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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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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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완-대하 김승완 박사공적비
    광주시 북구 동문대로112번길 99(장렬사 내)2015년대하 김승완 모선공적비조상을 숭상하고 종족이 돈목함은 효의 근본이다. 김해인 김승완은 호가 대하이니 가락국 수로대왕의 73세손으로 담양군 고서면 해평리에서 민선면장을 지낸 휘 대성의 1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임채갑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용모단정하고 품성이 근면 성실하며 재예가 뛰어나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전문의와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전남의대 조교를 거쳐 외과병원을 개원하여 인술과 봉사로 사회활동을 시작하였으니 광주광역시의사 회장. 대한의사협회 부의장 가사조정위원장등을 역임하였으며 고향 담양의 고서노인당과 창평 향교에는 공의 두터운 후원에 감사하는 기적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숭조정신이 투철하여 종사벌전에 많은 협조와 열성을 다 하였다. 일찍이 광주전남 금녕군파 종회를 창립하여 40대에 초대회장을 역임한바 있고 1998년 흥무왕 장열사 보존회제9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노후 된 전기시설을 점검하고 교체공사를 실시하여 안전사고에 대비하였다.특히 1952년에 건립한 묘정비가 사우의 명칭이 아닌 흥무왕 묘정비로 표기되어 있어서 순한문으로 된 비문을 알기 쉽게 번역하고 장열사묘정비로 개수하기로 종의를 모았으나 열악한 재정문제로 그 추진이 어렵던 차에 건립비 1천5백만 원을 전액 출연하여 장열사묘정비를 내삼문 앞 구 흥무왕 묘정비 좌측에 마주하여 웅위하게 건립 하였으니 숙원사업을 이루었다.그리고 최근에 장열사 발전기금으로 1천2백만 원을 헌성하니 공의 지극한 숭조 돈목정신을 짐작케 함이라.이외에도 위선 부종 계도사업에 물심양면으로 성원과 협조를 아끼지 아니하니 이에 그 공적을 빗돌에 새겨 후대에 큰 교훈이 되고 귀감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서기 2015년 (가락기원 1974년) 7월 일문학박사 송광운짓고사단법인 장열사보존회 세우다
    2018-12-16 | NO.128
  • 김재헌 선정비
    광주시김재헌(⾦在獻) 선정비는 1856~1858 광주목사로 재임한 뒤 세워진 것이다. 김재헌은 본관이 광산이고 사계 김장생의 이손(⽿孫, 7대손)이라고 한다. 병진년(1856년)에 부임해 오자마자 향교 흥학전, 교량 수보전, 사창 진휼곡 등을 마련했다. 광주 사림들이 비석을 세울 것을 결의했는데, 이 비문 작성 시기는 재임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입비 자체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 관찬서에는 김재헌의 광주목사 행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별다른 역할이 없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마 광주 사림들과 사상적 연원이 연결되는 김장생의 후손인데다가 사림들의 숙원 사업을 해결해주어서 사림들이 나서서 선정비를 세우려고 했던 것 같다.나도규의 <덕암집>에 그 비문이 실려 있다.나도규(羅燾圭, 1826∼1885)는 ‘월소루 시회에서 김재헌이 사운으로 화답하기를 청하여 삼가 이어서 짓다(月小樓詩會 金侯在獻 以四韻要和敬次)’라는 시를 남겼다. 당에 오르니 사육이 뜰에 떠들썩/오늘 마침 예원에서 즐겁게 노니네/삼대의 유관이 높게 자리에 모여서/흐드러진 봄빛에 술잔을 기울이네/맑은 노래 취한 후 감상을 즐기니/더운 기운이 바람에 머물지 않네/참으로 다행히 천추의 성절을 맞아/만수무강을 빌며 군은을 송축하네
    2018-11-09 | NO.127
  • 김홍두-애국지사 악포 김홍두 선생 공적비
    서구 용두동 163-4애국지사 악포 김홍두 선생 공적비愛國志士樂浦金弘斗先生功績碑는 서창면 용두리 155, 학동마을에서 출생한 김홍두金弘斗(1879~1933)의 일제강점기 때 독립투쟁을 했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2년에 세웠다.이 비는 대형 거북이 모양을 기단으로 1992년 7월에 이기전李基田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2018-05-25 | NO.126
  • 남석기공세종기적비
    광주시 서구 금호동 18-371997년이 남석기공세종기적비(南石奇公世淙紀績碑)는 주은 마재마을아파트 입구 쪽의 중앙공원산책로 입구 왼편에 있다. 이 기적비는 1997년 3월에 남석공 기적비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기관호)에서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나기만 광주대 중국어과 교수가 찬했고 글은 이상용 전 장성문화원장이 썼다.기적비 뒷면의 글 내용은 다음과 같다.기씨는 행주인이라.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기문(奇門)은 대대로 인륜을 훌륭하게 밝혀 충신효자가 끊이지 않는 명문이다. 이러한 가문의 훌륭한 전통을 이어받은 남석(南石) 기세종(奇世淙) 선생은  조선 단종조 때 청백리이신 정무공의 후예로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돈후하여 효행이 뛰어나고 선조의 유훈을 독실하게 실천하여 가족과 종족간의 화목을 이룩하는 데 종중의 모범이 되어 오셨다. 그러므로 행주기씨 문중의 운정공파 종중에서 종중회장으로 추대하여 그후 수십년을 조상을 훌륭히 모시며 선생께서는 위선(爲先)의 정성이 남달라 11대조 운정공 이하 수세의 선영이 각처에 산재하여 후손들이 참배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시고 종중과 협력하여 종중들의 생활근거지와 지근거리로 선영을 이장하고 누대조의 혼령이 외롭지 않으시도록 길지를 조성해드렸다.선생께서는 이 일을 솔선하여 마치신 후에도 새로 조성한 영성의 깨끗한 관리를 위해서 가사보다 우선해서 노력해 오셨으며 이 일의 영속을 위해 제위토를 매입하여 자경하고 기금을 조성하셨을 뿐 아니라 종중의 돈목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오셨다. 오늘날 염량세태의 정도가 극에 이르러 사람으로서 도리를 잊은 행위가 곳곳에서 빈발하여 충효의 전통적 가치가 더욱 소중하게 그리워지는 이 시점에서 선생의 뛰어난 독행은 우리 가문뿐 아니라 이 사회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운정공파 종중에서는 세종 선생의 멸사위선과 가문애호정신에 크게 감복하여 이를 높이 기리고 후손들이 길이 본받게 하고자 이 비문을 여기에 새긴다.
    2018-05-30 | NO.125
  • 남호원선정비
    광주시남호원(南鎬元)은 1875~1879에 광주목사로 재임했다.나도규의 <덕암집>에 비문이 실려 있다.
    2018-11-09 | NO.124
  • 낭암차행렬공적비
    광주시  광산구 본량신촌동길 59-6(동호동), 대동사이 낭암차행렬공적비는 대동사에 있다.
    2018-11-21 | NO.123
  • 농선대시주비
    광주시 서구 눌재로 258 서창치안센터 맞은편1769년농선대시주비農船大施主碑는 영산강과 황룡강이 어우러지는 서창교 일대에 1769년 강姜 아무개와 조曹 아무개가 농선을 기부해 주민들이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한 데 따른 칭송비로 알려져 있다. 서창동 서창치안센터 맞은편에 있다. 김희태는 이를 농선부시주비農船夫施主碑로 읽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건륭乾隆 34년에 한량閑良 강선주姜善周와 통정通政 조창좌曹昌佐가 농선을 시주했다.”이다.건륭 34년은 서기 1769년이다. 또 뒷면 두 곳 가운데 한쪽에 화주化主의 거주지가 금부촌리金夫村里와 성명 김순봉金順奉이 있다. 앞면과 연대 표기면 사이의 옆면 한 곳은 서일중徐日仲이라는 시주 인명과 금액 3량兩이 적혀있다. 금부촌리는 조선시대 후기 광주 당부면當夫面 관할이었다. 1914년에 금부金夫와 만호가 합해져 금호리가 되면서 서창면에 속하게 된다. 이 금호리가 뒷날 금호동이 된다.김희태는 이 비를 ‘농선의 선부가 시주를 해서 통정 조창좌와 한량 강선주 등이 세운 비’로 볼 것인지, 또 ‘농선의 선부를 위해서 세운 것인데 비 세우는데 통정과 한량 등이 시주 한 비’로 볼 것인지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배가 접안하던 나루터는 현재의 서창교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강을 건너려면 배가 있어야 했다. 농선은 예전에 동네와 강 너머의 농토를 오갈 때 사용된 배를 말한다. 주로 농토로 건너갈 때 사람과 농기구를 싣고 수확기면 볏단을 실어내던 쪽배였다. 지금으로부터 260여년 전 서창마을에 귀중한 배를 쾌척한 두 사람에게 그 감사의 뜻을 담아 동네 사람들이 이 비석을 세웠다. 이는 강을 끼고 살았던 서창 주민들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조선시대의 자료에는 당시 서창마을에 법으로 나룻배 1척을 비치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배는 5년에 한 번 꼴로 정기적으로 수리를 해야 했고 건조한 지 10년째가 되는 해에는 새로 나룻배를 짓도록 했다. 하지만 나룻배를 수리하고 건조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광주의 옛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사람들은 목재 부족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흔적이 여러 군데서 보인다. 아무리 작은 배라도 그것을 고치고 새로 짓는데 필요한 굵고 긴 나무를 확보하는 일은 늘 고역이었다. 이 와중에 농선대시주비에 기록된 것처럼 누군가 배를 쾌척했다면 이는 사람들의 노고를 크게 덜어주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2018-05-25 | NO.122
  • 농은공장동진 · 덕암공장동택공적비
    광주시 광산구 삼도동 회룡마을 입구1975년이 농은공장동진 · 덕암공장동택공적비(農隱公張東軫 · 德菴公張東澤 功績碑)는 국한문혼용체로 쓰여 있다. 비문의 공적내용은 다음과 같다.始祖太師忠獻公 諱 ⿍畢의 三⼗九世孫의 號는 農隱 諱는 東軫이요 號는 德菴 名은 東澤이다. 惟兩⼈은 爲先事業에 ⼼⾎을 傾注하여 ⾨中에 模範되었기에 功績碑를 건립하여 後世⼦孫의 귀감으로 삼고 천추만대에 永遠不渴의 ⽣命⽔가 되도록 하였음.功績農隱公 東軫은 ⾃幼時 孝誠이 지극하여 叩氷한 ⺩祥과 泣⽵한 孟宗의 본을 받아 善事兩親에 得⼀味면 必獻하고 ⾏⼀事면 必告하여 효행과 면정이 藉하였고 爲先之⼼이 進達하여 衆謀鳩財三⼗餘星霜에 ⼋代祖 號는 松隱 諱는 運亮의 永慕齋를 건립하고 ⽯碑를 改竪하였음. 德菴公 東澤은 少時에 家貧하였으되 孝⾏과 爲先之⼼에 雄志를 품고 ⽗⺟의 孝⼼이 特出하였고 종친에게 敦睦하였으며 節⽤節⻝으로 ⽣計를 하여 가면서도 位⼟畓 ⼗餘⽃落을 宗中에 獻納하였음.檀紀 四千三百⼋年 ⼄卯 三⽉ ⽇ ⾨中⼀同 竪
    2018-11-10 | NO.121
  • 도강이기수시혜비
    광주시 북구 본촌동 349-1(도로사업소 내)1974년이 도강이기수시혜비(渡江李基壽施惠碑)는 盧文永 짓고 쓰다.
    2018-11-13 | NO.120
  • 도은거사전주이공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본동로 94(명도동) 평림마을 평림경로당 앞2008년이재철의 기적비이다.
    2018-11-30 | NO.119
  • 도은이재철선생정년퇴임기념비
    광주시 광산구 본동로 94(명도동) 평림마을 평림경로당 앞1996년
    2018-11-30 | NO.118
  • 도지사신공용우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966년도지사신공용우선정비(道知事申公庸雨善政碑)의 양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莅政三載 尊聖惠民   伐石純續 永世不湮도지사를 역임한 신용우(申庸雨, 1912~1989)의 선정비로, 1966년에 전남유림(全南儒林)들이 건립하였다. 신용우는 전라남도 승주군(昇州郡) 순천면 출신으로 1960년 전매청 청장을 지내고,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제3대 전라남도 도지사를 지냈다.
    2018-06-11 | NO.117
  • 도지사이공기세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959년도지사이공기세선정비(道知事李公琦世善政碑)는 전라남도 도지사를 지낸 이기세(李埼世, 1903~1992)의 선정비(善政碑)로 1959년에 건립되었다. 이기세는 1903년에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출생하였다. 1956년 전라남도지사로 근무하였다. 비음(碑陰)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公來旬宣 공이 순선(여기서는 도지사를 가리킴)으로 와憂民寔寧 백성을 근심함에 진실로 평안하였네. 敬聖敏政 성인을 공경하고 정사에 힘을 쓰고 勤儉增産 근검하여 물자가 늘어났네.矯弊彰德 폐단을 고치고 덕을 드러내고遵法淨官 법을 준수하여 관을 깨끗하게 하였네. 縮費輕賦 비용을 줄이고 세금을 경감하였으며善導民福 민복으로 선도하였네.先賢之碑 선현의 비들을 集竪此所 모아 이곳에 세웠네.受薑桂性 강계한 성품을 타고나尙氷雪操 빙설의 지조를 숭상했네.能任鼎餗 능히 정속(나라의 임무)을 수행하여經世屛翰 병한(국정의 중신이나 지방수령)으로 세상을 다스렸네.堯風舜雨 요임금의 교화와 순의 은택이요 周愛甘棠 주나라에서 감당(召公의 善政에 감격하여 백성들이 그가 일찍이 쉬었던 감당을 소중히 여김)을 사랑하였네. 朝野咸頌 조야에서 모두 칭송하여 刻于金石 금석에 새기네. 功照靑史 공이 청사에 드러나 天地俱長 천지와 함께 길리라.
    2018-06-11 | NO.116
  • 려헌거사박공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지평동 지정마을1983년이 려헌거사박공기적비(藜軒居士朴公紀蹟碑)는 박상호(朴尙鎬)의 기적비이다. 건립 당시에는 광산구 지평동 지정마을 입구에 1983년에 세웠다. 마을 앞에 도로가 나면서 마을 뒤에 있는 공의 묘 앞으로 옮겼다. 그의 셋째 형인 박영호(朴泳鎬)의 유적비도 마을 골목 안에 세워져 있다.비문 내용擎天할 만한 才質과 貫道할 만한 學問을 간직하였지만 감추고 나타내지 않으면 알아주는 사람이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잠긴 踪跡과 숨은 德은 闇然히 어딘가 나타나 不⾒不問中에서 世敎에 隱然的 도움이 적지 않은 法이나 이 또한 達理者가 아니면 相互議論할 수 없는 것이다. 藜軒 朴公諱尙鎬는 咸陽世家로 淸⽩吏 遂智의 後裔며 諱廷奎의 四男으로 哲宗壬戌(⻄紀 ⼀⼋六⼆年) 三⽉⼆⼗⼋⽇에 出⽣하였는데 四兄弟中 ⻑兄⻱鎬와 次兄⽂鎬는 光州市柳等⾕⾯良苽⾥에서 出⽣하여 現三道新亭에 移居하였고 三兄泳鎬와 公은 三道에서 ⽣⻑하였다. 그런데 公은 天性이 純粹하고 才質이 卓犖하여 일찍이 遠⼤한 뜻을 품고 上學하였을 때 채찍질 안 해도 精密히 硏究하고 意味깊게 ⽣覺해서 學問에 精誠껏 勉勵하였으며 松沙 奇宇萬 先⽣의 ⾨下에서 修道하고 또 다시 勉菴 崔益鉉 先⽣에게 就正하여 性命의 學과 治⿑의 道를 習得하였으니 가히 天衢에서 活步할 만하며 王庭에서도 垂翼할 만하였으나 때로 더불어 맞지 않아 道를 품고 林樊에 숨어 世上의 榮利에 뜻이 없고 오직 後進을 養育해서 世道를 不知不覺中에 붙잡으러 ⼰任을 삼고 諄諄히 次序있는 指導와 訓誨로 成德한 者를 많이 輩出하였다. 그리고 治世의 道를 엮고 傷時의 情을 읊은 ⽂稿를 남겨 유소한 ⽂字라 하겠으나 顯功이 문에 보이지 않으니 말하는 이가 적으며 ⽂稿마저 紛失되었으니 슬프다. 達理者라 할지라도 公의 深奧한 ⼼情을 測定키 어렵다. 純宗後 癸亥(⻄紀⼀九⼆三年) ⼗⽉ ⼆⽇ 卒하니 墓는 ⿃前洞先瑩下⽩⻁嶝⾉坐에 모셨고 配羅州林⽒는 元默의 女요 ⽩湖悌의 後다.⼦는 濟弘이요 女는 坡平尹相俊의 妻며 孫은 永柱景柱鐵柱達柱다. ⻑孫 永柱의 妻光⼭鄭⽒는 特殊한 孝烈로써 道薦에 올라 이미 表⽯까지 세웠는데 恒時 公의 隱蹟이 아주 湮沒될까 걱정한 끝에 그 ⾨⼈과 族⼈들의 뜻을 모아 公의 懿德을 永久히 記念키 위하여 紀蹟碑를 세우고저 할 제 그 碑⽂을 懇請하기에 族⼈으로서 鄭⽒의 孝誠에 感動되어 ⼈微學淺하나 固辭치 못하고 銘을 부치노니-世上은 모두 外華에 달리고 富貴에 汲汲하는데 公은 홀로 內性만 지켜 淸寒에 淡淡하였네.世上은 모두 顯功을 ⼀時에 세우려고 하지만 公은 홀로 隱德을 萬世에 숨으려고 하였네.그 隱德이여 闇然히 世敎에 도움이 되었지만 아는 이 많지 않구려. 아-슬프고 슬프도다.光復後三⼗六年庚申冬⼗⽉ ⽇ 前成均館副館⻑ 族⼈ 載⻯ 撰                                                                            信川 康仁煥 書
    2018-11-10 | NO.115
  • 목사민공영직영세불망 마애비
    광주시 북구 무등로 1448 인근목사 민공영직영세불망(牧使 閔公泳稷 永世不忘) 마애비는 무등산 원효사  미처 못가서 있다.  전라도 관찰사로 온 아들 민정식이 새겼다.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신리 산2-9번지에도 이와 유사한 마애비가 있다.  여흥 민영직(1824~?)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자는 경예(敬藝)이며 1824년에 출생했다. 아버지가 민달용(閔達鏞, 1802~?)이다. 민달용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자는 자겸(子兼)이다.  1858년(철종 9)에 전라좌도암행어사(全羅左道暗行御史)가 되어, 각 지방 관리들의 비리를 적발하였다. 1861년(철종 12)에는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중국을 다녀왔다.민영직이 그 부친을 위해 신문고를 이용한 적이 있다. 신문고는 왕이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들어주고 무질서한 소송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대궐 밖 문루 위에 달았던 북을 말한다. 신문고는 조선 전기인 1401년(태종 1) 7월 ‘등문고(登聞鼓)’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어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고, 동시에 관리들의 부정한 관행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한 것이 기원이다. 1771년(영조 47) 창덕궁 진선문 등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했다는 기록을 보면 사건사(四件事)와 자손이 조상을 위하는 일, 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일, 아우가 형을 위하는 일, 노비가 주인을 위하는 일 및 기타 지극히 원통한 내용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게 정치적으로도 활용되었다. 1844년(헌종 10) 과거 시험의 부정과 연관되어 처벌된 민달용(閔達鏞, 1802~?)의 아들 민영직(閔泳稷, 1824~?)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를 이용하였다고 했다.
    2018-07-03 | NO.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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