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坐乖慵不入城 이 내 몸 게을러져 입성하지 않았는데二天寧復意相輕 사또에 향한 정성 어이 소홀하여 그러하리蕭蕭霜鬢凋年恨 덧없는 백발 속에 모년 한탄 더해지고戀戀綈袍昔日情 제포 보내준 옛 정분 지금까지 못잊네車騎雍容侵雪夜 거마는 단란하게 눈 내리는 밤에 모였고樓臺次第眺春晴 번화한 누대는 봄날씨에 한결 아
皀蓋行春到野亭 鶯花遲日鬧林埛 和風颺幙關三面 好雨隨車擁百靈繡畛滿添陂水白 螺鬟齊矗海山靑 遙知嘯傲登臨處 閱遍三農喜色形霽峯集 卷之三 詩 聞地主成德久在極樂亭 극락원 근처에 살았던 전라도 머슴아를 의리의 사나이라고 부르게 했던 인물 제봉 고경명도 서창나루를 오가면서 극락정에 자주 올랐음이 분명하다. 그의
남구만-贈吏曹判書高公請諡行狀 戊子 이조판서에 추증된 고공의 시호를 청한 행장 -약천집(藥泉集) 권23여기에서 고공(高公)은 고경명(高敬命)의 아들 고종후(高從厚, 1554~1593)를 말한다. 1592년 금산(錦山) 싸움에서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그는 이듬해 일본군이 진주를 공략한 뒤 호남지방으로 침입하려 하자 휘하
客久同吾土 떠도는 신세 어디고 다 고향같지官閑似馬曹 일 없는 관직 마조보다 한적하구나郊墟紆井邑 넓은 들판은 정읍으로 통했는데亭沼面林皐 한 모퉁이 모정이 아담하네頓覺襟靈爽 문득 기분이 상쾌함을 느끼고深嗟意匠高 구상의 높음을 깊이 감탄하네紛紛坐馳者 분분하게 저 좌치만 일삼는 이는 終歲不知勞 죽을 때까지
骨靑年少眼如刀 기골이 푸른 젊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三峽流泉指下挑 삼협에 흐르는 샘을 손끝으로 연주한다 風露滿空人寂寂 바람과 이슬 허공에 가득하고 인적은 드문데壯元峰上月輪高 장원봉 위에 둥근 달만 높이 떴네-청사집(晴沙集)고용후(高用厚, 1577~1652)의 본관은 장흥, 자는 선행(善行)이며 호는 청사(晴沙)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남촌(南村) 윤지화(尹之和 1476~1558)의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순경(順卿)이다. 현감(縣監) 윤응(尹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봉상시(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尹起畝)이다. 연산군의 외삼촌인 참판(參判) 윤구(尹遘)의 아들이자, 첨정(僉正) 윤지임(尹之任)의 동
임영-풍영정경차죽음선생운(風詠亭敬次竹陰先生韻)- 창계집 제2권 : 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1696)客行未可發 나그네 아직 길을 나서지 못함은 江雨復今夕 강에 비가 오늘 저녁 다시 내림일세名亭佳麗地 이름난 정자 아 름다운 풍광 속에 一醉如有約 약속이나 한 듯 한번 취해 보노라窓前白玉樹
巧削叢巖列半虛 멋잇게 깍인 돌무더기 허공에 중이었으니天公斤斧信非踈 조물주의 쏨씨가 실로 서툴지 않은 듯 하이人間誰擅公倕手 세상에 그 누가 공수(公倕)의 재주 부린다한들 用盡方圓定不如 모나고 둥굴게 함이 이와 같으리오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서울출신인 조선의 역사상 8명의 문장가
광주시 북구 금곡동 산 164-1(충장사 주변)1830년이 유명조선국숭정대부판결사의정부예의찬성김공함신도비(有明朝鮮國崇政大夫判決事議政府禮義贊成金公瑊神道碑)는 金致洙 쓰다.<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동쪽 20리의 거리인 배재(梨峙)마을에 있는 비석이다. 후손 면식(冕植)이 이를 세웠다. *瑊은 올돌 감, 또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길 66(압촌동 산14)광주시 기념물 제12호. 1985년 2월 25일 지정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은 조선 중기의 문관·의병장인 고경명(1533∼1592) 일가 7명의 충효열 삼강문이다. 삼강문은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旌閭)이다. 삼강문옆에 문중 제각인 추원각(追遠閣)이 있다. 보호구역 66㎡이
광주시 남구 원산동 951-61996년필문이선제신도비(蓽門李先齊神道碑)는 원래 1912년에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1864~1919)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95년에 이가원(1917~2000) 박사의 추기 비문을 받아 1996년에 세웠다. 한 비에 시기를 달리하여 두 사람이 지은 비문이 있는 셈이다.마을 입구 도로변에
광주시 남구 포충로 767(원산동) 포충사 內원래 포충사는 이 자리였으나 1980년 동쪽에 새롭게 포충사를 지으면서 사당 기능을 그곳으로 넘겨주었다.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인 포충사(褒忠祠)는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錦山)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 1533~1592) · 종후(從厚, 1554~1593) · 인후(因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