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판(參判) 한공(韓公) 성우(聖佑) 의 신도비명 병서- 한성우 광주목사

참판(參判) 한공(韓公) 성우(聖佑) 의 신도비명 병서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한수재집(寒水齋集)》 제25권 / 신도비(神道碑)


근세에 사계ㆍ우암 두 선생이 도학을 전승하여 온 세상의 사종(師宗)이 되었는데, 한공 여윤(韓公汝尹)은 사계의 외손자로 우암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젊어서부터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하여 깨끗한 조행을 스스로 지니었고, 나아가 벼슬할 때에 미쳐서는 곧은 도리로 임금을 섬기어 끝까지 법문(法門)의 끼친 법도를 훼손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의 천성이 그러하거니와 연원(淵源)의 소유래(所由來) 또한 속일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의 휘는 성우(聖佑)인데, 숭정(崇禎) 계유년 4월 1일에 태어났다. 총명하고 단아하며 글재주가 뛰어났으므로, 어른들이 공의 조예가 한량할 수 없을 정도로 기약하였다. 약관 시절에 누차 해액(解額)을 따냈었는데, 기유년에야 사마시에 합격하니, 사우(士友)들이 늦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이때 송곡(松谷) 조공 복양(趙公復陽)이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공을 금오랑(金吾郞)에 의망하려 하자, 공은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극력 사양하였다. 이해 겨울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다음해에 또 모친상을 당하였다.

갑인년에 사화(士禍)가 일어나려 하자, 수백 인의 선비들을 인솔하고 우암 선생의 억울함을 변명하고는, 인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호우(湖右)에 자취를 감추었다. 경신년의 대출척으로 인하여 으뜸으로 녹용되어 숭릉침랑(崇陵寢郞)에 제배되고, 관례에 따라 봉사ㆍ직장에 옮겨졌다.

갑자년에는 성균관 제술에서 장원하였고, 이해 겨울에는 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자궁(資窮)으로 예조 좌랑에 승진되었다. 을축년에는 병조에 옮겨져 호남에서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호남 사람들이 공의 공정함에 심복하였다. 이때에 사론(士論)이 이미 갈라져서 한 전랑(銓郞)이 공을 함경도 도사로 내보내자, 친구들이 모두 공의 좌천된 것을 위문하였는데, 공은 조금도 언짢은 기색이 없이 하직하여 말하기를 “북도의 명산(名山)은 내가 평소 보고 싶었던 곳이다.” 하였다. 그리고 막부(幕府)에 이르러서는 다만 시가나 읊조리는 것으로 유유자적하였고 성기(聲妓)는 한 번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병인년에는 사헌부 지평에 소배(召拜)되었는데, 이때 원임대신 이상진(李尙眞)이 민희(閔煕)와 홍우원(洪宇遠)을 석방할 것을 청하자, 공이 양사와 함께 이상진을 공박하였다. 그런데 동료 대관 가운데 이의를 세우는 자가 있자, 공이 인피하여 말하기를 “홍우원의 말은 왕대비를 범하였고 민희의 죄는 종사에 관계되는데, 대신이 그들을 신구한 것은 진실로 무슨 마음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아울러 사간 이홍적(李弘迪)과 장령 안규(安圭)의 언론을 회피한 과실을 논핵하였다. 우상 정재숭(鄭載嵩)이 연경에 사신으로 가서 상께 벌환(罰鍰)을 매기는 치욕을 받고 돌아오자, 공이 동료와 함께 그를 논핵하였고, 또 차자를 올려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의 폐단을 논하여 말하기를 “하루 사이에 이미 혁파할 것을 윤허했다가 다시 그전대로 두도록 하시니, 이는 실로 임금의 말 한마디가 나라를 일으키고 망치는 기미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윽고 사간원 정언에 옮겨졌다. 이에 앞서 교리 이징명(李徵明)이 궁금의 일을 말했다가 상의 뜻에 거슬리었으므로, 공이 상소하여 그를 구하였다. 그후에 다시 앞서의 논의를 되풀이하였는바 말이 더욱 격절하였으므로, 상이 진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엄한 전교를 내리고 즉시 공의 간관직을 체직하였다. 그러자 정원이 체직의 명을 돌려보내고 옥당이 차자를 올려 시정을 요구하니, 상이 이에 공에 대한 체직의 명을 환수할 것을 명하고 비답의 말도 고쳐서 내렸다. 이때에 조정과 외방이 모두 공을 대신해서 두려워 떨었으나 공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조(銓曹)에서 공을 40여 차례 이상 여러 내외직에 의망하였으나 끝내 상이 권점(圈點)을 내리지 않으므로, 노봉(老峯) 민 상공(閔相公)이 공을 불러 금위 종사(禁衛從事)로 삼았다. 그러다가 무진년에 원자(元子)가 탄생함으로써 비로소 공에게 예빈시 정을 제수하였다.

기사년에는 큰 사화가 일어나서 또 우암 선생이 제주도에 유배되자, 공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있으면서 서울에는 발도 딛지 않았다. 갑술년에는 성상이 크게 뉘우쳐 깨달음으로써 공이 으뜸으로 소명을 받아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공은 강연(講筵)에 오를 때마다 글 뜻을 해석하고 나서는 경사(經史)를 널리 인증하여 일에 따라 개도(開導)하고, 또 청하기를 “《성학집요(聖學輯要)》가 임금의 일상 행사에 가장 적절하니, 때때로 열람하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달한 말이 매우 적절하니, 의당 각별히 유념할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교리에 옮겨서는 우상 윤지완(尹趾完)에 대한 불윤비답(不允批答)을 대신 지으면서 ‘인륜이 무너졌다[彝倫斁敗]’는 말을 썼는데, 이에 대해 윤 정승이 자기에게 비난의 뜻을 부친 것인가 의심하여 매우 노여워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의 본의가 아니다.” 하였다. 그러나 끝내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사년의 방중(榜中)에 급제한 명가(名家)의 자식으로 병조의 낭관이 된 자가 하나 있자, 공이 말하기를 “만일 그가 스스로 옳게 처신하지 않으면 내가 반드시 그를 공박할 것이다.” 하였고, 홍문록(弘文錄)을 만들 때에 이르러서는 부제학 오도일(吳道一)과 쟁론하여, 기사년의 방중에 급제한 사람은 하나도 그 선(選)에 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청의(淸議)는 조금 펴졌으나, 시배들이 공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은 더욱 심해졌다.

이때 칠(漆) 3두, 호초(胡椒) 40두를 대내로 들여오라는 명이 있자, 공이 응교로 차자를 올려 그 일을 논하였다. 그 대략에 “지금 이 물품의 수량이 매우 많은데, 전하께서 어디에 쓰시려는 것입니까. 만일 아무런 쓸데없는 일을 하는 데에 면치 못한다면, 신은 성상의 마음이 사치의 지경으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깊숙한 방 안에서 남이 모르는 가운데 한 생각이 겨우 싹이 텄더라도 하늘은 이미 환하게 내려다보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삼가고 두려워하는 뜻을 더욱 지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그리고 집의에 체배되었는데, 이때 묘향(廟享)을 재감하자는 의논이 있자, 공이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하여 헌의하기를 “지금 상하 기관의 쓸데없는 비용을 전체적으로 계산하여 감하거나 혁파하는 일을 모든 기관에 모조리 다 시행하지 못하면서 먼저 묘향부터 감한다면 어찌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명께서는 큰 뜻을 분발하여 힘써서 먼저 스스로 검약하소서.” 하였다.

공이 일찍이 국문하는 자리에 참여했었는데, 이때 위관(委官)인 남상 구만(南相九萬)이 이의징(李義徵)을 감사(減死)하자는 의논을 제기하자, 공이 쟁론하기를 “의징은 화심(禍心)을 품고 누차 큰 옥사를 일으켜 사대부들을 마구 죽이고 국가에 해를 끼쳤으니, 용서해서는 안 된다.” 하고 누차 말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공이 일어나서 나오려고 하니, 위관이 부득불 공의 말대로 따랐다.

이로부터 수찬을 두 번, 교리ㆍ응교ㆍ사간을 각각 세 번, 집의를 두 번 역임하고 동부승지에 올라 병으로 체직되었다. 그후 호조 참의에서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나갔다가 을해년에 들어와 다시 승지가 되었다. 병자년에는 예조 참의로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보임되었다. 정축년에는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무지개와 천둥의 이변을 인해서 분부에 응하여 소장을 올려 재변을 중지시킬 절실한 방도를 극력 말하고, 또 경연에 자주 나갈 것과 세자를 보익할 것과 임금의 덕을 닦아 조정을 바르게 하고 염치를 면려하여 장법(贜法)을 엄히 할 방도에 대해 거의 수천 언을 진술하였는데, 상이 온후하게 비답하였다.

무인년에는 철원 부사(鐵原府使)가 되었다가 기묘년에 돌아와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이해 가을에는 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는데, 다음해에 그만두고 돌아오니, 광주 백성들이 공의 덕을 기리어 산비탈을 깎고 쇠를 주조하여 비를 세웠다. 신사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매우 엄격하였고, 호령이 명확하고 엄숙하였다. 당시 도내에 여러 궁가(宮家)가 널리 점유한 산택(山澤)이 수십 군데에 이르렀으므로, 공이 장계(狀啓)를 올려 혁파하기를 청하면서 거취(去就)를 조건부로 삼아 쟁론하였으나, 조정이 이를 덮어 두고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계미년에는 누차 소를 올려 체직되어 돌아와 호조ㆍ병조ㆍ예조의 참의와 승지ㆍ대사간ㆍ판결사에 제배되었는데, 그중에는 재차 제배된 벼슬도 있었다.

갑신년 가을에는 또 대사간이 되어 3건의 일을 상소하여 논했는데, 하나는 선혜청(宣惠廳)의 쌀을 가져다가 시전(市廛)에서 외상으로 가져온 물건 값을 갚으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대관(臺官) 김만근(金萬謹)을 변방 고을에 물리쳐 보직시키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지평 김재(金栽)가 아첨하여 할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을유년에는 또 승지에서 예조로 옮겨졌는데, 이때 존호(尊號)에 관한 의논이 있자, 공이 자신의 직사(職事)로 상께 간하면서 육 선공(陸宣公)의 “태평한 때에 행하여도 이미 겸허함에 누가 되거니와, 상란(喪亂)이 있는 때에 행하는 것은 더욱 사체를 손상시킨다.”는 말을 인용하여 정성을 다해 개진하니, 상이 윤허하고 “과인을 지성으로 사랑한다.[忠愛寡躬]”는 전교를 내렸다. 이해 가을에는 개성 유수에 승진되어 무비(武備)를 일신시키고 부고(府庫)를 가득 채워놓으니, 피폐한 백성을 소생시키고 폐해진 일들을 흥기시킨 효과가 크게 있었다.

정해년에는 병조 참판에 체배되었고, 무자년에는 서반직으로 의금부 당상을 겸하였다. 이때에 직신(直臣) 이동언(李東彥)이 시배들에게 증오가 쌓임으로 인하여 불효의 죄에 빠져 3년 동안 옥에 갇혀 있었는데, 성상의 뜻도 그에게 의도적인 것이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 일을 말하기를 꺼려 했었다. 그런데 공이 상소하여 그 일을 논하되, 사건의 근본적인 것을 숨김없이 설파하고 증거의 단서를 죽 열거하였다. 그리고 인하여 이동언의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정상을 명백하고 적절하게 말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은 다 통쾌하게 여기었으나 성상의 비답은 매우 엄하였다. 이로 인해 1년이 넘도록 벼슬길이 막히었는데, 뒤에 상의 명으로 이동언을 신원시키니, 사람들이 공의 상소가 그 장본이었다고 말하였다.

기축년에야 비로소 병조ㆍ예조의 참판과 좌윤ㆍ우윤에 제배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면하였다. 경인년에는 이조 참판이 되어 깨끗한 언론을 확장시키고 곧음을 굳게 지켜 굽히지 않았으므로, 시배들이 공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래서 끝내 권첨(權詹)으로부터 상소하여 헐뜯음을 입고 이로 인해 정체(呈遞)되었다가 다시 공조 참판ㆍ대사성에 옮겨졌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고 강교(江郊)로 물러가 있으면서 일곱 번이나 소명(召命)을 어김으로써 파직되었다. 그러자 산수 속에 노닐면서 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그해 11월 13일에 병으로 정침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78세였다. 공은 병중에 백여 마디 말을 입으로 불러서 자손들에게 남겨주었고, 임종시에도 성상의 병환이 중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애타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곡진히 말을 하였는데, 기식이 약하여 마치 꿈속의 말처럼 희미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조문과 부의를 의식대로 하였다. 다음해 1월에 광주(廣州)의 월곡(月谷)에 장사 지냈다가, 을미년 9월에 본주(本州) 부곡촌(富谷村) 인좌(寅坐)의 언덕에 이장하고 부인 홍씨(洪氏)를 합장하였다.

공은 천품이 대단히 강직했는데, 얼굴은 수척하고 정신은 맑았으며, 뜻은 고결하고 행실은 방정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어 항상 좌우에 모시면서 사랑과 공경을 곡진히 다하였고, 질고(疾故)가 있지 않으면 잠깐이라도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부모가 하찮은 병환이라도 있으면 얼굴에 근심스러운 빛이 드러났다. 일찍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모시는 사람은 의약(醫藥)을 몰라서는 안 된다.” 하고, 모든 의방(醫方)을 두루 상고하여 의술을 대략 알게 되었다. 어버이 상을 당하여서는 상심하여 슬퍼하는 정도가 예제에 지나쳤고, 비바람도 아랑곳없이 여묘에서 곡배(哭拜)하였다. 또 선대에 언급이 되면 반드시 목이 메어 울었는데, 늙어서도 그 슬픔이 줄지 않았다.

공은 외가의 선대 비갈(碑碣)을 몸소 다 마련하여 세웠다. 두 형을 마치 아버지처럼 섬겼고, 막내아우가 매우 가난했으므로 토지를 떼주어 생계를 꾸려 나가게 하였다. 부친을 여읜 세 조카들을 지성으로 교도하였고, 종형제들을 동기간과 똑같이 대하였다.

일찍부터 위기(爲己)의 학문을 사모하여 대현(大賢)을 사사하였는데, 비록 일찍이 유자(儒者)로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행신과 처사가 법도에 맞지 않은 것이 적었다. 매일 새벽이면 반드시 일어나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었고, 상스럽고 술수적인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서책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그중에도 주자의 글에 더욱 힘써 깊이 연구하고 흡수하여 이치가 밝아지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아서 이것을 일생의 체험으로 삼았다. 만년에는 《소학》 일부(一部)를 정하게 베껴가지고 늘 펼쳐보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만일 이것을 안다면 어버이와 임금을 거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문(文)을 짓는 데는 기력이 매우 힘찼고 억지로 꾸민 흔적이 없었는데, 임금에게 상주한 문자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모두 박식하고 문견이 많다고 칭도하였다. 시를 짓는 데 있어서는 생각이 침울하고 전중하였으며, 화려함을 일삼지 않았으므로, 문단의 여러 노장들이 공의 시를 감상한 것이 많았다.

사람을 접대하는 데는 반드시 정성과 신의로써 하였고 간격을 두지 않았다. 남의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포양할 것을 생각하였고, 만일 불선한 사람을 보면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기었다. 평온하고 조용하게 자신을 단속하고 출세 길에 분주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문정(門庭)이 고요하여 잡객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검소함을 숭상하여 자신 받드는 것을 마치 한빈한 선비와 같이 하였고, 염치와 절의를 면려하여 깨끗한 명성이 조정의 고관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객지에 집을 사서 우거하는 것을 남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했으나 공은 태연하게 지냈다.

산수를 매우 좋아하여 역내(域內)의 명산들을 두루 유람하고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10구(區)를 그림으로 그려서 병풍을 만들어 둘러놓고 누워서 유람하였다. 모든 물(物)에 인자하여 비록 곤충 같은 미물도 차마 함부로 죽이지 않았고, 정사를 하는 데는 엄격함을 숭상했으나 한 번도 인명을 손상시킨 적이 없었다. 저술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스스로 수장(收藏)하지 않아서 절반 이상이 산일되었고, 약간 권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상당 한씨(上黨韓氏)는 고려 태위(太尉) 난(蘭)을 상조(上祖)로 삼는다. 아조에 들어와서는 대대로 고관이 나서 귀한 지위를 계승하여 동방의 갑을족(甲乙族)이 되었다. 근세에 우의정을 지낸 충정공(忠靖公) 휘 응인(應寅) 같은 분은 큰 훈업(勳業)이 있어 중흥의 명상이 되었다. 충정공이 휘 덕급(德及)을 낳았는데 덕급은 지돈녕(知敦寧)으로 청녕군(淸寧君)을 습봉받았고, 사계 선생의 집에 장가들어 휘 수원(壽遠)을 낳았다. 수원은 사림들 사이에 중한 명망이 있었고, 목사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고(考)이다. 비(妣)는 함평 이씨(咸平李氏)인데 그의 고 용계 처사(龍溪處士) 영원(榮元)은 승지에 추증되었다.

홍 부인(洪夫人)은 당성(唐城)의 대성으로 도관찰사인 성암공(醒菴公) 처후(處厚)의 딸인데, 단정하고 엄숙하고 차분하고 전일하여 일마다 예법을 따라서 하였다. 그리하여 집에 있을 적에는 부모가 그를 훌륭하게 여겼고, 시집간 뒤에는 시부모가 그를 좋게 여겼다. 동서들을 마치 친형제처럼 대하였고, 여러 아비 여읜 조카들을 자기 자식과 똑같이 어루만져 보살피었다. 상자에는 패물이 없었고, 문에는 무당이나 점쟁이를 들이지 않았다. 공을 따라 여러 지방 고을에 가서도 아무것도 팔고 사지 않으니, 안과 밖이 엄숙하였다. 그리하여 집안사람들이 모두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4남 1녀를 길렀는데 장남 배의(配義)는 정랑이고, 다음은 배도(配道)ㆍ배문(配文)ㆍ배기(配琪)이며, 딸은 조명휘(趙命徽)에게 시집갔다. 측실이 낳은 아들은 배희(配煕)이고, 딸은 박필무(朴弼懋)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 딸은 아직 비녀를 꽂지 않았다. 배의의 아들 사범(師范)은 진사이고, 2녀는 이홍좌(李弘佐)와 유세모(柳世模)에게 시집갔다. 배도의 양자는 사식(師軾)이고, 3녀 가운데 둘은 윤지(尹志)ㆍ윤득검(尹得儉)에게 시집갔고, 막내딸은 아직 정혼하지 않았다. 배문의 아들은 사일(師逸)이고, 딸은 신진하(申鎭夏)에게 시집갔다. 배기는 일찍 죽었다. 사위 조명휘의 아들은 한종(漢宗)ㆍ한명(漢明)ㆍ한장(漢章)이다. 내외 증ㆍ현손이 모두 50여 인이다.

아, 공은 명문의 귀한 자제로 재학(才學)이 뛰어나서, 유생으로 있을 때부터 명성과 인망이 성대하였다. 늦게야 임금의 알아줌을 받게 되어서는 풍도와 위엄이 한 세상을 떨쳤으니, 의당 조정에 예복을 차리고 앉아 그 경륜을 크게 펼 듯했었는데, 누차 임금의 뜻에 거슬리고 시론(時論)과도 거슬림이 쌓여, 쓰인 것이 항상 시배들의 마음에 달려 있음으로써 포부와 능력을 다 펴지 못하고 뜻을 가진 채로 작고하였으니, 이것이 혹 이른바 운명이라는 것인가.

비록 그러나 삼가 공의 벼슬한 시말을 상고해 보건대,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는 고인의 정직한 풍도가 있었고, 강연(講筵)에 들어가서는 진학사(眞學士)란 칭송이 있었다. 그 늠름한 풍성(風聲)이 사책에 빛나서, 백세 뒤에까지도 반드시 나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고 탐욕스러운 자를 청렴하게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니, 살아서는 존귀를 극도로 누렸으나 죽어서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 사람과 비교해 보면 그 현ㆍ불초의 차이가 어떠하겠는가. 옛날 구양공(歐陽公 송 나라 구양수(歐陽脩))은 정사에 가장 뛰어났으나 그것이 문장에 가리었었는데, 지금 공은 행의가 순수하고 구비한데도 사람들이 혹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이 또한 공의 직절(直節)에 가리어진 것인가.

나는 공과 대대로 다져온 친밀함과 동문의 정분이 있으므로, 비록 은거함과 현달함의 길이 서로 달라서 자주 서로 종유하여 봉마(蓬麻)의 이익은 힘입지 못했으나, 그 높은 풍도를 멀리서 사모해온 지는 오래되었다. 공이 작고한 지 오래되어 지금 공의 묘목(墓木)이 이미 아름드리가 되었는데, 정랑군(正郞君)이 비문을 지어달라고 울면서 청하니, 내가 어찌 감히 글을 못한다 해서 사양하겠는가. 삼가 행장의 글에서 발췌하여 이상과 같이 차례대로 기록하고 명(銘)으로 잇노라. 명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한 신하가 있어 / 若有一个

강하기가 철석 같았네 / 其剛鐵石

일찍부터 사문에서 수학하여 / 夙遊師門

학문이 바르고 곧았네 / 學其方直

예송이 화의 계제가 되어 / 禮訟階禍

우암 선생이 멀리 유배되자 / 大老栫棘

수백 인의 선비를 거느리고 / 倡數百士

상소하여 선생을 변호했네 / 抗章昭析

경신년의 대출척으로 인해 / 白猿更化

공이 비로소 벼슬을 했는데 / 公始通籍

정색하고 대관의 자리에 있으니 / 正色臺端

위엄이 가을 하늘 수리새 같아 / 秋天一鶚

준엄한 말로 대면하여 힐책하매 / 危言面折

조야가 모두 위축되었네 / 朝野瑟縮

그런데 겁화가 하늘에 가득하여 / 劫火彌空

시사가 망극한 지경에 이르자 / 時事罔極

벼슬 내놓고 영원히 은퇴하여 / 掛冠長往

산수 사이에서 노닐었네 / 婆娑林壑

그러다가 임금님이 마음 돌리어 / 黃道回光

바른 선비들 다시 돌아오자 / 正士來復

깐깐하게 충성스러운 계책으로 / 侃侃忠規

임금님 정사 힘써 도왔네 / 密勿經幄

큰 고을 수령과 감사를 지내면서 / 大邑名藩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 淸氷苦蘗

개성 유수로 있을 적에는 / 居留舊京

상의 의뢰하는 마음 더욱 두터웠네 / 倚畀益篤

이조 참판으로 들어와서는 / 入佐天官

호선오악의 정사부터 먼저 하니 / 政先揚激

증오하는 자가 세상에 가득차서 / 白眼滿世

쉬파리 옥 더럽히듯 공을 해쳤네 / 靑蠅點玉

용납되지 못한 게 무어 해로울쏘냐 / 不容何病

우유자적함이 즐겁기만 했었지 / 優閒可樂

내 곡식 무성하게 자라고 / 我稼油油

내 호수 맑고 푸르렀었네 / 我湖澄碧

그러다가 선뜻 세상 떠나니 / 翛然乘化

천지간에 부끄러울 것 없어라 / 俯仰無怍

효성스러운 아들이 좋은 돌 다듬어 / 孝子劖珉

공의 명성과 덕행 드러내려 하니 / 思顯名德

맑은 명성 끝없이 전해져서 / 淸芬不沫

구름과 물과 함께 깨끗하리라 / 雲水俱白

[주-D001] 육 선공(陸宣公)의 …… 손상시킨다 : 

육 선공은 당(唐) 나라 때의 직신(直臣) 육지(陸贄)를 말한다. 선공은 그의 시호. 이 말은 육지의 봉천논존호가자장(奉天論尊號加字狀)에 나온다. 《四庫全書 集部 翰苑集 卷13》

[주-D002] 봉마(蓬麻)의 이익 :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대가 삼밭 속에 나면 손을 쓰지 않아도 절로 곧게 자란다.[蓬生麻中 不扶而直]” 한 데서 온 말로, 즉 착한 사람과 사귀면 자신도 자연히 착해짐을 비유한 것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