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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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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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한일-제헌 최한일선생 송덕불망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901년 건립, 1973년 재건립제헌최한일선생 송덕불망비(濟軒崔漢鎰先生頌德不忘碑) 비문 앞면에는 奉公警署 功德攸曁 惟愛商旅 玆頌永世라 했다.이 비는 최한일(崔漢鎰, 1846~1923)의 불망비(不忘碑)로 광무5년(1901년)에 세웠던 것이 훼손이 심하여 1973년에 다시 건립하였다. 찬자(撰者)는 김유신(金裕新)이고 서자(書者)는 고정흠(高廷欽)이다. 비문에 의하면 제헌(濟軒) 최한일(崔漢鎰)은 본관은 탐진(耽津), 손암(遜庵) 최윤덕(崔允德)의 11대손으로 1846년(헌종12) 서석산 아래 북촌(北村)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조선 말 국정이 혼란하여 민란이 봉기하는 등 전국이 어수선할 때 지사(志士)와 의인(義人)들이 광주(光州)에서 모여 공(公)을 수성별장(守城別將)으로 추대하였고, 당시 목사(牧使)인 이희성(李羲性)과 함께 별초군(別抄軍) 300명을 거느리고 방어를 독려하였다고 한다. 이 공으로 전라남도경무관서리총순(全羅南道警務官署理總巡) 겸 화순군수(和順郡守)에 제수되었다.
    2018-06-11 | NO.23
  • 춘강거사나주오공종남선행비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 137-7(가마마을)
    2018-11-11 | NO.22
  • 춘강김공순곤기실비
    광주시 남구 노대동 707, 신기마을 양양재1981년이 춘강김공순곤기실비(春岡金公淳坤紀實碑)는 남구 노대동 노대마을 입구 도로변에 1981년 건립되었다가 노대동 신기마을 뒷편 양양재洋洋齋로 옮겨졌다. 이 비는 김순곤이 이 고장 발전에 기여한 내용을 기록하고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김순곤의 자는 경순, 호는 춘강, 본관은 김해로서 김용관金容權의 3남으로 1918년 10월29일 이 곳에서 태어났으며, 濯纓 관영 선생의 15대손이다. 1979년 11월28일에 사망하였다. 서체는 국한문혼용체로 되어 있다. 높이는 165cm, 폭 57cm, 두께 22cm이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어렸을 때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어른이 되어서는 낙후된 이 고장의 발전을 위해 번민하면서 이 고장의 발전을 위해서는 향토인이 함께 뭉쳐 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춘강 선생은 南堤池防 저수지 축조공사에 심혈을 기울여 답 825평을 희사하였고 사재를 털어 하수도 개발과 다목적 마을회관을 건립하는 등 어려운 일에 대의를 일해 살았다는 비문 내용을 볼 수 있다. 비문은 1981년 2월에 조선대학교 교수인 김명현 ⾦海 ⾦明炫이 지었다.
    2018-06-14 | NO.21
  • 춘담기인 최병채기적
    광주시 동구 학동 필문대로329번길 22(武光祠)1958년이 춘담기인 최병채기적(春潭奇人崔炳釵紀績)은 동구 학동 구 춘태여상 자리인 무광사(武光祠) 경내에 있다. 춘담 최병채春潭 崔炳釵(1907~1987)의 공적내용을 화강암에 음각하였다.최병채는 1907년 곡성군 석곡면 운룡리(현 순천시 주암면 운룡리)에서 부친 경환(炅奐)씨와 김해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중엽 중종대에 의정부 사인(舍⼈)을 지낸 최산두의 16대 손이다. 15세부터 순천의 조정림에게 한의학을 배우고 화순 동복의 이진규에게 침구학(鍼灸學)을 배운 후 22세 되던 1928년 한약업사 면허증과 침구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부족한 공부를 위해 일본 오오사카 하마대라 침구학교에 유학했다. 43세 되던 1949년,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인과원(因果院)을 개업한 후 한의사이자 교육자, 사회사업가로 이름을 알렸다.그는 특히 육영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운룡초등학교(곡성 석곡ㆍ1947)를 시작으로 춘태여자고등공민학교(1960), 농업기술학교(화순 이서ㆍ1965), 춘태여자중학교(1966), 신농중학교(1967),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1967), 국제고등학교(1984)를 설립했다.그는 한의사로 번 전 재산을 궁핍한 사람을 구하고, 거지들을 도와주며, 민족교육을 위해 분토(糞⼟)처럼 쓴 인물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기인이라 불렀다.무광사(武光祠)는 그가 1957년 이은상(李殷相)박사의 자문을 받아 건립하였는데, 여기에는 이순신을주벽으로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든 문열공 김천일, 충장공 김덕령, 충장공 정운, 금계 노인,수은 강항, 수사 송희립을 모시고 있다. 무광사에서는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 춘향제(春⾹祭)를, 기일인 12월 16일 추향제(秋⾹祭)를 지낸다.⼘天下宰相 不許則⼘天下名醫 此以其尊卑雖殊 濟世均也 然余嘗疑其語矣 今⺫擊⽽後 知其不誣也 春潭奇⼈崔炳釵 通政⼤夫光洙之抱寢郞炅奐之嗣 上祖新⿑ 先⽣天性慈孝 才器過⼈ 涉獵經史 嗜軒岐之書⽽知醫 常對證論劑 ⾨庭成市 爲闡家世之潛光幽德 ⽴碑碣建齋閣 所謂 望雲閣 迎⽉軒 翠⾬亭 雙萱橋 在天寺 等 六七棟合三⼗餘間 櫛⽐淹洞壑 ⼭明⽔淸 ⽯奇花繁 有此美莊終⾝ ⼀朝卷歸于光州市楊林洞 ⼈莫知其故也 居無幾庚寅亂作 舊居之雲⻯⾥百餘⼾ 皆化焦⼟ 嚮⽈同隣之張三李四 皆爲劍頭寃魂 若⾮奇⼈不俟終⽇ ⽽作必隨其中矣 不惟⽐也 右建物亦爲獨存之靈光 ⼈以爲神 當戊戌之春 ⼜於府南⼭之顚 拓起⼟⽊ 不數⽉⽽告成 第⼀ 武光祠 配享 李忠武公 ⾦千鎰 ⾦德齡 鄭運 魯認 姜沆 宋希⽴ 七公 興起觀感第⼆ 醉醒院 延賓朋資燕嬉 第三 ⻱蓮菴 供禮 觀世⾳ ⻄⼭⼤師 泗溟堂之影 第四 ⾬花堂 居沙彌淸淨道場 第五 貞蘭室 啓虛菩薩修鍊最後 第六 ⽇⽉閣 藏圖書及國寶繙閱博識 第七 龍鳳院 育孤兒無告 馴致⽂明 第⼋ 烏⾸堂 招迎者宿討論古今 輦巖⽯筧 ⽔泉環築池臺 地勢兀兀落落 如移⼀仙境 放府中之半空 其江⼭之杳靄 市街之參差 眼欲窮⽽膏忽開也 猗歟韙哉 奇⼈ 平⽣⽤金如糞⼟ 療疾病 救窮之憐丐乞 興學校扶會社 布宮室享⻤神 安老少 其廣業崇德 果何如哉 旣⺒有良⼼ 窮⾏實踐 如此 以菲薄⾃奉 ⽽利⼈澤物之功 昭著遐邇 令名之無窮 眞可也 與范⽂正之宰相 相仲也 左記⼈⼠ 欲誇鄕産⽽奇績 ⻱將戴⽯ 放三塔之傍 徵余⽂ ⽂拙雖辭不獲 略擧梗槩 後之君⼦ 覽此⽽宜有以考焉 乃繫之以詩⽈雲⻯欝盤 洞壑深寬泉紅苔紫 沙碧松寒篤⽣異⼈ 才良形端遷居光州 倍勝⾵流杏林慈航 花⽯名樓豚肩不掩 節儉⾃修祠祀諸公 挽⽇頹⾵資⽗移居 ⾮孝曷忠天應有報 昌⼤無窮檀紀 四⼆九⼀年 戊戌 ⽉ ⽇ 完⼭ 李敎儀 撰번역천하에 재상을 바라나 허락하지 않은 즉 천하의 명의를 기대한다. 이는 그 존비가 비록 다르나 세상을구제하는 것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일찍이 이 말을 의심하였으나 지금 목격한 후로 그것이 거짓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춘담기인 최병채는 통정대부 광수의 손자요, 경환의 아들이다. 선조는 신제이다. 선생은 천성이 자효하고 재기가 남보다 뛰어나 경사를 섭렵하고 의서를 좋아하여 의술을 알았으며 항시 병의 증세를 보고 약을 지었다. 문전성시를 이루어 가세의 잠광유덕을 열었으며 비석을 세우고 재각을 건립하였다. 이른바 망운각, 영월문, 취우정, 쌍훤교, 재천사 등 6, 7동을 합하여 30여칸이 즐비하게 마을에 잠겨있어서 산은 밝고 물은 맑고 돌은 기이하고 꽃은 번성하여 이처럼 아름답고 장엄한 곳에서 종신코자 했으나 갑자기 광주시 양림동으로 돌아가니 사람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거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인란(6.25전쟁)이 일어나 옛 살던 운룡리 백여호가 모두 초토화되었다. 지난 번 마을의 보통 사람들이 다 칼끝의 원혼이 되어 만일 기인이 지체하고 떠나지 아니했다면 반드시 그 속에 들고 말았을 것임은 비할 바가 없다. 위 건물 또한 홀로 노나라의 영광전처럼 남았으니 사람들이 묘하다고 여겼다.무술년 봄을 맞아 또 광주의 남산 끝자락에 토목사업을 넓혀 일으켜 몇 달 가지 않아 완성하니 제1 무광사로 이충무공 김천일 김덕령 정운 노인 강항 송희립 등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7공을 배향하였다. 제2성원은 손님을 맞아 연회를 베푸는 곳이고, 제3 구연암은 관세음보살 서산대사 사명당의 영정을 공례한 곳이며, 제4 양화당은 사미가 거하는 청정도량이다. 제5 정난실은 보살이 전심으로 수련하는 곳이고, 제6일월각은 도서 및 귀한 자료들을 저장하는 곳이다. 제7 용봉원은 고아를 길러 순치하여 문명에 이르게 하는 곳이며, 제8 도수당은 초대한 자들과 밤새 고금을 토론하는 곳이다. 좋은 돌을 쌓고 주변에 연못을 둘러 파 지세가 빼어나서 마치 하나의 선경을 옮겨서 시내의 공중에 띄워 놓은 듯하다. 여기에서 보면 강산의 아득함과 시내의 아기자기한 모습을 눈으로 다 볼 수가 있어 마음이 활짝 열리는 듯하다.아, 위대하다. 기인은 평생 돈을 분토같이 쓰면서 남의 질병을 치료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걸인을 불쌍히 여겨 주고 학교를 세워 배우게 하고 회사를 도와주고 궁실을 지어 귀신을 향사하고 노소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그 광업숭덕이 과연 어떠한가? 이미 어진 마음이 있어 궁행실천하기를 이같이 하였다. 이런 선한 마음으로 몸소 실천을 하고 자신은 검소하게 생활해 남에게 이로움을 베풀어 그 공덕이 멀고 가까운 데에 두루 드러나 훌륭한 이름이 한없이 나고 있으니 범문정공의 재상됨과 맞먹을 만하다. 고향사람이라  자랑하고자 하여 기적을 돌에 새겨서 삼탑 옆에 놓고자 내 글을 구하니 글이 졸렬하나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요점만을 들어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지만 후의 군자들이 이를 보고 마땅히 살핌이 있으리라. 이어 시로써 말하기를,雲⻯欝盤 洞壑深寬 운룡마을 울창한 곳에 동학은 깊고 넓어泉紅苔紫 沙碧松寒 샘이 맑고 이끼 푸르니 모래 푸르고 소나무는 곧네.篤⽣異⼈ 才良形端 하늘이 이인을 내니 재주 넘치고 몸이 단정하여遷居光州 倍勝⾵流 광주로 이사하여 풍류는 배로 늘었네.杏林慈航 花⽯名樓 의원으로서 자비를 베푸니 화석에 명루로다.豚肩不掩 節儉⾃修 풍족히 먹지 않고 검소함을 스스로 다해祠祀諸公 挽回頹⾵ 여러 성인을 제사지내며 퇴폐한 풍속을 만회하였네.資⽗移居 ⾮孝曷忠 아버지 섬기기를 다하니 효 아니면 어찌 충성하리요.天應有報 昌⼤無窮 하늘이 복을 내려 창대함은 끝이 없구나.단기 4291년 무술년 완산 이교의 지음
    2018-11-09 | NO.20
  • 충장공불조이건희성비
    광주시 북구 충효동 성안마을이 충장공불조이건희성비(忠壯公不祧移建犧誠碑)는 비의 형태가 아니라 사당과 유사하여 현판에 御製致祭文이라 하였음
    2018-12-01 | NO.19
  • 충장사건립공적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1023(충장사 내)2004년이 충장사건립공적비(忠壯祠建立功績碑)는 金判圭 짓고 沈愚慶 쓰다.
    2018-11-13 | NO.18
  • 취병조공강생구지비
    광주시 남구 도촌동 산 181606~1679이 취병조공강생구지비(翠屛趙公降生舊址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서북쪽 30리 천곡(泉谷)에 있다. 조형(趙珩)공의 6세손 운한(雲漢)이 본주(本州) 목사로 부임하여 비석을 세웠다. 찬자는 운한(雲漢)이다.기문에 따르면 7세조 승지공(承旨公)이 병오(丙午)년 봄에 본주(本州) 목사로 부임하여 당년 10월 22일 취병공(翠屛公)을 낳았다. 이곳의 지명이 천곡(泉谷)이다. 고(故) 칠졸재(七拙齋) 박공(朴公) 휘(諱) 창우(昌禹)는 경서(經書)에 통하고 학문이 깊어 호남의 선비들이 추증(推重)하는 학자이다. 이때 산실(産室)을 박공(朴公)의 집을 빌려 정하였다. 읍에서 30리 거리에 있는데 그후 자손이 산을 넘어 안청리(安淸里)로 이사하였다.지난날 동강공(東岡公)이 암행어사로서 남방을 순행할 때 이곳을 지나면서 시를 지어 이르기를 "왕부(王父,12)께서 목사로 부임 하시어 선친께서 태어난 곳이네" 하였다.  불초 6세손 운한(雲漢)이 외람하게도 본주(本州)의 목민관(牧民官)으로 부임하여 몸소 옛 터를 살피고 이어서 박칠졸재(朴七拙齋)의 봉사손(奉祀孫) 만동(萬東)을 방문하여 정의를 나누고 유적을 찾아 드디어 그곳에 대(臺)를 쌓고 글을 새겼다. 아! 2백여년이 지난 오늘날 불초가 외람하게도 선조께서 태어난 옛터에다 비석을 세우고 글을 새기는 것은 진실로 우연이 아니라 어쩌면 오늘의 기다림이 있어서 일 것이다. 감모(感慕)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손을 씻고 삼가 기록하였다.
    2018-06-18 | NO.17
  • 탄월박공하선송덕비
    광주시 서구 벽진동 벽진마을1963년이 탄월박공하선송덕비(灘月朴公夏善頌德碑)
    2018-12-01 | NO.16
  • 탐진후인최원봉 김해후인김종우 송덕비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83-1 봉산정사 입구1968년탐진 최원봉崔元鳳과 김해 김종우金鍾堣의 은덕을 기리는 비로 1968년 4월에 봉학마을 봉산사 입구 못미처서 오른 편에 세워졌다. 뒷면의 송덕시 내용으로 봐서는 봉학마을과 관련한 인물로 평가된다.비의 뒷면에는 정부룡 글과 O효식의 글씨로 된 송덕시가 써있다.황금평야 서석들이 한눈안에 보일세라영산강 이른 바람! 세월 감을 恨하노라유서깊은 약수터에 오손도손 즐길진져그 이름 千秋万代 延O剤 하여지고인생향락 누리나니 이분들의 은덕일세이 비를 세운 고문은 송대유, 고광수, 이백휴, 최기원, 유재중, 김용학, 박영태, 강OO 등으로 나타나 있다.
    2018-05-25 | NO.15
  • 통정대부고공성운시은불망비
    광주시 남구 진월동 500-1통정대부고공성운시은불망비는 효덕동주민센터 입구에 있다. 1931년 신미년 4월에 효천면 소작인들이 고성운(1857∼1936)의 시은에 보답하는 뜻으로 공동으로 세웠다.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산 33-1번지 삼충각에 마애비가 또 있다. 通政大夫 高聖運 彰善碑(통정대부 고성운 창선비)는 1922년 음력 3월에 암벽에 글씨를 새겼다. 통정대부는 조선시대 정 3품 상계의 품계명으로 당상관이라 부른다. 목사 정도의 직급이다. 그는 상당한 재력가로 빈민 구제로 통정대부란 벼슬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압벽에 새긴 칭송의 글은善惡之分 善哉百行(선악을 구분하여 온갖 착한 일만 하였으니)有微有顯  於石彰善(숨기기도 하고 나타내기도 하여 돌에 새겨 표창하노라) 신문기록으로는 동아일보에 1922년6월30일, 1922년 11월 11일, 1923년1월 16일 화순군 도곡면 주도리에 살고 있으면서 학교 육영사업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어 있다.고성운은 화순군 도곡면 주도리 중촌마을에 살았다. 백성의 어려움을 살펴 빈민구제에 힘썼기에 나라로부터 중촌마을에는 공적비가 세워졌다. 마을 초입 당산나무 아래에도 별도의 비석이 초라하게 서 있다.
    2018-10-26 | NO.14
  • 하은김공시혜실적비
    광주시 북구 매곡동 306(김용학 가옥내)1936년이 하은김공시혜실적비(荷隱金公施惠實績碑)는 高光璉 짓고 宋泰會 쓰다서방 극락 양면 소작인 일동 건립
    2018-11-12 | NO.13
  • 하은김공희수시혜비
    광주시 북구 매곡동 306(김용학 가옥내)1932년이 하은김공희수시혜비(荷隱金公喜洙施惠碑)는 장성 진원 양면 소작인 일동 건립하다.
    2018-11-12 | NO.12
  • 하은김공희수유혜비
    광주시 북구 매곡동 306(김용학 가옥내)1931년이 하은김공희수유혜비(荷隱金公喜洙遺惠碑)는 담양 수북 대전 양면 소작 일동 건립하다.
    2018-11-12 | NO.11
  • 함평이공휘종우유적비
    광주시 광산구 임곡등 방혜마을1997년湖學敎授 義禁府都事 蔚山兵馬節度使 咸平李公諱從愚遺蹟碑는 16세손 이상범이 짓고 전주 이재철 쓰다. 방혜마을앞 우산각 옆에 있다. 咸平李氏 雲峰公門中에서 건립했다.
    2018-12-02 | NO.10
  • 현석 노길동공적비
    서구 서창동 서창농협 입구에 있다.파평인 윤종관이 찬하고 광주인 노빈이 글씨를 썼다. 용두수리계설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주하림 등 이 10명이 추진위원이며 찬조자는 30명으로 1995년 4월에 세웠다.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노길동은 충주노씨 절효공 휘 준공의 24세손으로 1927년 5월 9일 서창리 799번지에서 출생하여 지방공무원으로 27년간 근무하다 퇴직했다. 향리에서 거주하던 중 1983년 속칭 개물들 개인양수장의 농민착취를 물리치기 위해 경작인공동수리계를 주하림 위원장, 김덕수외 추진위원과 조직하여  자금을 한 푼도 없이  空拳으로 서창농협에서 거액을 대출받아 개인이 운영하는 양수장을 매입하여  용두수리계라는 이름으로 발족했다. 그러나 자금미수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일처럼 고심하여 거액의 채무를 상환하고 건실한 수리계를 세운 공로를 후세에 길이 찬양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2018-07-16 | 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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