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정보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통합검색 검색 폼

게시물 (188건)

고경명-‘주관에서 상사 성척지가 서울로 돌아감을 작별하다(州館 贈別成上舍惕之還京)
庚戌年中夏課時  경술년 하과 때百人今日幾人奇  백명이던 그 사람들 오늘날 남은 사람 몇 명이나 되느냐江湖復對一床雨  강호에서 다시 만날 때 비 흠뻑 내렸고樽酒相逢兩鬢絲  동이 술로 마주보니 구레나룻 희어졌네垂老關心難作別  늘그막에 정이 깊어 작별하기 어려운데斜陽握手重臨岐 
고경명-동헌에서 서회하다(東軒敍懷)
正坐乖慵不入城 이 내 몸 게을러져 입성하지 않았는데二天寧復意相輕 사또에 향한 정성 어이 소홀하여 그러하리蕭蕭霜鬢凋年恨 덧없는 백발 속에 모년 한탄 더해지고戀戀綈袍昔日情 제포 보내준 옛 정분 지금까지 못잊네車騎雍容侵雪夜 거마는 단란하게 눈 내리는 밤에 모였고樓臺次第眺春晴 번화한 누대는 봄날씨에 한결 아
고경명-극락정에서 성덕구로부터 ~을 듣다 (聞地主成德久在極樂亭)
皀蓋行春到野亭 鶯花遲日鬧林埛 和風颺幙關三面 好雨隨車擁百靈繡畛滿添陂水白 螺鬟齊矗海山靑 遙知嘯傲登臨處 閱遍三農喜色形霽峯集 卷之三 詩 聞地主成德久在極樂亭 극락원 근처에 살았던 전라도 머슴아를 의리의 사나이라고 부르게 했던 인물 제봉 고경명도 서창나루를 오가면서 극락정에 자주 올랐음이 분명하다. 그의
남구만-贈吏曹判書高公請諡行狀 戊子 이조판서에 추증된 고공의 시호를 청한 행장
남구만-贈吏曹判書高公請諡行狀 戊子 이조판서에 추증된 고공의 시호를 청한 행장 -약천집(藥泉集) 권23여기에서 고공(高公)은 고경명(高敬命)의 아들 고종후(高從厚, 1554~1593)를 말한다. 1592년 금산(錦山) 싸움에서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그는 이듬해 일본군이 진주를 공략한 뒤 호남지방으로 침입하려 하자 휘하
고경명- 경양 모정에서 국보를 위해(景陽茅亭 國保請賦 時爲察訪)
客久同吾土 떠도는 신세 어디고 다 고향같지官閑似馬曹 일 없는 관직 마조보다 한적하구나郊墟紆井邑 넓은 들판은 정읍으로 통했는데亭沼面林皐 한 모퉁이 모정이 아담하네頓覺襟靈爽 문득 기분이 상쾌함을 느끼고深嗟意匠高 구상의 높음을 깊이 감탄하네紛紛坐馳者 분분하게 저 좌치만 일삼는 이는 終歲不知勞 죽을 때까지
고경명- 題周道茅亭
監務官淸愜素懷 公餘寄傲小茅齋琅玕擁壁堪驅瘴 簷宇憑高不受霾犀柄拉賓風入坐 鶩行麾吏月侵階陶腰暫折何妨事 終勝香塵走九街-제봉집(霽峯集) 권3
고경명- 觀牧令試士于公庭
帀月絃歌化武城 庠橫媚學恥肥輕似聞諸子彈冠喜 應體賢侯愛士情雲幙靜隨簷影轉 粉袍寒映日華晴盱江諗衆文堪誦 愧把殘詩較病聲
고경명-聞白麓上官 戲疊前韻
按節當年識使君左轓重見入樓門粧臺喜色占蛾黛俠窟寒心屛鼠群車幔高褰瞻百里將壇雄跨壓諸軍公餘定理登山屐千丈圭峯翠掃雲光牧爲中衛大將 故第六及之이 때의 광주목사는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 1532~1585), 재임 : 1581~1582년으로 《광주읍지》에 1581년 문과 통정대부로 부임하였다. 《광주향교지》 기록에도 있다. 신응
고용후-海陽城聞琴(해양성에서 거문고를 듣다)
骨靑年少眼如刀 기골이 푸른 젊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三峽流泉指下挑 삼협에 흐르는 샘을 손끝으로 연주한다 風露滿空人寂寂 바람과 이슬 허공에 가득하고 인적은 드문데壯元峰上月輪高 장원봉 위에 둥근 달만 높이 떴네-청사집(晴沙集)고용후(高用厚, 1577~1652)의 본관은 장흥, 자는 선행(善行)이며 호는 청사(晴沙)이다.
윤지화(尹之和)
조선 전기의 문신 남촌(南村) 윤지화(尹之和 1476~1558)의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순경(順卿)이다. 현감(縣監) 윤응(尹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봉상시(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尹起畝)이다. 연산군의 외삼촌인 참판(參判) 윤구(尹遘)의 아들이자, 첨정(僉正) 윤지임(尹之任)의 동
고제림-到元曉寺
十里山行境復佳  십 리 산행(山行)에 경계는 다시 아름다워 雨中元曉夕陽崖  빗속의 원효사(元曉寺) 석양 끝에 이르렀네白雪守壑如相護  흰 눈은 골짝 지켜 서로를 보호하는 듯/瑞石齊天此可階  상서로운 바위 하늘에 가지런히 섬돌 될 만하네遠客靑藜三日是  먼 손님의 푸른 지팡이 삼 일
황박-광산관(光山館)에서
話久庭看跋  이야기 오래 하니 들의 끝이 보이고簾疏月出東  발 성기니 달 동쪽에 떠오르네.行愁趙盾日  조순(趙盾)의 날을 근심하다가來喜故人風  고인의 기풍을 기뻐했네此夜暫成會  오늘밤 잠시 이룬 모임明朝還墮空  내일 아침이면 다시 헤어지게 되리相思千里意  서로 생각하
임영-풍영정경차죽음선생운(風詠亭敬次竹陰先生韻)- 창계집 제2권
임영-풍영정경차죽음선생운(風詠亭敬次竹陰先生韻)- 창계집 제2권 : 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1696)客行未可發  나그네 아직 길을 나서지 못함은 江雨復今夕  강에 비가 오늘 저녁 다시 내림일세名亭佳麗地  이름난 정자 아 름다운 풍광 속에 一醉如有約  약속이나 한 듯 한번 취해 보노라窓前白玉樹
이순인-次高而順敬命韻(고경명의 시에 차운함)
巧削叢巖列半虛  멋잇게 깍인 돌무더기 허공에 중이었으니天公斤斧信非踈  조물주의 쏨씨가 실로 서툴지 않은 듯 하이人間誰擅公倕手  세상에 그 누가 공수(公倕)의 재주 부린다한들 用盡方圓定不如  모나고 둥굴게 함이 이와 같으리오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서울출신인 조선의 역사상 8명의 문장가
고경명-임란의병장 충렬공제봉고경명선생상
광주시 서구 화정동 407-17 광주월드컵경기장 북문옆 무궁화동산서구 풍암 월드컵경기장 북문 옆 공원에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 왜군과 싸우다 1592년 충청 금산전투에서 아들 인후(因厚)와 함께 전사한 고경명(高敬命) 장군을 기리는 동상이다.
김함-찬성 김공함 신도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산 164-1(충장사 주변)1830년이 유명조선국숭정대부판결사의정부예의찬성김공함신도비(有明朝鮮國崇政大夫判決事議政府禮義贊成金公瑊神道碑)는 金致洙 쓰다.<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동쪽 20리의 거리인 배재(梨峙)마을에 있는 비석이다. 후손 면식(冕植)이 이를 세웠다. *瑊은 올돌 감, 또
고경명-고씨삼강문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길 66(압촌동 산14)광주시 기념물 제12호. 1985년 2월 25일 지정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은 조선 중기의 문관·의병장인 고경명(1533∼1592) 일가 7명의 충효열 삼강문이다. 삼강문은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旌閭)이다. 삼강문옆에 문중 제각인 추원각(追遠閣)이 있다. 보호구역 66㎡이
호남순국열사지비(湖南殉國烈士之碑)
광주시 남구 포충로 767 포충사 內(원산동 947-4)호남순국열사지비(湖南殉國烈士之碑)앞면에는 호남순국열사지비(湖南殉國烈士之碑)라고 쓰여 있으며  뒷면에는 호남일대에서 한말 구국 의병 활동을 펼쳤던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1851∼1908),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
이선제-필문이선제신도비
광주시 남구 원산동 951-61996년필문이선제신도비(蓽門李先齊神道碑)는 원래 1912년에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1864~1919)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95년에 이가원(1917~2000) 박사의 추기 비문을 받아 1996년에 세웠다. 한 비에 시기를 달리하여 두 사람이 지은 비문이 있는 셈이다.마을 입구 도로변에
포충사묘정비
광주시 남구 포충로 767(원산동) 포충사 內원래 포충사는 이 자리였으나 1980년 동쪽에 새롭게 포충사를 지으면서 사당 기능을 그곳으로 넘겨주었다.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인 포충사(褒忠祠)는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錦山)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 1533~1592) · 종후(從厚, 1554~1593) · 인후(因厚,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