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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광주인, 박광옥

그때 회재 박광옥(朴光玉) 선생은 20여 년간의 관직에서 물러나 광주 집에 돌아와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파죽지세로 쳐들어오는 왜군에 경상도 상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회재는 수레를 타고 경기도의 광주목사 정윤우를 급히 만나 전라도 순찰사 이광에게 어서 가서 왜군을 막기 위해 북쪽 요새지 길목에 군사를 미리 보내 방어하도록 하라고 전한다. 그래야 서울을 호위하고 호남을 보존할 수 있어서다.

당시 순찰사 이광은 서울로 가던 중 마침내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난하자 도중에 후퇴하고 도망쳐버렸다. 회재는 통곡하며 창의사 김천일, 첨지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울 것을 결의하고 후방에서 군사와 군량과 무기를 조달했다.

김천일은 회재에게 편지를 보내 “한편은 전장에 나가고 한편은 지방에서 방비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일이다. 기반이 흔들리면 이 일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앞장서서 싸우는 것은 오직 공의 협조에 달렸다”고 회재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회재의 후방 지원이 그만큼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이때 도원수 권율 장군이 광주목사로 왔다. 수원에서 패전당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권율을 지원하기 위해 회재는 다시 누구의 명령도 없는데 이웃 고을들에 격문을 보낸다. 사사로 수천 명의 의병을 모아 권율에게 복속시켰다. 이리하여 다시 권율은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이런 회재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권율이 뒤에 큰 공을 세울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회재가 선비들을 보내어 마을마다 드나들면서 의병을 모집하니 겁을 먹고 응하지 않던 주민들이 그 의로움에 차츰 호응하였던 것이다.

회재의 정성에 권율이 탄복하고 군사를 모으는 일은 오로지 회재를 믿고 위임하였다. 이런 사정을 듣고 조정에서 복직하라는 어명이 떨어져 회재는 나주목사로 부임한다. 회재는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처해 있는데 의리상 사양할 수 없다며 불편한 몸에 다시 관복을 입고 임금이 어디에 있으며 이때가 어느 때냐며 줄곧 나라를 지키는데 혼신을 다했다.

회재는 직접 전장에 나갈 계획이었지만 의병을 모집하고 뒷바라지하느라 무리한 탓에 피곤이 겹친 데다 옛병마저 재발했다. 후방에서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한 탓에 결국 병으로 인해 예순여덟의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전장에 나가 직접 전투에 참여한 누구 못지않게 큰 공을 세운 회재는 임진왜란 시기 하나의 빛나는 별이었다. 몸은 성치 않은 데다 관직을 그만둔 처지인데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국가와 임금을 위해 헌신한 모습을 우리 역사 어디서도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가히 청사에 기록되어 전할 인물이라 함직하다. 회재 박광옥의 이러한 애국 행위는 이미 어릴 적부터 닦아온 공부와 가풍과 한 인간의 고결한 성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지 갑자기 발현한 것이 아니다.

어려서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는 어른처럼 상을 치렀고 뒷날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는 너무 슬퍼 묘소에 여막을 짓고 3년 복제를 하여 온 고을이 탄복하고 경의를 표했을 정도다.

한평생 출세를 위해서 높은 벼슬의 문앞을 찾아가지 않았고 부임하는 고을마다 먼저 향약을 세워 청년들을 가르쳤다. 그야말로 선비관리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잘 먹고 잘 입고 살 법도 하지만 근검절약하는 검덕(儉德)이 생활 신조였다.

나라에서 주는 녹봉밖에는 아무것도 더 취하지 않았다. 내 것이 아니면 손대지 않고 그것을 누구에게 주지도 않았다. 아는 자제들이 자리 부탁을 하면 크게 꾸짖었다.

젊어서 늙음에 이르기까지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책을 놓지 않았다. 특별히 문장에 뜻을 두지는 않았으나 문장이 중후하고 아름다워 옛 문장의 정취가 담겨있고 필법이 자유분방하였다.

만년에는 더욱 주역, 계몽, 가례 등 글에 힘써 통달하였다. 어린 서질부터 기대승 선생과는 교우가 되었고, 사암 박순, 옥계 노진과도 우의가 깊어서 서로 존경하는 사이로 지냈다.

안타깝게도 광주 인물 회재 선생을 하는 이는 많지 않는 듯하다. 학교에서 자기 고장의 역사와 인물을 잘 가르치지 않아서다.

회재 같은 고향 인물들을 가르쳐서 진정한 광주정신을 후대의 핏줄에 흐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광주사람을 양성하는 길이 아닐까. 회재 선생은 지금 광주 서구의 벽진서원에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오는 11월 22일 광주유림회관에서 광주 향토문화개발협의회 주최로 처음으로 임진왜란 시절 회재 선생의 활동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열었으니 선생의 위상을 다시 검증할 때다. 광주시의 관심이 요구된다.

출처 : 시민의소리(http://www.simi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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