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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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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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찰사이공근호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903년이 관찰사이공근호선정비(觀察使李公根澔善政碑)는이근호(李根澔, 1861~1923)의 의 비이다. 이근호 선정비는 그가 전남 5대 관찰사(1902년∼1903년) 재직 시절에 선정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근호는 조선 말기의 무신이자 일제강점기의 조선 귀족 출신이다. 계묘년(1903년)에 건립되었다. 비의 양면에 4자씩 4줄로 시가 적혀 있다.측면 향교쪽來宣棠化 一路澄淸 措以舊約 三代風俗측면 천변쪽 我粒伊誰 豊口有頌 我衣公德 視以片石 이근호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옥(文玉), 호는 송천(松泉)·송은(松隱)·규제(奎齊)이다. 이근택(李根澤, 을사늑약 당시 군부대신으로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냄)과 이근상(李根湘, 남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을 지냄)의 형이다.이근호는 1891년에는 평안북도 영변군의 부사로 재직하면서 재물을 탐학한 죄로 벌을 받았다가 재기용된 전력이 있다. 1898년 경무사에 임명되었고 1902년 2월 전라남도관찰사 겸 전라남도재판소 판사에 임명 돼 전라남도 지계감독을 겸했다. 1906년 육군참모장을 지냈다. 한일병합 이후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에는 은사공채 2만5000원을 받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奉授式)에 예복을 갖춰 참석했다.이 같은 내용은 대통령 직속기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95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각각 확인됐다.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이근호의 형이 을사오적 이근택이며 본인을 포함해 세 형제가 작위를 받아 습작자까지 모두 여섯 명이 조선귀족이 된 대표적인 친일 집안으로, 사람들은 이근호 5형제를 ‘5귀’(五鬼)라고 불렀다”고 밝혔다.광주역사정의행동연대는 “의향 광주의 중심에 자리 잡은 광주공원에 아직까지 친일파의 선정비가 남아있다는 것은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라며 “그들의 잘못을 후세에 전하는 차원에서 그들의 친일행각을 기록한 ‘단죄비’를 선정비 옆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8-06-11 | NO.143
  • 광산이병환봉선실적비
    광주시 북구 삼각동 산 174-11947년이 광산이병환봉선실적비(光山李炳煥奉先實績碑)는 종질從姪 만영萬永이 건립했다.이 비석은 일곡동 일동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왼쪽 산자락에 1947년에 세웠다. 화강암 재질의 비석으로서 크기는 135cm×47cm×19cm이었다. 그러나 일곡택지개발사업을 벌이던 1993년 중에 유실되었다가 현 위치로 옮겼다.嗚呼 吾從叔 諱 炳煥⽒ 早失其慈 侍養德嚴 ⾟勤⽽過⼦⽽來 及其⼗四五 慨然有志于學 ⽽貧窮無路 朝傭於野 暮讀於塾 可爲遂⼯矣 叔以鳩聚之財 孝奉偏嚴 友愛諸從 周六⽶於匿 其於三代先壟 皆以竪⽯ ⾄於⾨祚不 薄⼟⼯⽥圭畓 庶萬他⼈所奪 ⽽叔郞以遝退 ⾃爲已有 敍諸族⽈ 吾亦⼦孫 ⾹⽕之德 其可忍乎其中⼗四⽃⽥ 紬于⾨中 未⾄爲絶⾹矣 所叔以無爲之疾 先⽗⽽去 其不年之怚其可忍⾔哉 室潭陽鞠⽒啓洪之⼥ ⽗東⽇ 妣忠州朴⽒ 祖諱仁芳 妣光⼭⾦⽒幷咸陽朴⽒ 曾祖諱命光 妣平康蔡⽒ 舍⼈諱達善⼗世孫也⼦周城耽津崔⽒也 吾爲吾叔 似可爲傍⼈所議 以若從弟之年淺質薄 不識操制之⽅ 故不得已 ⽽撫實焉檀紀 四千⼆百⼋⼗年 丁亥 ⽉ ⽇ 族姪 萬永 竪번역아, 우리 종숙 병환씨께서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봉양함에 자식의 직분을 다하더니 나이 14,5세에 이르러 개연히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빈궁하여 길이 없어 아침에는 들에서 일하고 밤에는 서당에서 공부를 하여 학문을 이루었다.종숙은 모은 재산으로 홀아버지 봉양하고 제종과 우애하며 비축한 곡식으로 3대 선롱의 모든 비석을 세워 가문의 복이 박토 공전 규답이 아님에 이르렀다. 타인에게 빼앗긴 것을 종숙은 물려받아 자기의 소유로 만들어 제종에게 말하기를 “나 또한 자손이니 향화의 올림을 어찌 끊기게 하리요?” 하고 그 중 40두락을 문중에 내 놓아 향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종숙이 어찌 할 수 없는 병에 걸려 부친 앞에 돌아가시니 오래 살지 못한 슬픔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부인은 담양국씨 계홍의 딸이다. 부친은 동일 모친은 충주박씨, 조는 인방이요 조비는 광산김씨와 함양박씨, 증조는 명광이요 증조비는 평강채씨이다. 사인 달손의 10세손이며, 아들은 주성, 자부는 탐진최씨이다.나는 내 종숙에게 방인처럼 함께 의논할 바 못되나, 종제의 나이 어려서 질박하고 조제의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득이 내가 사실을 기록하노라.단기 4280년 정해 족질 만영 세움
    2018-11-13 | NO.142
  • 광산이씨상서공파선세사적비
    광주시 남구 원산동 951-6이 광산이씨상서공파선세사적비는
    2018-11-29 | NO.141
  • 광주공원 비석군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광주공원의 비석군은 광주시내 여러 곳에 흩어진 비석을 1957년 광주공원 입구에 옮겼다가 1965년 지금의 위치에 27기의 비를 조성했다. 광주공원 선정비는 주로 광주의 수령이었던 조선시대의 광주목사나 관찰사 도지사들의 비이고 특별하게 의리의 유학자 안규용, 어사 조헌과 여규익, 그 외 행군수(군수)와 찰방(역을 관리하는 관리) 약간 명의 선정비들이 있다. 사적비군 입구 은행나무 정중앙 앞자리에 행주산성 전투로 잘 알려진 권율장군 선정비가 있다. 선정비중 가장 값진 비다. 권율장군은 팔도 총사령관이었으며 광주목사와 도원수를 지내며 이순신 장군과 함께 육지는 권율, 바다는 이순신이 지켰다고 할 만큼 큰 공을 이룬 인물이다. 권율과 이순신은 서해 류성룡이 추천했던 인물들로 권율은 광주목사 도원수로 이순신은 좌수사요 통제사로 바로 여기에서 두 역사적 인물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으니 그 호남의 정기가 참으로 빛나고 빛나는 곳이다. 서헌거사라 불린 안규용(1873-1959)의 의적비도 있다. 안규용은 보성사람으로 과거는 보지 않고 유학을 공부하는데 집중했는데 사변적인 성리학보다는 의리론적 도학 공부를 했다. 보성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일제 지배 하에서는 낙재와 제자들이 만든 죽곡서원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집중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와 심문을 당하기도 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한 유학자로 다시금 새겨 봐야 할 인물이 아닌가 싶다. 어사 조헌(趙憲·1544-1592)의 행적도 눈길을 끈다. 조헌은 경기도 김포출신으로 선조 때 어사와 전라도 도사를 지냈다. 정여립과 갈등해 정철과 더불어 서인 강경파에 속해 호남인맥숙청에 영향을 미쳤을 것도 같지만 성품이 강직해 자기 주장에 선명했다. 상소를 올리는 방법도 도끼를 옆에 놓는 이른바 도끼상소를 하고나 자기 머리를 바닥에 찍어 피를 내는 시위를 했다. 그래서 선조는 조헌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싫어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쓴 소리하면 싫어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세태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인사로 선정된 윤웅렬은 1896년 고종이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전라도 초대 관찰사로 부임한다. 이 때 나주에서 군수와 관리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서 윤웅렬은 광주로 도망쳤고 그 뒤 광주에 눌러 앉아 관찰사 일을 했다. 이후 광주에 배치된 관찰도는 전남도청이 됐다. 윤웅렬도 한때 개화파 정치인으로 갑신정변에 참여했으나 나중에 일본에 망명한 후 친일내각의 군부대신이 됐다. 친일인사 이근호의 선정비도 지목됐다. 그가 전남 5대 관찰사(1902년∼1903년) 재직 시절인 1903년에 세워졌다. 이근호는 조선 말기의 무신이자 일제강점기의 조선 귀족 출신이다. 1898년 경무사에 임명되었고 1902년 2월 전라남도관찰사 겸 전라남도재판소 판사에 임명 돼 전라남도 지계감독을 겸했다. 1906년 육군참모장을 지냈다. 한일병합 이후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에는 은사공채 2만5000원을 받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奉授式에 예복을 갖춰 참석했다.
    2018-10-19 | NO.140
  • 괘고정보수헌성비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6 (원산동)괘고정보수헌성비(掛鼓亭補修獻誠碑)는 괘고정수 아래에 있다.
    2018-06-11 | NO.139
  • 국제라이온스의장사은김병기기념비
    광주시 동구 용연동 573용연마을2017광주·전남지역 출신으로 최초로 2013년 6월 독일 함부르크 국제대회에서 정회원 140만명의 세계 최대 국제봉사 단체인 국제라이온스협회의 2013~2015 국제이사로 선출됐다. 김병기 라이온은 (사)국제라이온스협회 한국연합회 2014~2015 회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광주광역시의 향토 기업인으로서 지역사회의 화합발전과 지구촌의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봉사에 평생을 헌신했을뿐만 아니라 지도력과 봉사 사업에 만인의 귀감이 됐다.지난 2014년 제53차 인천 동양 및 동남아대회의 라이온스 파견감독관으로 활약하며 이밖에도 중국 길림성 용정시 자선총회에 암소 300여마리와 농장시설지윈 및 장학회을 설립했다.100여명의 후원자로서 2000만원의 후원금으로 라이온스창립 100주년일을 맞이해 향리인 동구 용연동에 김병기 국제이사 재직기념비가 건립됐다.
    2018-11-22 | NO.138
  • 권율-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행주산성 전투로 잘 알려진 권율 장군의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義碑)는 사적비군 입구 은행나무 정중앙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장 갚진 비다. 권율 장군은 팔도 총사령관이었으며 광주목사와 도원수를 지내며 이순신 장군과 함께 육지는 권율, 바다는 이순신이 지켰다고 할 만큼 큰 공을 이룬 인물이다. 권율과 이순신은 서해 류성룡이 추천했던 인물들로 권율은 광주목사 도원수로 이순신은 좌수사요 통제사로 바로 여기에서 두 역사적 인물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으니 그 호남의 정기가 참으로 빛나는 곳이다.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서쪽 1리의 거리인 향사(鄕社)마을에 있다.기 문(記文)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지음주상(主上) 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듣는 바에 의하면 '권율(權慄)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將帥)의 재능(才能)이 있다'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내 특별히 그를 광주목사로 임명한다"라고 하시었다. 이러한 명을 받은 권공이 광주의 임지에 도착한 그 즉시 10개 조항(條項)의 약법(約法)으로 많은 무기를 비축하여 빈틈없는 수비(守備)를 다지 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외적의 침범이 근절되어 모든 주민들이 평안한 생활을 누림에 따라 또다시 경내(境內)의 여러 자제(子弟)들과 함께 이웃고을에 격문(檄文)을 보내 많은 의병(義兵)을 모집하였다. 이로 인해 이치(理致)의 전투에서 외적을 물리쳐 호남의 안전을 도모한 그 전공(戰功)으로 본도(本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역임하였고 또 행주(幸州) 전투에 나아가 왜적(倭敵)의 무리를 모두 주살(誅殺)하는 대승(大勝)의 전공(戰功)을 이루었다. 그리고 또 왜적의 무리가 경성(京城)을 함락한 그때에 각도의 의병(義兵)을 총괄하는 도원수(都元帥)의 책임을 맡아 파멸 직전(破滅直前)의 종사(宗社)를 구제하고 빈사직전(瀕死直前)의 백성을 회생시키는 등의 지대한 공적을 남기었다. 중국의 천자가 이 소식을 듣고 이에 대한 포상을 아끼지 않았고 또 적의 무리가 공의 안부를 살피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 그 당시에 있어서는 공의 위명(威名)이 어느 정도 수준임을 알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 것이다. 공께서는 무관(武官)이 아닌 선비출신의 장군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의 책훈(策勳)을 받은 최대의 영예를 누리었다. 어찌 이를 가리켜 보기 드문 위대한 일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미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공의 이러한 출세의 기반이 이 고을의 목사를 역임한 그때로부터 비롯된 서로간의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고을의 백성들이 오늘의 현재까지 그의 유업을 기리어 잊지 않는 많은 추모(追慕)를 가지었다. 공의 10세 손인 재윤(在允)이 지난 신축(辛丑)년에 이 고을의 원님으로 부임하였다. 신축이란 이 연도는 공의 책훈이 있는 그 해로부터 네 차례의 갑오년이 지난 1901년(광무5년)으로 그 다음 해인 1902년(壬寅)에 이 고을의 여러 인사와 함께 공익 창의비를 세우기 위해 나를 찾아와 이 비의 음기(陰記)를 부탁하였다. 오호(呜呼) 통재(痛哉)라! 공의 이러한 뛰어난 공적이 이미 나라의 사책(史册) 및 이정(彛鼎) 등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구태여 천루(賤陋)한 이 사람의 처지로 또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대략 고의 사적에 대한 약간의 전말을 서술한 나머지 이에 대한 송사(頌辭)를 지어 이르기를조그마한 이 빗돌(碑石)이 이 가운데 자리하니하늘땅과 다름없는 오랜 수명(長壽)를 누렸도다광주고을 여러 사민(士民) 서로 함께 힘을 모아지난 옛날 그 유업(遺業)을 그지없이 기렸도다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원 권율(權慄, 1537~1599)장군의 창의비(倡義碑)이다. 공(公)의 10세손 권재윤(權在允)이 신축년(1901년)에 광주군수로 부임하여 임인년(1902년)에 건립하였다. 찬자(撰者)는 은진 송병순(宋秉珣,)이고 서자(書者)는 11세손인 권교현(權敎鉉)이다. 송병순은 우암 송시열의 9대손으로서 1905년 을사보호조약 때 자결한 유학자 송병선의 동생이고, 그 역시 1910년 한일강제병합에 항거하여 1912년 자결한 사람이다. 비문에 의하면 권율은 광주목사로 재임 시 격문을 돌려 군사를 모집하여 이치(梨峙)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 공(功)으로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고, 행주(幸州)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경성(京城)을 회복하였으며, 제도도원수(諸道都元帥)가 되어 위태로움에 처한 종사(宗社)와 수많은 백성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이 비 옆면 두 곳에는 권율과 같이 전투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의 명단이 적혀 있고 뒷면은 권율 장군의 업적이 한자로 간략하게 적혀 있다. 광주목사 시절의 약법 10조와 의병모집, 이치 전투 승리, 행주대첩에 관한 내용 등이다. 비 양면에는 참좌(參佐, 아랫사람으로 참여하여 도움)한 여러 공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충신, 이세환, 김경립, 박대수, 김덕령, 박종정, 고성후, 유사경, 정빈, 권승경, 이완근, 박희수, 고인후, 이충립, 김치원, 김극추, 박천용, 정사준, 김제민, 선거이, 표헌, 정사현, 송제민, 정귀세, 권동현, 정지영 등 모두 2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26명 중 낯익은 이름이 바로 금남공 정충신이다.전면 都元帥 忠壯權公倡義碑후면嗚呼奧在壬辰天降大亂島夷猖獗長驅入寇兩南爲死地 上曰予聞權慄有將帥才拜光州牧使公膺 命至州 約法十條蓄銳以竢賊不敢入境而居民安堵如古於是招募境內子弟傳檄旁郡響應參佐者甚衆遂一戰而奏梨峙之捷湖南賴全以功陞本道巡察使再擧而鏖幸州之敵京城重恢爲諸道都元帥幾危之 宗社賴而後安無類之生靈得以更存 天子聞而獎大賞賊酋問公起居當世威名大震華夷卒以儒將策勳第一其猗歟休哉公之樹立盖基於是州而州之民懷其遺愛迄今不忘焉公十世孫在允辛丑莅郡乃是勘勳之五甲越明年與州人士謀以勒石徵文於余記其陰嗚呼公之豐功偉烈旣銘彛鼎而耀竹帛則固不待賤陋之贊述而明矣故畧識其顚末以歸之系以頌曰一片貞珉與天壤俱存光之士民庶無感於崇報光之溪山草木亦有輝乎 壬寅 陽月上旬 通仕郞義禁府都事 恩津宋秉珣 謹撰十一世孫 前參奉 敎鉉 謹書측면 參佐諸公 忠壯公 金德齡忠武 鄭忠信 別提 朴宗挺水使 李世環 郡守 高成厚 癸卯 三月 日直長 金敬立 佐郞 柳思敬萬戶 朴太壽 縣監 鄭 擯측면 僉使 權升慶 僉正 金致謜 兵使 宣居怡 有司 權東鉉察訪 李完根 承旨 金克秋 護軍 表 憲 鄭志榮 佐郞 朴希壽 參軍 朴天鵬 縣監 鄭思竤毅烈 高因厚 吏參 鄭思竣 持平 宋濟民府使 李忠立 忠剛 金齊閔 奉事 鄭貴世
    2018-06-11 | NO.137
  • 권재윤-행군수권공재윤청덕불망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903년이 행군수권공재윤청덕불망비(行郡守權公在允淸德不忘碑)는 광주군수(光州郡守) 권재윤(權在允)의 불망비(不忘碑)로 계묘년(1903년)에 건립되었다. 권재윤은 1901년에 광주군수로 부임하였고, 비의 앞면에 중은(重殷)으로 개명(改名)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권재윤은 1900년(고종 37) 12월 광주군수로 임용되었다. 1903년 8월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광주 군수 권재윤의 이름을 권중은(重殷)으로 고치겠다’고 내부 대신이 계를 올린 점으로 미루어 그때까지는 군수로 재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또 만취(晩翠) 권율(權慄)의 후손으로 청렴결백하였고 일심(一心)으로 다스려 칭송이 자자하였다는 내용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비의 앞면에 다음의 글이 있다.晩翠肖孫 淸白循吏  捐修公廨 恤及遷戶    一心爲治 萬口有譽   伐石無等 頌德永世
    2018-06-11 | NO.136
  • 금암김희수송덕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산 187(귀후재 옆)1985년이 금암김희수송덕비(錦庵金熙壽頌德碑)는 金明均 짓고 康仁煥 쓰다.낭장공파 사촌 종중 건립하다.
    2018-11-13 | NO.135
  • 금학김규현탑성거사공덕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846(원효사 아래 부도 및 비석군)1998년이 금학김규현탑성거사공덕비(金鶴金圭炫塔成居士功德碑)는 원효사 주지 현지 건립하다.
    2018-11-13 | NO.134
  • 금호최공원택실적비
    광주시 광산구 산월로21번길 26 (무양서원)1934년금호최공원택실적비(錦湖崔公元澤實績碑)는 무양서원 앞에 있다. 최원택(崔元澤)의 자는 도경(道京), 호는 금호(錦湖), 본은 탐진이며 벼슬은 참봉, 1862년(임술)생이다.이 비는 1934년(단기 4267년) 2월에 전 가의대부이조참판겸동지 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규장각직제학 세자시강원검교보덕 여흥 민병승이 기문을 쓰고 해주 오세창이 글씨를 썼으며 현직에 있는 시임(時任) 벼슬아치와 전직에 있던 원임(原任) 벼슬아치인 시원임은 박노선, 고광수, 기종섭, 이재춘, 이완상 등이다.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6년(병오년)  4월 10일 문인을 명하여 동맹록을 만들었는데 110명 가운데 최원택이 참가했다. 일본인들과 서양 사람들의 정착으로 개화의 바람이 일자 최원택은 이 지방의 선각자들과 토착세력인 지방 개화 인사들과 함께 자강・자립의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계몽운동에 나섰다. 주요 인사로는 최성기(최태군의 부친), 최종섭(최호연의 부친), 최원택(광주전등회사・무양서원의 창설 참여), 김인수(김양균의 조부), 정인준 등이 있다. 광주에 전등이 등장한 건 1917년 8월께. 동구 수기동 43번지에 있던 광주전등회사가 전기를 공급하면서부터였다. 《광주지방사정》이란 책에 의하면, 처음 광주전등의 발전양은 3500개의 전등을 켤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최원택은 무양사원 창설에 참여했다. 이 비가 세워진 무양서원(武陽書院)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서원이다. 1984년 2월 29일 광주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인종(재위 1122∼1146) 때 어의(御醫)이면서 명신인 장경공 최사전을 중심으로 그의 후손 4명(손암 최윤덕, 금남 최부, 문절공 유희춘, 충열공 나덕헌)을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최사전은 의술로써 벼슬에 나갔는데 왕의 총애를 받아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다. 무양서원은 1927년에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서 세운 서원이다. 서원의 이름은 광주의 옛 지명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강당인 이택당을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에 합의문과 합인문이 있다. 합의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동재인 성지재가 있고 왼편에는 서재인 낙호재가 있다. 또한 높은 땅 위에 담장이 있는 무양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사당 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원래 서원은 제사 기능과 교육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탐진 최씨 문중에서는 1945년 광산구 쌍암동에 무양중학교(현 비아중학교)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18-06-25 | NO.133
  • 김계윤-계산김계원모선공적비
    광주시 북구 동문대로112번길 99(장렬사 내)2015년桂山 金桂潤 慕先 功績碑文세상(世上)에 선덕(善德)을 베풀면 천복(天福)을 받는 것이니 원치 않는 자 있으리오만 이를 행하는 자는 드문 것이다.여기에 자랑스러운 의덕(懿德)이 있으니 그 이름은 김해인 김계윤(金海人 金桂潤)이요 호는 계산(桂山)이니 가락국 수로왕의 70세손이며 흥무왕 휘 유신의 58세손으로 전주 이남희(全州 李南熙)를 배우자로 맞아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전문의와 의학박사 학위(學位)를 취득하고 정형외과병원을 개설하여 종합병원(綜合病院)으로 성장발전시킨 의료계의 원로(元老)이며 고향인 장성에 복지관(福祉館)과 장학회(獎學會)를 설립하였고 특히 나주시에 대단위 사회복지법인 계산원(桂山院)을 건립하여 장애인복지사업에 필생의 과업으로 심혈(心血)을 기우리고 계시니 인술(仁術)과 봉사(奉仕)의 표상(表象)이 되고 있다. 이외에 지역사회 발전에 공(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지역의 덕망가(德望家)로 존경과 추앙을 한 몸에 받고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숭조경종(崇祖敬宗)의 정신이 남달라 종사(宗事)발전에 열성적(熱誠的)으로 헌신하신 종중(宗中)의 큰 어른이시다.1976년 장열사중건(壯烈祠 重建) 사업에 1백 만원을 헌성(獻誠) 하였으며 1987년 종친회관 건립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거금 오천만(5千萬)원을 쾌척하고 모금 운동을 전개하니 많은 헌성금이 답지하였고 그 후 2011년에 종친회관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숙원사업을 이루었다. 또 제6대 장열사 보존회장시에는 일천만(1千萬)원을 솔선 출연(出捐)하고 열악한 재정을 1억 원이 될 때까지 모금하였으며 2002 년에는 전국 12사우(祠宇) 보수자금 2억 원을 배정받아 기와교체 및 단청작업을 완공(完工)함으로써 장열사(壯烈祠) 관리보존과 활성화를 위한 공(公)의 지극정성이 구석구석에 서려 있다.이외에도 남다른 숭조 정신으로 위선(爲先)과 부종(扶宗)과 계도(啓導)사업에 많은 업적을 남기시니 그 크신 공적(功績)을 빗돌에 새겨 한평생 종사 발전을 위한 값진 삶이 후대에 큰 교훈(敎訓)이 되고 영원히 본 보기가 되를 바라는 바이다.서기 2015년 (가락기원1974년 乙未) 5월 일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부회장 장열사 보존회장 김종태 짓고 쓰다
    2018-12-16 | NO.132
  • 김기명-통훈대부희천군수의암김공충의비
    광주시 북구 본촌동 378-1(동주민센터 앞)1961년이 통훈대부희천군수의암김공충의비(通訓大夫熙川郡守義菴金公忠義碑)는 金珍鉉이짓고 金容仁(전면) 李玟秀(후면)이 썼다.이 충의비는 1961년 광산김씨 문중에서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힘쓴 희천군수 김기명(金基命, 1540~1593) 장군의 숭고한 충절을 높이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공의 자는 응여이고 호는 의암이며 조선 중종 때 광주 북구 본촌동 옛 부동(釜洞)에서 참봉 김광헌과 광산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기명은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 함경도 희천군수로 재임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양성 행주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우고, 호남의 관문인 진주성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성에 입성하여 의병장 김천일의 막하 부대장으로 최경회, 고종후, 황진, 장윤 등과 함께 성을 사수하다 함락위기에 처하자 향년 54세로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선조는 1605년 3등 선무원종공신에 봉하였고, 1623년 인조는 도총경력에 추증하였다.*2022년 4월 1일 수정
    2018-11-13 | NO.131
  • 김덕령은륜비-有明朝鮮國贈崇政大夫議政府左賛成謚忠壯行通政大夫承政院承㫖忠勇將軍金公德齡恩綸碑
    광주시 북구 송강로 13(금곡동) 충장사 내1842년김덕령 은륜비각이 있고 그 안에 비석이 있다. 원래는 충효동 배재마을 899번지에 백비로 있었으나 나중에 목사 조철영이 이 사실을 알고 글을 새겨 충장사로 옮겼다.은륜비(恩綸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동쪽 20리의 거리에 있는 빗돌로 명나라 영력(永曆) 연호(年號)로부터 네 번의 임인(壬寅)년이 지난 1842( 헌종8년)년도에 세운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의 비석이다.그 옆에는 원래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은륜비가 있다. <유명조선국김충장공덕령은륜비>라고 했다.비문은 비신의 네 면에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시 광주목사光州牧使였던 조철영趙徹英(1777-1853)이 정조 연간에 내려진 전교傳敎와 사제문賜祭文,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중 정조가 지은 서문을 옮겨 지은 것이다. 글씨는 조철영이 썼다. 서체는 안진경풍顏眞卿風의 해서이다. 비신 좌측면에 ‘방만동묘비자倣萬東廟碑字’라고 밝히고 있어서, 글씨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만동묘비’, 곧 ‘만동묘 묘정비萬東廟廟庭碑’의 글씨는 안진경의 해서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각자는 미상이다.비는 개석, 비신, 하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석의 재질은 응회암이고, 비신의 재질은 석회암이며, 하대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개석은 팔작지붕 형태이다.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비신의 상태는 양호하나, 전면 우측 상단과 후면 좌측 하단에 파손이 확인된다. 하대석은 직육면체 형태이다. 은륜비의 좌측에는 비의 건립 경위를 기술한 ‘추기비(1842)’가 있다. 비는 개석 없이 비신 상단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이다. 비문은 비신의 네 면에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순절한 김덕령의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흥양이씨興陽李氏의 순절처에 세워진 비를 조철영이 건립했다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은륜비가 세워지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비문(碑文)>본주(本州) 목사(牧使) 조철영(趙澈永) 지음지난 정묘(正廟) 무신(戊申)년에 김장군의 마을에 그의 유업(遺業)을 기리는 표리비(表里碑)를 세우라는 임금의 교시(敎示)에 의해 갑자기 빗돌을 마련하여 이를 다듬으면서 약간의 흠집이 생기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께서 이 돌을 버리고 보다 견고한 돌을 사용하라는 명령에 의해 다시 새로운 돌을 구하였다. 이 때문에 그 돌이 현재까지 그 비의 명사(銘詞)를 지은 사람의 집에 그대로 방치되어 그 용도를 찾지 못한 많은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오호(鳴呼) 통재(痛哉)라! 장군의 뛰어난 정충(精忠), 억울한 죽음에 있어서는 이미 열성조(列聖朝)의 많은 설원(雪寃)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正祖)때에 이르러 더욱 이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었다. 높은 관직을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정함과 동시에 표리(表里)의 윤음(綸音)을 비롯한 사우(祠宇)의 제문(祭文) 및 유사(遺事)의 서문(序文)을 내리는 등의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백대(百代)의 오랜 광영(光榮)을 누릴 수 있는 대성인(大聖人)의 위대한 포상(褒賞)임이 분명하다.비록 만분지일(萬分之一)의 조그마한 은전(恩典)이라 할지 라도 이 세상의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면 어찌 이를 누릴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김장군의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임금께서 내리신 전후(前後)의 어제(御製)를 해당 연월(年月)의 순서에 따라 이 돌에 새기어 이를 기념하는 오늘의 이 비(碑)를 세우게 된 것이다.옛날의 그 돌이 마치 오늘의 이 날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깊은 감회가 있기 때문에 표리비가 있는 그 근처(近處)에 이 비를 세워 그 이름을 은륜(恩綸)이라 하였다.*자료 : 전라북도.전라남도.광주광역시(2020), 2020금석문 탁본조사보고서, 문화재청.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
    2018-06-18 | NO.130
  • 김세근 장군 훈적비
    서구 눌재로 420(세하동)임진왜란 의병장 삽봉 김세근 장군 훈적비勳積碑는 비문에 김해 가락국 수로왕의 제 60세손으로 성장과정과 임진왜란에 참여하여 금산전투에서 순국하고 부인도 목숨을 끊은 내용이 담겨 있다. 2000년에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장 오성근吳晟根과 학산사보존회장 김종훈金鍾燻 등이 서창한옥문화관과 야은당 사이 주차장 한쪽에 세웠고 흥성인 장재철張在鐵이 글을 짓고 영천인 李敦興이 글씨를 썼다.
    2018-05-25 | NO.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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