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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판사사 건천 정광신도비

광주시 남구 진월동

1916년

전중판사사(殿中判寺事) 건천(巾川) 정광(程廣) 신도비(神道碑)

주(州)의 서쪽 5리의 거리인 금당산(金堂山)에 있는 비석으로 이천(伊川)의 사손(祀孫) 오경박사(五經博士) 광인(廣仁)의 전서(篆書) 및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명사(銘詞)가 있다.

<명 문(銘文)>
한산정씨(韓山程氏) 선조이신 이천(伊川)선생* 그분께서
이기철학(理氣哲學)의 깊은 듯을 이 세상에 권했도다
우리 후학(後學) 깨우치는 그의 뜻이 간절하여
천억만억(千億萬億) 여러 사람 많은 교훈 얻었도다
그 당시의 여러 후손(後孫) 동쪽으로 내려와서
그지없는 번창(繁昌)으로 이 나라를 빛냈도다
이 가운데 한사람인 건천(巾川)이란 이 어른이
그의 조덕(祖德) 이어받아 많은 행적(行蹟) 남겼도다
숭불(崇佛)하는 그 당시에 삼년독상(三年獨喪) 지키면서
척불(斥佛)하는 그 신념을 가훈(家訓)으로 남겼도다
포은(圃隱) 야은(冶隱) 두 동지와 서로 뜻을 모아
임금 앞에 나아가서 많은 간언(諫言) 올렸도다.
어지러운 나랏일(國事)을 그지없이 걱정하여
ユ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눈물 흘렸도다.
모든 일을 단념하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가니
고려(高麗)라는 이 나라가 뒤를 따라 망했도다
망복(罔僕)** 하는 그의 뜻을 시를 지어 읊으면서
여러 자손 불러모아 엄한 훈계(訓戒) 내렸도다
죽지 않은 그 자체(自體)를 부끄럽게 여기면서
사립문(柴扉)을 굳게 닫아 그의 몸을 숨겼도다
바른 언사(言辭) 옳은 의리 어김없이 지키면서
위아래의 순서 따라 모든 정(情)을 다했도다
이와 같은 높은 행의(行義) 어느 누가 따를손가
이 세상의 바른 윤리(倫理) 일으키어 세웠도다
조그마한 언덕 위에 가는 샛길(間路) 이어지니
사척(四尺) 높이 그의 무덤 어렴풋이 보였도다
아름다운 그의 유덕(遺德) 그지없이 추모하매
나도 모른 그 사이에 나의 몸을 굽혔도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지음

*이기(理氣)의 철학을 제창하여 유교의 도덕적 기초를 다진 중국 북송(北宋) 때 유학자 정이(程顧)의 호(號).
**고려의 신하로써 절개를 지키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

1916년에 건립된 정광(程廣) 신도비는 진월동 마 국도1호선 LG서비스센터 옆에 위치한다. 하남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풍우에 의한 마모가 심한 편이다.

617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은 하남(河南) 정씨(程氏)의 시조, 정사조(程思祖)의 2세인 정광(程廣)이 은거했고, 묻힌 땅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사조는 원나라 사람으로 1351년 12월에 고려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를 모시고 개경에 들어온 인물이다. 그는 노국공주를 보필하면서 어사대부(御使大夫, 관리의 감찰 업무를 맡는 관청의 정삼품 벼슬)를 지냈고, 훗날 공신으로 책봉되어 정일품인 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되었다.

정사조를 따라온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정도(程度)는 오부부사(五部副使)를 지냈지만 후손이 없어 대가 끊겼고, 둘째 아들 정광은 아버지를 따라온 직후인 135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중성(殿中省, 왕실 살림을 관장하던 부서)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고려 땅에 순조롭게 안착하는가 싶던 정씨 집안은 공민왕이 살해되고, 우왕·창왕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다시 한번 변화를 겪었다. 정광이 벼슬을 버리고 광주에서 서남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금당산 자락(지금의 진월동)으로 숨었다. 정광은 이미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충실한 고려의 신하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일찍이 고려가 번성한 날 엔/ 온 세상이 고려의 신하였는데/ 어찌 고려가 쇠잔할 줄 알았으랴/ 온 세상이 고려의 신하가 아니네”라고 세상을 한탄했다. 

정광이 광주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아내가 광산(光山, 광주광역시 광산구) 이씨여서, 처가 동네 근처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물가에 터를 잡고 띠를 베어 산수간에 집을 짓고” 살면서, 때로 무등산 정상 서석대에 올라 송도를 그리워했다.  등서석음(登瑞石吟)이라는 시이다.

瑞石靑春也自好  서석대의 푸른 봄을 좋아하네

雖將松岳舊顔來   송악에 있던 나를 누가 데려왔나

一回含淚一回哭   한 번 눈물에 또 한 번 통곡하네 

水咽出溪鬱此懷   물과 산골짜기 우울한 회포를 삼키네

백제 가요 무등산가(無等山歌)는 가사가 전해오지 않으니, 무등산을 소재로 한 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걸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정광은 역성혁명에 편승하여 조선 왕조로 스며들지 않고, 외진 산간으로 스며들어 버렸을까? 더욱이 연고도 없는 자식들에게까지 훈계하는 계자시(戒子詩)를 남겨, “너 또한 고려조의 신하이거늘/ 어찌 새 임금을 섬기랴/ 만약 신하 된 도리를 안다면/ 전조의 임금 은혜를 잊지 마라”고 했다. 이 유언 때문인지 하남 정씨 집안에서는 국가적인 변란인 임진왜란 때 화순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순국한 정득운(程得雲), 정득원(程得元) 형제가 공신으로 책봉될 때까지 크게 이름을 얻은 이가 없었다. 

정광이 의리를 지킬 수 있었던 힘은 그의 집안 내력에서 나왔다. 하남 정씨인 정광은 본관이 중국의 하남성으로, 송나라 수도였던 낙양(洛陽, 하남의 옛 이름)에 그의 선조가 살았다. 정광의 10대조가 바로 이천부자(伊川夫子)인 정이(程)인데, 정이는 그의 형 명도부자(明道夫子) 정호(程顥)와 함께 성리학을 창시한 걸출한 인물이다. 주자가 뒤이어 정호와 정이의 학설을 집대성하면서 성리학이 완성되는데, 이들의 성(姓)을 따서 성리학을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부른다. 성리학, 즉 정주학은 한반도에서 고려 말부터 통치이념으로 뿌리내리게 되는데, 하남 정씨는 정주학과 더불어 한반도에 뿌리내린 집안인 셈이다. 

정광은 당시 불교를 숭상하고 복(福)을 구하는 시대 풍조를 보고 “나의 가문은 이천부자와 선조(先祖)로부터 불도(佛道)를 쓰지 않거늘 내 어찌 저 무리를 존숭하고 믿겠는가”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는 예(禮)와 윤리, 도덕을 중시하는 정주학의 근본에 충실하여 고려 충신으로 남고자 한 것이다.  (여행작가 허시명의 글 중에서)



안쪽에는 재실(永慕齋, 1960년 건립)과 묘소와 묘비가 있다.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비문을 지어 1916년(崇禎5周 병진)에 세웠다. 저서는 정광인(程廣仁), 비문 글씨는 18세손 정남진(程南鎭)과 정의진(程義鎭)이 썼다. 원문은 《송사선생문집》권24(한국문집총간 345집 587쪽)에 실려 있다.

⾼麗殿中判寺事⼱川先⽣程公神道碑

中州聖賢之裔多舍中⼟⽽居褊邦若孔孟周朱⽿。⽽河南程{伊川先之後亦其蓋箕聖東出。⼋條敎⺠。禮樂。⾮復舊時之陋。⽽⼦⼜欲居之五胡亂華避地來者不於他必於此歟抑東⽅⽂敎將興菀然有中華之稱。⽽爲吾道東來之兆眹歟{以有宋太少師爲肇祖尙書員外希振府儀三司遹太中夫珦少師後三世太中公明道伊川兩夫⼦。伊川三⼦。季端彥郊社齋郞五傳翰林學樞密院事在⼼。六傳衛尉校丞思祖與翰林孔紹等陪魯公主東來官殿中侍御史川先考也妣貢⽒。⽗錢塘太守載公諱廣字德魯。⽣卒年⽉。世久無徵。⽣⽽純孝有氣節養兼志軆。⽣致樂喪致哀時麗季短喪三年。⽴家廟祭盡誠敬俗尙祈佛獨慨然⽈。吾家伊川先祖浮屠斥之甚嚴恭愍朝爲殿中判寺事與鄭圃隱吉冶隱志同道合與論國計流涕嘗登滿臺賦聯句若閔{農隱安富直提學安省鄭圃隱掌令徐}籠巖樞密李鍾學沙川伯南時淸流遣意悽切交遊之盛知國事不可爲棄官歸⼭。散錄隱淪之蹟題其⾸⽈。忠節⼈⾂古之君奉以周旋於蕩板之⽇。失之。⾮⼈⾂道理余亦亡國不勝⽲⿆之懷摭記若干⼈。以愧後世爲⼈⾂⼆⼼。⼜以詩⽈。我以間無似⼈。肯作泉下有罪⾂。如將今出新國後世其柰辱及⾝。亦以戒⼦⽈。汝亦麗朝⾂。何可事新君若知⼈⾂不忘前太祖屢徵以書辭上不負⺩⽒。下不負鄭夢周屛居以終墓在光州郞洞光州李⽒。掌令彥章⼥。雙封有連判尹有達進⼠,有通府使判尹⼠⼦府使鄭侍郞鴻慶序公遺集云孟⽒⾃國初已爲顯族始著于中廟屢登淸顯始著於正廟雲漢昭回譜牒增光。⽽夫何伊川之裔淪落草野深致慨惜之意第念程{克守先祖勿仕之訓五百年鞱光鏟跡此則程{⽒⽽久屈}以先⽣⾼⾵偉節兼爲賢之後闡揚必有其⽇。旣刊集矣。⼜將昭刻矣⾨。今伊始矣。⼜有私慨于久爲衍之藏使其早于世使今爲親者讀之則必有所感激于衷。⽽圖所以善後者矣今於神道之刻{炳鉉致其⾨⻑⽼之命徵爲銘。⼤賢之裔兼有扶植之義不敢以且病辭⽈。

所祖伊川傳不傳學啓我後⼈。彌萬彌億遺孫東來光華在國矧是克念祖德獨喪三年家訓斥佛圃冶同志禁闥⾮。潸然霑臆筮遯歸隱麗社隨屋以詩罔僕不死爲恥屛跡上下不負辭嚴義直萬世倫綱賴以扶植{郞之阡是公四尺。⾼⼭⾏。疇敢不式

嶽崇五周丙辰 八月幸州 奇宇萬 撰
中等河南伊川祀翰林院五經博士程廣仁篆
十八世孫 南鎭 謹書


번역

고려 전중판시사 건천선생 정공 신도비명 [서문을 함께 씀]

중주 성현의 많은 후예들이 살기 좋은 땅을 버리고 편방으로 옮겨 살고 계시는 분들은 공맹정주씨이니 하남정씨 이천선생의 후예도 또한 그 한분이시다. 그 당시 기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팔조지교로 백성을 가르치니 예악과 문물이 구시대와는 달리 많이 향상되었으나 그때 중화에서는 오호가 난립하여 세상이 어지러울 때 명도 이천 두 부자도 살고자 함에 그 난을 피하여 편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동방의 문교가 점점 흥하여 융성하여지니 소중화라는 칭이 있었음은 유교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징조이며 정씨는 송태자 소사 우로 중시조를 삼으니 상서 원외랑 희진과 개부의삼사 휼과 태중대부 향은 소사후의 3세이다. 태중공이 명도 이천 양부자를 생하였고 이천의 자 단중은 관농 영전사요 한림학사는 비요 추밀원사는 응발이며 위위교승은 사조니 한림 공소등과 함께 노국공주를 모시고 고려에 처음으로 나와 그 벼슬이 전중시어사가 되니 건천선생의 고이며 비는 공씨이니 부는 전당태수의 재이다. 공의 휘는 광이요 자는 덕노이며 벼슬은 전중성판사이니 돌아가신 년월은 오래되어 알길 없으나 공의 천성이 순효하고 기절이 뛰어나 부모를 봉양함에 지체를 겸하였으며 상사에 있어서는 애를 극진하게 하였다.

당시 고려에서는 단상을 행하였으나 공께서는 꼭 3년을 행하시고 가묘를 세워 지성과 공경심을 다하니 당시의 풍속이 불교를 숭상함에 이를 개탄하며 이르시기를 우리 가문은 이천선조로부터 부처를 믿지 아니하였으며 배척하기를 심히 엄하게 하였다. 공민왕 41355년 을미에 그 벼슬이 전중성판사가 되어 정포은 길야은과는 뜻이 같고 도가 같아 서로 국사를 논의할 때에는 어지러운 고려를 생각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일찍이 만월대에 올라 연구를 읊으시는데 농은 민안부와 직제학 안성과 정포은과 장령 서견과 농암 김수와 추밀이종학과 사천백 남을진은 당시의 손꼽는 청풍류로서 그 절친한 친교의 뜻을 가히 알 수 있었으며 고려가 망하자 다함께 은거 망복하니 벼슬을 버리고 광주 금당산에 돌아와 지금까지 행적을 산록하니 그 서문에 쓰기를 충절은 신하의 대보이며 옛 군자도 모든 국정이 문란해지면 바로잡도록 주선을 하였으니 진실한 충절은 한번 잃으면 신하의도리가 아니라 하였으며 이제 망국대부로서 고려국의 회포를 이기지 못하나 후세 사람으로서 신하가 되어두 마음을 품은 자는 부끄럽게 여겨왔다.

공의 뜻을 시로써 나타내기를 나라는 인간이 무사한 사람으로서 지하에 가서도 죄 있는 신하가 될 것인가 만일 이제 새 나라에 나가 벼슬을 한다면 후세에 그 욕이 내 몸에 미쳐오는 것을 어찌하리오하였다. 또한 아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경계 시에서 너도 또한 고려의 신하로서 어찌 새 임금을 섬길 것인가 만일 신하로서 그 도리를 안다면 전왕의 은혜를 잊지 못하리라 하였다. 황익성공이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갈 때 고시를 써서 중하기를 그대는 청운을 타고 가는데 나는 청산을 바라보며 돌아가도다. 구름과 산이 이를 좇아 이별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도다라 하였고 이태조께서 벼슬길에 나오라고 여러번 부르니 글로써 나타내기를 위로는 고려 왕씨를 저버릴 수 없고 아래로는 정몽주를 저버릴 수 없으니 죽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라 거절하였다.

그 뒤 영영 은거하여 조용한 일생을 마치니 묘는 광주 금당산 정랑동 자좌에 있으며 부인은 광산이씨이니 장령 언장의 딸이며 묘는 쌍봉하였다. 세 아들 가운데 유련은 판윤이요 유달은 진사요 유통은 부사이다. 판윤의 자 유는 진사요 임도 진사이며 인은 부사이다. 가만히 돌아 보건데 정시랑 홍경이 유업을 서술한 글에서 말하기를 맹씨는 조선 국초로부터 이미 관직에 나가 벼슬을 하였고 공씨는 비로소 중종 때에 와서 학식과 문벌이 높아 규장각 홍문관 선원관의 벼슬에 올랐으며 주씨는 비로소 정조 때에 이르러 운막이 나타나 빛을 보게 되어 보첩이 증광되었는데 어찌하여 이천의 후손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묻혀 벼슬을 아니 하셨는지! 후손들은 이를 깊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 당시 정씨는 선조의 말씀대로 벼슬을 하지 말라는 훈계를 굳게 지켜 조선 오백년에 그 훌륭한 공적이 나타나지 않고 감추어져 흔적이 없어졌으니 이는 오직 정씨 뿐이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버리고 이조에 나가 벼슬을 했었다면 정씨가문은 대성하였을 것이다.

선생의 고풍위절이 겸지하여 대현의 후예가 틀림없으며 이 뒷날 그 훌륭한 공적과 행적이 크게 나타나 반드시 밝게 빛나는 그날이 꼭 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선조들의 문집을 간행하여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렸으면 정씨 가문이 더욱 밝게 대창 하였으련만 은거생활로 초야에 묻혀 그 빛을 잃게 되었으니 오직 마음에 개탄할 일이나 건천선생께서 남긴 유문이라도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를 세상에 널리 간행하여 친신 또는 세록신들이 그 문집을 읽고 정씨 가문을 알게 되었더라면 과연 충절은 신하의 대보로서 진실로 그 충절을 한 번 잃으면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느끼게 되었을 것이며 긍작유죄신 기나욕급신과 그 여역여조신 하가사신군과 그 상불부왕씨 하부정모씨라 말씀하신 것을 보면 충절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후예들에게 꼭 전하고자 함이다.

이제 공의 모든 사실을 신도비에 낱낱이 새겨 후인으로 하여금 이를 보고 느끼도록 함이니 이미 비석이 갖추어져 정생 병현이 그 문중 어른의 명을 받아 비에 새기도록 대현의 후예가 이를 부탁하니 감히 늙었으나 이를 사양하지 못하노라.

이천선생은 전치 못한 성리학을 후세에 전하여 어두웠던 당시의 후인들을 밝은 세상으로 인도하여 깨우쳐 주었으니 그 뒷날 그 광화가 우리나라에 까지 미쳐왔으며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큰 덕을 쌓아 삼년상을 홀로 행하고 가훈으로 불교를 배척하니 정포은과 길야은은 동지로서 금지된 대궐에 출입하고 국란과 국정의 어지러움에 상심하니 감추려했던 눈물이 문득 가슴에 적시도다.

처음부터 은거생활로 돌아와 송도개경을 바라보며 시로써 모든 뜻을 나타내어 아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경계를 하였으나 죽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며 두문불출 은거로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니 위로는 충절을 저버릴 수 없고 아래로는 친교의 도의를 저버릴 수 없었으나 오직 만세의 윤상이 깊이 뿌리내려 영원히 빛나리라. 금당산 정랑동에서 공이 평생을 조용히 마치시니 고산같이 우러러보며 스스로 고개가숙여지도다.

1916년 병진 8월 기우만이 짓고 중등 하남 이천사 한림원 오경박사 정광인이 전서를 쓰고 십팔세 손 남진과 의진이 글씨를 쓰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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