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구 광곡길 73 (광산동) 애일당은 한국적 살롱문화 溪山風流의 산실로 일컫는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廣谷 너브실)마을에 고봉의 13대 후손 기세훈(奇世勳, 1914~2015)이 지낸 애일당(愛日堂)이 자리하고 있다.너브실에서 가장 유명한 집이 고봉의 13대 후손 기세훈(奇世勳, 1914∼현재)의 고택이다. 애일당(
광산구 신창동 풍영정(風詠亭)의 주인 칠계 김언거의 손자 김치원金致謜(1562~?)은 수진당을 경영하며 풍영정도 관리했다. 김치원의 자는 화제(和濟), 호는 수진당이다.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권율 장군을 도와 이치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이곳에서는 임련林堜, 장운익
남구 압촌동 고경명의 조부인 송설松雪 고중영高仲英(1506~ ?)은 남구 압촌동 출신으로 하천 고운의 아들이다.귀양에서 풀려나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중종 때의 절신(節臣)인 고중영은 명종비 인순왕후심씨仁順王后沈氏의 외삼촌인 정승 이량李梁이
남구 고싸움로 2(칠석동) 부용정은 감사 부용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 1411년에 별장으로 세운 정자이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남쪽 30리에 있다. ‘부용’은 송宋의 주돈이周敦離가 ‘애련설愛蓮設’에서 연꽃을 꽃 중의 군자라고 칭송하였던 것에서 따온 것이다. 정내에는 창암 이삼만의 '芙蓉
광산구 두정동 산82《광주읍지》(1879, 1924)에 주의 서북쪽 40리에 있으며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지었다고 했다. 기대승이 출가해 처음으로 생활한 곳으로 옛 소고용리召古龍里에 속해 있었다. 고봉의 8대손 종손 연기 현감 기상익 이후 1760년께 퇴락되었다. 광산구 임곡 본량동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경명의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산96 나옹선사(1320~1376)는 1340년 허망하게 요절한 친구의 죽음에 무상함을 느끼고 그길로 공덕산 묘적암에서 요연선사에게 출가한다. 1344년에는 회암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법원사에 머물며 4년여를 지공에게 수학하였다구월산ㆍ용문산ㆍ원적산ㆍ금강산 등
광산구 첨단1동 (미산마을) 광산구 오룡동 미산마을 뒷산 정마봉停馬峰 아래 영산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임진왜란 이전 15세기 무렵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등을 지낸 남강노어南江老漁 이몽린李夢麟이 지었던 정자가 있었다.정마봉은 모악(暮嶽) 권율(權慄 1537 ~ 1599)장군이 전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
남구 양과동 조선 중기의 문인,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난계 박종정朴宗挺(1555~1597)이 1576년 식년시에 진사 2등 21위로 합격했다. 뜻을 더해 송광사에서 열심히 공부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 돌아와 난계蘭溪라는 초당을 지었다. 당쟁에 가담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고 마음 편히 살다 떠난 곳
남구 포충로 701 (원산동) 제봉산 하록에 있었다고 하는 남강정은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일설에는 참판 이시원(李始元)과 집의 이조원(李調元)이 여러 동생들과 참의인 하천 고운과 함께 계를 경영했다는 수계소修契所라는 기록도 있다. 옛날 그 자리에 황산사黃山祠의 강당인 숭의당崇義堂이 들어서
북구 석곡동 환학喚鶴 조여심(曺汝諶, 1518~1594)의 은거터로 그가 학문을 닦으며 유유자적했던 정자가 있다. 석곡동은 무등산 자락 북쪽에 위치한 무등산수박이 유명한 곳이다. 조여심은 학과 같이 살겠다는 뜻으로 스스로 호를 붙였다. 송순, 임억령 등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시우詩友로서 교유했던 서파 오도일이 “
광산구 풍영정길 21 (신창동)풍영정을 지은 칠계 김언거金彦据(1503∼1584)의 아들 관포당灌圃堂 김광부金光符가 극랑강변 어딘가에 지어 지냈다. 김광부는 선무랑 군자감주부이다. 이황이 김언거에게 보낸 '기제관포정(寄題灌圃堂)'이란 시에 ‘관포당(灌圃堂)’이 나온다. 寄題灌圃堂 漆園傲吏離風塵 千載同歸漆水
남구 구소동 (지석천)송암松巖 최응룡崔應龍(1537~1592)의 본관은 삭녕朔寧이며 자는사서士瑞, 별호는 충절忠節이다.통덕랑 강정 최경립의 아들로 남평 출신이다. 형조참판에 올랐지만 온갖 사화로 세상이 어지러워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지석천 강변 소나무숲에 정자를 짓고 은거하며 책을 읽고 자연을 즐기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본관은 장흥.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峯)·태헌(苔軒)이다. 환갑의 나이, 임진왜란 때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해 광주의병의 첫머리에 오르내린다. 아버지는 대사간 고맹영이다. 1552(명종7년)년 진사가 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갑
임란 최후 의병장이자 조선의병 총수인 김덕령(1568∼1596)의 자는 경수(景樹)로 광산이다. 양녕대군의 장인인 한로(漢老)의 12세손이며 1470년 무렵 광주 서구 금호동에서 충효마을(당시, 석저촌)로 터를 옮긴 문손(文孫)은 그의 고조부이다. 1568년 12월 29일 붕변(鵬變)과 남평 반씨 3남 3녀 중 둘째아들로 석저촌(石底村)
김덕홍(1558∼1592)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증조부는 김후(金珝), 조부는 김극효(金克孝)이다. 부친은 습독(習讀) 김붕변(金鵬變)이다. 동생은 김덕령(金德齡), 김덕보(金德普)이다.김덕홍의 호는 성암(省菴)으로 아우 김덕령과 매형 김응회와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김덕령과
회재로는 전남 나주시 남평읍에서 지석천을 건너 서창방면 좌측 도로에서 바로 시작해 광주광역시 남구 독립로까지 이어진 15.534km 연장의 꽤 긴 도로다. 또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또 하나의 통로이기도 하다.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옛 광이리에서 1번지를 시작하는 회재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먼저 하얗게 무리지어 늘어
그때 회재 박광옥(朴光玉) 선생은 20여 년간의 관직에서 물러나 광주 집에 돌아와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파죽지세로 쳐들어오는 왜군에 경상도 상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회재는 수레를 타고 달려가 광주목사 정윤우를 급히 만나 전라도 순찰사 이광에게 어서 가서 왜군을 막기 위해 북쪽 요새지 길목
광주시 남구 압촌동 산 23-1의병장 고경명의 조부 하천霞川 고운高雲 묘소로 가기 전에 재실 송산재松山齋가 있다. 고운(1479∼1530) 본관 장흥. 자 종룡從龍, 호 하천霞川이다. 그의 아들은 대사간 고맹영高孟英, 손자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다.묘역에는 2기의 묘가 앞뒤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앞쪽 묘는&n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