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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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야승- 남중잡록3; 김덕령 용력이 뛰어나다

계사년 하 만력 21년, 선조 26년(1593년)

윤11월 4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고 6일에는 안개가 끼어 종일토록 사방이 막혔다.
○ 광주(光州) 상인(喪人) 김덕령(金德齡)은 도내 각 고을 여러 군자(君子)에게 공경히 고하나이다. 요사이 보건대, 흉악한 적이 이미 서울에서 나와 영남 변두리에 벌떼처럼 주둔하여 변경(邊境)의 성보(城堡)에 멧돼지처럼 돌격하여 가만히 엿보는 생각을 품고 날로 미친 짓을 방자히 하매, 관군(官軍)이 패배하고 의병도 또한 움츠러져서 군사를 멈추고 둘러서서 보기만 하고 무찔러 멸하는 데는 뜻이 없으니 위엄을 상실하고 적을 길러줌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조정에서는 시위(侍衛)하는 신하가 부지런히 힘쓰는 이가 없고 밖으로는 제 몸을 잊는 충신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오늘날의 사세를 보건대, 진실로 답답합니다. 김덕령은 처음부터 소탈한 바탕으로 뜻은 갓끈을 청하는 데 간절하였습니다. 변이 난 처음에 군중에 몸을 던져 감히 조그마한 힘이나마 바치려는 생각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늙은 모친이 병이 들어 서산에 지는 해와 같았으므로 마지막으로 봉양할 정이 간절하여 차마 뿌리치고 갈 수 없어 두 해를 집에 엎드려 있으면서 칼을 어루만지며 동쪽을 돌아볼 뿐이었습니다. 이제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시어 자식으로서 믿을 데가 없고, 국가에 일이 많으니 신하로서 절개를 다할 때입니다. 다행히 담양 부사 이후(李侯) 경린(景麟)을 만났더니, 그는 종실(宗室)의 후손으로 일찍이 나라 위해 적을 칠 뜻을 품은 이라, 나의 헛된 이름을 듣고 전구(戰具)를 준비해 주면서 일어난 국난(國難)에 임하기를 권하므로 두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침내 어쩔 수 없어 애통한 정을 끊어 상복을 벗고 사세에 따라 군중(軍中)으로 나왔나이다. 장수 노릇하는 방략(方略)은 비록 표요(票姚)에게 부끄러우나 의기(義氣)는 적이 조사아(祖士雅)를 사모하나이다. 손으로 칼을 휘두르며 몸에는 갑옷을 걸치고 위엄을 기르며 날랜 기운을 쌓아서 범의 굴을 바로 더듬어 백성의 분을 조금이나마 풀어 주고 칠묘(七廟 임금의 종묘)의 수치를 쾌히 씻으려 하오니, 오직 바라건대, 먼 데나 가까운 데서 마음을 협력하여 위태한 나라를 붙드는 지극한 계책을 함께 정합시다. 지금 이에 충심(衷心)을 밝혀서 고하오니, 각 읍의 장사 중에 혹시 나를 따를 이가 있을는지요. 아! 2백 년 동안 기르고 가르친 나머지에 한 사람의 선비도 분에 겨워 순국(殉國)할 이가 없을쏜가. 몸을 버려 국난을 구제해야 할 때가 이때로다. 소매를 떨치고 단(壇)에 오름을 어찌 가히 늦추랴! 김덕령의 힘은 솥을 들기 어렵고, 용맹은 만인을 대적할 사람이 못 됩니다. 회고하건대,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어야 할 것이므로 재주와 지혜의 졸렬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같은 무리의 선비를 불러 모아 모두 단심(丹心)으로 공업을 성취하려 하나이다. 기회를 타서 변통하는 데는 비록 능히 묘한 계책으로 적을 제어하지는 못하나마 칼날에 부딪치는 데는 마땅히 군사의 선등(先登)이 될 것을 맹세하나이다. 방금 7도가 병화(兵禍)를 입지 않은 데가 없는데 오직 우리 호남만이 도륙을 면하였으니, 회복할 일맥이 여기에 있는데 근자에 물력(物力)이 거의 다 되고 민생이 곤궁하여 병화를 겪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이때에 적이 이른다면 누가 다시 막아내리오! 부모 처자는 사람마다 있지 않은 이가 없고, 상재송백(桑梓松栢)도 집집마다 기르지 않은 이가 없는데 하루 아침에 살육 약탈되고 분탕질을 당한다면 어찌 그것이 바라는 바이겠는가. 진실로 사람마다 노한 마음을 품어서 사사로운 원수 갚듯 한다면 이 적을 멸하지 못할 이가 없다. 혹시 목전의 편안함을 보존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오지 않는다면 이것은 부모를 적에게 주는 것이며, 제 손으로 송백(松栢)을 스스로 자르는 것이니, 어찌 그럴 이가 있으리요. 원하노니, 각 읍의 선비들은 마음을 주저하지 말고 분발하는 기운을 배나 더하여 서릿발 같은 창날과 철기(鐵騎)로 우레처럼 굴리고 바람처럼 몰아쳐 간다면 다 죽어 가는 남은 적들이 반드시 흙처럼 무너지고 와해(瓦解)될 것이며, 칼날에 피 묻히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달려와 죽기를 기다릴 것이니, 비수(淝水)의 공을 오늘에 세울 수 있고, 전연(澶淵)의 승리를 불시(不時)에 얻을 수 있으리니, 어찌 매우 다행하지 아니한가. 아! 명 나라 군사가 항상 불의(不意)의 습격에 욕을 보고, 우리의 강토는 오랫동안 왜놈에게 더럽혀졌네. 칼을 짚고, 수레바퀴를 울려도 군사들이 일어나지 않는도다. 경계에 다다라 목을 찌르니, 옹문(雍門)을 누가 회복하리. 거사(擧事)할 것은 아래와 같이 조목을 나열하니, 이 격문이 도착하거든 자세히 생각하여 힘쓸지어다. 또 군사는 정예하기를 힘쓰고 많기를 힘쓰지 않는 것이니, 오중 장사(吳中壯士) 10여 인을 얻어 함께 가기를 원하나이다.

12월 25일 학가가 전주에 도착하여 다음날 알성(謁聖 임금이 공자 신위에 참배하는 것)하고, 27일에 과거를 보여 문신(文臣) 11인과 무신(武臣) 1천 6백 인을 뽑았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또한 명령을 받들어 합천(陜川)으로 진을 옮겨 과거를 보여 무과(武科) 9백 인을 뽑았다. 영남으로 간 장사들을 호남으로 모을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나누어 시취(試取)하였는데, 철전(鐵箭) 다섯 개를 일순(一巡)에 두 번 맞히고, 말타기 1차(次)에 두 번 맞힌 자는 뽑고, 그 나머지는 합하여 1방(榜)으로 하였다.
○ 조정에서 이정복(李廷馥)의 장계로 인하여 김덕령(金德齡)에게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주었다.
○ 낙상지 등은 경주로부터, 송대빈 등은 삼가(三嘉)로부터 모두 군사를 철수하여 서울로 향하여 이내 명국으로 돌아갔다.
○ 익호군중 선비들의 통문은 아래와 같다.
김덕령 장군은 좀처럼 보기 드문 용력(勇力)을 가졌고, 여러 해 동안 적을 평정하지 못함을 분히 여겨 상중(喪中)에서 몸을 빼내 칼을 짚고 일어서니 웅장한 명성에 격동되어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 그림자처럼 따랐다. 번개처럼 발동하고 구름처럼 모여들어 소탕해 맑히기를 한가지로 맹세하였다. 의기가 이미 영남 바다 한쪽에까지 진동하니, 몇몇 남은 적들은 가마 속에서 노는 물고기처럼 죽을 때만 기다리고, 전라도 한 구석이 도륙을 면하였으니 심히 다행이다. 다만 관청이나 민간의 저축이 모두 다 되어 군중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모두 스스로 판출하려고 장수나 군사가 그렇지 아니한 이가 없다. 다 같은 신하요 백성인데 어떤 이는 도망해 숨느라고 겨를이 없는데, 스스로 싸우고 스스로 먹어야 하니 겨울에 종군하는 자만 어찌 잘나서이겠는가. 아! 종군하는 괴로움은 어느 누가 꺼리지 않으며, 가정의 기쁨은 누군들 좋아하지 않으리오마는 남들의 하고 싶어하는 바를 버리고 꺼리는 바를 즐거이 따름은 어찌 딴 뜻이 있으랴! 그들은 전란을 겪은 백성들이 적이 와도 막지 못하여 부모는 칼날에 죽고 처자는 포로로 잡혀가서 집을 잃고 재물을 잃고서 울부짖는 자들을 보고 함께 망하는 것을 차마 할 수 없어 드디어 손바닥에 침 뱉고 소매를 떨치고 격동하여 구름처럼 모여서 위로는 국가를 위해 무궁한 수치를 씻고, 아래로는 집에 자물쇠를 굳게 하기 위하여 만번 죽더라도 아깝지 않은 행동으로 깃발을 들고 갑옷을 걸치고서 영남에까지 싸우러 왔으니, 그 뜻은 장하고 계책은 깊다. 그런데도 그 고향에 처하여 살림을 편안히 하여 집안 처자의 즐거움을 앉아서 누리는 자는 홀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아! 이 적이 있으면 이 재물이 없어질 것이며, 이 적이 없어져야 이 재물이 있을 것이니, 재물을 가지고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재물을 내어 적을 제거함이 낫지 않겠는가? 옛사람의 말이 있는데, “잠깐 소비하지 않으면 길이 편안할 수 없다.” 하였고, 또, “재물을 저축함은 능히 잘 쓸 수 있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 하였는데, 혹시 쌓아 두고 흩지 않아서 훗날의 계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비루하지 아니한가? 대저 사람을 물에서나 불에서 구제해 주면 반드시 그 은덕을 갚으려고 생각함은 나를 살려 준 은혜가 지극히 중하기 때문이다. 지금 왜적의 날뜀이 수화(水火)보다 심한데 그의 해를 입을 사람들이 평범히 보고 돌이켜 생각할 줄 모르니, 이 무슨 뜻인가? 엎드려 원하건대, 창을 메고 싸우는 괴로움 대신에 보존하기 어려운 미곡을 아끼지 말고 빈부(貧富)에 따라 각기 한 되 한 말이라도 내어 군자(軍資)에 보조하면 저 토벌하고 방어하는 군사들이 반드시 기운을 다해 급히 달려서 죽도록 힘껏 싸워서 흉악한 칼날로 하여금 이 도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그러면, 오늘날 한 되 한 말을 내는 것이 장래에 창고를 보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이라도 오히려 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여러 군자의 밝고 지혜로움으로 이것을 모르겠는가? 그리고 또 김 장군의 생각으로는 거느린 장사들과 적진에 달려가 싸우더라도 부모 처자는 모두 도내의 제일되는 산성에 들어가게 하였다가 만약 뜻밖의 변이 있을 때에는 군사를 돌이켜서 지키고 방어하여 몰사하는 화를 면하게 하려고 하니, 이것은 실로 싸우고 지키는 상책(上策)이다. 이에 모집된 곡식을 거두어 모아서 한편으로는 싸우러 가는 군사에게 주고, 한편으로는 성을 지키기 급할 때에 대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실책이 없게 하려 하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곡식을 모집한 것은 아래에 조목을 나열해 기록하였다. 도유사 전 첨정(都有司前僉正) 기효증(奇孝曾) 등.
도내 산성 가운데 장성(長城)ㆍ입암(笠巖)ㆍ담양(潭陽)ㆍ금성(金城)이 서로 비슷한데 군사를 간직하고 싸움을 하는 데는 입암이 더욱 나으므로, 김덕령 장군이 여기의 형세를 둘러보고 장차 한 도의 주장(主將)의 처소로 삼아서 도내 사람의 부모 처자를 다 여기에 두어 보호하고, 싸우고 지킬 자리를 만들겠다 하였다.
○ 원수 권율은 합천에 그대로 머물고, 승의장 첨지(僧儀將僉知) 처영(處英)으로 하여금 남원의 교룡산성을 수축하게 하니, 처영이 의령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교룡산성에 주둔하여 수축하였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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