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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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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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군현분예(郡縣分隸) -경세유표 제3권 / 천관 수제(天官修制)
    *경세유표 제3권 / 천관 수제(天官修制)  정약용(1817) 중 일부. 무남성(武南省) : 포정사는 광주부(光州府) 성안에 있으며, 3주, 6군, 18현을 관할한다(또 濟州는 2현을 거느린다).광주(光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2군은 장성(長城)능성(綾城 : 綾州)이고, 6현은 담양(潭陽)ㆍ창평(昌平)ㆍ화순(和順)ㆍ남평(南平)ㆍ옥과(玉果)ㆍ곡성(谷城)이다.무남성 순찰사는 무주(武州)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살피건대, 광주(光州)란무주(武州)이다. 신라 말부터 항상 큰 진(鎭)이었고, 고려 때에도 또한 그러했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창의(倡義)하는 군사가 이곳에서 먼저 일어났으니 그 고을을 포정사로 한 것이 그것에 연유한다.나주(羅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2군은 영광(靈光)ㆍ영암(靈巖)이고, 6현은 함평(咸平)ㆍ무안(務安)ㆍ강진(康津)ㆍ해남(海南)ㆍ진도(珍島)ㆍ압해(押海)이다.나주 도호부 목사는 무남성 우도 방어사를 겸한다.생각건대, 압해는 나주 바다의 바깥 섬이다. 나주 바다에 열두 개의 큰 섬이 있고, 작은 섬으로서 큰 섬에 딸린 것은 수십 개나 된다. 여러 섬에서 1년 동안 요역(徭役)으로서 고을 관청 사람의 요구에 응(應)하는데 곡식이 1만 섬이나 들고 다른 물건도 이만큼은 든다 한다. 나주 군관이 바깥 섬 주인이 되어, 그 이(利)를 다 먹으면서, 목사가 쓰는 목물(木物)과 잡비를 충당해준다 하니 천하에 무의 무법(無義無法)함이 이와 같을 수 없다. 섬 백성이 바다를 건너 육지에 와서 고소(告訴)하려 하여도 한 번 부성(府城)에 들어오려면, 헛되이 드는 비용이 매우 많고 사건은 결국 바로잡아지지 않기 때문에 원통함과 억울함이 쌓여서, 별도로 한 현을 세우고, 열두 섬을 다 이 현에다 붙이기를 원하고 있다. 내가 그 실정을 익히 알므로, 이번에는 열두 섬 중에 하나를 택해서 관아를 세우고자 하는데 자은(慈恩)ㆍ암태(巖泰)ㆍ압해가 그 후보지이다. 그런데 압해는 본시 옛 현이니 여기에다 관아를 설치함이 또한 마땅하다.생각건대, 신라ㆍ고려 때에 왜구가 우리 서해(西海)를 여러 번 침범했고, 만력 임진년과 정유년 난리에는, 다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힘을 입어서, 왜적이 울두홍(熨斗谼)을 넘지 못했다. 만약 그때에 왜적이 이곳을 넘었더라면 나주 열두 섬이 맨 먼저 뱀과 돼지 같은 놈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여러 섬에 성 하나, 보(堡) 하나 없으니 우리나라 서남해의 방어는 허술하다 할 수 있다. 바삐 한 현을 설치해서 그 침입을 막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승주(昇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승주는 곧 順天이다).2군은 장흥(長興)ㆍ보성(寶城)이고, 6현은 광양(光陽)ㆍ흥양(興陽)ㆍ낙안(樂安)ㆍ동복(同福)ㆍ금오(金鼇)ㆍ검주(黔州)이다.승주 도호부 목사는 무남성 좌도 방어사를 겸한다.살피건대, 순천 수영(水營) 남쪽에 금오도(金鼇島)가 있는데 둘레가 300리이고, 그 서쪽에 수태도(愁太島)가 있는데 주위가 200리나 된다. 그리고 돌산(突山)ㆍ내발(乃發)ㆍ횡간(橫看) 따위 여러 섬은 그 수효도 모를 정도이다. 지금은 금오도를 현으로 만들고 그 옆에 있는 수십 개 섬을 다 이 현에 예속시켜서 왜구의 침입을 막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생각건대, 흥양 남쪽에 있는 절금도(折今島)는 둘레가 100여 리인데 백성이 많고 토지가 기름지다. 그 서쪽에 산이(山伊)ㆍ조약(助藥)ㆍ벌라(伐羅)ㆍ금당(衾堂) 따위의 섬이 있는데 그 수효도 모를 지경이다. 절금도에 금주현을 만들고, 그 옆에 있는 수십 개 섬을 다 이 현에다 예속시킴도 또한 마땅한 일이다.제주(濟州)는 2현을 거느린다.2현은 정의(旌義)ㆍ대정(大靜)이다.제주 도호부 대사는 탐라부 병마 수군 도절제사(耽羅府兵馬水軍都節制使)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생각건대, 제주는 모두 원래 제도대로 하고 고칠 것이 아니다.-<하략>12성(省) 주ㆍ군ㆍ현의 총수(가경 병자년, 곧 순조 16년, 1816년 8월 23일에 시험삼아 기록했다)봉천성(奉天省) 38읍(4주, 10군, 22현. 또 沁州 1주, 1군)사천성(泗川省) 42읍(4주, 10군, 28현)완남성(完南省) 27읍(3주, 6군, 18현)무남성(武南省) 27읍(3주, 6군, 18현)제주(濟州) 3읍(1주, 2현)영남성(嶺南省) 30읍(3주, 9군, 18현)황서성(潢西省) 30읍(3주, 9군, 18현)열동성(洌東省) 21읍(3주, 6군, 12현)송해성(松海省) 27읍(1경, 2주, 12군, 12현)패서성(浿西省) 20읍(1경, 1주, 6군, 12현)청서성(淸西省) 19읍(3주, 14군, 2현)폐4군 4읍(4군)현도성(玄菟省) 16읍(2주, 4군, 10현)만하성(滿河省) 10읍(2주, 8군)이상 공 314읍이다. 본래는 346읍인데, 줄인 것이 43읍이고(풍덕ㆍ교하ㆍ목천ㆍ석성ㆍ비인ㆍ신창ㆍ덕산ㆍ해미ㆍ평택ㆍ영동ㆍ회인ㆍ전의ㆍ진잠ㆍ함열ㆍ구례ㆍ자인ㆍ하양ㆍ순흥ㆍ진보ㆍ비안ㆍ영덕ㆍ청하ㆍ연일ㆍ안의ㆍ칠원ㆍ곤양ㆍ진해ㆍ흡곡ㆍ송화ㆍ옹진ㆍ증산), 증설한 것이 11읍이다(압해ㆍ금오ㆍ검주ㆍ화령ㆍ인성ㆍ계산ㆍ후주ㆍ폐4군).
    2020-09-12 | NO.600
  • 광주 대현에서 용구산을 바라보며〔光州大峴望龍龜山 - 백담집
    광주 대현에서 용구산을 바라보며〔光州大峴望龍龜山 - 백담집 제1권 : 구봉령(具鳳齡, 1526~1586)고갯길 부여잡고 오르니 병든 눈이 열리어 / 峴路攀登病眼開용구산 푸른빛이 눈앞에 들어오네 / 龍龜翠入望中來산 앞에서 일찍이 말 멈춘 나그네였으니 / 山前曾是停驂客오늘 머리 자주 돌리는 걸 어찌 견디리 / 此日那堪首屢回[주-D001] 용구산(龍龜山) :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과 월산면에 위치한 산이다.
    2020-12-14 | NO.599
  • 광주 목사 권공 묘갈명 병서 〔光州牧使權公墓碣銘 幷序〕- 용주유고 제17권 / 묘갈(墓碣)
    선조 말엽 단성(丹城)에 과거 공부로 뛰어난 자가 있으니 권달보(權達甫 권집(權潗))라고 한다. 그의 종제 정보(靜甫 권도(權濤))와 그의 아우 도보(道甫 권준(權濬))와 아울러 세상에서는 ‘삼권(三權)’이라고 일컬었다. 도보가 죽은 지 십여 년 만에 그의 아들 극유(克有)가 그의 형과 아우와 함께 부친의 일을 성실하게 서술해 가장(家狀)을 만들어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선생은 우리 선친의 벗이십니다. 감히 선친의 혼령을 빌려 선생께 글을 써 주십사 간청을 드립니다.”하였다. 나는 눈물을 거두며 대답하였다.“아, 참으로 잘 왔네. 자네 부친과 나는 오십 년 오랜 친구 사이니 자네 부친의 평생을 나만큼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네. 묘갈명을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가장을 살펴보건대, 도보의 성은 권(權)이고 휘는 준(濬)이며 호는 상암(霜嵒)이고 도보(道甫)는 그의 자이다. 책을 읽을 줄 안 때부터 부형이 시키지 않아도 걸상의 무릎 닿는 부분이 뚫어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는데 그 중 《맹자》를 가장 열심히 읽었다. 약관의 나이에 향시에 여러 차례 합격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그의 종제 정보(靜甫)와 함께 그해 증광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분관(分館)되었다. 권지에서 규례대로 박사에 올랐고, 성현 찰방(省峴察訪)으로 나갔다가 다시 규례대로 전적으로 승진하였다.당시 광해군의 정사가 혼란하여 간신들이 권력을 휘둘러 인사를 마음대로 단행하면서 어진 이를 낮추고 자신의 당인(黨人)을 높였다. 황덕부(黃德符), 이위경(李偉卿) 등이 마음대로 날뛰고 아첨하였는데 도보와 잘 지내고자 좋은 관직으로 꼬였지만 도보가 좋게 여기지 않는 데야 어찌 하였겠는가. 성균관과 찰방을 전전한 것은 이 일에 관계된 것이라 한다.계해년(1623, 인조1) 인조반정 때에 한 가지 재주 한 가지 능력을 가진 사람도 등용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도보만은 형조 낭관에 제수되었다가 결성 현감(結城縣監)으로 나갔다.정묘년(1627)에 예조 낭관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황해 도사(黃海都事)에 제수되었다.무진년(1628)에 중앙으로 들어와 예조 정랑이 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수안 군수(遂安郡守)에 제수되었다.신미년(1631) 가을에 종묘서 령(宗廟署令)에 제수되었다가 공조 낭관으로 전직되어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직하였다. 겨울에 사예(司藝)로 개차되고 다시 상례로 개차되었다가 태복시 정으로 옮겼다. 한 달여 만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다.갑술년(1634)에 직강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을해년(1635)에 장악원 정을 거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병자년(1636) 가을에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남한성이 포위되고 호남과 영남의 두 절도사가 잇따라 패전하였다. 당시 온 도의 인심이 흉흉하였는데 여러 고을의 수령들은 오직 자신의 몸을 보존하고 처자를 보호할 계획에 여념이 없었다. 도보는 분개하여 우뚝 서서 마을의 부로들을 의로써 격동하고 흩어진 병졸들을 군령으로 수습하였다. 정홍명(鄭弘溟)에게 호소사(號召使)에 응하도록 권했으며 겁먹고 굼뜬 체부 종사관(體府從事官)을 꾸짖었다. 그러자 난민들이 두려워할 줄 알게 되어 창고가 그런대로 보존되었으니 도보의 공이다.무인년(1638)에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상의원 정으로 개차되었다. 부임하기 전에 삼척에서 횡령하였다는 모함으로 죄를 받아 광양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에 방면되어 돌아왔다.임오년(1642, 인조20) 10월 16일에 단성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5세였다.아, 도보의 넓은 도량과 아름다운 재주가 누구만 못하기에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는가. 군자들은 이렇게 말한다.도보가 혼란한 조정에서 쫓겨난 것은 보통 선비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계해년(1623, 인조1) 이후로 도보를 아는 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지만 도보를 밀어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도보도 거의 얼굴과 언사에 드러낸 적이 없다. 이는 거의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군자’라고 할 수 있지만, 계해년 이전 현달하지 못했을 때보다 더 어려움이 있었다.그러나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당시에 쓰임이 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은 자신의 뜻을 행하고 싶어서가 아니겠는가. 도보는 세 곳의 큰 고을 수령을 지내면서 모든 일을 신속하게 다스려 모두 고과에서 최고로 위에 보고되어 안팎 옷감을 하사받았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표창된 것이다. 그가 떠났을 때에는 떠난 후의 추모하는 마음을 돌에 새기지 않고 동(銅)에 새겼으니, 백성에게 은택을 주겠다는 평소 지닌 도보의 뜻이 여기에서 펼쳐진 것이다. 후한(後漢) 때의 순리(循吏)의 공적이 어찌 표비(豹朏)의 두려움을 부끄러워하겠는가? 처음에 내가 세 권씨에 대해 혼자서 평을 해보았었다. 달보는 외면은 단정하고 내면은 고아하며 정보는 융통성과 지조를 둘 다 갖추고 때로 규각을 드러내니 모두 한 때의 명사가 되기에 충분한데, 지극한 성실함으로 화려함이 없고 밖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모두 진솔하다는 평은 도보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그 뒤 입신양명하고 행한 일이 대략 나의 말과 비슷하게 되었다.도보는 본래 안동 사람으로 그의 먼 조상인 김행(金幸)이 고려 초에 권씨 성을 하사받았는데 그 일이 《고려사》에 보인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휘 금석(金錫)이 단성(丹城)에 살기 시작하여 마침내 단성 사람이 되었다. 증조 휘 시준(時準)은 영경전(永慶殿) 참봉이다. 참봉은 휘 운(運)을 낳았는데 상의원 별제이다. 별제는 휘 세인(世仁)을 낳았는데 군기시 판관이다. 이씨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는데, 장남 집(潗)은 임자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자는 달보이다. 도보는 그의 막내아우이다. 도보는 고성 현령(固城縣令) 조응도(趙凝道)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현숙하고 아녀자의 법도가 있어 숙인에 봉해졌다. 도보보다 6년 앞서 죽었다. 도보의 묘는 의령(宜寧) 박령산(縛領山) 묘향(卯向)의 언덕인데 조숙인과 같은 묘역 안의 다른 무덤에 묻혔다.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장남은 극리(克履)로 업유(業儒)이다. 차남은 극관(克觀)이고 삼남은 극유(克有)이다. 극유는 성균관 진사로 벼슬하여 선공 참봉(繕工參奉)이 되었다. 사남은 극겸(克謙)으로 그 역시 업유이다. 극리는 부사 조정생(曹挺生)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극관은 일찍 죽었다. 극유는 목사 이지천(李志賤)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극항(克恒)은 윤정벽(尹正辟)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흠(欽)과 유(鑐)는 극리의 아들인데, 유는 생원이다. 익(釴)과 윤(鈗)은 극유의 아들인데, 익은 진사이다. 전(錪)은 극항의 아들이다. 흠은 이준로(李俊老)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남은 우형(宇亨)이다. 우형은 현감 송정렴(宋挺濂)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나머지는 어리다. 유는 윤정남(尹挺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익은 찰방 이귀징(李龜徵)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윤은 박이혁(朴以赫)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전은 심유진(沈儒珍)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측실에게서 딸 둘을 두었다. 장녀는 심여(沈櫖)에게 출가하여 딸 둘을 낳았다. 차녀는 정연휴(鄭延休)에게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세상은 말 잘하는 것 좋아해서 / 世好佞美그대에게 억지로 ‘어눌하다’ 이름붙이고 / 强名君曰吶세상은 꾸미는 것 좋아해서 / 世好飾羽그대에게 억지로 ‘질박하다’ 이름붙이네 / 强名君曰質어눌하고 질박함이 / 惟吶與質기름진 권세의 길엔 불리하겠지만 / 雖不利於脂膏形勢之途탁무(卓茂)와 주읍(朱邑)의 무리와 함께 / 與卓茂朱邑之倫백성의 사당에 거하면서 칭송의 노래 성대하리니 / 居民社而歌于于그렇다면 세상의 교활한 자들은 / 則世之巧儇者90리 길 양보하고, 한 수를 물리는 그 정도 뿐 아니네 / 不趐三舍讓一籌輸그대의 뜻과 사업은 바로 질박하고 어눌함 속에 있다는 것 / 惟君志業正在質吶之中兮세상에 누가 알리요 / 世誰知之참으로 사람들은 몰라도 하늘은 아시리니 / 固有人不識而天翁知兮그대 자손 마땅히 번성하리라 / 宜爾子孫之振振猗[주-D001] 광주 …… 묘갈명 : 이 글은 권준(權濬, 1578~?)의 묘갈명이다. 권준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보(道甫), 호는 상암(霜嵒)이다.[주-D002] 걸상의 …… 정도로 : 후한(後漢)의 관영은 55년 동안 나무로 만든 탑상(榻牀)에 앉아 있었는데, 단정한 자세를 한번도 잃은 적이 없었으므로, 무릎 닿는 곳에 모두 구멍이 뚫렸다고 한다. 《高士傳 管寧》[주-D003] 두 절도사 : 남병사(南兵使) 서우신(徐佑申)과 전라 병사(全羅兵使) 김준룡(金俊龍)을 가리킨다.[주-D004] 자신을 …… 군자 : 《논어》 〈학이〉 제1장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라고 하였다.[주-D005] 어찌 …… 부끄러워하겠는가 : 원문은 ‘해뉵표비지출재(奚恧豹朏之怵哉)’인데, “표비(豹朏)”의 의미가 불분명하고 관련된 전고를 찾을 수 없어 일단 위와 같이 번역한다.[주-D006] 탁무(卓茂)와 주읍(朱邑) : 두 사람 모두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 탁무(?~28)는 전한(前漢) 원제(元帝) 때에 밀현령(密縣令)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왕망(王莽)이 집권할 때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즉위하자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그를 태부(太傅)로 발탁하고 포덕후(褒德侯)에 봉하였는데, 뒤에 밀현에 탁무의 사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後漢書 卷25 卓茂列傳》 주읍(朱邑, ?~기원전 61)은 동향(桐鄕)의 색부(嗇夫)가 되어 치적을 남겼다. 주읍이 죽자 그의 아들이 유언에 따라 그를 동향에 장사지냈는데, 그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2022-03-04 | NO.598
  • 광주 목사 박미를 보내다[送光州朴牧使楣] - 점필재집 시집 제16권
    광주 목사 박미를 보내다[送光州朴牧使楣] - 점필재집 시집 제16권 :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응당 먼 곳 백성을 위해 조정 반열 떠났으리니 / 應爲遐萌輟鷺班한 깃대로 강관 나가는 것을 한하지 마소 / 一麾休恨出江關해양의 옛땅은 남쪽 지방서 가장 웅대하고 / 海陽舊壤雄南服서석산의 높은 표치는 뭇 산의 으뜸이로세 / 瑞石高標冠衆山넓은 도량은 청렴한 관리를 나무라지 않을 게고 / 曠度不敎廉吏讁좋은 때엔 의당 춤추는 허리 굽은 걸 감상하리 / 良辰宜賞舞腰彎묻노니 지금도 견훤의 집 풍속이 있다던가 / 問今尙有甄家俗적자와 용사로 다스리긴 또한 매우 어려우리 / 赤子龍蛇亦甚難견훤(甄萱)이 처음 무진(武珍)에서 일어나 뒤에 전주(全州)에 도읍하였다. 무진은 바로 광주이다. [주-D001] 해양 : 광주(光州)의 고호임.[주-D002] 서석산 : 광주에 있는 무등산(無等山)의 고호임.[주-D003] 적자와 용사로……어려우리 : 무지한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 한유(韓愈)가 운조복절도관찰등사(鄆曹濮節度觀察等使) 마공(馬公)을 칭송한 운주계당시서(鄆州谿堂詩序)에 “공(公)이 고을에 처음 이르렀을 적에는 백성들이 교화가 되지 못하여 무(武)로 다스리면 분개하여 원망을 품고, 은혜로 다스리면 방자해지므로 한편으로는 적자(赤子)로 취급하고, 한편으로는 용사(龍蛇)로 취급하여 오랜 세월 동안 노심 초사를 거듭하고 나서 교화가 크게 행해진 다음에는 백성들이 모두 공을 친부모처럼 떠받들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補遺》
    2020-09-25 | NO.597
  • 광주 목사 죽음 영공이 경양의 방죽에서 고기 잡는 것을 보고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차운하다- 제호집
    광주 목사 죽음 영공이 경양의 방죽에서 고기 잡는 것을 보고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차운하다〔光牧竹陰令公觀漁景陽坊築有詩 次韻〕비단 나무 서리에 잎이 지는데 / 錦樹經霜葉脫枝성 서쪽의 더딘 모임을 한하네 / 城西此會恨差遲촌에 일 없고 정무에 짬 많으니 / 村居無事政多暇태수가 출유해도 백성은 모르네 / 太守出遊民不知넓은 물 뛰는 물고기는 기운찬데 / 水闊跳魚鱗鬣壯찬 하늘 병든 학 날개를 거뒀네 / 天寒病鶴翅翎垂무정한 화각소리 참으로 미우니 / 生憎畫角無情極잠시나마 수레가 머물지 못하네 / 不許華軺住少時제호집 제8권 /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양경우(梁慶遇, 1568~1638)는 고려 때 태자 중윤(太子中允)을 지내고 찬화공신(贊化功臣)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진 양주운(梁朱雲)의 16세손으로, 본관이 남원(南原)이며, 자는 자점(子漸), 호는 제호(霽湖)ㆍ점역재(點易齋)ㆍ요정(寥汀)ㆍ태암(泰巖)이다. 고조 계옥(啓沃)은 부사직(副司直), 증조 자윤(自潤)은 사포 별제(司圃別提), 조부 의(艤)는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다. 아버지는 임진왜란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髙敬命)과 함께 활약하다가 순국(殉國)한 청계(靑溪)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이다.
    2023-07-05 | NO.596
  •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하는 곽문징(郭文徵)을 전송하는 서 - 기언 별집 제8권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하는 곽문징(郭文徵)을 전송하는 서  - 기언 별집 제8권 :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선생의 문집, 《기언(記言)》 67권과 《기언별집(記言 別集)》 26권난리 후 내가 남쪽에서 객지살이를 한 지 4년째 되던 해에 호남으로 나가 낭주(朗州)를 유람하는 길에 석포(石浦)로 군을 찾아갔는데, 이때 군은 1년 전에 시종(侍從)의 직임을 사직하고 바닷가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지금은 병든 몸으로 경성에 머무르고 있는데, 군은 광주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았고, 이어서 만리나 떨어진 연경(燕京)으로 떠나는 맏아들을 전송하게 되었으니, 내가 그 자리에 참석하여 군과 더불어 슬퍼하였다.아! 수십 년 동안에 군과 나눈 만남은 항상 나그네 길에서였다. 지금 나는 가련하게도 벌써 늙어 인사(人事)를 기약하기 어렵다. 더구나 광주는 경성에서 천 리나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닌가.광주는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하여 노령(蘆嶺) 남쪽의 큰 도회로 꼽힌다. 그곳의 풍속이며 인물의 성쇠, 상서(祥瑞)와 요얼(妖孼), 고금의 변화를 북쪽으로 오는 인편이 있을 때 적어 보내도록 하라. 내 비록 늙었으나 아직 문학의 말업(末業)을 일삼고 있으니, 그것을 보고서 남국고사(南國故事)에 붙이고자 한다.[주-D001] 곽문징(郭文徵) : 곽성귀(郭聖龜, 1606~1668)로 문징은 자이다. 본관은 해미(海美), 부친은 곽치요(郭致堯)이다. 생원시에 합격하고, 1631년(인조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저서로 《현주세고(玄洲世稿)》가 있다.[주-D002] 낭주(朗州) : 전라남도 영암(靈巖)의 고호이다.
    2020-09-13 | NO.595
  • 광주 목사로 가는 신여만을 전송하다, 2수 〔送申光州汝萬, 二首〕- 동명집 제4권
    광주 목사로 가는 신여만을 전송하다, 2수 〔送申光州汝萬, 二首〕- 동명집 제4권 :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1597~1673)광주부의 고을이야 내 못 봤지만 / 不見光州府서석산의 그 이름은 들어 보았네 / 猶聞瑞石山그 가운데 있는 그대 이은이거니 / 此中君吏隱다음 해엔 임금이 꼭 불러올리리 / 來歲上徵還그리고 또 유명 간에 느낌 있거니 / 且有幽明感내가 전에 계맹 간에 교분 맺었네 / 曾交季孟間성 남쪽서 가는 오마 전송을 하매 / 城南送五馬머리카락 반백 된 걸 퍼뜩 깨닫네 / 偏覺鬢毛斑내 젊어서 선승상을 배알했으며 / 少謁先丞相인하여서 두 아들과 교유하였네 / 因從兩胤遊매번 홍안 행렬의 뒤 따라다니며 / 每隨鴻鴈序여러 차례 봉황루에 올라갔었네 / 屢上鳳凰樓옛 친구라 늘 정겹게 말 나눴거니 / 道故常私語백발 되어 만나 어찌 생소하리오 / 如新豈白頭길 떠남에 임해 되레 말해 주나니 / 臨行還有贈노력하여 걱정 나눈 직분 잘하소 / 努力愼分憂[주-D001] 신여만(申汝萬) : 신익전(申翊全, 1605~1660)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만, 호는 동강(東江)이다.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뒤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부응교ㆍ사인(舍人)ㆍ사간을 거쳤으며, 이어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냈는데, 신익전이 광주 목사에 제수된 것은 《동강유집(東江遺集)》 권17에 나오는 〈가장(家狀)〉을 보면, 1645년(인조23) 겨울로 되어 있다. 저서로는 《동강유집(東江遺集)》이 있다.[주-D002] 서석산(瑞石山) : 광주(光州)에 있는 무등산(無等山)의 별칭이다.[주-D003] 이은(吏隱) : 관직에 있으면서도 은자(隱者) 같은 생활을 하며 이록(利祿)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흔히 경치 좋은 고을의 수령으로 있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주-D004] 그리고 …… 맺었네 : 동명이 신익전의 형인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도 교분을 맺었는데, 신익성은 신익전이 광주 목사에 제수되기 한 해 전인 1644년(인조22)에 죽었으므로 한 말이다.[주-D005] 오마(五馬) : 말 다섯 마리가 끄는 수레로, 태수가 부임할 적에 이 수레를 타고 갔으므로, 한 고을의 수령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주-D006] 선승상(先丞相) : 신익전의 아버지인 신흠(申欽)을 가리킨다. 신흠이 영의정을 지냈으므로 한 말이다.[주-D007] 매번 …… 따라다니며 : 신익전 형제들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는 뜻이다. 홍안(鴻鴈) 행렬은 형제간에 길을 갈 적에 동생이 형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말하는데, 전하여 형제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주-D008] 여러 …… 올라갔었네 : 동명 자신이 자주 동양위 신익성의 집에 갔었다는 뜻이다. 봉황루(鳳凰樓)는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그의 딸인 농옥(弄玉)을 위하여 만들어 준 누각으로, 봉루(鳳樓)라고도 한다. 농옥이 음악을 좋아하였는데, 소사(蕭史)가 퉁소를 잘 불어서 봉새가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이에 목공이 농옥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누각을 지어 주었는데, 이들 두 사람이 퉁소를 불면 봉황이 날아와서 모였으며, 이들은 그 뒤에 봉황을 타고 날아갔다고 한다. 《列仙傳》 여기서는 신익성이 선조(宣祖)의 사위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주-D009] 옛 친구라 …… 생소하리오 : 어렸을 적부터 오랫동안 사귀어서 서로 간에 정이 푹 들었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권83 〈추양열전(鄒陽列傳)〉에 “백발이 되도록 오래 사귀었어도 처음 만난 사이처럼 생소하기만 하고, 수레를 처음 맞댄 사이이면서도 옛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겠는가. 바로 상대방을 알고 모르는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諺曰 有白頭如新 傾蓋如故 何則 知與不知也〕”라고 하였다.[주-D010] 노력하여 …… 잘하소 : 광주 목사의 직임을 잘 수행하라는 뜻이다. ‘걱정 나눈 직분’은 임금의 걱정을 나누어 맡는다는 뜻으로, 지방의 수령이 되는 것을 말한다.
    2020-09-15 | NO.594
  • 광주 목사로 부임하는 이경함 을 전송하는 절구시의 서문-어우집
    광주 목사로 부임하는 이양원 경함(1553~1627) 을 전송하는 절구시의 서문〔送光州牧使李養源 慶涵 絶句序〕-어우집 제3권 / 서(序) :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1559~1623)만력(萬曆) 32년(1604, 선조37) 봄에 이군(李君)이 광주(光州)로 부임하게 되어 나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옛날 사람들은 길을 떠날 때 전별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설(薛)나라 군주는 맹자(孟子)에게 금을 주었으니 제가 금을 드릴까요? 그렇지만 저는 금이 없습니다. 자산(子産)은 계찰(季札)에게 모시옷을 주었으니 제가 모시옷을 드릴까요? 그렇지만 저는 모시옷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채찍을 드려야겠네요. 옛날에 요조(繞朝)는 채찍을 전별의 선물로 주었는데, 채찍은 말을 달리게 하는 것이니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저는 채찍을 뺏고 싶은 심정인데 그러지 못하거늘 하물며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버들가지를 드려야겠네요. 옛날 사람은 송별할 때 버들가지를 꺾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버들가지는 실처럼 약하여 떠나는 사람을 묶어놓을 수도 없거늘 더구나 꺾어서 준다면 더욱 붙들어 매어놓을 수 없으니 어찌 드리겠습니까. 이것도 아니라면 물 한 잔 채워 권해야겠네요. 옛사람이 태수를 전송할 때 물 한 잔 채워주는 자가 있었습니다. 물맛은 심심하여 존귀한 빈객을 대접하기에 마땅하지 않으니 한 병의 맛 좋은 술을 가지고 한강(漢江) 가로 따라가 전송해야 마땅하겠습니다. 다만 이군(李君)은 백천(百川)을 들이마시는 주량이니 한 병의 술로는 대접할 수 없고 저 또한 병 때문에 집 밖을 나아가지 못하니 어찌 한강 가의 전별을 기대하겠습니까.이군은 수십 년 사귄 친구이고 광주는 천 리밖에 떨어져 있으며 목사는 삼 년 동안 객으로 살아야 하니, 어찌 전별의 선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전별의 선물로는 마땅히 시만한 것이 없는데, 시가 시답지 못하면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함을 어찌하겠습니까. 시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니 마음이 귀하지 시가 귀한 것이 아닙니다. 시에는 본디 크고 작음이 있으니, 저는 우선 작은 시를 전별의 선물로 드립니다.”광주에는 공문서가 언덕처럼 쌓였을 것인데 / 光山朱墨積如陵어제는 아득한 구층의 은대에서 잠을 잤네 / 昨夢銀臺渺九層그래도 종일토록 잠자는 장군보다 나으니 / 猶勝將軍盡日睡세상의 힘들고 편안함은 능력에 달려있다네 / 世間勞逸能無能[주-D001] 광주 …… 서문 : 이 글은 1604년(선조37)에 광주 목사로 부임하는 이경함(李慶涵, 1553~1627)을 전송하며 쓴 시의 서문이다. 이경함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양원(養源), 호는 만사(晩沙)이다. 내직으로는 정언ㆍ지평ㆍ호조 참판ㆍ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성주 목사ㆍ광주 목사ㆍ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는데, 인조반정 이후 한성부 우윤으로 총관(摠管)을 겸하였다.[주-D002] 설(薛)나라 …… 주었으니 : 맹자(孟子)가 제(齊)나라에서 금(金) 1백 일(鎰)을 주는 것은 받지 않다가, 송(宋)나라에서 70일(鎰)을 주는 것을 받고 설(薛)나라에서 50일을 주는 것을 받았다. 그의 제자 진진(陳臻)이 받는 것에 옳고 그름을 물으니, 맹자는 “제나라에서는 받을 일이 없어서 받지 않았고, 송나라에서는 노자로 주는 것이라 받았으며, 설나라에서는 그 때 내가 의외에 대비할 것이 있는 것을 알고서 병기(兵器)를 준비하라고 주기 때문에 받았으니, 받은 것이 모두 옳다.”라고 대답하였다. 《孟子 公孫丑下》[주-D003] 자산(子産)은 …… 주었으니 : 이별의 자리에서 각자 소중한 물건을 주고받는 것을 뜻한다. 춘추 시대 오(吳)나라 계찰(季札)이 일찍이 정(鄭)나라에 가서 대부(大夫) 자산(子産)을 만났을 때 마치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처럼 여겨져서 자산에게 흰 비단띠[縞帶]를 선사하자, 자산은 계찰에게 모시옷[紵衣]을 선사하였다. 오나라에서는 흰 것을 귀중히 여기고, 정나라에서는 모시를 귀중히 여기기 때문에 각각 자기가 귀중히 여기는 물품을 서로 선사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襄公29年》[주-D004] 요조(繞朝)는 …… 주었는데 : 길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면서 의미 있는 한 마디 말을 해 주는 것을 뜻한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사회(士會)가 진(秦)나라로 망명 가 있었는데, 진(晉)나라에서는 진(秦)나라에서 사회의 계책을 쓸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계책을 써서 사회를 진(晉)나라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사회가 돌아올 때 진(秦)나라의 요조가 사회에게 채찍을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우리 진(秦)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여기지 말라. 나는 진(晉)나라의 계책을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13年》[주-D005] 옛 …… 채워주는 : 태수에게 물처럼 청렴한 정사를 펼치기를 당부하는 것이다. 후한 방삼(龐參)이 한양 태수(漢陽太守)로 부임하여 고사(高士)인 임당(任棠)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가 아무 말 없이 염교의 큰 뿌리 하나와 물 한 사발을 문 앞에 놓고는 손자 아이를 품에 안고 엎드려 있자, 방삼이 한참 동안 그 의미를 생각하다가 ‘물처럼 청렴하고, 염교 뿌리를 뽑아 버리듯 힘 있는 자를 억누르고, 손자 아이처럼 약한 백성을 돌보아 주라는 뜻’임을 깨닫고는 돌아가서 그대로 실천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51 龐參列傳》[주-D006] 백천(百川)을 들이마시는 : 술을 고래처럼 들이마시는 것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좌상은 날마다 주흥으로 만전을 허비하여, 술을 큰 고래가 백천을 들이마시듯 하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7] 은대(銀臺) : 승정원(承政院)을 가리킨다.
    2020-12-31 | NO.593
  • 광주 목사로 옮기는 경원 부사 이모를 보내며〔送李慶源遷刺光州〕- 미암집
    광주 목사로 옮기는 경원 부사 이모를 보내며〔送李慶源遷刺光州〕- 미암집 제1권 / 시(詩) : 유희춘(柳希春, 1513~1577우뚝한 왕자의 기상 드높고 / 磊落王子氣象高문무를 갖추어 영웅호걸로 추앙되네 / 才全文武推英豪전념하여 이미 오경을 깨치고 / 潛心已發五經庫장한 기상 삼산에 떨치었네 / 壯氣欲掁三山鼇북쪽 관문 지키려면 예전 장수 필요하여 / 北門鎖鑰須舊將변방에 넉넉한 인재 오게 하였지 / 故來邊郡揮牛刀근심 나눔이 곧 임금 가까이 모시는 것이니 / 自謂分憂卽近君밤낮으로 경륜 펴느라 수고로움 잊었네 / 夙夜綜理忘焦勞백 리 내 백성들 어루만지고 / 百里蒼生入撫摩삼군은 모두 하수 막걸리에 취하네 / 三軍共醉河簞醪깃발의 정채 하루아침에 변하니 / 旌旗精彩一朝變오랑캐도 벌벌 떨어 터럭 곤두서리라 / 犬羊凜凜生寒毛위엄이 어찌 변방 풍속만 압도했을까 / 威靈豈徒殊俗壓문풍은 다시 선비들 진작시켰네 / 文風更振靑袊袍삭망엔 대궐에 절하고 예의 가르치며 / 朔望拜闕敎禮義사직단과 문묘에 친히 제사 받드네 / 社壇文廟親焄蒿경서 가르쳐 몽매함 깨치느라 피로함 모르니 / 授經發矇不知倦여러모로 고무시켜 종과 북 울리는 듯하였네 / 多方鼓舞如鍾鼛얼음물 마시고 황벽 먹은들 어찌 괴로우리오 / 飮氷食蘖那自苦백성들로 하여금 임금 은택 젖게 하였네 / 要令赤子沾流膏내가 일찍이 얼굴 뵙고 아량 살펴보니 / 我嘗承顔窺雅量팽려호가 가을에 장강의 물결 접한 듯 / 彭蠡秋接長江濤기민을 먹인 은혜가 굴서에게 미치니 / 哺飢之仁及掘鼠하늘 끝 객지에서 만남이 얼마나 다행인가 / 天涯何幸萍蓬遭임기가 차서 또 남쪽으로 부임하니 / 瓜期又紆南州綬거문고 들고 간 소매자락 바람에 펄럭이네 / 一琴歸袂風颾颾영암읍의 명성이 광주 고을까지 들리어 / 靈邑仁聲入光邑모두들 늦게 왔다 맞으며 간모를 구경하네 / 共迎來暮觀干旄옆 사람들 자주 외직 나감을 의심치 마라 / 傍人莫訝屢出守업후는 벼슬을 두루 거쳐 삼공에서 마쳤다네 / 鄴侯歷試終槐曹멀리서 떠난다는 말 듣고도 송별 못하고 / 遙聞旌旆不相送스스로 겹겹 쌓인 토옥에 갇혀 탄식하네 / 自嗟土屋重重牢원컨대 노인들 얼고 굶주림에서 구제하여 / 但願老老救凍餒냉산의 근심스런 마음 조금 누그러뜨리기를 / 冷山少弛心忉忉[주-D001] 이모 : 누구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다.[주-D002] 삼산(三山) : 자라 등 위에 얹혀서 바다에 떠 있다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 등 삼신산(三神山)을 말한다. 옛날 발해(渤海) 동쪽에 신선이 사는 다섯 개의 산이 조류(潮流)에 밀려 표류하자, 천제(天帝)가 큰 자라 열다섯 마리로 하여금 머리로 그 산들을 떠받치게 하였는데, 용백국(龍伯國)의 거인(巨人)이 낚시질하여 여섯 마리를 잡아가는 바람에 지금은 아홉 마리가 세 개의 선산(仙山)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列子 湯問》[주-D003] 북쪽 …… 하였지 : 이모(李某) 장군이 구장(舊將), 즉 경험 많은 장군으로서 북쪽 변방을 자물쇠처럼 굳건히 지키기 위하여 차출되어 변방에서 그의 능력이 발휘되었음을 말하였다. 우도(牛刀)는 변방의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데 대도(大道)를 사용했다는 뜻이다. 《논어》 〈양화(陽貨)〉에 “공자(孔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공자가 들렀더니, 글 읽고 거문고 타는 소리가 들렸다. 공자는 자유를 보고 웃으며,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는가.〔割鷄焉用牛刀〕’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 조그만 고을을 다스리는데 나라를 다스릴 때 쓰는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 등을 씀을 희롱 섞어 칭찬한 말이다.[주-D004] 근심 …… 잊었네 : 경원 부사로 부임한 이모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임금의 위임을 받아 지방관의 책무를 다하는 것은 곧, 군주의 역할에 가깝다라고 여겨 스스로 책임을 다하려 했다는 의미이다. 분우(分憂)는 임금의 근심을 나눠 갖는다는 뜻으로, 목민관의 직책을 가리킨다.[주-D005] 삼군(三軍)은 …… 취하네 : 사졸(士卒)들을 아끼면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옛날에 어느 훌륭한 장수(將帥)가 어떤 이가 보내 준 한 병의 막걸리를 가지고 부하(部下)의 모든 병사(兵士)들과 함께 마시기 위해 이 술병을 하수(河水)에 던져 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하수의 하류(下流)로 내려가서 다 함께 그 물을 마시게 했다고 한다. 《三略 上略》[주-D006] 오랑캐도 …… 곤두서리라 : 이모의 소식을 들은 오랑캐들이 겁을 먹었다는 뜻이다. ‘견양(犬羊)’은 원래 하찮은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북방의 오랑캐를 지칭한다.[주-D007] 犬羊 : 대본에 ‘大羊’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의 의미상 ‘犬羊’으로 바로잡았다.[주-D008] 제사 받드네 : ‘훈호(焄蒿)’는 귀신께 정성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제의(祭義)〉에 “…… 그 기가 위로 올라가서 소명ㆍ훈호ㆍ처창함이 되니, 이는 백물의 정기이다.〔……其氣發揚于上 爲昭明焄蒿悽愴 此百物之精也〕”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는 그 주에서 “귀신이 밝게 드러나는 것을 소명, 그 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훈호, 사람의 정신을 두렵게 하는 것이 처창이다.”라고 하였다.[주-D009] 얼음물 …… 괴로우리오 : 어려움 속에서도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자세를 유지했음을 뜻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삼년위자사시(三年爲剌史詩)〉에 “삼 년 동안 자사로 있으면서, 얼음을 마시고 또 황벽을 먹었네.〔三年爲刺史 飮氷復食檗〕”라는 내용이 있다.[주-D010] 팽려호가 …… 듯 : 경원 부사 이모(李某)의 아량이 넓음을 표현하였다. 팽려호(彭蠡湖)는 ‘파양호(鄱陽湖)’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파양호(鄱陽湖)를 이른다. 《書經 禹貢》 장강(長江)은 양자강(揚子江)을 말한다.[주-D011] 기민을 …… 미치니 : 선정(善政)이 하층의 백성들에게까지 미쳤음을 뜻한다. 굴서(掘鼠)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절신(節臣) 소무(蘇武)와 관련된다. 소무는 당시 중랑장(中郞將)으로서 흉노(匈奴)에게 사신 갔는데, 그만 19년 동안 흉노에게 잡히어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절개를 지켰다. 특히, 북해(北海) 근방으로 이동되어 양(羊)을 쳤는데, 양식이 없어 들쥐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漢書 卷54 蘇武》[주-D012] 임기가 차서 : 본문의 ‘과기(瓜期)’는 ‘과만(過滿)’, ‘과한(過限)’이라고도 하는데, 지방 관원의 임기가 차는 것을 말한다.[주-D013] 간모(干旄) : 검은 소의 꼬리를 장대 위에 매단 기(旗)로 존귀한 사람이 예(禮)를 갖추어 어진 사람을 초빙함을 뜻한다. 《시경》 〈용풍(鄘風) 간모(干旄)〉에 “우뚝한 간모가, 준읍의 교외에 있도다.〔孑孑干旄 在浚之郊〕”라고 하였다.[주-D014] 업후(鄴侯)는 …… 마쳤다네 : 벼슬을 오랫동안 함이 결코 누가 되지 않음을 뜻한다. 업후는 당(唐)나라 이필(李泌)의 봉호이다. 경조(京兆) 사람이며, 자는 장원(長源)으로 현종(玄宗)ㆍ숙종(肅宗)ㆍ대종(代宗)ㆍ덕종(德宗) 네 조정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재상까지 지내는 동안 여러 번 권신(權臣)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슬기롭게 화를 면하였다. 본문의 괴조(槐曹)의 괴는 삼공(三公)의 자리를 뜻하고, 조는 무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주-D015] 노인들 …… 구제하여 : 선정을 베풀었음을 나타내었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이 오십에는 비단이 아니면 따뜻하지 않고, 나이 칠십에는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다. 따뜻하지 못하고 배부르지 못한 것을 소위 춥고 배고프다고 표현하는데, 옛날 문왕의 백성 중에는 춥고 배고픈 늙은이가 없었다.〔五十非帛不煖 七十非肉不飽 不煖不飽 謂之凍餒 文王之民 無凍餒之老者〕”라고 하였다.[주-D016] 냉산(冷山)의 …… 누그러뜨리기를 : 종성(鍾城) 유배지에 있는 유희춘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냉산’은 송(宋)나라 홍호(洪皓)가 건염(建炎) 3년에 대금 통문사(大金通問使)가 되어 금(金)나라로 사신 갔다가 금나라 점한(粘罕)의 뜻을 거슬러 쫓겨난 곳이다. 그곳은 몹시 추워서 4월이 되어야 풀이 나고 8월이면 눈이 내렸다. 홍호는 이곳에 머물면서 갖은 고생을 다하며 15년을 머물다가 간신히 송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宋史 卷373 洪皓列傳》
    2020-12-14 | NO.592
  • 광주 무등산 천황봉〔光州無等山天皇峯〕:- 운양집
    광주 무등산 천황봉〔光州無等山天皇峯〕 광석대(廣石臺)와 입석대(立石臺)가 모두 천황봉(天皇峯) 아래에 있다. - 운양집 제1권 / 시(詩)○승평관집(昇平館集) : 김윤식(金允植, 1835~1922)천황의 소매 높이 잡고 / 高挹天皇袂머리 긁적이며 속세와 작별했네 / 搔頭謝俗塵산중에 흰 돌 많고 많은데 / 山中多白石양을 치는 사람은 그 누구인가 / 誰是牧羊人[주-D001] 양을 …… 누구인가 : 《신선전(神仙傳)》 〈황초평(黃初平)〉에 황초평이 금화산(金華山)에서 신선술을 닦아 백석(白石)을 질타하여 양 떼로 만들었다고 했다.
    2020-12-31 | NO.591
  • 광주 서오층석탑의 유래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서 전해 오는 서오층석탑에 관한 이야기.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 있는 서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기 사이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109호의 유형문화재이다. 이야기는 서오층석탑의 내력에 관한 전설이다. 서오층석탑이 있는 광주공원 일대는 옛날에 성거산이라 불렸고, 성거사가 있었다. 성거사는 언제 지어졌고, 언제 없어졌는지 기록이 없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성거사를 지을 때 완성 직전에 여러 번 무너졌다고 한다. 성거사는 처음에는 성거산에서 거북의 꼬리 쪽인 향교 주변에 짓고 있었다. 완성 직전이면 넘어지고 다시 세우면 또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에 이름 높은 도승이 지나가다 보니, 살아 있는 거북의 꼬리에 집을 짓고 있다고 하였다. 거북이 꼬리를 칠 때마다 집이 무너지는 것이니 거북을 죽여 못 움직이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을 따라 거북의 목에 오층탑을 세우고 다시 절을 지었더니 절이 허물어지지 않았다.「광주 서오층석탑의 유래」의 주요 모티프는 '동물 형태의 지형'과 '풍수로 지은 사찰' 등이다. 서오층석탑이 있는 광주공원은 예부터 거북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구강(龜岡)이라 불렸다. 현재는 절이 없고 탑만 남아 있다. 성거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거북의 목 부분에 절과 탑을 지어 거북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사찰을 지었다. 그래서 성스러운 거북의 기운이 광주와 이 지역을 떠나지 못한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참고문헌] 『무등산』(삼화문화사, 1988)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590
  • 광주 신사에 제사를 지내다- 표해록 제1권 / 1488년 윤1월 14일
    광주 신사에 제사를 지내다- 표해록 제1권 / 무신년(1488, 성종 19) 윤1월 14일 : 금남(錦南) 최부(崔溥)큰 바다 가운데서 표류하였음.이날은 맑았습니다. 신시에 배가 표류하여 한 섬에 이르니 동, 서, 남의 3면(面)이 아득하게 끝없이 멀어 눈을 가리는 것이 없었으나, 다만 북풍을 피할 만한 곳은 있었는데 도리어 닻이 없는 것이 근심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제주도를 출발할 때는 배가 매우 큰데도 실을 물건이 없으므로 몇 개의 돌덩이를 배 안에 실어서 배가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허상리(許尙理) 등이 새끼줄로 그 돌 4개를 얽어매어 합쳐서 임시 닻을 만들어 배를 머물게 하였습니다. 안의(安義)가 군인 등과 서로 말하여 신에게 알아듣도록 하기를,“이번 행차가 표류해 죽게 될 까닭을 나는 알고 있었다. 자고로 무릇 제주도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신사(神祠)와 나주(羅州) 금성산(錦城山)의 신사에 제사를 지냈으며,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오는 사람들도 모두 광양(廣壤)의 차귀(遮歸)ㆍ천외(川外)ㆍ초춘(楚春) 등의 신사에 제사를 지내고 나서 떠났던 까닭으로, 신(神)의 도움을 받아 큰 바다를 순조롭게 건너갈 수가 있었는데, 지금 이 경차관은 특별히 큰소리를 치면서 이를 그르게 여겨, 올 때도 무등산과 금성산의 신사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갈 때도 광양의 여러 신사에 제사를 지내지 않아 신을 업신여겨 공경하지 않았으므로, 신 또한 돌보지 아니하여 이러한 극도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누구를 허물하겠는가?”하니, 군인들은 동조하면서 모두 신(臣)을 책망하였으나, 권송(權松)만은 홀로 말하기를,“그렇지 않다. 이에 앞서 정의 군수(旌義郡守) 이섬(李暹)은 3일 동안 광양 등의 신에게 재계(齋戒)하여 정성껏 제사를 지냈는데도, 표류되어 거의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며, 경차관(敬差官) 권경우(權景祐)는 여러 곳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서 왕래하였으나 조그만 탈도 없었다. 바다를 건너는 데 편리함과 편리하지 못함은 순풍을 기다리는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에 관계되겠는가?”하므로, 신 또한 타이르기를,“천지(天地)는 사심(私心)이 없고, 귀신은 말없이 운행(運行)하면서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되, 오직 그것이 공평할 뿐이다. 악한 사람이 귀신을 아첨해 섬겨서 복을 구한다면 그 사람에게 복을 주겠는가? 착한 사람이 사설(邪說)에 미혹되지 않아서 부당하게 제사 지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재앙을 주겠는가? 일찍이 천지와 귀신이 음식으로 아첨해 섬긴다고 해서 사람에게 재앙과 복을 준다고 생각하겠는가? 절대로 이런 이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제사도 일정한 등급이 있으니, 사대부와 서인(庶人)이 산천에 제사 지내는 것은 예절에 어긋난 일이다. 예절에 어긋난 제사는 곧 음사(淫祀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 지냄)인데, 음사를 하면서 복을 얻은 일은 나는 보지 못하였다.너희들 제주도 사람들은 귀신을 몹시 좋아하여 산택(山澤)과 천수(川藪)에 모두 신사를 설치해서, 광양 등의 신당(神堂) 같은 데는 아침저녁으로 공경하여 제사를 지냄이 지극하지 않은 점이 없었으니, 그 바다를 건너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표류하고 침몰되는 근심이 없어야 될 것이지마는, 그러나 오늘은 어떤 배가 표류하고, 내일은 어떤 배가 침몰되어, 표류하고 침몰하는 배가 앞뒤로 서로 잇따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과연 신(神)의 신령스러운 감응이 있는 일이겠는가? 제사를 지내어 능히 복을 받는 일이겠는가? 하물며 지금 함께 배를 탄 우리들 중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람은 다만 나 한 사람뿐이고, 너희 군인들은 모두 성심으로 재계하여 제사를 지내고 왔으니, 신이 만약 영험이 있다면 어찌 나 한 사람이 제사를 지내지 않은 까닭으로 너희들 40여 명이 재계하여 제사를 지낸 정성을 폐(廢)할 수 있겠는가? 우리 배가 표류한 것은 오로지 행리(行李 여행)가 전도되어 배가 떠날 때 순풍을 잘 기다리지 않은 데서 그렇게 된 것인데, 도리어 제사를 지내지 않은 일로 나를 책망하게 되니, 또한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하였으나, 안의 등은 오히려 신의 말을 오활(迂闊)하다고 여겨 옳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2020-09-28 | NO.589
  • 광주 왕서에게 보낸 글〔光州王緖〕 - 계원필경집 제12권
    광주 왕서에게 보낸 글〔光州王緖〕 - 계원필경집 제12권/위곡(委曲)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왕서(王緖) 님에게 알립니다. 하늘은 간사함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사람은 오직 순리(順理)에 따르는 자만을 돕게 마련입니다. 만약 지극한 이치를 어기면 반드시 떳떳한 법을 어지럽히게 될 것입니다.내가 알기에, 그대는 지난번에 안장(顔璋)으로 인하여 오래도록 화심(禍心)을 품고 있다가 대중의 노여움을 불러 일으켰고, 안장이 주륙(誅戮)을 당하자 그만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어찌하여 전장(戰場)에서 손을 묶어 의역(義域)에 몸을 던지려고는 하지 않고서, 감히 다시 도당을 불러 모으려고 모의하며 여전히 방자하게 떠들어 대는 것입니까. 상서(相鼠)의 기롱만을 자초(自招)할 뿐, 견양(牽羊)의 예법은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의 뜻이 끝내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지금 이렇게 은혜를 먼저 하고 처벌을 뒤로 하는 것은 무경(武經)에서 소중히 여기는 바요,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왕화(王化)에서 행하는 바입니다. 선(善)으로 인도하는 문을 활짝 열어, 인(仁)으로 돌아오는 길을 밟게 하려고, 마침내 회유(誨諭)를 가하면서 의향을 묻는 바이니, 빨리 본래의 속셈을 버리고 다른 소망을 일러 주기 바랍니다. 회답의 내용을 자세히 살피고 나서, 곧바로 지시를 내리려고 합니다.예(禮)에 이르기를 “뜻을 가득 채우면 안 된다.”라고 하였고, 전(傳)에 이르기를 “악한 일은 키워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대의 오늘날 뜻은 어떠합니까? 무고한 백성들을 몰아 죄의 그물에 잘못 들어가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을 날씨가 싸늘하니 건강에 특히 유의하시고, 절급(節級)들에게도 각기 위문해 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주-D001] 왕서(王緖) : 원래 수주(壽州)의 백정이었는데, 중화(中和) 1년(881) 8월에 매부(妹夫) 유행전(劉行全)과 함께 500명의 도적을 모아 수주를 점거하고, 다시 광주(光州)를 함락하고는 자칭 장군(將軍)이라 하였으며, 그 뒤에 진종권(秦宗權)의 주청에 의해 광주 자사(光州刺史)가 되었다. 《資治通鑑 卷254》 《新唐書 卷9 僖宗本紀》[주-D002] 상서(相鼠)의 기롱 :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상서(相鼠)〉에 “쥐를 보아도 가죽이 있는데,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단 말인가.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다면, 죽지 않고 또 무엇하리오.〔相鼠有皮 人而無儀 人而無儀 不死何爲〕”라는 말이 나온다.[주-D003] 견양(牽羊)의 예법 : 항복하여 귀순하는 법도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 정(鄭)나라 군주가 초(楚)나라 왕에게 항복하였는데, 그때의 광경을 “정나라 군주가 웃옷을 벗고 양을 끌고서 영접하였다.〔鄭伯肉袒牽羊以逆〕”라고 표현한 말이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12년에 나온다.[주-D004] 뜻을 …… 된다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오만함을 키우면 안 되고, 욕심나는 대로 따르면 안 되고, 뜻을 가득 채우면 안 되고, 즐거움을 끝까지 추구하면 안 된다.〔敖不可長 欲不可從 志不可滿 樂不可極〕”라는 말이 나온다.[주-D005] 악한 …… 된다 :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6년에 “좋은 일은 놓쳐서는 안 되고, 악한 일은 키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진 환공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善不可失 惡不可長 其陳桓公之謂乎〕”라는 말이 나온다.
    2020-09-12 | NO.588
  • 광주 유현의 아들 유명환 - 부상록(扶桑錄)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9월
    광주 유현의 아들 유명환 - 부상록(扶桑錄)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1617년(광해군 9) 9월 2일(갑자) 맑음. 일기가 매우 추웠다. 해진 후에 조흥이 왔다는 것을 듣고 죄다 돌려보내도록 하는 곡절 및 문서를 수정하는 일을 다시 청했는가를 물었더니, 답하기를,“오늘 집정에게 다시 청해 두고 왔는데, 오자 곧 또 부릅니다. 지금 또 복견으로 갈 참이니, 오는 즉시 자세히 보고하겠습니다.”하였다.포로당한 사람으로서, 진주(晉州)에 거주하던 하위보(河魏寶)의 아들 하선(河愃)이 중이 되어 관 앞에 와서 뵙는데, 이 사람이 바로 좌의정이 칭념(稱念)하던 사람이므로 역관 등이 서로 만나게 됨을 기뻐하여, 그 부모의 소식을 자세히 전해 주고, 이어서 관백이 이미 영을 내려 쇄환한다는 뜻을 말하며, 그가 거주하는 사찰(寺刹)을 물으니, 우물거리며 말하지 않았다. 그 부모의 말을 듣고도 조금도 생각이 움직이지 않았으며,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핑계하고는 한 번 간 후에는 형적(形跡)도 없으니, 정상(情狀)이 지극히 밉살스러웠다.광주(光州)에 사는 유현(柳玹)의 아들 유명환(柳命環)이 대판(大坂)에서 양천경(梁千頃)의 아들 몽인(夢寅)ㆍ몽린(夢麟) 등 및 전일에 편지했던 신향(愼向) 등 딸과 그 누이동생 혜란(惠蘭)의 편지 아울러 3통을 가지고 왔는데, 신향의 딸 등의 편지는 곧 전일 편지에 돌아가기를 원하던 그 뜻이었고, 혜란의 편지도 또한 그 뜻이었다. 몽인 등의 편지는 대략,“어미를 모시고 아우ㆍ누이동생과 같이 탈 없이 보존하고 있습니다. 멀리 동떨어진 지역에 흘러온 지 20년 동안 여름의 긴 날, 겨울의 긴 밤 잠깐 동안도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심정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호랑이 아가리 같은 데를 벗어나기 어려워 지금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니, 부끄럽고도 부끄럽습니다. 원컨대 은덕(恩德)을 힘입어 고국에 돌아가고 싶습니다.……”하였다. 명환을 불러서 물으니, 답하기를,“협판 중서(脇板中書)가 나이 많아 그 임무를 그 아들에게 전해 주어서, 그 아들이 신농주(信濃州)로 바꿔 제수되어서 장차 그곳에 부임하고, 중서(中書)는 왜경에 영주(永住)하게 되므로, 권속(眷屬)을 데리고 대판부에 왔으나, 장군이 복견성에 있기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고 우선 체류하고 있습니다. 저희 모자(母子)와 양몽인은 제 뜻대로 가고 옴을 허락하나 그 나머지는 모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중에도 몽린은 중이 되어 차(茶) 끓이는 것을 맡아 하는데 중서가 가장 애중(愛重)하게 여기므로 도망갈까 염려하여 그 모친을 담보(擔保)로 하고 있습니다. 모친은 비록 늙었으나 이 때문에 돌아가기가 어렵습니다.……”하였다. 곧 각 사람의 성명을 별지(別紙)에다 기록하여 조흥에게 주며 장군에게 청해서 돌아가도록 하게 하였다. 다만 듣건대, ‘중서의 아들로서 15~16세 이하인 두 사람이 방금 관백의 좌우에 있으면서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있다 하며 그들이 가로막을까 염려된다.……’ 하였다. 들으니, ‘쇄환하라는 영을 왜경에 알리되, 만약 가기를 원하는데도 숨기고 귀환(歸還)시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중한 죄를 준다.……’고 하였다. 내장(內匠)이 박대근을 불러,“문서 고치는 일을 집정 및 숭전(崇傳)에게 말하였더니, 집정이 말하기를, ‘왕(王) 자를 쓰지 않는 것은 바로 일본의 고례(古例)일 뿐 아니라, 낮추어서 쓰지 않는 것이 예도에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고 숭전은, ‘장군은 왕이 아닌데 어떻게 쓰느냐?’ 했습니다. 그러나 숭전은 나와 더불어 함께 공부하던 동무이니, 다시 가서 말해 보겠습니다.”하였다.
    2020-09-18 | NO.587
  • 광주 이한지에게 보낸 글〔光州李罕之〕 - 계원필경집 제12권
    광주 이한지에게 보낸 글〔光州李罕之〕 - 계원필경집 제12권/위곡(委曲)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한지(李罕之) 님에게 알립니다. 성간(成覵)이 말하기를 “그도 장부요, 나도 장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공을 이루고 절조를 세우는 것은 옛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요, 순리(順理)에 따라 충성을 바치는 것은 바로 오늘날에도 해당된다고 할 것입니다.최근에 칙서(勅書)와 수조(手詔)를 받들건대, 대중의 마음을 격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아울러 왕 영공(王令公)을 도통(都統)에 제수하고 서문 군용(西門軍容)을 도감(都監)에 임명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번진(藩鎭)이 공을 세우지 못하고 조정의 계책이 다하였으므로 마침내 대임(大任)을 노유(老儒)에게 맡긴 것인데, 비록 전해진 소문이 믿을 것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필시 일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입니다.나는 거년에 날랜 군사를 일제히 거느리고 가서 흉악한 무리를 소탕하려 하다가, 곧바로 조서(詔書)를 받들고는 회해(淮海)를 안정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서에 “짐을 위해 오월(吳越)의 지역을 보전하여, 짐이 동남쪽을 돌아보는 걱정이 없게 하라.”라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군대를 되돌렸으니, 이는 감히 명령을 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물의(物議)를 자세히 살피고 군기(軍期)를 참작해야만 할 것입니다. 관중(關中)에 도끼를 쥐고 휘두르는 무리가 있는데도, 곤외(閫外)에 창을 베고 자는 의지가 없으니, 누가 힘을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실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내가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대중이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제 곧장 변로(汴路)를 따라 바로 동관(潼關)으로 들어가서 봉성(鳳城)을 수복하고 난가(鑾駕)를 맞이함으로써, 길이 만대(萬代)에 유전(流傳)되게 하고 끝내 사방(四方)을 숙정(肅靜)하려고 합니다.그대는 이미 지방 장관의 신분으로 오랫동안 용기를 배양해 왔으니, 반드시 정예 군사를 뽑아 흉악한 반적(叛賊)을 기필코 섬멸하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칙서와 수조를 기록하여 그대에게 부쳐 드립니다. 성상의 뜻을 받들어 반드시 충성을 힘써야 할 것이니, 바로 정벌(征伐)을 결행하여 함께 부귀를 도모했으면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이니, 그대는 힘쓰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알리는 바이니, 속히 회보(回報)해 주면 좋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주-D001] 성간(成覵)이 …… 하였습니다 : 춘추 시대 제 경공(齊景公)에게 성간이 “그도 장부요, 나도 장부이다. 그러니 내가 그를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彼丈夫也 我丈夫也 吾何畏彼哉〕”라고 말한 내용이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주-D002] 왕 영공(王令公) : 왕탁(王鐸)을 가리킨다. 당 의종(唐懿宗) 함통(咸通) 7년(866)에 호부 시랑(戶部侍郞)으로 탁지(度支)를 주관하다가 예부 상서(禮部尙書)로 자리를 옮겼으며, 희종(僖宗) 건부(乾符) 6년(879)에 형남 절도사(荊南節度使)와 남면행영초토도통(南面行營招討都統)이 되었고, 희종을 따라 서촉(西蜀)에 들어간 뒤, 중화(中和) 2년(882)에 중서령(中書令)이 되고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이 되었다. 서유구(徐有榘)의 〈교인 계원필경집 서문〔校印桂苑筆耕集序〕〉에 그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나온다.[주-D003] 서문 군용(西門軍容) : 서문사공(西門思恭)을 가리킨다. 일찍이 추밀사(樞密使)와 봉상감군(鳳翔監軍) 및 우신책관군용사(右神策觀軍容使)를 지내고, 중화(中和) 2년에 제도행영도감(諸道行營都監)이 되었다.[주-D004] 창을 …… 의지 : 기필코 적을 섬멸하려는 굳은 의지를 뜻한다. 동진(東晉)의 유곤(劉琨)이 친구인 조적(祖逖)과 함께 북벌(北伐)을 하여 중원을 회복할 뜻을 지니고 있었는데, 조적이 먼저 기용(起用)되었다는 말을 듣자 “내가 창을 머리에 베고 누워 아침을 기다리면서 항상 오랑캐를 섬멸할 날만을 기다려 왔는데, 항상 마음에 걸린 것은 나의 벗 조적이 나보다 먼저 채찍을 잡고 중원으로 치달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吾枕戈待旦 志梟逆虜 常恐祖生先吾箸鞭耳〕”라고 말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62 劉琨列傳》
    2020-09-12 | NO.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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