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남구 포충로 767(원산동) 포충사 內원래 포충사는 이 자리였으나 1980년 동쪽에 새롭게 포충사를 지으면서 사당 기능을 그곳으로 넘겨주었다.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인 포충사(褒忠祠)는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錦山)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 1533~1592) · 종후(從厚, 1554~1593) · 인후(因厚,
광주시 광산구 탑동길 93(지산동 277-1 탑동마을 )1915년이 평택임씨삼강유허비(平澤林氏三綱遺墟碑)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사한 임영수(林英秀)와 그 아들 임계(林桂) 그리고 남편에게 절의를 지킨 아내와 며느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비갓을 갖춘 화강암제로 되어 있고, 현재 평택임씨문중 소유이다. 비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포충사)충노봉이귀인지비(忠奴鳳伊貴仁之碑)는 포충사에 있다.고경명의 집에서 일하던 노비 중에 봉이와 귀인이 주인을 따라 의병에 참여했다. 금산에서 사망한 고경명과 둘째아들 인후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이들이었고, 첫째아들 종후의 두 번째 거병에도 참가해 주인과 목숨을 함께 한 의인이
광주시 광산구 용진로 219(북산동 450)1887년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창녕조씨삼강정려각(昌寧曺氏三綱旌閭閣)은 창녕조씨
일가 4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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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한 조언수의 충, 그의 손자 조순악과 증손자 조후건의 효, 며느리 문화유씨
광주시 북구 무등로 1050 충민사 內(화암동)1972년전상의신도비(全尙毅神道碑)는 충민사에 있다. 구성부사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시충민 전공 신도비(龜城府使 贈資憲大夫 兵曹判書 諡忠愍 全公 神道碑)라 한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627(정묘)년에 건노(建虜, 후금국)가 반적(反賊) 강홍립(姜弘立)을 앞세워 쳐들어올
광주시 북구 화암동 218(운암서원 내)1905년이 운암서원유허비(雲岩書院遺墟碑)는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1549∼1602)을 모신 서원 내에 있다. 숙종 32년(1706) 지역 유림들의 청원으로 북구 운암동 東背 마을 앞 山에 터를 잡아 건립하고 조선 중기의 학자 해광 송제민을 배향하였다. 숙종 35년(1709)에 임
광주시 광산구 용진로 219(북산동)1923년삼강정려각중수중건기(三綱旌閭閣重修重建記)는 있다.창녕조씨 일가 4대의 충, 효, 열 행정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임진왜란 시 의병으로 활동한 조언수의 충, 그의 손자 조순악과 증손자 조후건의 효, 며느리 문화유씨의 열을 기리는 정려이다. 1923년에 건축된 광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행주산성 전투로 잘 알려진 권율 장군의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義碑)는 사적비군 입구 은행나무 정중앙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장 갚진 비다. 권율 장군은 팔도 총사령관이었으며 광주목사와 도원수를 지내며 이순신 장군과 함께 육지는 권율, 바다는
학산사(鶴山祠)는 서구 서창동 불암마을에 있는 의병장 김세근(金世斤)을 모신 사당이다.1958년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김세근의 충의정신을 기리고 그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경내에는 사우인 학산사와 경의당, 학산사 묘정비 등이 세워져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22일에 춘향제를 지낸다.향사 인물
서구 매월동 회산懷山마을 출생으로 선조가 ‘호남의 충의신’이라 극찬했던 임진왜란 때의 공신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2) 선생에게는 영특한 따님이 있었어요. 어려서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고 동물 소리까지 알아듣는, 총명한 재주를 지녔지요. 그 따님의 나이 과년(여자 나이 15.16세 때를 이름)이 되어
풍암지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당산金塘山은 해발 304m로 옥녀봉과 황새봉을 거느리고 있지요. 금당산에서는 일찍부터 옥녀봉과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인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1567∼1596) 장군 사이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먼저 옥녀봉을 알면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요. 풍암지구가
서창동 중앙부에 있는 백마산은 해발고도 162.1m의 나지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수려하면서도 골짜기가 깊어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삽봉에 얽힌 전설이 많이 남아 있지요. 삽봉은 조선조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 당시 문민文愍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조의제문사초弔意帝文史草 사건에 연루돼 참살당하는 화
서창동 백마산에는 수련골과 수련재, 차일봉, 장수굴 등 삽봉揷峰 김세근金世斤(1550∼1592) 장군과 관련된 지명들이 유독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백마산에는 임진왜란 때 공신인 삽봉 김세근 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지요. 삽봉은 조선 연산군 시절 일어난 무오사화에 김일손金馹孫이 연루돼 참살을 당하자 종6품 벼슬을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광주 지역 아전이었던 충무공 정충신鄭忠信(1576∼1636)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 권율權慄 장군의 휘하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충신은 거지 복장을 했지요. 임금에게 장계狀啓를 전해야 하는 데 왜군들이 길을 점령하고 있어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장계를 전달할 사
황호黃顥의 본관은 장수이며 자는 사서士瑞, 호는 남제南齊, 풍암동 운리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품이 대범화통하여 글을 잘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의병을 이끌고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南의 막하에 들어가 각지를 전전하면서 전공을 세웠다. 이복남은 우계羽溪 사람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고, 시호는
박희수朴希壽(1540~?)는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덕로德老이고, 호는 회헌懷軒이다. 1540년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박상의 손자이고 김해부사 박민제朴敏齊의 아들이다. 회재 박광옥의 문인이며 벼슬은 1577년(선조 10) 음보蔭補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박광옥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박지효朴之孝(1553~?)의 본관은 충주이며 자는 자경子敬, 호는 육류정六柳亭이다. 1553년 서창면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기대승에게 글을 배워 학문이 깊었으며 40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고경명 등을 제향하는 포충사에 대해 1603년 그와 후손들이 사액을 청하여 포충이라는 이름과 편
박대수朴大壽(1533~1612)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의 참모관이 되어 왜군을 무찌르는데 훌륭한 전략을 내놓았고 광주 의병소 시절엔 고경명과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던 애국지인이다.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인수仁叟, 호는 송계松溪이다. 진사 박지흥의 증손이며, 하촌 박정의 장남인 박호손朴虎孫의 아들이다. 1533년 서창
박광조朴光祖(?~1592)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말굽 아래 쓰러져가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는 큰 뜻을 세우고 의병활동에 참가하였으며 고경명장군이 참가했던 금산전투에서 생을 마감했던 의인이다. 본관이 음성이며 시영市榮, 호는 지봉砥峯이다. 정랑正郞을 지낸 박번朴蕃(1469~1542)의 아들이다. 1588년 무과에 급제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