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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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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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광 송제민(1549~1602)

송제민의 본관은 홍주, 초명은 제민濟民, 자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 호는 해광海狂이다. 현감 송기손宋麒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청심헌淸心軒 송구宋駒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정자 송정황이다. 1549년 광산구 극락면에서 출생하였다.

훗날 ‘백성을 구제하라’는 제민(濟民)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제민(齊民)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운암서원 배향록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기개와 도량이 비범하고 총민함과 행동이 남달라 ‘얼굴은 어린이나 행실은 어른과 같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가 객지에서 비명횡사했다는 비보를 접한 해광은 말을 타고 가다 말이 지치자, 도보로 여러 날을 먹지 않고 금산 땅에 이르렀다. 이후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이를 드러내어 웃는 일이 없었고 부친의 묘 앞에서 흘린 피눈물로 인해 풀이 말라 자라지 않으니 모두들 천생의 효자라 했다.

20세 이전에 성현의 글을 터득하고 양명학에 심취해 빈민구휼과 애민사상을 전파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천문, 지리, 의술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 천리(하늘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역경(易經=주역)을 깊이 탐구해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또 그는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을 배우는 것은 경세치용(經世致用,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익을 증진)을 위함이라고 여겼다. 사설의료 기관인 의국(醫局)을 개설해 환자를 돌보고 백성을 구휼하는데도 힘썼다.

그러나 강직한 성품, 속박되기를 싫어하는 호방한 성격 때문에 벼슬길에 나가기를 단념하고 20세 청년기에 들어서자 명산대천(名山大川)과 어진 선비를 찾아 전국 순방길에 올랐다. 그러던 중 한산에 숨어 살던 토정 이지함 선생을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됐다. 해광 송제민이 토정의 정맥이라고도 일컬어진다.

1578년 토정 이지함을 따라 호서(湖西)에 갔을 때 중봉重峰 조헌趙憲(1544~1592)화천당花遷堂 박춘무朴春茂(1544~1611)를 만나 서로 뜻이 통하자 세한계(歲寒契)를 맺어 국란에 대비할 구국의 결의를 다졌다. 이들은 실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두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585년 해광이 존경하던 율곡 이이, 송강 정철 등이 탄핵을 당하자 해광은 조헌과 함께 상소를 올리려 했으나 그의 숙부도 탄핵에 연루되자 오해의 소지가 있어 상소를 포기했다. 주역을 깨쳐 하늘의 이치에 밝았던 그는 모리배가 판치는 조정을 보며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것을 알았다.

1588년에 조헌이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하자, 해광은 세상과 등지고 산과 바다를 유람한다. 그러다가 아예 무안 땅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이 섬 저 섬 돌아다녔다. 이때 스스로 호를 해광(海狂)이라 지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으는 격문을 각 고을 수령과 유생들에게 보냈고 300여명이 모였다. 해광은 양산숙(1561~1593), 양산룡(1552~?)과 같이 의병을 모집해 구국의 대열에 나섰다. 이때 마침 전 부사 김천일(1537~1593)이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합류해 김천일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스스로 종사관이 됐다. 뒤에 고경명(1533~1592)과 같이 금산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이듬해 8월 모친상을 당한 외종 동생 김덕령(1567~1596)을 찾아가 나라 일이 먼저고 집안일은 나중이라고 설득해 의병장으로 추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해광은 손수 제주까지 가서 군마 30여필을 구해와 의병장 김덕령의 사기 진작에 힘쓰고 이후 김덕령 의병군에 합류했다.

1596년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왜병을 크게 격파한 김덕령이 이몽학의 난에 연루됐다는 모함을 받고 29세에 옥사하자 해광은 종일토록 통곡했다. 해광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모든 일과 그 득실을 논술한 '와신기사(臥薪記事)'를 저술했다.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성 주둔 중인 명장 양원을 도와 이진을 종용하다가 도리어 박해를 받은 바 있었다. 당시에 국내외 정세를 기록한 척왜만언소(斥倭 萬言疏)’를 올려 조야의 주목을 끌었다. 척왜만언소를 지은 뒤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세상일을 잊고 스스로 호를 해광이라 하였으며, 왜적을 물리칠 여러 방안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문에는 조선의 부패상과 탐관오리에 대한 직언이 많아 중간의 대신에 의해 왕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오히려 이로 인해 감사의 미움을 사게 돼 이후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송제민은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도 관련이 깊다. 거북선은 고려말부터 남해안과 영산강 일대에 창궐하던 왜구의 기습공격에 대비한 공수 전용 전함으로 대굴포에서 처음 제작됐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결과를 통해 밝혀졌다.

함평문화원이 발표한 대굴포 전라도 수영고찰논문에 따르면 해광 송제민은 곤재 정개청의 문하생으로 대학자이며, 무역산단의 대선주(船主)로 대굴포 서쪽 1km 지점인 사포의 언덕에 백일홍당을 짓고 우거했다.

200여년간 왜구의 기습이 없어 건조되지 않던 거북선은 왜적의 침입을 예견한 곤재 정개청과 그의 문도인 송제민, 오익창, 나덕신, 나덕명 등 양명학자와 나대용, 박만천, 나치용, 이설 등 영산강 인근 출신 무관들에 의해 영산강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에서 다시 건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기록이 송제민의 '해광집', 오익창吳益昌(1557~1635) 의 '사호집(沙湖集)'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번암집樊巖集 등 다수의 문헌에 수록돼 있다.

고려말에 제작된 거북선이 200년이 지난 임진왜란 몇 년 전부터 나대용, 송제민 등에 의해 빠르게 재건조될 수 있었던 것은 광산탁씨, 홍주송씨 등에 거북선 설계도 또는 제작 기술이 전승됐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굴포 전라도 수영고찰에 따르면 무역산단의 대선주였던 송제민은 스승인 정개청의 요청에 따라 상선 29척을 이순신 장군에게 주어 이를 병선으로 개조해 사용했다. 난중일기에는 “159228일 거북선에 사용할 돛베 29필을 조달 받았으며, 동년 3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실험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김천일 장군 휘하의 의병이 무려 400척의 전함을 동원해 강화도 양화진 전투를 벌였던 것은 막하 종사관인 송제민, 이광주 등이 선박 제작 기술자였기 때문이었다. 김천일 장군과 송제민, 이광주, 임환, 양산룡 등 가문과는 복합적인 혼인관계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해광 송제민의 선단과 군량미 그리고 의병모병 지원활동 등은 각 문중들의 글에서 확인된다.

해광의 공덕은 사후 100년이 지나서야 재평가됐다. 1788년(정조12)에 해광 송제민의 학덕과 충절을 가상히 여겨 증 조봉대부사헌부지평(贈 朝奉大夫司憲府持平)을 내리고 1706년(숙종 32) 호남의 사림 삼백여명의 발의로 운암서원을 창건해 봉향했다. 묘갈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해광의 사위 석주 권필(1569-1612)은 선조, 광해군 때 최고의 시인으로 충장공 김덕령의 취시가(醉時歌)를 지은 사람이다.

해광은 남다른 지략과 탁월한 문장력으로 많은 글을 남겼으나 안타깝게도 전란 중에 대부분이 소실됐다. 소모호남의병문(召募湖南義兵文)과 만언상소문(萬言上疏文) 등을 수록한 해광집(海狂集)을 정조(正祖) 7년(1783)에 해광의 5대손 익중(益中) 등이 편집․간행해 전해지고 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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