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崔愼)의 기록 - 하, 송자대전 부록 제18권 / 어록(語錄) 5 :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신] 세속(世俗)에 전하기로는, 김덕령(金德齡)은 용력(勇力)이 있는 외에도 신이(神異)한 일화가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는 말과 수감(收監)되었을 적에 고문을 무수히 당했으나 살갗이
동몽교관 증 사헌부 지평 권공 행장(권필) - 명재유고 제43권 :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선생의 성은 권(權)씨이고 휘는 필(韠)이다.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이며 안동(安東) 사람이다. 문충공(文忠公) 근(近)의 6세손이다. 조부 승지 휘 기(祺)는 아들 둘을 두었으니, 장남 벽(擘)은 관직이 참의에 이르
박군(朴君) 상현(尙玄) 에게 답함 - 명재유고 제17권 윤증(尹拯)미발설(未發說)에 대해서는 주자와 율곡이 논한 바가 있어 아래에다 수록해 놓았으니, 이 두 조목을 자세히 음미해 본다면 기형(奇兄)과 그대가 한 말의 득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대체로 남헌(南軒)은 “중인(衆人)에게는 미발(未發)의 중(中)이 없다.
기자량(奇子亮) 정익(挺翼) 에게 답함 갑인년(1674, 현종15) 5월 16일 명재유고 제17권 윤증(尹拯)어깨를 나란히 한 것처럼 서로 바라보면서도 다른 세상을 사는 것처럼 서로 막혀서 살아왔으니, 어찌 그대의 편지가 멀리서 날아와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나를 크게 위로해 주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박해량(朴海量) 행장 -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2권 병자년(1876, 고종13) 선생 44세, 거유 최익현(崔益鉉)윤5월 문인 박해량(朴海量)이 정심사(淨心寺) 중 인찰(寅札)ㆍ춘담(春潭)을 데려 와서 뵙고 선생의 초상을 그려 포천 본댁으로 모시고 갔다.박해량의 자는 도겸(道謙),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집이 광주(光州) 하남(河
임덕함(林德涵)에게 답함경오년(1690) - 농암집 제13권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별지에 하신 말씀을 보니 고명의 뜻이 더욱 고마웠습니다. 앞서의 편지에 말씀드린 학문을 하는 공부는 다만 한때의 소견을 근거로 써 보내어 가르침을 청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처럼 칭찬해 주시니, 이는 아마도
후석 오준선의 <후석유고>『후석유고』는 한말의 유학자인 오준선의 목활자본 시문집으로, 25권 12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권1, 2는 오준선의 詩와 賦 451수가 수록되어 있다. 사우들과의 차운시 및 輓詩를 비롯해서 述懷 및 景物詩 등 다양한 내용의 시를 시기별로 편집하였다. 스승인 奇正鎭을 비롯해서 宋近洙,
안촌집(安村集)은 박광후(朴光後1637~1678)의 문집으로 1908년에 嗣孫 朴元圭가 간행한 4권2책의 활자본이다. 박광후는 학문에 몰두하느라 책을 지어 후세에 전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유고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1861년에 이르러 기정진이 저자의 유고를 「안촌집安村集」으로, 저자의 아들 박중회朴重繪의 유고를 「소은집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 1637(인조 15)∼1678년숙종 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술(士述), 호는 안촌(安村)이다.조부는 진사(進士) 칠졸재(七拙齋) 박창우(朴昌禹)이고, 부친은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남씨(南氏)이고 부인은 홍씨(洪氏)이다. 광산
기정용의 『樂庵遺稿』는 5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1910년 후손 奇東斗 등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서문은 宋秉珣이 썼다. 서문은 宋秉珣이 썼다. 송병순은 기정룡이 기대승이 살았던 터에 암자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樂菴이라고 일컬어졌으며, 遜齋 朴光一로부터 기대승 이후의 1인이라고 평가를 받았고, 陶庵 李縡로부터
朴鼎休(1805~1865)의 자는 元實, 호는 芚皐, 貫鄕은 忠州이다. 그의 현조는 중종 때 端敬王后 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충주목사를 지냈으며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를 한 눌재 박상朴祥이며, 고조는 再茂, 증조는 師東, 조부는 燧이다. 부친 筠軒 朴孝碩은 원래 조부 燧의 족형인 龍湖堂 褧의 셋째 아들인데, 燧가 일찍
사촌 김윤제(金允悌)가 광주시 북구 충효동에 금다리보(金橋)를 짓고 벽간당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본래 환벽당을 말함다. 환벽당의 당호(堂號)는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이 지었으며, 벽간당(碧澗堂)이라고도 불렀음이 고경명(高敬命)의 유서석록(遺書石綠)에 기록되어 있다.건물은 정면 3칸, 측면2칸, 팔작지붕
광산구 삼도동 도림마을 지어재(志於齋)는 조선 영조때 광산에 살던 동강처사 오대하吳大夏(1677∼1743)가 강학터로 지어 지냈던 곳이다. 지어(志於)는 논어 술이(述而)편에 “도에 뜻을 두고, 덕을 굳게 지키며, 인에 의지하고, 예의 세계에서 노닐어야 한다.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는 공자 말의 의미를 담고 있다.나
송제민의 본관은 홍주, 초명은 제민濟民, 자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 호는 해광海狂이다. 현감 송기손宋麒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청심헌淸心軒 송구宋駒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정자 송정황이다. 1549년 광산구 극락면에서 출생하였다. 훗날 ‘백성을 구제하라’는 제민(濟民)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제민(齊
주(州)의 서쪽 40리 나주 경계에 있다. 두 고을이 합설하여 유애사(遺愛祠)를 만들었는데 문간공(文簡公) 이민서(李敏敍), 병산(屛山) 이관명(李觀命),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삼산(三山) 이병상(李秉常), 송호(松湖) 유언호(兪彦鎬)를 향사(享祀)한다.장의(掌議) 1인, 색장(色掌) 1인 원생(院生) 25인이며 고종 무
북구 환벽당길 10 (충효동) 환벽당은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노년에 자연을 벗 삼아 후학양성을 목적으로 건립한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유실형 정자이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동쪽 30리에 있다. 가까이에는 무등산 원효계곡의 물이 흐르며 계곡 아래 증암천甑巖川 주변에는 배롱나
남구 도금동 칠매당 김오(金浯,
1617~1676)는 본관은 광산, 자는 중원(仲源)이며 남구 도금동 출신이다. 1660년에 경자증광사마시庚子增廣司馬試에 생원 3등 28위로 합격하였다. 칠매당을 짓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채 후학 양성에 일을 삼았다. 칠촌漆村 김충남金忠男의 증손이자 명암처사鳴巖處士 김형金逈의 손자이다.
광산구 진곡동 산15번지 창산재는 만회재(晩晦齋) 창암(蒼庵) 박휘진(朴徽鎭, 1705~1790)이 마을 앞 창산蒼山(팔랑산) 아래에 초당을 짓고 지냈던 공간이다. 그의 본관은 순천, 자는 백회(伯晦)다. 광산구 진곡동에서 송시열의 제자였던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1740년 증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