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효증(奇孝曾), 湖節2上-066-2, 光州, 壬辰, 義穀將 -《호남절의록》(1799)기효증奇孝曾(1550~1616)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백로(伯魯), 호는 함재(涵齋). 청백리 기건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기진(奇進)이고, 아버지는 고봉 기대승(奇大升)이며,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이임(李任)의 딸이다. 1550(명종5년)년
김덕보(金德普), 湖節4下-127-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호남절의록》(1799)김덕보(金德普)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룡(子龍), 호는 풍암(楓巖).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박씨(南平朴氏)로 직장 박계종(朴繼宗)의 딸이다. 형이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다.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 지금의 충
충장로-5가(忠壯路三五街) 【동】
본래 광주군 성내면의 지역으로서, 광주 읍성의 북문 근처가 되므로 북문 거리라 하였다. 1927년 명치정 5정목이라 하다가, 1948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시호를 따서 충장로 5가로 고치고 1957년 동제 실시에 따라 동구 충수동회의 관할이 되었
충장로-4가(忠壯路四街) 【동】
본래 광주군 성내면의 지역으로서 광주 읍성 북문쪽이 되므로 북문 거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서내리,
북내리, 사정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북문통이라 해서 광주면(시)에 편입되었다. 1927년 명치정 4정목이라 하다가, 1948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
충장로-3가(忠壯路三街) 【동】 본래 광주군 성내면의 지역으로서 광주 읍성 북문쪽이 되므로 북문 거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서내리, 북내리, 사정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북문통이라 해서 광주면(시)에 편입되었다. 1927년 명치정 3정목이라 하다가, 1948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충장공 김덕령
충장로-2가(忠壯路二街) 【동】 본래 광주군 성내면의 지역으로서 광주 읍성 북문 쪽이 되므로 북문 거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서내리, 북내리, 사정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북문통이라 해서 광주면(시)에 편입되었다. 1927년 명치정 2정목이라 하다가, 1948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충장공 김덕령
충장로-1가(忠壯路一街) 【동】 본래 광주군 성내면의 지역으로서 광주 읍성의 북문 안쪽이 되므로 북문 거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서내리, 사정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북문통이라 하여 광주면(시)에 편입되었다. 1927년 명치정 1정목이라 하다가, 1948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사정리를 갈라서 충
북구 풍암제길 117 (금곡동) 조선 선조와 인조 때 활동했던 집의 풍암楓巖 김덕보金德普(1571~1621)가 지은 정자이다. 풍암정은 무등산 분청사기 박물관에서 원효계곡 쪽으로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계곡 건너편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광주읍지》(1879, 1924)에 따르면 주의 동쪽 20리에 있다.‘풍암’이라는 이
북구 충효동 397-3 취가정은 환벽당 남쪽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30리 거리인 충효리 뒷산에 있다. 임진왜란 때의 충장공 김덕령(1567~1596)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890년 후손 김만식(1845~1922) 등이 세웠다.주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야트막한 산 위에 누대처럼 지었다. 대부
주의 서쪽 40리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40리에 있는 건물로 참봉을 지낸 서암 유상근이 건립했다. 후암後菴 송증헌宋曾憲(1878~1947)이 기문을 썼고 주인 유상근의 원운과 유병우柳秉禹의 차운, 면암 최익현의 아들인 월성 최영조崔永祚(1859~1927)의 시가 남아 있다.송증헌의 기문에는 그의 선조는 호가정
북구 금곡동 산17-5 북구 무등산으로 가는 길에 충장사에서 광주호 방면에 금곡동이 나온다. 금곡동 입구 삼거리 길에서 소쇄원으로 가는 도로 옆 하천변 윗골(金감마을)의 꾀꼬리 당산나무가 있는 곳에 삼괴정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다. 삼괴정은 1900년 괴암槐庵 문병일文炳日(1877~1948)이 부친 삼괴三愧 문유식文愉植의
서구 서창동 (벽진마을)벽진碧津은 고려 때 벽진부곡이 있었으며 바닷물이 들어왔고 나루터로 운영된 곳이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국립호텔격인 극락원極樂院이 있었던 일대는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벽진碧津이라 했다. 벽진마을은 300여년전 박학순이 광주에서 농경지를 찾아 이곳에 옮겨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회재 박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산96 나옹선사(1320~1376)는 1340년 허망하게 요절한 친구의 죽음에 무상함을 느끼고 그길로 공덕산 묘적암에서 요연선사에게 출가한다. 1344년에는 회암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법원사에 머물며 4년여를 지공에게 수학하였다구월산ㆍ용문산ㆍ원적산ㆍ금강산 등
임란 최후 의병장이자 조선의병 총수인 김덕령(1568∼1596)의 자는 경수(景樹)로 광산이다. 양녕대군의 장인인 한로(漢老)의 12세손이며 1470년 무렵 광주 서구 금호동에서 충효마을(당시, 석저촌)로 터를 옮긴 문손(文孫)은 그의 고조부이다. 1568년 12월 29일 붕변(鵬變)과 남평 반씨 3남 3녀 중 둘째아들로 석저촌(石底村)
김덕홍(1558∼1592)은 김덕령의 형이다. 호는 성암(省菴)으로 아우 덕령과 매형 김응회와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덕령과 덕보 두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모셨는데 효우가 지극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의의 뜻을 가지고 어머니께 하직하고 아루 김덕령과 함께 의병을 불러 모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산 1023(북구 송강로13)김덕령(金德齡) 박광옥(朴光玉) 오두인(吳斗寅) 김덕홍(金德弘) 김덕보(金德普)를 배향한 사우1604년(선조 37) 창건1604년(선조 37) 창건 당시 명칭 「벽진서원(碧津書院)」, 박광옥(朴光玉)을 제향1678년(숙종 4) 지방사람들의 발의로 김덕령(金德齡) 추향, 명칭 「의열사(義
설날 전후로 많은 이들이 고향을 다녀갔다. “예전 그대로인데!”, “와, 많이 바뀌었네.” 등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다.광주 서구 서창동을 다녀간 이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마을에 따라 바뀐 모습의 양상이 크게 다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기억나는 것은 ‘극락’이다.우리나라에서 ‘극락’이라는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