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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14건)
- 광주 서구문화원, ‘의향정신 찾아 떠나는 여행’ 가져
- 광주 서구문화원은 한국학호남진흥원의 문화원 동행사업으로 23일 광주지역 내 의로움과 의병정신을 간직한 장소들을 방문하고 현장특강을 듣는 등 광주정신의 뿌리를 찾는 답사를 진행했다.이번 답사는 의로움과 당당함으로 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에 대한 현장 탐구를 통해 선현들의 용기와 희생이 오늘의 광주 공동체를
- 봉산정 鳳山亭
- 근세 초 기의 한학자 고재현(高在鉉, 1885 ~ 1967)이 지어 학문을 강구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강학터로 사용했다.그는 고재현은 초명이 재봉(在鳳)이며, 자는 치구(致球)이고, 호는 지산(志山)이다. 무안읍 용월리 토동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민재(敏齋) 박임상에게 나아가 공부하였
- 정대현
- 정대현(鄭大鉉, 1873~1946)의 자는 익삼(益三), 호는 석계(石溪), 본관은 하동(河東) 정씨다. 아버지는 정지초(鄭志楚), 어머니는 강화최씨(江華崔氏) 사이에 광주광역시 오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성이 온후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날마다 책을 읽었으며,
- 봉산정사 鳳山精舍 엄이재 掩耳齋
- 서구 용두동 산 79번지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 깊숙한 꽤 높은 곳 봉황산 가파른 중턱에는 한 지식인이 시대적 아픔에 어쩌지 못하고 읍궁암泣弓菴에서 울분을 삭히며 세상을 마감했던 유서 깊은 흔적이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30리의 거리인 봉황산에 위치해 있다.주변에 큰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봉산
- 봉산사 / 鳳山祠
-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 봉황산 구릉지대고광선(高光善)을 배향하는 사우1906년 창건1906년 지역유림과 제자들이 고광선을 기리고자 건립사당 :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봉산사 묘정비추모제 유허비상의문(솟을대문)엄이재(掩耳齋) : 정면 4칸, 측면 1칸, 팔작지붕향사인물: 고광선(高光善, 1855~1910) 본관-장흥(
- 엄이재중건의연방명비
-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 봉황산 봉산정사1976년이 엄이재중건의연방명비(掩耳齋重建義捐芳名碑)는
- 정인서 문화비평19, 광주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자
- 광주를 걷는다. 광주에 주민등록을 두고 살기 시작한 지 40여년이 되었는 데도 아직도 모르는 광주의 기억들을 찾을 때마다 새롭기만 하다. 신문기자 생활을 30여년 했으니 제법 오래 했고 문화원장을 맡은 지도 4년이 지났다. 자연스레 지역문화에 애정을 쏟고 있다.지난해 <양동시장에서 서창 들녘까지>라는 서구지
- 서구문화원, 17일 광주지역 문화답사 가져
- 광주 서구문화원(원장 정인서)은 17일 문화원 회원 2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9월중 지역문화답사로 벽진서원과 박호련 묘소, 봉산정사, 용두동고인돌 등을 둘러보고 지역문화와 스토리텔링에 대한 방안 등을 논의했다.이날 첫 방문지는 풍암동 벽진서원으로 이곳에 향사된 회배 박광옥은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 김천일과 함께
- 정인서 문화비평13, 광주, 문화콘텐츠를 놓치고 있다
- 솔제니친은 러시아의 작가이다.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스탈린 시절 강제노동수용소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작품을 발표해 세계적인 작가로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그 이후로도 비판적인 글들을 발표했다. 1974년 2월 시민권 박탈과 강제 추방당했다.소련 붕괴 이후 1994년 20년간의 망명
- 엄이재중건비
-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정사)중건비는 1976년에 파평인 중헌重軒 윤정복尹丁鍑이 글을 지었고 함평인 이창헌李昌憲이 글씨를 썼다.
- 엄이재유적비
-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정사)유적비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의 문하생인 충주인 송애松厓 박하형朴夏炯(1891~1971)이 글을 짓고 후학인 죽산인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1907~1987)이 글씨를 썼다.
- 읍궁암(눈물바위)의 푸른 이끼
-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에는 읍궁암泣弓巖이 있어요. 엄이재掩耳齎 뒤편에 있는 푸른 이끼가 낀 바위를 말합니다. 이 엄이재는 한말 유학자이자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 선생이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봉황산鳳凰山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
- 봉황산
- 서구 용두동과 남구 압촌동광주 무등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는 수레바위산 - 소룡봉 - 분적산 - 금당산을 지나 화방산 - 송학산 - 봉황산 - 등룡산으로 이어지다가 승촌에서 영산강을 만나 끝을 맺는데 그중에 봉황산은 167.8m이다. 서창과 대촌의 중간에 있으면서 눌재로를 사이에 두고 송학산과 마주보는 산이다.
- 봉산사
-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번지서구 용두동 봉학마을 깊숙한 꽤 높은 곳 봉황산 가파른 중턱에 봉산사가 있었다. 이곳은 을사늑약 이후 어지러운 세상에 그만 ‘귀를 닫아버리고[掩耳]’ 싶었다고 해서 ‘가리다, 숨기다’의 엄(掩)자를 쓴 엄이재 띠집을 짓고 후학을 가르친 현와 고광선이 지낸 곳이다.주변 숲속에 읍궁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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