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포충사)충노봉이귀인지비(忠奴鳳伊貴仁之碑)는 포충사에 있다.고경명의 집에서 일하던 노비 중에 봉이와 귀인이 주인을 따라 의병에 참여했다. 금산에서 사망한 고경명과 둘째아들 인후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이들이었고, 첫째아들 종후의 두 번째 거병에도 참가해 주인과 목숨을 함께 한 의인이
광주시 북구 화암동 218(운암서원 내)1905년이 운암서원유허비(雲岩書院遺墟碑)는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1549∼1602)을 모신 서원 내에 있다. 숙종 32년(1706) 지역 유림들의 청원으로 북구 운암동 東背 마을 앞 山에 터를 잡아 건립하고 조선 중기의 학자 해광 송제민을 배향하였다. 숙종 35년(1709)에 임
벽진서원이 복원된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지 150년만의 일이다.벽진서원위패봉안추진위원회는 오는 7일 오전 11시 광주서 서구 풍암동 769-1번지에 회재 박광옥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있던 운리사 일대를 벽진서원으로 복원하는 행사를 갖는다.회재 박광옥 선생은 1526년 1월26일 광주 서구 매월
학산사(鶴山祠)는 서구 서창동 불암마을에 있는 의병장 김세근(金世斤)을 모신 사당이다.1958년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김세근의 충의정신을 기리고 그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경내에는 사우인 학산사와 경의당, 학산사 묘정비 등이 세워져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22일에 춘향제를 지낸다.향사 인물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에는 읍궁암泣弓巖이 있어요. 엄이재掩耳齎 뒤편에 있는 푸른 이끼가 낀 바위를 말합니다. 이 엄이재는 한말 유학자이자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 선생이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봉황산鳳凰山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
서창동 중앙부에 있는 백마산은 해발고도 162.1m의 나지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수려하면서도 골짜기가 깊어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삽봉에 얽힌 전설이 많이 남아 있지요. 삽봉은 조선조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 당시 문민文愍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조의제문사초弔意帝文史草 사건에 연루돼 참살당하는 화
서창동 백마산에는 수련골과 수련재, 차일봉, 장수굴 등 삽봉揷峰 김세근金世斤(1550∼1592) 장군과 관련된 지명들이 유독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백마산에는 임진왜란 때 공신인 삽봉 김세근 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지요. 삽봉은 조선 연산군 시절 일어난 무오사화에 김일손金馹孫이 연루돼 참살을 당하자 종6품 벼슬을
박희수朴希壽(1540~?)는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덕로德老이고, 호는 회헌懷軒이다. 1540년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박상의 손자이고 김해부사 박민제朴敏齊의 아들이다. 회재 박광옥의 문인이며 벼슬은 1577년(선조 10) 음보蔭補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박광옥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박지효朴之孝(1553~?)의 본관은 충주이며 자는 자경子敬, 호는 육류정六柳亭이다. 1553년 서창면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기대승에게 글을 배워 학문이 깊었으며 40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고경명 등을 제향하는 포충사에 대해 1603년 그와 후손들이 사액을 청하여 포충이라는 이름과 편
박대수朴大壽(1533~1612)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의 참모관이 되어 왜군을 무찌르는데 훌륭한 전략을 내놓았고 광주 의병소 시절엔 고경명과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던 애국지인이다.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인수仁叟, 호는 송계松溪이다. 진사 박지흥의 증손이며, 하촌 박정의 장남인 박호손朴虎孫의 아들이다. 1533년 서창
박광조朴光祖(?~1592)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말굽 아래 쓰러져가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는 큰 뜻을 세우고 의병활동에 참가하였으며 고경명장군이 참가했던 금산전투에서 생을 마감했던 의인이다. 본관이 음성이며 시영市榮, 호는 지봉砥峯이다. 정랑正郞을 지낸 박번朴蕃(1469~1542)의 아들이다. 1588년 무과에 급제하여
박광옥朴光玉(1526~1593)은 조선 중엽 명종과 선조 때에 성리학을 연구하고 향약을 널리 실시해 이름을 세우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의기로운 선비이다.박광옥의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할아버지는 박자회朴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
김세근金世斤(1550~1592)은경남 함안군 마륜동 출생으로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중빈重賓, 호는 삽봉揷峰이다. 김해인으로서 절효공 극일의 후손으로 1550(명종5년)년 4월 16일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 스승 중봉 조헌선생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제봉 고경명의 의병과 합세한 금산전투에서 순군한 의병부장
서구 매월동 519-1옛날에는 개산, 회산마을 사이로 하천이 흘렀다. 각시봉과 백마산에서 내려온 작은 물줄기가 개산을 지나 개산제로 모여 세하천으로 흘러갔는데 개금산의 작은 물줄기도 회산을 거쳐 개산제로 흘러들었고, 학산사 뒷산과 화방산花芳山 물도 매월제에 모여 개산제로 흘러들었다. 이곳 들판의 야트막한 산에
서구 용두동 산 전체의 모습이 둥글둥글 해 무등산을 연상시키는 송학산은 높이 212.3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산 곳곳에 큰 바위가 박혀있다. 서창동 학동마을과 절골마을 뒤에 자리한 송학산은 남구 압촌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산자락에는 고인돌이 있다. 이는 오랜 역사의 증거다. 산 중턱에는 잡목림 숲이 우거져 가
서구 세하동과 매월동 경계백마산은 서구 세하동과 매월동 경계에 위치해 있는 산이다. 금당산에서 남서쪽으로 화방산을 거쳐 송학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절골[寺洞] 동편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면서 솟아있다. 서쪽으로 극락강이 흐르고, 광주공항과 송정리 일대가 조망된다. 개금산을 마주보고 있으며 해발고도는 162.1m
서구 풍암동 광주 풍암지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당산은 해발 303.5m로 100m대의 백마산이나 개금산에 비해 월등히 높다. 산등성이를 따라 남구 진월동과 서구 풍암동의 경계에 속하는 산이다. 무등산에서 분적산을 거쳐 북서쪽으로 내려선 능선이 1번 국도를 거쳐 오른 산이다. 금당산의 지질구조는 백악기 후반 유
광주시 서구 송풍로 42(풍암동)서구 풍암동 벽진서원(운리사) 인근 음성박씨 풍암선산묘에 있는 회재 박광옥의 묘비 뒤에 새겨진 묘비문이 눈에 띈다. 자헌대부 우의정 허목許穆이 엮은 것이라 써있다. 묘비 글씨는 1952년 태인泰仁 박래호朴來鎬가 번역하고 영천永川 이돈흥李敦興이 썼다. 전체적인 내용은 회재의 출생과
서구 사동길 118(서창동)서구 송학산 북쪽 기슭의 사동마을은 오래 전부터 절골마을로 불리었다. 회암 박지흥(1411~1488)과 자녀들이 살았던 초당 터다. 눌재 박상과 영의정을 한 사암 박순의 탯자리이다.조선시대 말까지 방하동芳荷洞에 있는 추모재追慕齋는 당시에 눌재 박상의 큰형인 하촌荷村 박정朴禎(1467~1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