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열사景烈祠는 광주 무등산 자락과 나주, 두 곳에 있다. 두 곳의 경열사 모두 고려장군으로 우리나라 수군을 창설한 정지 장군을 모시고 있다. 대체 왜 정지 장군을 모신 사당이 두군데나 있는 것일까? 정지 장군의 고향은 나주였지만 정지 장군이 머물며 왜구창궐에 나섰고, 일생을 마감한 곳은 광주였다. 이에 충청도 사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신촌마을(광산구 본량신촌동길 47-8)1948년 대동사는 1727년(영조3년)에 아사 유차달(鵝沙 柳車達)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기 위해 황해도 연안군 구월산아래 사우를 건립하고 제향해 왔다. 1868년(고종5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45년 광복 후 후손들과 유림들의 협력으로 동호동
광주주 서구문화원(원장 정인서) 마을인문학반은 11월 4일 조광조와 양팽손의 지란지교(芝蘭之交), 정율성의 능주초등학교, 주자의 증손자인 주잠의 묘가 있는 주자묘 등 화순 능주지역 문화답사를 가졌다. 우리 지역의 정신과 사상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지역 문화답사를 갖고 있는 마을인문학반은 먼저 조광조 유배
광주시 광산구 광곡길 133 너브실마을월봉서원 연혁과 고봉 기대승 선생의 행장 등을 기록한 묘정비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을 기리는 월봉서원은 고봉 사후 7년만인 1578(선조 11)년 호남유생들의 공의로 지은 신룡동의 망천사(望川祠)로부터 비롯되었다.그 후 정유재란의 화로 피해를 입고 월봉산 아래
광주시 광산구 도호동 600(원도산마을)선거이의 충신정려는 현재 도산동에 있으나 원래는 고내장(지금의 송정동)에서 옮겨온 것이다. 건립연대는 조선 순조 원년(1801)으로 조정에서 족려(族閭)를 명하여 제실을 포함한 원산사(서원)로 세워졌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은 없어지고 정면 측면 1칸씩
편방사(片坊祠) 유허비(遺墟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음기(陰記)가 있다.최초의 경렬사는 인조 22년(1644)에 현재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 74번지에 편방사(片坊祠)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이곳은 정지 장군이 말년에 낙향했던 곳이 광주목 편방면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경렬공
광주시 남구 포충로 767(원산동) 포충사 內원래 포충사는 이 자리였으나 1980년 동쪽에 새롭게 포충사를 지으면서 사당 기능을 그곳으로 넘겨주었다.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인 포충사(褒忠祠)는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錦山)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 1533~1592) · 종후(從厚, 1554~1593) · 인후(因厚,
광주시 북구 무등로 1050 충민사 內(화암동)1972년전상의신도비(全尙毅神道碑)는 충민사에 있다. 구성부사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시충민 전공 신도비(龜城府使 贈資憲大夫 兵曹判書 諡忠愍 全公 神道碑)라 한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627(정묘)년에 건노(建虜, 후금국)가 반적(反賊) 강홍립(姜弘立)을 앞세워 쳐들어올
벽진서원이 복원된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지 150년만의 일이다.벽진서원위패봉안추진위원회는 오는 7일 오전 11시 광주서 서구 풍암동 769-1번지에 회재 박광옥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있던 운리사 일대를 벽진서원으로 복원하는 행사를 갖는다.회재 박광옥 선생은 1526년 1월26일 광주 서구 매월
서구 화운로156번길 17-8(화정동)화담사花潭祠는 하동 정씨 사당이다. 문절공 정수충鄭守忠(1401∼1469)에 대한 집을 지어 영정을 모시라는 왕의 교시가 내려졌고, 1478년 보성군수를 지낸 정화鄭和(1434∼1505)가 군분으로 이사,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을 만들면서 출발한다. 화담사를 중심으로 하동 정씨 집성촌이
서구 화운로156번길 17-8(화정동)광주지하철 화정역 4번 출구로 나와 하동정씨 추선회관 쪽으로 내려오다 왼쪽 골목으로 꺾어 조금 걸어 들어가면 도심과는 낯선 풍경 하나가 펼쳐진다. 사당이 있기 때문이다. 주택과 아파트를 담벼락과 병풍 삼아 자리하고 있는 화담사花潭祠가 그곳으로, 하동 정씨 사당이다. 1776년(영조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