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72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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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일록 제3권 / 무술(戊戌, 1598)-익산군수가 광주 목사로
- ○ 11월 3일 갑신(甲申)익산 군수(益山郡守)가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제수 받고, 이원익(李元翼)이 영의정에 올랐으며, 이정신(李廷臣)이 전주(全州) 부윤을 제수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 2023-12-04 | NO.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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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 제31권 / 신우 2(辛禑二) 광주 왜구 침입
- 경신신우 6년(1380), 대명 홍무 13년○ 3월에 왜적이 순천 송광사(松廣寺)를 침범하였다. ○ 왜적이 광주(光州)와 능성(綾城)ㆍ화순(和順) 두 현을 침범하니, 원수 최공철(崔公哲)ㆍ김용휘(金用輝)ㆍ이원계(李元桂)ㆍ김사혁(金斯革)ㆍ정지(鄭地)ㆍ오언(吳彦)ㆍ민백훤(閔伯萱)ㆍ왕승보(王承寶)ㆍ도흥(都興)을 보내어 막았다.
- 2022-04-29 | NO.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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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 제32권 / 신우 3(辛禑三) 노준공
- 정묘신우 13년(1387), 대명 홍무 20년○ 겨울 10월에 광주(光州) 사람 노준공(盧俊恭)이 시묘를 살고 3년 복을 입었으므로, 그 마을을 정표하였다. ○ 왜적이 광주(光州)를 침략하여 전 서운정(書雲正) 김언경(金彦卿)의 처 김씨를 잡아 가서 욕보이려하니, 김씨가 땅에 엎어져 적을 꾸짖으며 크게 고함치기를, “너희들은 곧 나를 죽여라. 의리상 욕은 당하지 않겠다." 하여, 드디어 해를 당하였다.
- 2022-04-29 | NO.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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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 제32권 / 신우 3(辛禑三) 왜구 침입
- 갑자신우 10년(1384), 대명 홍무 17년○ 11월에 ○ 왜적이 동복현(同福縣)을 침략하니, 도순문사 윤유린(尹有麟), 광주(光州) 목사 김준(金準), 장흥(長興) 부사 유종(柳宗)이 적과 싸워 9급을 베었다.
- 2022-04-29 | NO.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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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 제33권 / 신우 4(辛禑四) 왜구 광주 함락
- 무진신우 14년(1388), 대명 홍무 21년○ 가을 7월에 왜적이 광주(光州)를 함락시키니 양광ㆍ전라ㆍ경상도 도체찰사 황보림(皇甫琳)과 양광도 부원수 도흥(都興), 전라도 부원수 김종연, 경상도 부원수 구성로(具成老) 등에게 명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 2022-04-29 | NO.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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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 제34권 / 공양왕 1(恭讓王一)- 원상 광주 귀양
- 경오 2년(1390), 대명(大明) 홍무 23년○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려 다시 변안열의 당(黨)을 논핵하니, 을진(乙珍)과 경도(庚道)를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왕안덕(王安德)은 풍주(豐州)로, 우홍수는 인주(仁州)로, 원상(元庠)은 광주(光州)로 귀양보냈다.
- 2022-04-29 | NO.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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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 제35권 / 공양왕 2(恭讓王二)- 유백유 광주 귀양, 정지 졸
- 신미 3년(1391), 대명 홍무 24년 6월○ 과거에 성균 사예 유백순(柳伯淳)이 순녕군(順寧君) 담(耼)과 말하기를, “무진년에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받고 요동을 쳤는데 머뭇거리다가 군사를 돌이켰으니, 공이 없는 것 같은데도 지금 도리어 포상을 받았으며, 그 군사를 돌이켰을 때에 왕씨를 세우는 것을 저지하고 아들 창을 세운 것도 또한 형세가 그렇게 된 것인데, 대신이 이 일로 옥에 갇히었다. 옛날 의종 때 조정의 난을 또한 거울로 삼을 만하다. 지금 유자 정도전 등이 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려 하니, 혹시 전날과 같은 난이 있다면 우리들이 그 화를 입을까 두렵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대간과 형조가 자은사(慈恩寺)에 모여서 담과 백순을 잡아서 신문하니 상세히 자백하므로, 드디어 담은 견주(見州)로 귀양보내어 속적(屬籍 왕실의 족보)을 삭제하고, 백순은 곤장을 쳐서 기주(基州)로 귀양보냈다. 또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유백유(柳伯濡)가 전법(田法)을 비난하였기 때문에 광주(光州)로 귀양보내었다.10월 ○ 판개성부사 정지(鄭地)가 졸하였다. 정지는 젊을 때 큰 뜻이 있고 자질이 뛰어나게 훌륭하였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였다, 장수가 되어 글 읽기를 좋아하여 대의에 통하였으며, 드나들 때마다 항상 서적을 지니고 다녔다. 윤이ㆍ이초의 옥사에 잡혀서 청주(淸州)에 갇혔는데, 불복하며 말하기를, “이 시중(李侍中 이성계(李成桂))이 대의를 주장하여 군사를 돌이킬 때 내가 이윤(伊尹)ㆍ곽광(霍光)의 고사로써 시중에게 암시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는데 다시 어찌 윤이ㆍ이초에게 편당하였겠느냐." 하면서 말할 때마다 반드시 하늘에 맹서하며 말뜻이 사무쳤는데, 결국 수재 때문에 죄를 면하고 물러나와 광주(光州)에 있었다. 이때에 와서 왕의 부름을 받았는데, 나아가기 전에 졸하였다.
- 2022-04-29 | NO.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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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장과 지게
-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려장에 관한 이야기. '고려장과 지게'는 고려장(高麗葬)을 이행하려는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 마을회관에서 주민 이맹순(여, 80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어느 사람이 아버지를 고려장하기 위해 지게에 지고 갔다. 이때, 그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그 사람은 아버지를 땅에 묻고 지게를 그곳에 두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 사람의 아들은 지게를 가지고 가자고 말하였다. "지게는 갖고 갑시다!" "뭣 헐라고 그냐?" 그 사람이 이유를 물으니, 아들은 이렇게 답하였다. "아부지도 죽으믄 이 지게에 지고 와서 여어다가 묻을랑게." 그 사람은 아들의 말에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려장과 지게'의 주요 모티프는 '고려장이 없어진 계기'이다. 고려장은 늙은 부모를 산 채로 갖다 버리는 악습으로, 고려장을 폐지하는 계기에 관한 설화는 전국적으로 전승되는 광포전설(廣浦傳說)이다. 아버지는 악습에도 불구하고 따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아들은 지게를 통해 아버지의 불효를 깨닫게 하고 잘못을 고치도록 유도한다. 이 이야기는 아들의 지혜를 통해 효와 인간의 가치를 강조한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2023-07-31 | NO.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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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목나무 속의 구렁이업
- 광주광역시 서구 덕흥동 덕흥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구렁이업에 관한 이야기. '고목나무 속의 구렁이업'은 구렁이업으로 우환을 당한 본량댁에 대한 이야기이다. 2018년 3월 6일 광주광역시 서구 덕흥동 덕흥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최현섭(남, 84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본량댁이란 사람의 집 뒤에 할아버지당산이 있는데, 옆에 큰 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동짓날에 죽을 쑤어 놔두었더니, 누군가 죽을 다 먹었다. 이후 나무가 고목이 되자, 집안 사람들은 나무를 베고 땅을 다지는 공사를 하였다. 그런데 나무를 베고 보니 그 속에 큰 구렁이 여러 마리가 죽어 있었다. 그 이후 본량댁에서는 큰아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연이어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보고 구렁이가 업이었는데 죽여서 본량댁 사람들이 화를 입었다고 보았다. '고목나무 속의 구렁이업'의 주요 모티프는 '구렁이업으로 인한 화'이다. 업은 말과 동작과 생각, 그리고 거기에 비롯한 인과를 통칭하는 불교 용어로, 인간 개인의 행동과 사회가 맞물려 돌아가는 장치로 작용된다. 본량댁은 고목을 제거하고 땅을 다지기 위해 고목 안에 있는 구렁이를 죽게 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이후의 일에 영향을 미쳐 집안 사람들이 연달아 죽는 비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목나무 속의 구렁이업」 이야기에서 마을 사람들은 구렁이업으로 본량댁이 화를 입게 되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참고문헌] 조용길, 「업(業)에 대한 고찰」(『한국불교학』 5집, 한국불교학회, 1987)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2023-07-31 | NO.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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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봉 기대승 선생의 산소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봉 기대승에 관한 이야기.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자기가 묻힐 묏자리를 스스로 정했는데, 풍수설에 따라서 기대승의 후손이 끊겼다는 이야기이다. 1989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 거주하는 기세옥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고봉 기대승이 여름 동안 광산동 청량산(淸凉山)에서 거처한 후에 제자와 함께 산을 내려오다가 자신이 죽은 뒤에 묻힐 묏자리를 정하였다. 제자는 기대승이 정한 자리가 길이 끊긴 절손지지(絶孫之地)로 후손이 끊어질 것이라며, 명당이 아니라고 하였다. 기대승은 제자가 본 풍수가 맞다고 하면서, 형님의 자손들도 자신의 자손이니 후에 양자를 삼아서 집안의 대를 계승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묻힐 곳은 백대 향화지지(百代香火之地)로 좋다고 하였다. 기대승은 죽은 뒤에 자신이 정한 자리에 묻혔고, 제자의 견해대로 증손 때 절손(絕孫)이 되어서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기대승의 산소는 현재 광주광역시 광곡(廣谷)[너브실마을] 서북쪽에 있으며, 월봉서원에서 봄과 가을에 제향(祭享)을 지낸다. 「고봉 선생의 산소」는 고봉 기대승과 관련한 일화적 성격의 이야기이다. 고봉 기대승이 자신이 묻힐 묏자리를 직접 정했고, 풍수설로 제자와 논쟁을 벌였다는 내용이다. 기대승은 손이 끊길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대부 집안의 명예를 잇기 위해서 자신의 묏자리를 정하였다. 이 이야기는 허구적 성격의 설화이기보다는 사실적 성격의 일화이며, 기대승 집안을 중심으로 전승된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2023-07-31 | NO.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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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민- 幽居述懷
- 誅茅新卜博山陽 띠풀 베어 박산의 양지쪽에 초가집 엮으니瑞石層峰看渺茫 서석산 봉우리들이 아련히 떠오르네.屈曲前川如有護 굽이굽이 흐르는 앞 냇물이 감싸주는 것 같고 蕭條村落不成行 적막한 시골이라 나들이에 마음쓸 일 없네. 窮居自任蓬高下 궁벽한 곳, 초가집에 자신을 내맡기고 추려序 何 藜藿場 어찌 거친 쌀에, 명아주, 콩잎 밥상을 꺼리겠는가?春夢幾驚鷄報曉 새벽 닭 울음소리에 봄잠 몇번이나 깨었고秋懷頻見雁呼想 기러기 불음소리에 가을의 회포 몇번이나 느꼈는가?徒傷老大知無奈 다만 늙어감을 어찌할 수 없어 슬퍼하며苦戀明時念不忘 살기 좋은 때를 깊이 바라, 마음속에 잊지 못하고這裡難堪多少恨 그속에 많은 한 감당할 수 없으니 論心誰與共連床 마음을 펴는 데 누구와 더불어 자리를 같이 하리.*병자호란 때 탄음은 동지 오천여명을 규합하고 군량을 모아 서울로 향하던 중, 청주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하늘의 강기가 해와 달을 떨어뜨리고, 시절의 뜻이 역사를 말살시키는가 (天綱墜日月 時義掃春秋)"라는 시를 짓고 자연에 묻혀서 일생을 마쳤다. 숨어지내는 감회를 읊은 시가 애절하다
- 2020-03-31 | NO.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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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천-객사 광산관
- 百里蒼山一日還 백리길 푸른 산을 하루에 돌아오니夢魂仍在水雲間 꿈속의 넋 물과 구름 사이에서 맴도네.斗酒更對神明宰 말(斗)술로 다시 신명한 재상을 대하니爽氣催詩入我班 상쾌한 기운 재촉하여 시를 짓게 하네- 광주읍지,월봉집(月峯集)고부천(高傅川, 1578-1636)의 자는 군섭(君涉)이며 호는 월봉(月峯)이다.
- 2018-07-27 | NO.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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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후-東軒酒席
- 十載干戈後 10년의 전란을 거친 후에湖南有此筵 호남(湖南)에서 이 자리를 펼쳤네琴歌是別恨 거문고와 노래는 이별의 한尊酒卽江天 단지 술로 강천(江天)을 마주하네世道今新態 세도의 모습은 새로 바뀌었지만朋情莫更遷 친구간의 정(情)은 바뀌지 마세나光山一夜會 광산(광주)에서의 하룻밤 모임에서休說我狂顚 나의 흥이 과하다 이르지 말게 조선 중기의 문신 죽촌(竹村) 고성후(高成厚 1549∼1602)가 임진왜란이 끝난 어느날 광주 동헌 술자리에서 읊은 시다.
- 2018-07-06 | NO.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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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씨 출신 중범이 의거에 나아감을 보내며〔送高出身仲範赴義〕 - 노사집 제2권
- 고씨 출신 중범이 의거에 나아감을 보내며〔送高出身仲範赴義〕 - 노사집 제2권 :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신경을 어찌 봉천과 같은 때라 할까마는 / 神京豈曰奉天時근기에서 어쩌다 출새시 듣게 되었나 / 近甸那聞出塞詩칼 짚고 그대 감에 늙은 간담 격동시키니 / 杖劒君行激老膽제봉에게 후손 있음을 믿을 수가 있네 / 霽峯方信有孫枝[주-D001] 신경(神京)을 …… 할까마는 : 신경은 임금이 계시는 서울을 뜻한다. 봉천(奉天)은 당나라의 덕종이 주자(朱泚)라는 자의 반역 사건으로 인하여 서울에서 나와 피란을 갔던 곳이다. 당시 상황이 임금이 피란을 갈 정도로 화급한 때가 아님을 말하였다.[주-D002] 출새시(出塞詩) : 출새는 변방을 뜻하니, 곧 싸움과 관련된 시를 말한다.[주-D003] 제봉(霽峯) : 고경명(高敬命, 1533~1592)으로,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이다. 광주(光州)에서 태어났다. 1552년(명종7)에 진사가 되었으며, 1552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공조 좌랑을 시작으로 전적(典籍)ㆍ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량(李樑)의 전횡 사건에 연루되어 울산 군수로 좌천된 후 파면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기용되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적도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금산(錦山)에서 곽영(郭嶸)의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작은 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문집으로는 《제봉집(霽峯集)》이 있으며,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유서석록(遊瑞石錄)》이 있다.
- 2020-10-04 | NO.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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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용후-海陽城聞琴(해양성에서 거문고를 듣다)
- 骨靑年少眼如刀 기골이 푸른 젊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三峽流泉指下挑 삼협에 흐르는 샘을 손끝으로 연주한다 風露滿空人寂寂 바람과 이슬 허공에 가득하고 인적은 드문데壯元峰上月輪高 장원봉 위에 둥근 달만 높이 떴네-청사집(晴沙集)고용후(高用厚, 1577~1652)의 본관은 장흥, 자는 선행(善行)이며 호는 청사(晴沙)이다. 고경명 장군의 여섯째 막내아들로 의병장이었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0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병조좌랑·병조정랑을 거쳐 1616년(광해군 8) 남원부사가 되었으며, 1624년(인조 2) 고성군수를 역임하였다.1631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판결사(判決事)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저서로는 《청사집》, 《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청사집》은 1680년 고부선이 저자의 유문을 수집하여 간행했고, 1759에 2권1책 목판본으로 간행했다.2019.1.18. 수정
- 2018-07-10 | NO.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