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화양동 어록〔華陽洞語錄〕 -손재집

화양동 어록〔華陽洞語錄〕 -손재집 제9권 / 어록(語錄) : 박광일(朴光一, 1655~1723)

○ 을축년(1685, 숙종11) 2월에 화양정사(華陽精舍)에 가서 선생을 뵈었다. 선생께서 “해를 이어 방문하니 극히 다행이네만, 이번에는 또 무슨 까닭에 궁벽한 산속 적막한 곳을 찾아왔는가?”라고 하고, 이어 부모 모시고 지내기 편한지 물어보셨다. 대답하기를, “우러러 여쭐 일도 있고 겸하여 어떻게 지내시는지 인사하려고 왔습니다. 이어 허다한 의심나는 뜻을 질문하고 돌아가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지난번 송해광(宋海狂)의 문자에 대한 일은, 사원(士元 박광일)의 편지에 해광을 중히 여기고 의지하는 말이 많았기 때문에 진즉 완성하여 그 청에 부응하였네.”라고 했다. 가친의 편지를 올렸더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논성설(論性說)은 송생(宋生)이 가지고 간 편지에서 내가 상세히 다 논의했다고 생각하네.”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송우(宋友)가 지금 시골로 돌아오지 않아서 미처 읽어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라고 했다.


○ 선생께서 광주(光州) 유생(儒生)의 문목(問目)을 보고 “그곳 제현(諸賢)들이 전 구성(全龜城)을 김 안주(金安州)의 사당에 함께 제사 지내려고 하는 것은 고금에 이미 행하여 온 규례에 상고해 보면 근거가 없지 않네. 송나라에서는 백록동(白鹿洞)의 염계서원(濂溪書院)에 양정(兩程)을 배향(配享)했는데, 양정은 남강(南康) 사람이 아니지만 도(道)가 같기 때문에 함께 제사를 지낸 것일세. 우리나라에서는 대구(大丘) 박 참판(朴參判)의 서원(書院)에 사육신(死六臣)을 병향(幷享)했으니, 사육신이 어찌 모두 대구 분들이겠는가. 그 절의(節義)가 같기 때문에 함께 배향하는 것이니, 이는 증거가 될 만하네.


그러나 제봉(霽峰)과 구성(龜城 전상의)은 같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충절(忠節)을 위하여 죽은 것은 비록 선후(先後)의 차이가 있으나, 구성을 제봉에게 배향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는가. 위패(位牌)를 앉히는 차례[坐次]에 있어 불편하다는 말은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네. 제봉의 문장과 절의는 사림이 추중하는 바이므로 구성을 같은 열(列)에 넣어 병향하는 것은 부당하고 배위(配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네. 그리고 배위를 분배(分排)하는 순서는 자연 규례가 있으니, 연차(年次)의 고하와 세대(世代)의 선후로 분배한다면 무엇이 불편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대답하기를 “후생이 비록 전공(全公 전상의)의 사적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지만, 인조(仁祖) 때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하였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니, 이것으로써 그분이 과연 순국(殉國)한 충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떠도는 말에 전공(全公)을 헐뜯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안주성(安州城)이 함락될 때 김공이 전공을 시켜 화약고(火藥庫)에 불을 놓으라 하였는데, 전공이 듣고 따르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것은 그를 헐뜯은 말이네. 그때의 사적은 절대로 그렇지 않네. 당초에 안주성을 지킬 때 김준(金浚) 공이 장차 오랑캐의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강화하자는 말을 전하려 하였으니, 이는 대개 수성(守城)의 채비가 아직 미비했기 때문에 이런 구차한 계책을 써서 조금이라도 그 형세를 늦추려고 한 것이었네. 그때 전공은 김공의 강화(講和)하자는 말을 범범히 듣고 있다가 분연히 크게 노하여 칼을 뽑아 김공을 베려고 하였다가, 김공의 뜻이 강화에 있지 않은 것을 알고서 그만두었다네. 대개 전공의 열렬한 의기가 이와 같았으므로, 과연 불을 놓으라고 시켰다면 분명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을 것이니 어찌 따르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전공이 과연 불을 놓지 않았다면,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삶을 도모한 계책일세. 만일 죽음을 두려워하여 삶을 도모할 사람이었다면, 당시에 몸을 빼내어 구차하게 화를 면한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었는데, 전공이 어찌하여 이들과 함께 살아남지 않고 죽으면서도 후회가 없었겠는가. 사람이 탁월하여 남보다 뛰어난 행실이 있으면 반드시 흠잡고 헐뜯는 비방이 따르게 마련이니, 인심과 세도가 너무도 착하지 못한 것이네. 내가 안주에서 전공이 사절(死節)한 것을 안 지 오래지만, 단지 어느 지방 사람인지를 몰랐다가 오늘에야 전공이 광주 사람인 것을 알았네. 대저 그의 사람됨이 씩씩하고 용맹스럽고 호걸스럽다고 하였네.”라고 했다.


○ 선생께서 묻기를 “정자(正字) 박광윤(朴光潤)은 한양에 무고히 있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오늘 고신(告身 직첩(職牒))을 삭탈당하고 시골로 내려갔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무슨 연고로 그랬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가주서(假注書)로 있으면서 몸에 병이 나서 패초(牌招)에 나아가지 못했는데, 이것이 탈이 되어 마침내 갇히기까지 하고 이어 고신을 삭탈당했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이런 때에 한양을 벗어나는 것은 어찌 흔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오직 주손(疇孫)의 진퇴가 난처하여 매우 걱정스럽네. 만일 탄핵을 만났다면 편안히 앉아 먹고살 터인데, 뜻밖에 급제하였고 또 분수 밖의 직책을 맡아 낭패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매우 민망스럽도다.”라고 했다.


○ 선생께서 가친의 편지권상하(權尙夏)에게 내보이고 말하기를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하니, 권치도(權致道)가 대답하기를 “소생이 무슨 식견이 있겠습니까. 다만 평소 《근사록(近思錄)》의 주(註)를 당연하다 생각했을 뿐 다른 견해는 없습니다. 대저 명도(明道)의 이 설은 다만 ‘생지위성(生之謂性)’이란 뜻을 밝혔을 따름이니,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 광일이 대답하기를 “《근사록》의 주(註)의 설명으로 말한다면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을 적에는 진실로 성(性)이라고 부를 수 없고, 사람이 태어난 뒤에야 비로소 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성이라고 하자마자 또한 성이 아니다’라고 했으니,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성(性)은 무슨 성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성’ 자 하나를 허공에 매달아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또 《예기》에 ‘사람이 태어나서 고요할 때는 하늘의 성이다.’라고 하였으니, 성(性)이라 부를 때를 어떻게 ‘성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이라고 하자마자’의 ‘성’ 자와 ‘무릇 사람들이 성을 말한다’의 ‘성’ 자는 자체로 일관된 문세(文勢)입니다.


대개 ‘‘사람이 태어나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人生而靜]’일 때에는 성(性)이라고 말할 수 없고, 다만 그 발현된 단서를 통해서 성의 선(善)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 성이라 말할 때에는 벌써 정(情)이요 성이 아니기 때문에 ‘성이라고 하자마자 곧 이미 성이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아래 조목에 ‘무릇 사람들이 성을 말하는 것은 다만 계지자선(繼之者善)만을 말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성이라 말했을 때는 곧 이미 성(性)이 아니다’라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지금 별지(別紙)에 기록된 주자의 설 중에 위의 세 조항은 분명히 소생이 한 말과 부합되지만, 아래 조목에 기록된 〈답엄시형서(答嚴時亨書)〉와 《근사록》 주에 인용한 설은 이와 크게 다르니, 여기에 분명히 초년설(初年說)과 만년설(晩年說)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친께서 이것을 여쭈었지만, 말이 생각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여 아직도 귀일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항상 안타까웠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나의 생각에는 ‘인생이정 이상(人生而靜以上)’이라고 한 것은 그 주된 뜻이 오로지 ‘인생 이상’에만 있고 ‘이정(而靜)’ 두 글자에는 있지 않은 듯하네. 대개 ‘인생이정’이란 네 글자는 《예기》의 글이므로 명도가 인용할 적에 옛 문자를 훼손하지 않으려고 이 네 글자를 다 쓰셨나 보네. 또 주자의 설은 혹은 천도(天道)로 말하고 혹은 인도(人道)로 말하였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듯하네.”라고 했다.


대답하기를 “여기의 정(靜) 자는 주자가 ‘미발(未發)’이라 하셨는데, 진실로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주자의 모든 설이 모두 명도의 말을 밝힌 것인데 이렇게 차이가 있으니, 명도의 본래 뜻은 반드시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일 것입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근사록》과 《주자대전》 및 《주자어류》 등 여러 가지 서적을 자세히 강구(講究)하고 조용히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라고 했다.


이때 밖에서 서찰이 계속 답지(遝至)하여 약간 시끄러운 감을 느꼈다. 선생께서 묻기를 “자네는 언제쯤 돌아갈 생각인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새달 초순쯤 산을 나설까 합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사안을 논의할 날짜가 아직 남았구나.”라고 했다.


○ 광일이 묻기를 “주자가 ‘화종낭전(花宗浪戰)’이라고 한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화종(花宗)이 만약 사람 이름이라면 삼국(三國) 때 사람 같으나 지금 상고할 길이 없네. 그런데 주자의 글에 귀종(貴宗)을 화종이라 한 곳이 있으니, 혹 유씨(劉氏)의 종인(宗人)에 낭전(浪戰), 그러니까 부질없는 싸움을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일까 하네. 이것은 정확히 알 수가 없네.”라고 하였다.



○ 선생께서 감기 기운이 있어서 잠시 연침(燕寢)에 들어가셨을 때, 보은(報恩) 사람이 의례문목(疑禮問目) 서너 조를 가지고 도착했다. 선생께서 말을 전하기를 “내가 지금 병 조리 중이라 재량하여 답변할 수가 없으니, 이 문목에 대해 권치도와 상의한 뒤 답장으로 보내겠다.”라고 하고, 말한 대로 권 도사(權都事)와 상량하여 강정한 뒤 연침에 들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 문목에 답장을 했는가?”라고 하기에, 말하기를 “소생 등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답장을 보내겠습니까. 여쭈어본 뒤에 말씀하신 대로 답장을 보내겠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강론한데다가 조금 수정을 한 뒤 답장했다.


○ 묻기를 “이윤(尼尹)이 ‘율곡(栗谷)은 참으로 입산(入山)한 실수가 있었다’고 말한 것은, 그 본 의도를 찾아보면 진정 율곡을 욕하려는 데서 나온 것 같지는 않으나 말이 공손치 못하여 일부 사람들의 구실이 되었으니, 이는 마땅히 비판하여야 될 일입니다. 만약 그의 의도가 완전히 선현(先賢)을 모욕하려는 데서 나왔다고 한다면 장차 그의 마음을 굴복시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의 이 말이 비록 망발이라고는 하나, 대체로 공경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끝내 적었기 때문에 경솔히 발설한 것이네. 요사이 주석(疇錫)이 《논어》 〈자로(子路)〉의 ‘작은 허물은 용서하라[赦小過]’는 주(註)에 ‘큰 허물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大過, 不可不懲]’는 말로 증명하였는데 그것이 합당하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그가 ‘선인(先人)께서는 당초 죽을 만한 의리가 없었다.’라고 말한 것은 진실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윤씨를 편드는 사람들도 ‘그때에 미촌(美村)은 다만 피난하는 사람이었다. 어찌 죽어야 할 의리가 있겠는가.’라고 말하는데, 저의 생각에는 이 말이 전혀 옳지 않습니다. 미촌이 비록 피난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미 강도(江都)에 들어갔으니, 깊은 산속이나 먼 바다에 임의로 피난을 떠난 사람과는 차이가 있고 의리로 보아 성을 지키다가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굽혀 보전하고 종묘사직이 망하는 것을 차마 바라만 보다가 끝내 적군의 손에 사로잡히고 난 뒤에야 의리가 된다는 말입니까. 하물며 남에게 죽겠다고 허락하고서 죽지 않은 사람이겠습니까. 그에게 ‘원래 죽을 만한 의리가 없다’라고 한 말은 진실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나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예기》 〈단궁(檀弓)〉에 ‘동자(童子) 왕기(王踦)가 적과 싸우다가 죽었는데, 노(魯)나라 사람들이 왕기에게 성인(成人)의 행실이 있다 하여 상(殤)으로 치르지 않으려고 공자(孔子)에게 묻자, 공자가 「방패와 창을 잡고서 사직을 호위할 수 있었으니, 상으로 치르지 않고자 하더라도 또한 옳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동자가 국난에 달려가서 사직을 호위하다가 죽었어도 공자께서 오히려 의리라 하여 상(殤)으로 치르지 않는 것이 옳다 하셨는데, 어찌 성인(成人)인 데다가 선비로 일컬어진 사람에게 사직을 호위하다가 죽을 의리가 없겠는가. 동자는 사직만을 위하여 죽었는데도 성인께서 의롭게 여기셨는데, 하물며 강도는 종묘와 사직이 모두 있었지 않았는가. 어찌 애당초 죽을 만한 의리가 없다고 하겠는가.


율곡께서 입산했던 일에 대하여는, 처음 입산할 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기 위하여 산속으로 들어간다. 호연지기를 기르려면 산속이 아니고서는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네. 이어 집 이름을 의암(義庵)이라 하였으니, 이는 ‘집의이소생(集義而所生)’이란 뜻을 취한 것이었네. 무슨 까닭에 상소에서 한 말이 이와 다른지 모르겠네.”라고 했다.


○ 묻기를 “‘사거여사(舍去如斯), 달거여사(達去如斯)’에 대하여 사람들은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어떤 것이 더 나은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목숨 버릴 작정을 하여 이러한 것인가, 이치에 통달하여 이러한 것인가’라는 견해가 한 가지이고, ‘자기의 생명을 이처럼 버렸으니, 필시 이치에 통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다’라는 견해가 또 한 가지인데, 내 생각에는 뒤의 설명이 더 낫네. 또 이 대목의 이야기가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세 군데나 나오는데, 각각 같지 않으므로 주자는 ‘혹자는 당시에 원래 이러한 문답이 없었다고 한다’라고 했네.”라고 했다.



묻기를 “《맹자》 호연장(浩然章)에 ‘마음에서 구하지 못하거든 기운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은 가하다[不得於心, 勿求於氣, 可也.]’라고 한 주(註)에 ‘가하다는 말은, 가한 데 가깝지만 아직 다하지 못한 점이 있다는 말이다[可者, 僅可而有所未盡之辭也.]’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기에 도움을 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의(義)를 축적하여 기운을 기르는 것이 기에 도움을 구하는 것이네.”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예전에 어떤 친구가 이에 대하여 묻기에 저도 이런 뜻으로 대답은 하였으나, 저의 마음에는 아직까지 꼭 그렇다고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선생의 말씀을 듣고 나니 가슴속이 후련합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호연장은 가장 읽기 어려워서 나는 아직까지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네.”라고 했다.


대답하기를 “처음부터 지언(知言)까지의 문답은 맥락이 분명한데 ‘안연은 성인(聖人)의 특성을 두루 가지고 있으나 미약하다[顔淵則具體而微]’ 이하는 물음에 따라 대답한 것으로 처음과 끝이 서로 호응하는 맛이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첫머리에 ‘제나라의 경상이 되어서[加齊之卿相]’라는 말로 글을 시작하였으니, 처음과 끝이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고는 못할 것이네.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중간에 나오는 ‘고자(告子)가 말하기를, 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거든[告子曰不得於言]’ 운운한 이하의 내용이네. 여기서 말한 내용은 기를 기르는[養氣] 데 긴요하지 않은 듯하네. 또 ‘지는 기의 장수다[志氣之帥]’, ‘지는 지극하다[志至焉]’, ‘지를 유지한다[持其志]’, ‘기운이 전일하면 뜻을 움직인다[氣壹則動志]’라고 했으니, 이 장의 주된 뜻은 부동심(不動心)에 있는데, 마음[心]을 말하지 않고 굳이 뜻[志]을 말한 것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 그리고 ‘도리어 그 마음을 움직인다[反動其心]’고 한 데서는 또 ‘심(心)’ 자로 말했네. 때로는 ‘지(志)’ 자로 말하고 때로는 ‘심’ 자로 말하였으니, 이런 것들이 모두 내가 의심하는 이유일세.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글로써 이 장을 논변한 바가 있었는데, 지금 그 종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것을 보지 못하여 안타깝습니다.”라고 했다.


○ 묻기를 “《서경》 〈태갑하(太甲下〉에 ‘생각하지 않으면 어찌 얻을 수 있으며, 행하지 않으면 어찌 이루겠는가.[弗慮胡獲, 弗爲胡成.]’라고 했고, 또 ‘임금은 변론하는 말로 옛 정치를 어지럽히지 않는다.[君罔以辨言亂舊政]’라고 했습니다. 주(註)에, ‘생각하지 않고 행하지 않으며 방종과 태만에 편안하면 선왕의 법이 폐지되고, 생각하고 행할 수 있어 총명을 부리게 되면 선왕의 법이 어지러워진다.’라고 했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행하지 않아 법을 폐지하는 데 이르는 것이지, 생각하고 행하는데 어찌하여 옛 정치를 어지럽히는 데 이릅니까? 생각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 것이 이미 옳지 않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주에서 말한 ‘능사능위(能思能爲)’ 네 글자가 ‘능변능언(能辨能言)’의 잘못인 듯합니다.


대문(大文)에서 이미 ‘변론하는 말로 옛 정치를 어지럽히지 않는다.’라고 했으니, 훈고(訓誥)도 마땅히 ‘변론하고 말 잘하고 총명을 부리게 되면 선왕의 정치를 어지럽힌다.’라고 해야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능사능위’ 네 글자는 의심할 만한 듯하네만, 오자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채씨(蔡氏 채침(蔡沈))의 전(傳)에는 주자에게 미치지 못하는 곳이 제법 많다네.”라고 하고, 이어 말하기를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자주 모여 강학할 수 없으니 참으로 아쉽고 한탄스럽네.”라고 했다.


○ 선생께서 《기보통편(紀譜通編)》을 두루 참고하고 나서 탄식하기를 “이 책은 윤증(尹拯)과 함께 만든 것이다. 언제나 이 책을 대할 적마다 슬픈 마음을 어쩔 수 없다. 그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끝내 패망(悖妄)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라고 하고, 다시 한숨을 쉬면서 즐겁지 않은 표정을 지으셨다.



○ 광일이 말하기를 “내일 산을 나가겠습니다. 명도(明道 정호(程顥)) 선생의 논성설(論性說)에 대해 헤아려서 결론이 나게 해 주시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근사록(近思錄)》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내오라고 하셨다. 광일이 《주자대전》에서 서로 차이가 있는 설을 찾아내었다. 선생께서 먼저 《근사록》에 기재된 명도의 설을 보시고 깊이 생각하며 되풀이해서 읽고 나서 다시 《주자대전》에서 차이가 있는 설을 찾아보았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이는 두 가지 설이니, 하나는 천도(天道)를 기준해서 한 말이고, 하나는 인성(人性)을 기준해서 한 말이네. 두 설이 서로 방해되지 않는 것 같네.”라고 하기에, 광일이 대답하기를 “만일 명도의 말이 없이 주자께서 자기의 뜻으로 이렇게 두 가지로 말씀하셨다면 각각 해당된 바가 있고 본디 오늘과 같은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주자의 이 두 설이 모두 명도의 말을 해석한 것인데도 이처럼 다르니, 명도의 본래 뜻은 반드시 이 중 하나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명도의 말을 해석하는 데 과연 서로 차이가 있네.”라고 했다. 선생께서 《주자어류》 가운데에서 이런 부분에 대하여 논란한 것을 찾아내었는데 얼추 수십여 조목이나 되었다. 어떤 것은 선생께서 직접 읽으시고 어떤 것은 광일이 읽어 드렸으니, 모두 〈답엄시형서(答嚴時亨書)〉와 같은 의미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명도 선생이 이 대목에서 논의한 것은 모두 고자(告子)의 ‘생지위성(生之謂性)’을 밝힌 것이네. 주자의 설에 비록 차이가 있으나 명도의 뜻을 바로 해석한 것으로는 아마 〈답엄시형서〉만 한 것이 없는 듯하네. 《주자어류》의 수십 조목에서 논한 것이 모두 〈답엄시형서〉와 같으니, 주자의 말년 견해가 아마 이와 같았으리라 생각하네.”라고 했다.


○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성(性)을 말할 때 다만 계지자선(繼之者善)을 말한다’는 대목에서 주자는 ‘계지자선은 성(性)이 발(發)하는 곳이다.’라고 했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공자께서 ‘이어지는 것이 선이고, 이루어지는 것이 성이다.[繼之者善, 成之者性.]’라고 하셨네. 이어지는 것[繼之者]은 천도가 유행하는 시초이고, 이루어지는 것[成之者]은 기질(氣質)이 형태를 이룬 뒤일세. 천도가 유행하는 시초에는 선하지 않음이 없지만, 기질이 형태를 이룬 뒤에는 비로소 선악이 있게 되는 것이네. 그런데 계지자선(繼之者善)도 성지자성(成之者性)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성(性)이 감발(感發)하는 곳에서 계지자선임을 볼 수 있는 것이지.


이런 때문에 명도는 ‘무릇 사람들이 성을 말할 때에는 다만 계지자선을 말한다.’라고 하였고 주자는 명도의 뜻을 해석하여 ‘천도의 유행이 이렇기 때문에 사람의 성이 발동하여 움직이는 것도 이와 같다.’라고 하였네. 이에 근거하면 정자(程子)가 말한 계지자선은 곧 공자가 말씀한 계지자선인 것이네. 공자가 계선(繼善)을 성성(成性)의 앞에 말하였으니, 성이 발하는 곳에서 과연 계지자선을 볼 수 있는 것이네. 그러므로 정자가 ‘무릇 사람들이 성을 말할 때에는 다만 계지자선을 말한다.’라고 하였으니,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이 바로 이것이지. 그렇다면 공자가 말씀한 계선의 선이나 맹자가 말한 성선의 선은 다 하나일 뿐이다.


명도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생이정(人生而靜) 이상’은 다만 이치[理]라 말할 수 있고 성이라 말할 수는 없으니, 곧 공자가 말한 계선(繼善)이란 때이네. ‘성(性)이라 말했을 때’는 이 이치가 형기(形氣) 가운데 떨어졌지만 이 성의 본체에는 합하지 않은 것이니, 곧 공자가 말한 성성(成性)이란 때일세. 그러므로 무릇 사람들이 성선(性善)을 말하는 것은 다만 계지자선으로 말한 것이니, 맹자의 성선이 바로 이것이네.


대저 잇는 때[繼之時]에는 선하지 않음이 없으나 이루어진 때[成之時]에는 비로소 선악이 있는 것이네. 그렇지만 계지자선은 실제로 성지자성(成之者性)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성(性)이 발용(發用)하는 곳에서 계지자선을 볼 수 있는 것이네. 그러므로 나는 정자가 말한 계지자선은 곧 공자가 말한 계지자선이라고 생각한다네.”라고 하셨다.


○ 3월 1일, 권치도(權致道 권상하(權尙夏)의 자)가 밥을 빨리 먹고는 인사하고 돌아갔다. 저녁 때 광일도 돌아가겠다고 아뢰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엿새 강학을 하여 참으로 다행이지만, 아직도 다 궁구하지 못한 데가 있으니, 빠진 듯한 마음은 또한 단지 헤어지는 생각 때문만은 아닐세.”라고 했다. 헤어질 무렵에 또 말씀하시기를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조조(曹操)가 손권(孫權)을 정벌하려고 유수구(濡須口)에 이르렀을 때 시중 광록대부(侍中光祿大夫) 순욱(荀彧)이 자살했다.’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순욱이 죽은 것을 조조가 손권을 공격하려고 유수구에 당도한 기사 밑에 기록함으로써 순욱의 죄가 드러났다.’라고 하였네. 그러나 나는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겠네.


이미 한(漢)나라 시중 광록대부라 썼으니, 순욱의 죄는 저절로 드러난 셈이네. 어찌 굳이 손권을 공격하려고 유수구에 당도한 기사 밑에 기록한 다음에야 순욱의 죄가 드러난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사람들에게 많이 물어보았으나 한 사람도 답하는 이가 없으므로 마음이 매우 답답했으니, 돌아가거든 어른께 아뢰어 후일 인편에 생각하신 것을 보내 주게나.”라고 했다. 이에 일어나 절을 올리고 하직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가는 길이 매우 머니, 조심해서 돌아가게.”라고 했다. - 위는 화양동(華陽洞) 어록이다. -


[주-D001] 송해광(宋海狂) : 
해광은 송제민(宋齊民, 1549~1602)의 호이다. 박광일이 송제민의 비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한 적이 있어서 써 놓았다는 말로 보인다. 송제민의 본관은 신평(新平), 초명은 제민(濟民), 자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이다. 아버지는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송정황(宋庭篁)이다. 이지함(李之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글재주가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룡(梁山龍)ㆍ양산숙(梁山璹) 등과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서 전라도 의병조사관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다시 김덕령(金德齡)의 의병군에 가담하였다. 김덕령이 옥사하자 종일토록 통곡하고 《와신기사(臥薪記事)》를 저술하였다. 또, 척왜만언소(斥倭萬言疏)를 올려 왜적을 물리칠 여러 방안을 피력하였으나 이것이 감사의 미움을 사게 되어 이후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1789년(정조13)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광주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주-D002] 송생(宋生) : 
송규(宋圭)로 보인다. 박상현이 1월에 편지를 보냈고, 송규가 가지고 간 송시열의 답장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박광일을 통해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냈다. 《寓軒集 卷3 上尤菴先生 乙丑正月, 上尤菴先生 乙丑二月○先生正月書未到之前》
[주-D003] 그곳 …… 것 : 
전 구성은 구성 부사(龜城府使)를 지낸 전상의(全尙毅, 1575~1627)이다. 김 안주는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낸 김준(金浚)이다. 광주 유생들이 청원한 것으로 보아 먼저 김준을 모시던 광주 경렬사(景烈祠)에 전상의를 배향한 것으로 보인다. 전상의의 본관은 천안(天安), 아버지는 용(蓉)이다. 1603년(선조36)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고 1627년(인조5) 구성 부사로 정묘호란을 맞았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ㆍ안주 목사 김준과 같이 죽었다. 전상의는 자손이 쇠잔하여 정려(旌閭)하는 전례를 청하지 못하였는데, 1684년(숙종10), 전라 감사 이사명(李師命)이 그 후손의 호소에 따라 조정에 장계를 올려 청하였다. 원래 예조에서는 “해가 오래되었으니 중지하고 시행하지 않아야 한다.” 하였으나, 특별히 명하여 함께 배향하게 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5년 2월 4일》 《국역 숙종실록 10년 8월 5일》
[주-D004] 송나라에서는 …… 것일세 : 
‘염계서원’은 곧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다. 강서성(江西省) 성자현(星子縣)에 있다. 양정은 정호(程顥)ㆍ정이(程頤)이다. 양정은 남강 사람이 아니라 낙양(洛陽) 출신이다. 1179년, 주희가 남강군 태수(南康軍太守)로 부임하여 예전의 학관을 중수하였고, 직접 강학을 하였다. 주희는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위패를 모시고, 정호와 정이를 배향하였다. 《宋史 卷429 道學列傳1 朱熹》
[주-D005] 우리나라에서는 …… 분들이겠는가 : 
박 참판은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이다. 서원이란 낙빈서원(洛濱書院)으로, 대구의 하빈사(河濱祠)를 말한다. 박팽년은 순천(順天)이 본관으로, 대구 사당에 모셔진 것도 후손이 살아서였지, 대구 출신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홍주(洪州)의 노은사(魯隱祠)는 창녕(昌寧)이 본관인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유택(遺宅)이 있기 때문에 세워졌고, 과천(果川)의 노량사(露梁祠)는 사육신의 의총(疑塚)이 있기 때문에 세워졌다. 《국역 송자대전 제144권 영월군(寧越郡) 육신사 기(六臣祠記)》
[주-D006] 제봉(霽峰)과 …… 불가하겠는가 : 
제봉은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다. 고경명을 모신 사당은 포충사(褒忠祠)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경명의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이순(而順)이고, 호는 제봉 또는 태헌(苔軒)이다. 광주 압보촌(鴨保村)에서 출생했다. 1552년(명종7)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인 이조 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핵하였다가 울산 군수로 좌천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 박광옥(朴光玉) 등과 의병을 일으켜,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그해 7월 왜적에 맞서 싸우다 아들 고인후(高因厚) 등과 금산(錦山)에서 순절하였다. 《국역 백사집 제2권 순창(淳昌) 고경명(高敬命)의 창의권(倡義卷) 후미에 쓰다》 《국역 미호집 제13권 《갑자모의록 서(甲子募義錄序)》
[주-D007] 선생께서 …… 했다 : 
박광윤은 이름자로 보아 박광일과 같은 항렬 집안 사람인 듯한데, 어떤 관계인지는 미상이다.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지냈으며, 1685년(숙종11) 유성운(柳成運)의 후임으로 차출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고 승정원 사령(使令)을 내쫓았다고 하여 추고당했다. 《承政院日記 肅宗 11年 2月 11日》
[주-D008] 주손(疇孫)의 …… 걱정스럽네 : 
주손은 송시열의 손자 송주석(宋疇錫, 1650~1692)이다. 조부는 송시영(宋時瑩)이고, 아버지는 송기태(宋基泰)이다. 아버지 기태가 송시열에게 입후되었다. 송주석의 자는 서구(敍九), 호는 봉곡(鳳谷)이다. 1683년(숙종9)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1685년, 김성대(金盛大)와 이진안(李震顔) 등이 송시열을 비방하자 변론 상소를 올렸다. 곧 조상우(趙相愚)ㆍ박세준(朴世????)ㆍ강현(姜鋧)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 《국역 숙종실록 11년 8월 22일》
[주-D009] 가친의 편지 : 
박상현이 박광일 편에 송시열에게 보낸 편지로 보인다. 박상현은 편지에서 정호(程顥, 1032~1085)의 “타고난 것을 성(性)이라 한다.”라는 말과, 《예기》에 ‘사람이 태어나서 고요할 때는 하늘의 성이다.[人生而靜, 天之性也]’에 대해 질문하였다. 《寓軒集 卷3 上尤菴先生 乙丑二月○先生正月書未到之前》 아래 박광일의 질문 역시 박상현의 질문을 부연한 말이다.
[주-D010] 권상하(權尙夏) : 
1641~1721.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치도(致道)이며, 호는 수암(遂菴)ㆍ한수재(寒水齋)이다. 송시열ㆍ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며, 특히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리는 송시열의 수제자였다. 《송자대전》의 편찬을 주도했고, 문집으로 《한수재집(寒水齋集)》이 있다. 박광일과 나눈 성리학 토론이 편지로 남아 있다. 《遜齋集 卷3》 《국역 한수재집 제10권》
[주-D011] 명도(明道)의 …… 따름이니 :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에 나온다. 명도는 중국 송나라의 정호를 가리킨다. “타고난 것을 성(性)이라 한다.”라는 말은 원래 《맹자》에서 고자(告子)가 한 말인데, 정호가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에서 “타고난 것을 성이라 하니, 성이 기(氣)이며 기가 성이다.”라고 하였다.
[주-D012] 근사록의 …… 했습니다 : 
정호의 ‘생지위성(生之謂性)’이란 말에 대한 주희의 설명이다.
[주-D013] 예기에 …… 하였으니 : 
《예기》 〈악기(樂記)〉에 “사람이 나서 고요한 것은 하늘의 성이고, 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성의 욕이다.[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라고 했다.
[주-D014] 아래 …… 하였는데 : 
《근사록》 권1 〈도체〉에서 정호가 ‘생지위성(生之謂性)’을 말한 다음 대목을 말한다.
[주-D015] 답엄시형서(答嚴時亨書)와 …… 다르니 : 
《회암집(晦庵集)》 권61 〈답엄시형〉에서 주희는 “인생이정(人生而靜)은 바로 미발(未發) 때이고, 이상(以上)은 인물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때이니 성이라 할 수 없고, 비로소 성이라 말할 수 있는 때는 곧 사람이 태어난 뒤로 이 이(理)가 형기(形氣) 가운데 떨어져 있으니 온전한 성의 본체가 아니다.”라고 했다. 《근사록》 주에서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을 적에는 진실로 성(性)이라고 부를 수 없고, 사람이 태어난 뒤에야 비로소 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라고 했기 때문에 박광일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16] 선생께서 …… 했다 : 
송시열은 이 논의를 박광일 편에 박상현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자가 전후에 사람들에게 준 편지와 《주자어류(朱子語類)》에 기록된 것에 이동(異同)이 많은 것은 대개 천도(天道)를 따라 말하기도 하고 인성(人性)을 따라 말하기도 하였으며, ‘생(生)’ 자를 따라 말하기도 하고 ‘정(靜)’ 자를 따라 말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차이가 없을 수 없네. 그러나 말마다 각각 타당한 근거가 있으니, 각각 그 지향한 바를 따라 추구한다면 아마도 서로 방해되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네. 그러나 명도(明道)의 본의를 바로 해석한 것으로는 아마도 엄시형에게 답한 편지만 한 것이 없을 듯한데, 이 글도 역시 《주자어류》에 전부 기재되어 있네. 《국역 송자대전 제113권 박경초(朴景初)에게 답함-을축년 3월 1일- 별지》
[주-D017] 주자가 …… 말 : 
‘화(花)’ 자는 ‘화(華)’ 자가 옳은 듯하다. 《宋子大全隨箚 卷3》 이익(李瀷)은 “주자가 유지부(劉智夫)에게 답한 편지에, ‘도학(道學) 문자는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어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영루(營壘)와 같고 화종 낭전(華宗浪戰)에 비유할 바가 아니다.’ 하였는데, 해석하는 자는 이 말이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 알지를 못한다. 내가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1년을 상고하니 다음과 같다. ‘송(宋)나라 화(華)씨가 배반했다. 제후(諸侯)의 군사가 토벌하니, 화씨의 일당은 혹은 관(鸛)이 되기를 원하기도 하고, 혹은 아(鵝)가 되기를 원하기도 했다. 관ㆍ아는 모두 진(陣)의 이름이다. 그래서 자구(赭丘)에서 싸워 크게 패했던 것이다.’ 저 화씨의 무리가 팔진(八陣)의 이리저리 연결되는 법을 쓰지 않고 한갓 변변치 못한 관ㆍ아의 술(術)만 일삼았으므로, 이른바 낭전(浪戰)이란 것이고, 화종(華宗)은 화씨의 무리가 한 사람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화종이라 칭한 것이다.” 하였다. 《국역 성호사설 제29권 화종낭전(華宗浪戰)》
[주-D018] 이윤(尼尹)이 …… 되었으니 : 
이윤은 이산(尼山)에 사는 윤선거(尹宣擧)의 아들 윤증(尹拯)이다. 윤증이 춘추관에 보낸 편지의 내용에 “율곡은 진정 절간에 들어간 잘못이 있었으나 우리 아버지는 꼭 죽어야 할 의리는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 편지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사학(四學) 유생들이 “윤증이 아버지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 선현을 모욕하였다.”라고 내외에 통문을 보내 성토한 일이 있었는데, 윤증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사관(四館) 관리들이 정거(停擧)의 벌을 받았다. 《국역 숙종실록 11년 2월 4일, 6일》
[주-D019] 예기 …… 하셨다 : 
왕기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동자로 제(齊)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사람들이 왕기의 공적을 높여 미성년자의 장례인 상례(殤禮)가 아니라 성년(成年)의 예로 장례 지내고자 하여 공자에게 물었던 내용이다. 《禮記 檀弓下》
[주-D020] 집의이소생(集義而所生)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맹자가 호연지기를 논하면서 “이는 의리(義理)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의(義)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엄습하여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했다.
[주-D021] 사거여사(舍去如斯) …… 하니 : 
《이정외서(二程外書)》 권12에 보인다.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부릉(涪陵)으로 유배 갈 때 염여퇴(灩澦堆)를 지나는데 거센 파도가 일었다.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몸 둘 바를 몰랐으나 정이 홀로 태연히 동요하지 않았다. 강안(江岸)에서 나무하던 자가 큰 소리로 “목숨을 버릴 작정을 하여 이러한 것인가. 이치에 통달하여 이러한 것인가.[舍去如斯, 達去如斯.]” 하였다. 《심경부주(心經附註)》 권2에도 수록되어 있다.
[주-D022] 묻기를 …… 하니 : 
《맹자》의 호연지기에 대한 논의는, 《손재집》 권7 〈호연장문답(浩然章問答)〉에도 상세하다.
[주-D023] 기보통편(紀譜通編) : 
주희의 제자 이방자(李方子)가 지은 《주자연보(朱子年譜)》와 명나라 대선(戴銑)이 지은 《주자실기(朱子實紀)》를 합쳐 1660년(현종1)에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이 편찬한 책이다. 총 6권 3책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정식 서명은 《문공선생기보통편(文公先生紀譜通編)》이다.
[주-D024]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 하였네 : 
《자치통감강목》 권14에 나온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