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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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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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야승- 난중잡록4 ; 권율이 병으로 죽었다

기해년 만력 27년, 선조 32년(1599년)

7월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이 나주(羅州)에서 남원으로 왔다가 이내 서울로 돌아갔다.
○ 도원수 권율(權慄)이 병으로 죽었다. 그 뒤에 휘하의 여러 장병들이 행주산성에 비석을 세우고 이름을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라 하였는데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유명 조선국 제도 도순찰사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증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홍문관 제학 동지 성균관사(有明朝鮮國諸道都巡察使正憲大夫知中樞府事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권공(權公) 율(慄)이 세상을 뜬 지 이미 한 돌이 되었다. 그의 보좌관들은 공이 전에 행주대첩에 있어 그 공이 더욱 크므로 그곳 언덕 위에 비를 세우고 공적을 적어 영원히 남기기 위하여 공의 사위 지금의 영의정 이공 항복(恒福) 에게 글을 청하여 가지고 와서 최립(崔岦)에게 글을 지어 달라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임진년 4월에 일본 군사가 큰 기세로 쳐들어와 우리가 경계하지 않고 있는 틈을 타서 진(鎭)과 읍(邑)을 잇따라 함락시키니 중외가 크게 놀랐다. 임금께서 아뢰기를, “나는 권 아무개가 쓸만한 인물이라고 들었는데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였다. 이에 의주 목사(義州牧使)이던 공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기용하였는데, 이때 조정의 신하들이 양남(兩南)은 가기만 하면 죽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공이 명을 받고 단기(單騎)로 서울로 달려갔다. 서울은 이미 지킬 수가 없었고 임금은 서도로 행차한 뒤였으나 이미 병사를 모아 들어와 호위하라 하였다. 전라 순찰사 이광(李洸)이 군사 4만을 동원하고, 방어사 곽영(郭嶸)이 재를 넘어 북상하면서 공을 방어군의 중위장(中衛將)으로 임명하였다. 서생(書生)에게 무부(武夫)의 일을 맡기는 것을 사람들은 어렵게 여기기도 했지만 공은 ‘나의 직책이다.’ 하고 직산(稷山)으로 가서 충청군(忠淸軍)과 회합하였는데, 역시 수만 명이나 되었다.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자, 이광이 곽영에게 용인(龍仁)의 적을 먼저 치게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적이 먼저 험한 곳을 점거하고 있으니 습격할 만한 형세가 못 되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서울인데 이미 적의 점유가 되었으니, 주공(主公)께서는 전도(全道)의 군사를 다 거느리고 와서 바로 올라가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臨津)을 막아서 적이 서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면, 아군은 유리한 형세를 얻을 것이오. 그리하면 행재소(行在所)에 명령을 품의할 길이 있어 곧 큰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지금은 조그마한 적과 싸워서는 안 되며, 또한 만전을 기하는 계책이 못 되어 명성과 위신을 손상하게 될 것이오.’ 하였다. 선봉장 백광언(白光彦)ㆍ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가 각각 정병 1천을 가지고 따라와 경솔히 진격하려 하므로, 공이 또한 경계하여 함께 기다릴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백광언 등은 이르자 마자 모두 함몰 되었다. 이날 밤에는 군사들이 헛것에 놀랬고 아침에는 적을 바라보고 크게 무너져 모든 군사가 다 돌아가 버렸고 공도 광주로 돌아갔다. 잘 적에도 옷을 벗지 않고 주장(主將)의 명령을 기다렸으나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이에 공은 분연히 말하기를, ‘신하로서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날을 기다릴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고을 안의 자제 5백여 명을 모으고, 이웃 고을에 격문을 돌려 또 천여 명을 얻어 가지고 경상도 접경에 가서 주둔하였다. 남원 백성들이 적이 들어오기도 전에 스스로 난동을 부렸다는 말을 듣고 임진년 7월 3일에 중도조방장(中道助防將) 이유몽(李由蒙)이 패하여 장수(長水)에 돌아와서 떠들기를, “적이 그의 군대에 왔다가 남원성으로 들어가 창고를 모조리 부수었으므로 그곳 사람들이 따라다니면서 남은 곡식을 주워 모으더라.” 하였다. 잠깐 퇴각하여 진정시켰다. 순찰사가 공이 보고하는 이 사실을 듣고 공을 임시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삼아 여러 고을의 관병을 통솔하게 하여 영남에서 호남으로 오는 적의 진로를 끊게 하였다. 공이 이치(梨峙)로 진군하여 요소에서 막고 기다리다가 7월에 적을 만나 급히 공격하였다. 때마침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이 군에서 용맹하기로 유명하였는데 적탄을 맞고 물러나자 전군의 사기가 꺾여 적이 성채로 뛰어 들어오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사세가 급하자 공이 칼을 휘둘러 크게 소리치며 앞장서서 칼날을 번뜩이니, 전사(戰士)가 일당백(一當百)이 아닌 자가 없었다. 적은 사상자를 구할 겨를도 없이 무거운 것을 여기저기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얼마 안있어 행재소에서는 공을 나주 목사로 임명하였으니, 나주가 광주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본도 순찰사로 제수하는 교서가 이미 진중에 전달되니, 공은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감읍하여 전군을 감동시켰다. 공이 방어사로 하여금 이치를 대신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전주로 가서 도내의 군사 만여 명을 징발하여 9월에 근왕(勤王)하였다. 이때에 왜적의 여러 부대가 평양(平壤)ㆍ황해(黃海)ㆍ개성(開城)을 나누어 점거하고, 서울을 점거한 자가 대본영(大本營)이 되어 군사를 사방으로 풀어 놓았다. 그래서 서로(西路)는 이미 끊겼으므로 근왕의 여러 군대는 모두 강화(江華)로 들어가 강을 막고 지킬 뿐이었다. 공은 임금이 의주(義州)에 계시고, 적은 아직 평양을 지나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은 오직 서울의 적을 공격하여 이미 서쪽으로 간 적으로 하여금 동쪽으로 올 겨를을 주지 않는 것이 유리한 계책이라 하고, 드디어 수원 독성(禿城)에 주둔하고 임금께 아뢰었더니, 임금께서 차고 있던 칼을 끌러 말을 달려 보내면서 이르기를, ‘모든 장수들 중에 명령대로 하지 않는 자는 이 칼로 처치하라.’ 하였다. 서울의 적은 공의 군사가 요해(要害)를 지키고 있음을 걱정하여 그 군사 수만을 세 영(營)으로 나누어 오산(烏山) 등지에 헤쳐 늘어놓고 왕래하면서 싸움을 걸었으나, 공은 수비를 굳게 하여 응하지 않고 다만 때로 기병(奇兵)을 내보내어 기세를 꺾으니, 적은 하는 수 없이 밤에 병영을 불사르고 사라져 버렸다. 계사년 2월에 공은 휘하의 정병 약 4천 명을 둘로 나누어 그 하나를 절도사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천산(衿川山)에 주둔하여 성원(聲援)하게 하고, 공은 그 하나인 실수(實數) 2천 3백 명을 자신이 거느리고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고양(高陽)의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이때에, 명 나라 대장 이여송공이 구원병을 거느리고 동으로 와서 이미 평양에서 이겨 위명(威名)이 크게 떨쳤다. 적으로서 평양에 도망친 자, 황해도를 버린 자, 개성을 버린 자, 함경도에서 풍문을 듣고 도망쳐 온 자가 모두 서울로 모여, 서울의 적의 세력은 갈수록 강대하였다. 공은 현군(縣軍)으로 서울에 아주 가까운 곳까지 들어갔으나, 적은 그 병력이 적음을 알고서 별로 개의치 않고 들어가기 만하면 무너뜨릴 따름이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3월 12일 새벽에 정탐하던 아전이 적의 형적이 있음을 알리니, 공은 군중에게 움직이지 말라 경계하고 높은 데 오랄 바라보니, 성에서 5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 적군이 벌써 들판을 뒤덮고 있었다. 먼저 백여 기로 바싹 다가오고 이어서 많은 군사로 포위한 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아군이 결사적으로 싸워 화살과 돌이 비오듯 했다. 적은 군사를 세 부대로 갈라 번갈아 쉬면서 진격하여 묘시에서 유시까지 세 번을 싸웠으나 제편이 불리하게 되자 사람들을 시켜 갈대를 묶어서 가져다가 바람결에 불을 지르니 불이 목책에 닿았다. 성안에서 물로 껐으나, 바로 서북쪽 승군(僧軍)이 지키던 자성(子城)이 조금 탔다. 적이 크게 고함을 지르면서 돌입하니 전군이 휩쓸리므로, 공은 칼을 빼어들고 여러 장수들을 꾸짖으니 모든 장수들이 다투어 창을 적에게로 돌려 분전하였다. 적은 크게 패하여 시체를 사방에 쌓아 놓고 불지르고 달아났다. 아군이 그 나머지를 베었는데 1백 30여 급이나 되었으며 버리고 달아난 깃발ㆍ갑옷ㆍ칼ㆍ창 등을 무수히 노획하였다. 그때에 제독 이여송이 개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선봉유격(先鋒遊擊) 사대수(査大受)가 공이 크게 이겼다는 소리를 듣고, 이튿날 그의 부관을 보내어 싸운 곳을 살피게 하고, 또 며칠 뒤에 만나자고 요청하므로 공이 부대를 정돈하고 환영하였는데, 와서 감탄하기를, ‘외국에도 참 장수가 있구나.’ 하였다. 공이 파주(坡州)의 산성으로 진지를 옮겼는데 적이 행주에서의 패배를 보복할 양으로 대군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왔다가 공의 진지가 행주에 비해 더욱 엄한 것을 보고 서로 경계하며 범하지 못하고 되돌아 갔는데,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 4월에 이 제독이 심유경의 계책을 채용하니 모든 적들이 화의를 받아들였다 칭하고 하루 동안에 서울을 버리고 떠나갔다. 공이 그 소식을 듣고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서 성으로 들어가니 적은 이미 한강을 건넜다. 제독은 유격(遊擊) 척금(戚金)을 보내어 공의 동정을 살피고는 나룻배를 모두 거두어 강을 건너 추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공은 분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싸움을 그만두고 본도(本道)로 돌아갔다. 당초에 공이 서울을 치려는 뜻을 가졌으나 전 순찰사에게 굽히어, 양호 6만의 군사가 모인 기회를 타서 임진(臨津)으로 나가면 반드시 유리하게 지킬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여 용인(龍仁)에서의 일 패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요, 이치(梨峙)의 싸움 같은 것은 불행한 뒤에 있는 조그마한 쾌사(快事)라 하겠다. 그러나 호남지방으로 하여금 몇 해 동안 악독한 왜군이 다시 엿보지 못하게 하고 근거지가 되어 정벌하고 수송하여 동ㆍ서에 보급한 것은 도대체 누구의 힘이냐? 순찰사를 대임하게 된 뒤부터는 도내의 군사를 마음대로 쓸 수 있게는 되었으나 이때에 도내의 군대를 쓰는 사람이 많았다. 절도사 최원(崔遠) 같은 이는 벌써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대병(勤王大兵)이라 일컫고 강화(江華)에 주둔하러 갔으며, 관군ㆍ의병들로 싸우고 지키고 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공은 겨우 만 명의 군사를 모아가지고 갔다. 그래서 그 형세가 승냥이와 호랑이 같은 왜적을 바로 두들길 수는 없었지만, 독성(禿城)을 굳게 지켜 왜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에 충분하였고, 양호(兩湖)에서 경기도 우측의 보급로를 꿰뚫어 통하게 하였고, 행주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주인으로서 객인 왜적을 유인하여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이겼으니, 그것은 다만 명 나라 장수가 평양을 무찌르고 남은 위력이 흉악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해서 그렇게 된 것만은 아니다. 그때에 적을 두렵게 하지 않았다면 비록 백 명의 심유경이라도 왜적으로 하여금 하루 사이에 서울을 떠나게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이것으로써 공이 본래부터 서울을 치려던 뜻이 거의 저버려지지 않게 된 것이다. 6월에 도원수에 임명되어 영남의 모든 군대를 통솔하였다. 이 뒤로부터는 혹은 병권을 돌리기도 했고 혹은 다시 등용되기도 하다가 정유년 겨울에 마귀 제독의 울산(蔚山) 싸움에 따라갔다. 무술년 가을에는 유정 제독의 순천(順天) 싸움에 따라갔으나, 모두 체통에 견제되어 선견지명이 있는 말을 했지만 채용되지 못하고, 적진에 먼저 쳐들어가는 용기는 있었으나 보람을 나타내지 못하였으니, 비단 공만이 스스로 영웅의 눈물을 닦았을 뿐 아니라, 모든 뜻 있는 선비들도 함께 아깝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적은 다시 엿보고 쳐들어오지 못하였고, 이내 또 철수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는 서울이 이미 수복되어 지킬 수가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르러 공의 서울을 수복하려는 본래의 의도가 증명될 수 있었으니, 중흥의 공훈이 돌아갈 데가 없다면 모르겠거니와, 있다면 누구를 첫째로 손꼽을 것인가? 기해년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 서울에서 의원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다시 조정에 나가지 못하고 7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는 63세였다. 부고를 듣자 임금은 몹시 슬퍼하여 정사를 보지 않았으며, 제사와 부의를 후하게 내렸다. 아! 공의 공로가 우리 조정에 두드러졌으므로 임금은 병신년에 다시 도원수의 임명을 사퇴한 것을 받아 주지 않았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면서 교서가 있었고, 사은할 적에 어주(御酒)를 하사하고 또 내구마와 마장(摩裝)을 하사하고 교서가 있었으며, 무술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기를 청하는 소를 올렸으나 더욱 힘쓰라는 유시가 있었고, 세상을 떠나매 벼슬을 추증할 것을 대신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공의 명성이 중국에 알려진 것으로 말하면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상을 시행하라는 공문을 우리 나라에 보낸 일이 있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공훈을 천자에게 아뢴 일이 있으며, 천자가 홍로시(鴻臚寺)의 관원을 보내어 우리 나라에 선유한 일도 있었고, 임진(臨津)에 이르렀을 때, 마(麻) 제독은 공더러 군사를 잘 지휘한다고 칭찬했으며,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공의 군사가 잘 싸우는 것을 가상하게 여겼다. 1년 후에는 중국의 대소 관원들이 공의 이름을 들으면 그의 사람됨을 상상하게 되었고, 왜군의 우두머리들은 반드시 권 원수의 동정에 대하여 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사관이 마땅히 책에 쓸 것이니, 비문에 일일이 기록하는 것이 경중이 되지 않으므로 생략하는 바이다. 공의 자는 언신(彦愼)이요,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고려의 태사 행(幸)의 후손이다. 본조(本朝) 찬성(贊成) 근(近)의 6대손이며, 영의정 철(轍)의 아들이다. 그의 기량이 본래 유래가 있으며 사람과 사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더욱 성심과 화기(和氣)로써 하고, 그저 엄하고 꿋꿋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능히 사람을 충심으로 기쁘게 복종하게 하고 위급할 때에 힘을 얻게 되었다 한다. 공은 46세에 임오년 문과에 급제하여 낭관(郞官)을 거쳐 당상관에 뛰어오르고, 마침내 문사로서 장수가 되어 이름을 나타내었다. 거친 벼슬은 그리 많지 않고 조정에 나간 일도 드물며, 시국의 어려움을 만나서 자기의 포부를 다 못 폈지만, 그러나 휘하에 있던 옛 관리와 선비들이 공의 덕을 그리며 다투어 재물과 힘을 내어 공의 형 호군공(護軍公)에게 알리어 정성과 힘을 바쳐 이 비석을 세우는 것이니, 또한 가상할 만하도다. 위 호군공(護軍公)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순(恂)이요, 영의정 이공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항복(李恒福)이다. 공은 재취하였으나 모두 아들이 없다. 무덤은 서울 서쪽 홍복산(洪福山)에 있다.” 최립(崔岦) 지음.
“공이 세상을 떠나 이미 초빈(草殯)했을 적에 그의 친척으로 종군하던 사람이 나를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공이 군에 있을 때에 일찍이 무엇을 기록해 둔 것 같은 두루마리 하나를 가지고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사위 이의정(李議政)이 있으니 반드시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나의 묘지(墓誌)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 주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하더라’ 하였다. 내가 그 상자를 열어보니 두루마리가 있는데, 거기에는 행주(幸州)싸움 때 명 나라 총독 군문 대사마(總督軍門大司馬) 송응창(宋應昌)이 우리 나라에 공문을 보내어 장려한 것이 적혀 있는데, ‘권 아무개가 의롭고 위태로운 성을 굳게 지켜 대적과 항전하였으니, 어지러울 때의 충신이요, 중흥시킨 명장이다.’ 하였고, 이어서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아뢰었더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우리 나라에 칙유(勅諭)를 내렸는데, ‘지금 전라도에서 적의 목을 벤 것이 수많은 것을 보니 나라 백성이 능히 진작할 수 있다.’ 하였고, 그 밑에 또 적기를, ‘병신년에 거듭 교서가 있었는데 이르기를, 「경의 충성된 공로가 대단히 두드러지고 용맹스러운 지략이 세상에 뛰어나,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져 적국을 위압했으니 원수(元帥)의 적임이 경을 버리고 누가 있으리오.」 하였으며, 들어가 임금을 대하니 위로하기를, 「경이 아니었던들 나라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으랴.」 하였고, 또, 「시국의 안전은 다만 경의 노력에 의지할 뿐이니, 흉적을 섬멸하여 나라를 안정시켜 주기를 나는 바라노라.」 하고, 이에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는 등의 말들은 모두 공의 글씨가 분명하였다. 내가 읽고 감탄하기를, ‘대단하도다. 이것으로 족하도다. 빛나는 글이여. 다시 무슨 사연을 더 빌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물며 공의 분부가 있었으니, 감히 그것을 지키어 큰 총령(寵靈)을 빛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것을 비문에서 생략하면 또 사관(史官)이 혹시 빠뜨리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비석이 이룩되매 그 뒷면을 빌려 기록한다.” 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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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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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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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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