다가는 빚에 눌려 질식당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야반도주를 했다. 몇 해를 그렇게 고향을 떠나 타향을 전전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먹고 어느 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곱지 않은 시선들만이 그의 귀향을 맞았다. 그래도 채권자들의 양해를 얻어 나루에서 뱃사공 일을 시작했다. 근근이 뱃삯을 모아 빚을 갚았고 가진 배로 화물운송업 같은 사업도 했던 것도 같다. 몇 해가 지나자 그의 살림형편은 크게 펴졌고 1920년대 중반 그는 제법 큰 재산을 모아 지역유지라 불릴 만큼 성공도 했다. 자수성가를 했던 셈이다. 하지만 주변 세상은 그의 성공담만큼 나아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춘궁기가 되면 어김없이 배를 곯았다. 박호련은 보릿고개 때마다 굶주린 이웃들을 구했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오만하거나 인색해지기 쉽다고 하지만 그는 그 반대의 삶을 살았다. 서창나루의 송덕비들은 지금도 길섶의 외진 모퉁이를 지키고 있다. 변변한 안내표지도 없다. 색 바랜 빗돌만이 세월의 덮개를 말해준다. 그러나 이들 송덕비의 주인공이 뱃사공 출신이라는 점, 고관대작이나 지주의 흔한 송덕비가 아니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또한 가난했어도 따뜻했던 시절의 기록이라 더욱 값져 보인다.2개의 비면엔 각각 4자字의 운문으로 네 구句 16자字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끼고 아껴서 남은 것이 있는 줄 알면, 가난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네. 깊고깊은 은혜가 바다와 같고, 그 높은 덕은 산보다 높다네.[節食節用 剩知救貧 恩深於海 德高於山]”1925년 2월 서창면 共立“남의 굶주림을 자기 일로 여겨, 여기저기 나눠주어 가난한 이 구제했네. 모든 사람들이 입모아 칭송하니, 남기신 덕 날로 새로워라.〔飢思若己 傳施恤貧 萬口咸誦 遺德日新〕”1929년 11월 서창면 일동
    2018-05-25 | NO.104
  • 백당문화류재만행적비.백당류재만옹모선기실비
    광주시 광산구 덕림동 고암마을, 경위도좌표: N 35˚10´52.8″, E 126°40′36.5″  1945년이 백당문화류재만행적비栢堂文化柳在萬行蹟碑는 문화류씨 문중이 관리한다. 梁在晟이 찬했다.류재만의 자는 극일克一, 호는 백당栢堂이다. 1909.3.19. 출생으로 송은 홍렬(松隱 洪烈)의 장자요, 광산 김귀선(光山 金貴璿)의 외손으로 덕림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독실하고 재예(才藝)가 명민할 뿐 아니라 효성이 출중하여 부모의 뜻을 순종하고 어김이 없으므로 어른들이 기특하게 여기었다. 본래 가세(家勢)가 빈한하여 학업에 전념하지 못하고 몸소 농사지어 위로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 처자를 거느리며 가사를 영위하였다. 한편 조석으로 부모의 처소(處所)에 나아가 문안을 드리고 색다른 반찬을 구하여 드리되 항상 부족함을 근심하였다. 나이 40에 이르러 학문에 뜻을 두고 동향(同鄕)의 장덕(長德)인 회산 양일묵(晦山 梁鎰黙), 만헌 오필선(晩軒 吳弼善) 선생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탐구하고, 많은 사우들을 종유하여 문난질의(問難質疑)로 수년을 몰두, 드디어 학문의 요체(要諦)를 깨달았다. 50 이후로 위선사(爲先事)에 뜻을 두고 농사를 짓는 한편 여가로 지방 특산물인 돗자리(莞草席) 행상에 나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수입을 저축하여 매년 선대묘 한군데씩 사업을 하였는데 지금까지 30년 동안 무릇 30여처에 석의(石儀)는 물론 제전(祭田)을 모두 갖추었다. 그리고 외가가 무사(無嗣)함으로 외조의 묘소에 석의와 위토를 갖추고 계자(系子)를 주선, 봉사(奉祀)토록 하였다. 1964년 정월, 모친상을 당하여 망극한 슬픔을 다하고 상장(喪葬)의 절차를 가례에 쫒아 행하며 삭망(朔望)의 성묘를 폐하지 않았다. 1965년 3월에는 덕림사(德林祠)를 복설하여 선조 서산선생(西山先生)을 주향(主享)하고 이하 사현(四賢)을 배향(配享), 유림(儒林) 행사를 주선하는 한편 위토 10여두락을 헌납하였다. 1968년 7월 부친상을 당하여 모든 예제를 전상(前喪)과 같이 행하니 원근의 인사들이 공의 효성에 감복하여 조객(吊客)이 무릇 수백명에 이르렀다. 복을 마친후 선고 송은공(松隱公)의 유고(遺槁)를 간행하였다. 지난 1969년에 향당(鄕黨)의 사우(士友)들이 이같이 지극한 효성과 위선(爲先)의 정성에 흠앙하고 후세의 귀감을 삼고자 행적비(行蹟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술암 송재성(述庵 宋在星)이 지었다. 1985년 5월, 덕림사지(德林祠誌)를 간행하고, 이듬해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는데 이상 제반 사업에 소요된 비용은 모두 공이 전담하였다. 1986년 음10월23일, 문화류씨대종회(文化柳氏大宗會) 정기총회에서 선행표창패(善行表彰牌) 제1호가 공에게 수여되었다. 또 1988년 3월, 광산 종중(光山 宗中)에서 공의 위선사업의 거룩한 뜻을 기리고자 모선기실비『慕先紀實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중헌 윤정복(重軒 尹丁鍑)이 지었다. 동년 여름에 백당찬고『栢堂讚槁』가 간행되었는데 공의 위선의 지고(至高)한 뜻을 찬양한 전국 유림(儒林)의 한시(漢時) 3백여수가 실리었다. 찬고(讚槁)의 서문은 죽하 정동휘(竹下 鄭東暉)가, 발문은 성재 라갑주(誠齋 羅鉀柱)가 각기 지었다. 배위 장흥고씨(長興高氏)는 시원(時遠)의 따님으로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영광정씨(靈光丁氏)는 진옥(鎭玉)의 따님인데 현숙한 부덕(婦德)을 갖추어 평생을 부군의 뒷바라지에 헌신하였으니 실로 공의 이같은 사업은 부인의 내조(內助)가 컸었다. 1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기선(淇善)이요, 따님은 하음 봉영렬(河陰 奉永烈), 함양 박윤섭(咸陽 朴允燮), 장흥 고재삼(長興 高在三)에게 출가했다. 끝에 연숙(連淑)이는 미혼이다. 특히 위로 딸을 두고 68세의 노령으로 늦게야 아들을 두니 향리에서 이르기를 『조상의 감동으로 아들을 두었다. 』고 칭송이 대단하였다. ※ : 慕先紀實碑.
    2018-11-18 | NO.103
  • 병천사비군
    광주시 서구 금호운천길 31 (금호동)1918~1920년참봉 지응현의 시혜불망비 13개가 나란히 있다.
    2018-12-01 | NO.102
  • 보건사회부장관 정희섭공적비
    광주시 남구 양림동 108-101970년사직공원내에 있다. 1970년 1월에 전라남도지사 김재식과 부지사 손수익 및 국장, 시장 군수들이 협찬하여 세웠다.뒷면에 적힌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정희섭 박사는 1920년 2월 1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준장으로 육군의무감을 거쳐 1966년 4월 두번째 보건사회부장관을 역임, 1969년 10월 21일 퇴관하다.육군병원장으로 광주에서 근무한 일이 있는 정박사는 전라남도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전남 사람임을 자처하며 이 고장의 개발에 힘쓰다.특히 1967년, 68년 두해 혹심한 한발이 겹쳐 그 참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정박사는 몸소 현지를 돌아보고 정부에 건의하여 외원을 요청하여 알뜰한 구원의 손길을 뻗치다.양년 3백억에 달하는 농작물 감수에 구호를 요청하는 농가만도 46만호에 이르렀으나 한 사람도 굶는 이가 없었으며 양곡 32만톤과 국고보조 39억원을 지원하다.우리 도민은 이 양곡과 자금을 거저 쓰지 아니하고 표난 것만 추려도 수리사업 5만6천학탤, 도로 확장 6백키로미터를 완성하고, 간척 2만2천헥탈을 착공하다.여기 작으나마 비석을 세워 정희섭 박사의 은공을 적고, 온 도민이 칭송하여 길이 전하고자 한다.
    2018-06-21 | NO.101
  • 붕남거사지공응현부인정명월김계씨선덕공적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846(원효사 명부전 옆)1959년이 붕남거사지공응현부인정명월김계씨선덕공적비(鵬南居士池公應鉉夫人淨明月金桂氏善德功績碑)는 朴錫珍 짓다.
    2018-11-13 | NO.100
  • 삼현비(三賢碑)
    광주시 북구 두암동삼현비(三賢碑)는 광주시 북구 우치동에 있던 고비명(古碑名)이다. 우곡리(牛谷里)에 소재한 김씨 삼현 비석(金氏 三賢碑石)이다. 북구 두암동에 복설하였다.(조선지지자료)
    2018-07-03 | NO.99
  •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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