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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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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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武珍遺俗故凶奸 - 점필재집 시집 제21권
    광주 사람이 그곳 판관 우윤공을 쏘아서 팔뚝을 맞혔는데, 윤공은 화순으로 달아났다[光州人射其判官禹允功中臂允功奔和順] - 점필재집 시집 제21권 : 김종직(金宗直, 1431~1492)무진의 남긴 풍속은 본디 흉하고 간악하여 / 武珍遺俗故凶奸어린아이가 능히 적백환을 더듬어 취했네 / 童子能探赤白丸태평시에도 분수를 범할 줄 어찌 알았으랴 / 豈意治朝猶犯分처음 들으매 쇠한 머리털이 관을 찌르누나 / 初聞衰髮尙衝冠창랑은 스스로 군저의 노염을 불렀거니와 / 滄浪自致群狙怒매질은 장차 백 가호의 해독을 이루겠네 / 箠楚將成百室殘봉생정 아래 길에서 부절 멈추고 있노라니 / 弭節鳳笙亭下路풍속 바꿀 꾀 없어 왕관 된 게 부끄럽구나 / 轉移無術愧王官[주-D001] 적백환을 더듬어 취했네 : 한 성제(漢成帝) 때에 장안(長安)의 소년들이 암살단(暗殺團)을 조직하여 적(赤)ㆍ백(白)ㆍ흑(黑) 삼색(三色)의 탄환(彈丸)을 만들어 놓고 서로 더듬어서 적환(赤丸)을 취한 자는 무리(武吏)를 죽이고, 백환(白丸)을 취한 자는 문리(文吏)를 죽이고, 흑환(黑丸)을 취한 자는 장사(葬事)를 주관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九十》[주-D002] 창랑은……불렀거니와 : 저격을 받은 장본인이 스스로 저격받을 짓을 했음을 비유한 말. 군저(群狙)는 뭇 원숭이인데, 저(狙)는 곧 저격(狙擊)의 뜻을 취한 것이다. 유자(孺子)가 노래하기를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을 수 있다.”고 하니,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소자(小子)들아, 들어 보아라.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게 되니, 물이 스스로 취한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上》
    2020-09-26 | NO.690
  • 牧隱藁碑陰記 - 이숙야 광주목사의 기록이 있다
    牧隱藁碑陰記/ 비음기(碑陰記) [이맹균(李孟畇)]선조(先祖) 한산백(韓山伯)의 신도비(神道碑)는 문인 하 문충공(河文忠公)이 영락(永樂) 을유년 겨울에 지은 것이다. 금년 여름에야 비로소 좋은 빗돌을 얻어 각자(刻字)를 시작하여 가을에 이르러 마쳤는데, 숙부(叔父) 유후공(留後公)께서 나에게 산맥(山脈)이 내려온 근원과 좌향(坐向)을 기록해서 비석 후면에 쓰도록 명하셨다.또 이르기를, “내가 비문(碑文)을 보건대, 숙옹부 승(肅雍府丞)에 제수되면서부터 한산백에 봉해지는 사이의 산관(散官)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글을 간략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연보(年譜)가 있으니, 관직은 상고할 수가 있다. 그리고 비문에 기재된 자손들이 이제는 모두 성립하여 관질(官秩)이 승진되어서 현달(顯達)한 지위에 이른 자가 실로 많고, 비문을 지은 이후에 태어난 친손(親孫)과 증손(曾孫), 현손(玄孫) 또한 많으니, 이들을 다 기록해서 후손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빠짐없이 다 기록해서 모두 비석 후면에 기재하라.” 하시므로,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선조의 묘는 한산군(韓山郡) 기린봉(麒麟峯)의 남쪽 기슭 축간(丑艮)의 산 계좌정향(癸坐丁向)에 있는데, 동남쪽으로 한산군 소재지와의 거리는 5리이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 산맥은 홍산(鴻山)의 영흥산(永興山)으로부터 내려왔는데, 영흥산에서 꺾어져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내려와서 우뚝 솟은 것이 바로 기린봉이니,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실로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온 것이다. 기린봉 아래 가지(加智)의 언덕은 청룡(靑龍) 백호(白虎)와 안산(案山)이 굼틀거리며 빙 둘러 옹위하여 가기(佳氣)가 충만하니, 아, 하늘과 땅이 아끼고 숨겨 두었다가 현철(賢哲)한 이의 좋은 묏자리가 되기를 기다렸던가? 묘의 손방(巽方)으로 33보(步)가 되는 곳에 큰 비석을 세워서 선조의 아름다운 덕을 기록하여 무궁한 후세에 밝게 보이고, 또 자손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서 다음과 같이 갖추 열거하는 바이다.선조의 장남은 우리 선군(先君)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휘 종덕(種德)인데, 문하 평리(門下評理) 유혜손(柳惠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맹유(孟㽥)는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이고, 그다음은 맹균(孟畇)이며, 그다음 맹준(孟畯)은 별장(別將)인데 일찍 죽었고, 막내 맹진(孟畛)은 한성부 부윤(漢城府府尹)이다. 장녀는 서령(瑞寧) 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도총제(都摠制)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연기(衍基)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고, 그다음 유기(裕基)와 보기(保基)는 글을 읽고 있으며, 장녀는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이후(李厚)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 이의(李椅)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도염서 녹사(都染署錄事) 김자행(金自行)에게 시집갔다. 감찰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주(澍)이고, 다음은 엄(渰)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서령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방선(方善)이고, 차남은 방경(方敬)이다.중남(仲男)인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휘 종학(種學)은 문하 시중(門下侍中) 이춘부(李春富)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숙야(叔野)는 광주 목사(光州牧使)이고, 그다음 숙규(叔畦)는 진주 목사(晉州牧使)이며, 그다음 숙당(叔當)은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인데, 지금 모두 사망하였다. 그다음 숙묘(叔畝)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이고, 그다음 숙복(叔福)은 급제하였으며, 막내 숙치(叔畤)는 공조 참판(工曹參判)이다. 딸은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다. 광주 목사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1남 축(蓄)은 호조 정랑(戶曹正郞)이고, 장녀는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안숭신(安崇信)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 이원근(李元根)에게 시집갔다. 정랑의 1남 1녀는 모두 어리다. 진주 목사는 5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감목관(監牧官) 유쟁(柳諍)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능직(陵直) 곽분(郭汾)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유학(幼學) 전극경(全克敬)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사남(李思南)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어리다. 첨총제는 3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思)는 사역원 주부(司譯院注簿)이고, 그다음 외(畏)는 능직이며, 그다음 이(異)는 동부 녹사(東部錄事)이다. 주부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능직의 1녀는 어리다. 녹사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동지는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치(菑)는 원평도호부 부사(原平都護府副使)이고, 그다음 여(畬)는 사헌부 감찰이며, 장녀는 의령감무(宜寧監務) 하맹질(河孟晊)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공조 좌랑(工曹佐郞) 안숭효(安崇孝)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통례문 봉례(通禮門奉禮) 김리(金理)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어리다. 부사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수은(壽垠)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감찰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견(仁堅)이고, 그다음은 의견(義堅)이며, 모두 어리다. 급제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문비(文埤)이고, 차남은 문강(文疆)이며, 장녀는 군자감 녹사(軍資監錄事) 윤빈(尹濱)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학 유중인(柳仲諲)에게 시집갔다. 문비의 1남은 어리다. 참판의 1녀는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 이경현(李敬賢)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 의산(義山)은 사정(司正)이고, 1녀는 집현전 정자(集賢殿正字) 김문효(金文孝)에게 시집갔다.계남(季男)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 휘 종선(種善)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치사(致仕)한 권균(權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계주(季疇)를 낳았는데, 계주는 호조 정랑(戶曹正郞)이다. 또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의 딸에게 재취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계린(季疄)은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이고, 그다음 계전(季甸)은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인데 정미년 친시(親試)에 급제하였으며, 그다음 계원(季畹)은 전직(殿直)인데 임자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그다음 계정(季町)은 글을 읽고 있다. 장녀는 강화도호부 부사(江華都護府副使) 이백상(李伯常)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능직 김숭로(金崇老)에게 시집갔다. 정랑은 1남 4녀를 낳았는데, 1남은 개(塏)이고, 장녀는 유학 이휘(李徽)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분연(李賁然)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판사는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숙(塾)이고, 그다음은 훈(壎)이며, 그다음은 해(垓)이고, 그다음은 경(坰)이며, 모두 어리다. 수찬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육(堉)이고, 그다음은 우(堣)이며, 모두 어리다. 전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은 연(堧)이고, 모두 어리다. 능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외현손(外玄孫)은 모두 50여 인이나 되므로, 글이 많아서 명씨(名氏)를 다 쓰지 않는다. 그리고 혼인(婚姻)한 가운데 이성(李姓)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모두 우리와 같은 이씨가 아니다.자손이 많고 대대로 높은 관작이 나서 통현(通顯)한 지위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나처럼 불초한 사람도 외람되이 중외(中外)의 관직을 두루 거쳐 낭묘(廊廟)의 직임에까지 참여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적덕(積德)으로 인한 여경(餘慶)이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덕을 많이 쌓은 자는 덕택이 먼 후세까지 전해지고, 근본이 깊은 나무는 지엽이 무성하게 된다.” 하였으니, 그 말이 사실이로다.또 홍무(洪武) 을축년 가을에 명(明)나라 국자감 학록(國子監學錄) 장보(張溥), 전부(典簿) 주탁(周倬)이 사명을 받들고 와서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우리 선조를 바라보고는 역자(譯者)에게 묻기를, “저 몇째 번에 서 있는 이는 순수한 유도인(有道人)인데, 저분이 바로 이 선생(李先生) 모(某)가 아닌가?” 하므로, 역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선조의 앞으로 다가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우 공경하였다. 그리고 무진년에 명년(明年)의 하정사(賀正使)로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는 고황제(高皇帝)가 한 번 보고 선조의 어짊을 알고는 한참 동안 말을 나누어 주고, 선조가 물러감에 미쳐서는 물러가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면서 이르기를, “그려 놓음 직하다.” 하였으니, 대체로 선조의 풍도(風度)를 아름답게 여겼던 것이다.영락(永樂) 계미년에는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사명을 받들고 본국에 와서 일 때문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그간에 목은 문집을 구하여 보고는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또 행장(行狀)을 구하여 열람하고는 또한 매우 사모하여 시(詩)를 지어서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그러자 그때 곁에 있던 사람이 청하여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이렇게 간절히 탄복하고 사모하시니, 서(序)를 지어서 권수(卷首)에 붙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축군(祝君)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의당 환조(還朝)하여 글 잘하는 조신(朝臣)에게 청해서 지어 보내겠다.” 하였다. 과연 그 후 국자감 조교(國子監助敎) 양성(羊城) 진련(陳璉)이 찬한 묘지명(墓誌銘)을 보내왔는데, 사적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양촌 선생(陽村先生)이 찬한 행장에 근본하여 조사(措辭)를 변개하려다가 오히려 실상을 잃게 된 곳이 있다. 그러나 덕행을 논함에 있어서는 역시 양촌의 말에 근본하여 약간 손익(損益)을 가하였고, 문장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문사(文辭)가 전실(典實)하고 풍창(豐鬯)하되, 흥치(興致)는 풍아(風雅)에서 근본하였고, 언론(言論)은 덕의(德義)에 도달하였으므로, 화평한 음조와 정대한 기운이 편질(編帙)의 사이에 성대히 드러난다.” 하였고, 명(銘)의 한 구절에는, “오직 공이 제작한 것은 화곤처럼 문채가 나도다.[惟公製作 華袞之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만약 공이 천조(天朝)에서 벼슬을 했다면 반드시 평소에 온축(蘊蓄)한 것을 크게 펴서 천자(天子)에게 알아줌을 받았을 것이니, 그래서 훈명(勳名)을 수립하여 역사(歷史)에 길이 빛나게 되었더라면 왕사례(王思禮)만 유독 당(唐)나라에 훌륭한 공훈을 남기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한 나라에서만 벼슬을 하여 경륜을 다 펴지 못하였으니, 그 애석함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 총결(總結)의 말을 보면 이는 양촌이 하지 않은 말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 문집을 보고 그 위인을 알아서, 감히 외국 사람이라 하여 낮게 보지 못하고 칭찬한 말이 여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그 성심으로 감복한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우리 선조의 도덕의 숭고함과 문장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동방 사람들만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 사모할 뿐 아니라, 고황제의 명철함으로도 한 번 보고 그 어짊을 알았었고, 또 장 학록(張學錄), 주 전부(周典簿) 같은 이들은 중조(中朝)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는데도 역시 매우 공경하였으니, 반드시 성덕(盛德)의 광휘가 사람들에게 감지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 소경(祝少卿), 진 조교(陳助敎)의 탄복하고 칭찬한 것도 어찌 문장의 오묘함이 풍아에 잘 합치되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므로 아울러 여기에 나타내는 바이다.선덕(宣德) 8년 8월 하한(下澣)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참찬 집현전대제학 겸 성균대사성(議政府參贊集賢殿大提學兼成均大司成) 손(孫) 이맹균(李孟畇)은 삼가 기록하다.선조(先祖) 한산백(韓山伯)의 신도비(神道碑)는 문인 하 문충공(河文忠公)이 영락(永樂) 을유년 겨울에 지은 것이다. 금년 여름에야 비로소 좋은 빗돌을 얻어 각자(刻字)를 시작하여 가을에 이르러 마쳤는데, 숙부(叔父) 유후공(留後公)께서 나에게 산맥(山脈)이 내려온 근원과 좌향(坐向)을 기록해서 비석 후면에 쓰도록 명하시고, 또 이르기를, “내가 비문(碑文)을 보건대, 숙옹부 승(肅雍府丞)에 제수되면서부터 한산백에 봉해지는 사이의 산관(散官)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글을 간략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연보(年譜)가 있으니, 관직은 상고할 수가 있다. 그리고 비문에 기재된 자손들이 이제는 모두 성립하여 관질(官秩)이 승진되어서 현달(顯達)한 지위에 이른 자가 실로 많고, 비문을 지은 이후에 태어난 친손(親孫)과 증손(曾孫), 현손(玄孫) 또한 많으니, 이들을 다 기록해서 후손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빠짐없이 다 기록해서 모두 비석 후면에 기재하라.” 하시므로,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선조의 묘는 한산군(韓山郡) 기린봉(麒麟峯)의 남쪽 기슭 축간(丑艮)의 산 계좌정향(癸坐丁向)에 있는데, 동남쪽으로 한산군 소재지와의 거리는 5리이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 산맥은 홍산(鴻山)의 영흥산(永興山)으로부터 내려왔는데, 영흥산에서 꺾어져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내려와서 우뚝 솟은 것이 바로 기린봉이니,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실로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온 것이다. 기린봉 아래 가지(加智)의 언덕은 청룡(靑龍) 백호(白虎)와 안산(案山)이 굼틀거리며 빙 둘러 옹위하여 가기(佳氣)가 충만하니, 아, 하늘과 땅이 아끼고 숨겨 두었다가 현철(賢哲)한 이의 좋은 묏자리가 되기를 기다렸던가? 묘의 손방(巽方)으로 33보(步)가 되는 곳에 큰 비석을 세워서 선조의 아름다운 덕을 기록하여 무궁한 후세에 밝게 보이고, 또 자손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서 다음과 같이 갖추 열거하는 바이다.선조의 장남은 우리 선군(先君)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휘 종덕(種德)인데, 문하 평리(門下評理) 유혜손(柳惠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맹유(孟㽥)는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이고, 그다음은 맹균(孟畇)이며, 그다음 맹준(孟畯)은 별장(別將)인데 일찍 죽었고, 막내 맹진(孟畛)은 한성부 부윤(漢城府府尹)이다. 장녀는 서령(瑞寧) 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도총제(都摠制)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연기(衍基)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고, 그다음 유기(裕基)와 보기(保基)는 글을 읽고 있으며, 장녀는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이후(李厚)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 이의(李椅)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도염서 녹사(都染署錄事) 김자행(金自行)에게 시집갔다. 감찰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주(澍)이고, 다음은 엄(渰)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서령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방선(方善)이고, 차남은 방경(方敬)이다.중남(仲男)인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휘 종학(種學)은 문하 시중(門下侍中) 이춘부(李春富)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숙야(叔野)는 광주 목사(光州牧使)이고, 그다음 숙규(叔畦)는 진주 목사(晉州牧使)이며, 그다음 숙당(叔當)은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인데, 지금 모두 사망하였다. 그다음 숙묘(叔畝)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이고, 그다음 숙복(叔福)은 급제하였으며, 막내 숙치(叔畤)는 공조 참판(工曹參判)이다. 딸은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다. 광주 목사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1남 축(蓄)은 호조 정랑(戶曹正郞)이고, 장녀는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안숭신(安崇信)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 이원근(李元根)에게 시집갔다. 정랑의 1남 1녀는 모두 어리다. 진주 목사는 5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감목관(監牧官) 유쟁(柳諍)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능직(陵直) 곽분(郭汾)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유학(幼學) 전극경(全克敬)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사남(李思南)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어리다. 첨총제는 3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思)는 사역원 주부(司譯院注簿)이고, 그다음 외(畏)는 능직이며, 그다음 이(異)는 동부 녹사(東部錄事)이다. 주부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능직의 1녀는 어리다. 녹사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동지는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치(菑)는 원평도호부 부사(原平都護府副使)이고, 그다음 여(畬)는 사헌부 감찰이며, 장녀는 의령감무(宜寧監務) 하맹질(河孟晊)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공조 좌랑(工曹佐郞) 안숭효(安崇孝)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통례문 봉례(通禮門奉禮) 김리(金理)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어리다. 부사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수은(壽垠)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감찰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견(仁堅)이고, 그다음은 의견(義堅)이며, 모두 어리다. 급제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문비(文埤)이고, 차남은 문강(文疆)이며, 장녀는 군자감 녹사(軍資監錄事) 윤빈(尹濱)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학 유중인(柳仲諲)에게 시집갔다. 문비의 1남은 어리다. 참판의 1녀는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 이경현(李敬賢)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 의산(義山)은 사정(司正)이고, 1녀는 집현전 정자(集賢殿正字) 김문효(金文孝)에게 시집갔다.계남(季男)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 휘 종선(種善)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치사(致仕)한 권균(權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계주(季疇)를 낳았는데, 계주는 호조 정랑(戶曹正郞)이다. 또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의 딸에게 재취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계린(季疄)은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이고, 그다음 계전(季甸)은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인데 정미년 친시(親試)에 급제하였으며, 그다음 계원(季畹)은 전직(殿直)인데 임자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그다음 계정(季町)은 글을 읽고 있다. 장녀는 강화도호부 부사(江華都護府副使) 이백상(李伯常)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능직 김숭로(金崇老)에게 시집갔다. 정랑은 1남 4녀를 낳았는데, 1남은 개(塏)이고, 장녀는 유학 이휘(李徽)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분연(李賁然)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판사는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숙(塾)이고, 그다음은 훈(壎)이며, 그다음은 해(垓)이고, 그다음은 경(坰)이며, 모두 어리다. 수찬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육(堉)이고, 그다음은 우(堣)이며, 모두 어리다. 전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은 연(堧)이고, 모두 어리다. 능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외현손(外玄孫)은 모두 50여 인이나 되므로, 글이 많아서 명씨(名氏)를 다 쓰지 않는다. 그리고 혼인(婚姻)한 가운데 이성(李姓)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모두 우리와 같은 이씨가 아니다.자손이 많고 대대로 높은 관작이 나서 통현(通顯)한 지위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나처럼 불초한 사람도 외람되이 중외(中外)의 관직을 두루 거쳐 낭묘(廊廟)의 직임에까지 참여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적덕(積德)으로 인한 여경(餘慶)이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덕을 많이 쌓은 자는 덕택이 먼 후세까지 전해지고, 근본이 깊은 나무는 지엽이 무성하게 된다.” 하였으니, 그 말이 사실이로다.또 홍무(洪武) 을축년 가을에 명(明)나라 국자감 학록(國子監學錄) 장보(張溥), 전부(典簿) 주탁(周倬)이 사명을 받들고 와서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우리 선조를 바라보고는 역자(譯者)에게 묻기를, “저 몇째 번에 서 있는 이는 순수한 유도인(有道人)인데, 저분이 바로 이 선생(李先生) 모(某)가 아닌가?” 하므로, 역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선조의 앞으로 다가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우 공경하였다. 그리고 무진년에 명년(明年)의 하정사(賀正使)로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는 고황제(高皇帝)가 한 번 보고 선조의 어짊을 알고는 한참 동안 말을 나누어 주고, 선조가 물러감에 미쳐서는 물러가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면서 이르기를, “그려 놓음 직하다.” 하였으니, 대체로 선조의 풍도(風度)를 아름답게 여겼던 것이다.영락(永樂) 계미년에는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사명을 받들고 본국에 와서 일 때문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그간에 목은 문집을 구하여 보고는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또 행장(行狀)을 구하여 열람하고는 또한 매우 사모하여 시(詩)를 지어서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그러자 그때 곁에 있던 사람이 청하여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이렇게 간절히 탄복하고 사모하시니, 서(序)를 지어서 권수(卷首)에 붙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축군(祝君)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의당 환조(還朝)하여 글 잘하는 조신(朝臣)에게 청해서 지어 보내겠다.” 하였다. 과연 그 후 국자감 조교(國子監助敎) 양성(羊城) 진련(陳璉)이 찬한 묘지명(墓誌銘)을 보내왔는데, 사적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양촌 선생(陽村先生)이 찬한 행장에 근본하여 조사(措辭)를 변개하려다가 오히려 실상을 잃게 된 곳이 있다. 그러나 덕행을 논함에 있어서는 역시 양촌의 말에 근본하여 약간 손익(損益)을 가하였고, 문장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문사(文辭)가 전실(典實)하고 풍창(豐鬯)하되, 흥치(興致)는 풍아(風雅)에서 근본하였고, 언론(言論)은 덕의(德義)에 도달하였으므로, 화평한 음조와 정대한 기운이 편질(編帙)의 사이에 성대히 드러난다.” 하였고, 명(銘)의 한 구절에는, “오직 공이 제작한 것은 화곤처럼 문채가 나도다.[惟公製作 華袞之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만약 공이 천조(天朝)에서 벼슬을 했다면 반드시 평소에 온축(蘊蓄)한 것을 크게 펴서 천자(天子)에게 알아줌을 받았을 것이니, 그래서 훈명(勳名)을 수립하여 역사(歷史)에 길이 빛나게 되었더라면 왕사례(王思禮)만 유독 당(唐)나라에 훌륭한 공훈을 남기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한 나라에서만 벼슬을 하여 경륜을 다 펴지 못하였으니, 그 애석함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 총결(總結)의 말을 보면 이는 양촌이 하지 않은 말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 문집을 보고 그 위인을 알아서, 감히 외국 사람이라 하여 낮게 보지 못하고 칭찬한 말이 여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그 성심으로 감복한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우리 선조의 도덕의 숭고함과 문장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동방 사람들만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 사모할 뿐 아니라, 고황제의 명철함으로도 한 번 보고 그 어짊을 알았었고, 또 장 학록(張學錄), 주 전부(周典簿) 같은 이들은 중조(中朝)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는데도 역시 매우 공경하였으니, 반드시 성덕(盛德)의 광휘가 사람들에게 감지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 소경(祝少卿), 진 조교(陳助敎)의 탄복하고 칭찬한 것도 어찌 문장의 오묘함이 풍아에 잘 합치되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므로 아울러 여기에 나타내는 바이다.선덕(宣德) 8년 8월 하한(下澣)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참찬 집현전대제학 겸 성균대사성(議政府參贊集賢殿大提學兼成均大司成) 손(孫) 이맹균(李孟畇)은 삼가 기록하다.先祖韓山伯神道碑。門人河文忠公。永樂乙酉冬。所撰也。今夏。始得貞石而鐫刻。至秋乃畢。叔父留後公。命孟畇記山來坐向書諸碑陰。又曰。余觀碑文。自授肅雍府丞。至封韓山伯。竝不書散官。蓋簡其文也。然年譜在。可攷也。其碑文所載子孫。今皆成立陞秩。至於顯達者寔多。後生親孫若曾玄男女亦衆矣。不可不錄示後裔也。其悉記之。倂載碑陰。孟畇不敢辭。謹記之。先祖墓在韓山郡猉獜峯之南麓丑艮之山癸坐丁向。東南距郡治五里。謹稽山來自鴻山之永興山。折而東南三十餘里。崒然停峙。是爲猉獜峯。原其所自。實出於長白山也。峯之下加智之原。龍虎與案。蜿蜒環擁。佳氣沖融。嗚呼。天慳地祕。以待賢哲之吉兆歟。卽墓之巽方三十三步。樹立豐碑。以記德美。昭示無窮。又序次子孫之名。具列如左。長男吾先君。知密直司事諱種德。娶門下評理柳惠孫之女。生四男二女。長孟㽥。仁寧府司尹。次孟畇。次孟畯。別將。早亡。季孟畛。漢城府尹。女長適瑞寧柳沂。次適都摠制河久。府尹三男三女。長衍基。司憲監察。次裕基。次保基。讀書。女長適敦寧府判官李厚。次適司瞻直長李椅。次適都染錄事金自行。監察二男三女。長澍。次渰。皆幼。瑞寧二男。長方善。次方敬。仲男簽書密直司事諱種學。娶門下侍中李春富之女。生六男一女。長叔野。光州牧使。次叔畦。晉州牧使。次叔當。右軍僉摠制。今皆云亡。次叔畝。同知中樞院事。次叔福。及第。季叔畤。工曹參判。女適全州府君李漸。光牧一男二女。男蓄。戶曹正郞。女長適漢城判官安崇信。次適書雲副正李元根。正郞一男一女。皆幼。晉牧五女。長適監牧官柳諍。次適陵直郭汾。次適幼學全克敬。次適幼學李思南。次幼。僉摠制三男。長思。司譯院注簿。次畏。陵直。次異。東部錄事注簿。一男二女。皆幼。陵直一女。幼。錄事一男一女。皆幼。同知二男四女。長菑。原平都護府副使。次畬。司憲監察。女長適宜寧監務河孟晊。次適工曹佐郞安崇孝。次適通禮門奉禮金理。次幼。副使二男二女。長壽垠。餘幼。監察二男二女。長仁堅。次義堅。皆幼。及第二男二女。長文埤。次文疆。女長適軍資錄事尹濱。次適幼學柳仲諲。文埤一男。幼。參判一女。適典農直長李敬賢。府尹一男一女。男義山。司正。女適集賢殿正字金文孝。季男開城留後司留後諱種善。娶參贊門下府事致仕權鈞之女。生一男。季疇。戶曹正郞。後娶吉昌君權近之女。生四男二女。長季疄。判司譯院事。次季甸。集賢殿修撰。中丁未年親試。次季畹。殿直。中壬子年成均試。次季町。讀書。女長適江華都護府副使李伯常。次適陵直金崇老。正郞一男四女。男塏。女長適幼學李徽。次適幼學李賁然。餘幼。判事四男二女。長塾。次壎。次垓。次坰。皆幼。修撰二男三女。長堉。次堣。皆幼。殿直一男一女。男堧。皆幼。陵直一男一女。皆幼。外玄孫男女共五十餘。文繁不悉書名氏。婚姻有姓李者。皆非一李也。子孫衆多。而奕世簪纓。致位通顯。至於孟畇之不肖。亦得濫歷中外。至參廊廟。豈非積德流慶之所及也。古人云德厚者流光。本深者末茂。信哉。且洪武乙丑秋。大明國子學錄張溥,典簿周倬。奉使而來。望見我祖於稠人之中。問諸譯者曰。彼立第幾者。精粹有道人也。不是李先生某耶。譯者答曰是。卽前相語甚敬。歲戊辰。以明年賀正使赴京師。高皇帝一見知其賢。賜語移時。及退。目送之曰。堪畫。蓋美其風度也。永樂癸未。太僕少卿祝孟獻奉使到國。以事久留。間求見牧隱文集。嘆服無已。又索閱行狀。亦甚景慕。因賦詩以表景仰之心。時在旁者請曰。大人嘆服景慕如此之切。幸作序以冠卷首。祝君曰。吾豈敢爲。當俟還朝。請於縉紳之能文者製送。其後乃送國子助敎羊城陳璉所撰墓誌銘。其序事則本於陽村先生所撰行狀。而欲變措辭。有致失實處。然論德行則亦本陽村之辭。而小加損益。至於論文章則日。爲文辭典實豐鬯。興致本乎風雅。言論迪乎德義。和平之音。正大之氣。藹然見於編帙之間。銘一句云。惟公製作。華衮之章。又云。使公獲仕天朝。必能大推所蘊。受知天子。建立勳名。垂輝竹帛。則罔俾王思禮專美於有唐矣。惜乎。仕止一國。未究厥施。可勝惜哉。觀此總結之語。則陽村之所未道也。必也見其文集。知其爲人。而不敢以外國人下視之。稱揚讚美。至於如此。其誠服也無疑矣。我祖道德之崇。文章之盛。不唯東方之人仰之如山斗。以高皇帝之明。一見知賢。又若張學錄,周典簿。中朝聞人也。亦且甚敬。必有盛德光輝。接於人者故也。祝少卿,陳助敎之嘆服讚美。豈非文章之妙脗合於風雅也耶。故倂著云。宣德八年八月下澣。正憲大夫議政府參贊,集賢殿大提學兼成均大司成孫孟畇。謹記。
    2023-07-13 | NO.689
  • 用光牧韵- 高峯集 권1
    用光牧韵- 高峯集 권1客路相逢興易漫。一杯聊復借紅顔。久知城郭眞多事。倂覺雲林亦不閑。風力漸輕煙拂樹。春光難動雪埋山。向來把手無窮意。且自悠悠任往還。
    2023-07-13 | NO.688
  • 祭伯氏判書公文 서형수가 형 서호수에게 쓴 제문
    祭伯氏判書公文 : 서형수가 형인 서호수(徐浩修, 1736~1799)를 위해쓴 제문이다.명고전집(明臯全集) 권 13서형수(徐瀅修, 1749~1824)의 자는 유청(幼淸), 여림(汝琳)이고 호는 명고(明臯), 오여(五如)이다.백씨 판서공에게 올린 제문아! 형님께서 무오년(1798, 정조22) 제석(除夕)에 성상께 문후하는 반열에서 물러 나와 제가 있는 곳으로 오셔서 저의 침소에서 머무시며 흘러가는 세월을 탄식하시고 인생이 덧없다고 개탄하신 지 겨우 두 달이 지났습니다. 형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가셨기에 빈 들보에는 먼지가 끼고 난데없이 여막이 보인단 말입니까? 형님께서 진실로 저를 버리고 먼저 가셨으니, 저는 앞으로 형님 없이 홀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시경》 〈육아(蓼莪)〉 편에서 길러주고 돌보며 어디서든 생각한다고 읊은 부자와 같고, 〈치효(鴟鴞)〉 편에서 부지런히 갈대를 물어오고 비바람 치면 울부짖는다고 말한 군신과 같습니다. 〈여왈계명(女曰鷄鳴)〉 편에서 주살로 잡아오면 그대와 맛있게 요리하겠다고 읊은 부부와 같고, 〈북풍(北風)〉 편에서 은혜롭게 나를 좋아하는 이와 손잡고 함께 돌아가겠다고 말한 붕우와 같습니다. 그리고 〈소완(小宛)〉 편에서 날이 밝도록 잠 못 이루며 부모님을 생각하고, 곡식을 쥐고 나가 점을 쳐서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라고 읊은 형제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어찌 형제간의 윤리 하나만을 지키면서도 죽고 살고 헤어지는 다른 사람의 형제들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형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위문하러 온 친지와 빈객들은 저마다 형님에 대해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내직으로 팔좌(八座)를 두루 지내고 외직으로 사절(四節)을 쥐었으니 영화와 존귀함이 더할 나위 없었고, 슬하에 아들 넷을 두어 소과와 대과에 급제하였으니 자손이 번성하였고, 예순이 넘은 연세에도 건강하여 책을 읽고 일을 처리하였으니 장수하고 강녕하였다. 공이 무슨 복을 누리지 못해 유감이 있겠는가.” 하고, 어떤 이는 “주인(疇人)의 자제들이 주(周)나라 말기에 흩어진 뒤로 율력(律曆)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어, 아무리 소옹(邵雍)과 주자(朱子) 같은 대현(大賢)과 채(蔡)ㆍ허(許) 같은 대유(大儒)라 할지라도 아득하여 상고하기 어려운 기수(器數)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공은 변방의 후학으로서 단절된 천문(天文)과 역산(曆算)에 직접 통하여 책을 저술하였다. 가령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재상이 되고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가 대제학이 된다면, 공이 서운관(書雲觀)과 이원(梨苑)에서 어깨를 나란히 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안목 있는 사람은 인정할 것이다. 공이 무슨 명성을 이루지 못하여 미련이 있겠는가.” 하고, 어떤 이는 “효자의 소원은 어버이를 영화롭게 봉양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는데, 어느 누가 이러한 소원이 없겠는가마는 이룬 사람이 드물다. 공은 젊은 나이에 총재(冢宰 이조 판서)가 되어 집안이 전성했던 시기에 몸소 양친을 봉양하여 천하의 즐거움을 다 누렸으니, 효자로서 원하는 일에 빠진 것이 없었다. 공이 무슨 소원을 이루지 못해 여한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아, 간사한 무리들이 우리 집안에 대해 시종 짖어댄 것이 지금까지 3, 40년이 되었습니다. 계교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 시기하는 사심으로 이어져서, 권력을 잡으면 달려와 애걸하다가 권세를 잃으면 야유하며 돌을 떨어뜨려 아첨하고 배반하는 행태가 몇 번이나 급변한 줄 모릅니다. 그러나 선군자께서는 산처럼 요지부동하여 두려워하거나 갈등하지 않았고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으로 그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나가서는 관망하고 들어와서는 애태우며 몸은 사통팔달한 드넓은 길에 있었으나 마음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험로에 얽매인 것은 오직 형님 한 분이었고 저는 아직 어렸습니다.형님은 기상이 맑고 풍채가 좋아 조정의 모임에서든 사적인 자리에서든 바라보면 옥산(玉山)과 요림(瑤林)이 하늘 높이 솟은 것 같아 아무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기상이 이러한데도 복록이 돌아가지 않으랴.” 하였습니다. 형님은 효성과 우애가 월등하고 지극정성이 외모로 드러나, 수저 하나 약물 하나에서부터 장례와 제사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모두 손수 담당하여 기쁨만 가득하고 유감이 없었으며, 잠시라도 부모를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우들과 누이들에 대해서는 보지 않으면 그리워하고 보면 기뻐하였으며, 나이도 잊고 지위도 잊은 채 서로 즐겁게 어울렸지요.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행실이 이러한데도 복록을 누리지 못하랴.” 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기상과 행실은 참으로 사람의 한평생을 점칠 것이 못 됩니다. 눈썹을 치켜들고 기운을 토하며 아침저녁으로 떠들어대는 용렬하고 쥐새끼 같은 저 무리들로 말하면 진실로 말세의 기수(氣數)에서 정도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인가 봅니다.형님께서는 감격하여 생사도 잊은 채 서울의 저택에 들어가 머무셨지요. 당시에 벼슬에 나아가 성상을 모시는 정성을 다하였고, 또 형제자매와 가까이 살아서 가는 곳마다 술잔을 주고받았지요. 마음속에 맺혀 털어놓지 못하고 목이 메어 말할 수 없었던 일들을 남김없이 말하고 후련하게 들었으니, 우리 형님께서 만년의 즐거움으로 지난날의 답답했던 심정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듯했지요.그러나 형님의 부음이 전해지자 성상께서 누차 애석해하는 뜻을 보이셨고, 또 형수께서 중도에 위태하고 유구(有榘)가 천 리를 급히 달려간 일로 슬퍼하시는 전교가 정중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연신(筵臣)이 돌아와서는 대궐 사람들이 슬피 울고 각중(閣中)의 상하 신료들과 겸임했던 관직의 관원들이 누구나 아까운 분을 잃었노라 안타까워하고 몹시 애통해하였으며, 형님의 공적을 열거하며 이제 누구를 믿고 살까 하였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형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다만 문중의 성쇠가 걸린 일일 뿐만 아니라 세도(世道)와 시운(時運)에 크게 관련된다는 것을 여기에서 증험할 수 있습니다. 생전에는 아무런 보탬을 주지 못하고 죽어서는 아무런 명성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형님께서는 우리 성상께 이런 대우를 받고 관료들에게 이러한 평판을 얻고 또 사람들의 한결같은 칭송을 받았습니다. 아, 이 결함투성이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심신의 영췌(榮悴)와 고락(苦樂)이야 지금 형님을 위해 따져볼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저의 번뇌와 원통한 마음으로 말하면 끝내 이로써 슬픔을 막을 수 없습니다.차마 형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의리로 어찌 감히 일체 유언을 명심하여 그대로 시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임좌(壬坐)의 언덕은 지관(地官)이 이의를 제기하여 방향을 살펴 기좌(己坐)로 다시 잡았으니, 누차 살펴 자리를 택한 것은 알맞기를 기약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실로 정간공(貞簡公 서문유(徐文裕))과 문민공(文敏公 서종옥(徐宗玉)) 양대의 묘와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고 문정공(文靖公)의 묘와는 더욱 가까워 바라보이니, 형님을 그 사이에 묻은 것은 선영에 묻히기를 원하던 형님의 소원을 따랐기 때문입니다.아, 제가 형님을 영결하는 자리에서 아뢰고자 하는 애통한 심정으로 말하면 비록 수미산(須彌山)을 붓으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는다 한들 어찌 가슴속에 가득한 슬픔을 만의 하나라도 쏟아놓을 수 있겠습니까? 형님을 잃은 뒤로 바보인 듯 술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하여 아뢸 일이 생기면 형님이 집에 계시다고 착각하여 일어나 찾아가려던 적이 여러 번이니 어이합니까? 넋이 나가 마음은 멍하고 손은 뜻대로 되지 않으며 한 글자 쓸 때마다 눈물 떨어져 작은 종이가 다 젖었습니다. 계절이 바뀌어 시식(時食)을 올리오니, 길게 말해봤자 이별이며 구구절절 말해봤자 이별입니다. 아, 형님이여! 아, 형님이여! 흠향하시기 바랍니다.[주-D001] 백씨 …… 제문 : 【작품해제】 큰형 서호수(徐浩修, 1736~1799)에게 올린 제문이다.[주-D002] 장단(長湍)은 …… 거리이고 : 원문의 단산(湍山)은 경기도 장단(長湍)을 말하고, 원문의 상유순(上由旬)은 불교에서 말하는 거리의 단위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 권55 〈화산(花山) 용주사(龍珠寺) 봉불식(奉佛式)에 복을 기원하는 게송[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 결게분(結偈分) 정토 극락(淨土極樂)에, “단 이슬은 청정한 국토에 두루 내리고, 가을 달빛은 넓은 하늘에 가득하도다. 한 언덕에 있는 아란야는, 왕성과의 거리가 팔십 리도다.[甘露遍淨界, 秋月滿長天. 一曲阿蘭若, 王城上由旬.]” 하였는데, 그 주석에서 “유순(由旬)은 중국 말로 한량(限量)이며, 세 등급이 있는데 다르다. 상(上)은 80리(里)이고, 중(中)은 60리이며, 하(下)는 40리이다. 용주사(龍珠寺)는 왕성(王城)과 80리 거리이다.” 하였다.[주-D003] 송매(宋妹) : 송위재(宋偉載)에게 시집간 누이동생을 말한다.[주-D004] 팔좌(八座) : 육조(六曹)의 상서(尙書) 및 좌우 복야(僕射)의 총칭이다. 서호수가 판서의 반열에 올랐으므로 이와 같이 말하였다.[주-D005] 사절(四節)을 쥐었으니 : 네 고을의 관찰사를 역임했다는 뜻이다. 서호수는 1774년(영조50)에 전라도 관찰사를, 1779년(정조3)에 함경도 관찰사를, 1782년(정조6)에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나머지 한 곳은 미상이다.[주-D006] 주인(疇人) : 대대로 부조(父祖)의 업을 계승하는 자를 말하는데, 후세에 와서는 오로지 역산가(曆算家)를 일컫게 되었다.[주-D007] 몽장씨(蒙莊氏)는 …… 여겼으니 : 몽장씨는 장자(莊子)를 말하고, 반백씨는 반고(班固)를 말한다. 구양수(歐陽脩)가 〈방희칙을 전송하는 서(送方希則序)〉에서 “몽장은 벼슬을 감옥으로 여겼고, 반백은 명성을 족쇄로 여겼다.” 하였다. 《文忠集 卷64 送方希則序》[주-D008] 날로 …… 것 : 《서경》 〈주관(周官)〉의 “덕을 행하면 마음이 편안한 가운데 날로 아름다워지겠지만, 그 반면에 거짓을 행하면 마음이 수고로운 가운데 날로 졸렬해지게 될 것이다.[作德, 心逸日休: 作僞, 心勞日拙.]”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주-D009] 살아서 …… 경지 : 《논어》 〈이인(里仁)〉 편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구절에 대한 주희의 집주에 보이는 말이다.[주-D010] 돌을 떨어뜨려 : 위급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보고 구해주기는커녕 더욱 곤경에 빠뜨리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志銘)〉에 “사람들이 작은 이해에 걸리면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안면을 몰수하는 경우가 있고, 함정에 빠졌을 경우에 손을 내밀어 구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밀어 넣고 돌을 던진다.” 하였다.[주-D011] 칠리탄(七里灘) : 은거지를 말한다. 동한(東漢)의 은사(隱士) 엄광(嚴光)이 은거하여 낚시하던 곳이다.[주-D012] 술잔 …… 되고 : 재앙의 조짐이 보이다가 기어이 재앙을 입게 되었다는 말이다. 역(蜮)은 일명 단호(短狐)라고도 하는데, 자라처럼 생기고 세 발이 달렸으며, 입속에 가로질러 있는 뿔로 만든 쇠뇌[弩] 같은 물건에 기(氣)를 화살[矢]로 삼아 물속에서 사람을 쏘아 해친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모래를 입에 물었다가 사람을 쏘아 맞히면 부스럼을 앓게 되며 그림자를 맞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즉 몰래 사람을 해치는 것을 말한다.[주-D013] 창틈으로 …… 되어 : 미상이다.[주-D014] 결함투성이의 세상 : 도가(道家)에서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사는 도읍을 백옥경(白玉京)이라고 하는데, 백옥경은 천상의 세계로 인간의 생로병사가 없는 완전무결한 세계이다. 이와 반대로 생로병사로 고통받는 이 세상을 결함투성이의 세상이라고 말한다.[주-D015] 군자의 …… 말입니다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말이다.[주-D016] 소장공(蘇長公)이 …… 하였으니 : 소장공은 소식(蘇軾)이고, 자유(子由)는 소철(蘇轍)의 자이다. 소식이 사건에 연루되어 어사대(御史臺) 옥에 갇혀 있을 때 옥리(獄吏)의 괴롭힘이 심하여 살아서 나갈 수가 없다고 생각되자, 영결의 뜻을 담은 칠언율시 두 수를 지어 옥졸(獄卒)을 통해 아우 소철에게 보냈는데, 이 구절은 바로 그 첫 수의 마지막 부분이다. 《東坡全集 卷29 獄中寄子由 二首》弟瀅修。因三月三日之奠。爲文哭告于伯氏判書公靈筵曰。嗚呼。公於戊午除夕。退自候班。臨弟之所。欹弟之枕。歎年光之如流。而慨人生之不足把翫者。堇月兩易耳。公今安往。而空樑欲塵。倚廬忽現也。公誠棄弟而先逝。弟將無公而獨存耶。夫以分形連氣之至愛。而相失於望秋紛白之頹景。此人事之至難遣而物情之所大慼也。若弟之於公。則奚但曰兄弟而已。其長育顧復。出入腹我。蓼莪之父子也。拮据捋荼。風雨嘵嘵。鴟鴞之君臣也。弋言加之。與子宜之。鷄鳴之夫婦也。惠而好我。携手同歸。北風之朋友也。而明發不寐。有懷二人。握粟出卜。自何能穀。又小宛之兄弟也。若是者。豈他人之兄弟。只處一倫。而猶可以死生契濶者比耶。湍山上由旬地也。光山之於日下。亦不盡千里而遙也。然弟之自湍移湖也。公不能捨弟盡室而從焉。弟爲光牧。往來如梭。盖未甞終三年淹。而公常謂宋妹曰。做官豈必每食兩盂。吾今老矣。老人心弱。不耐渠遠遊。嗚呼。公不耐弟遠遊。而弟獨耐公先逝乎。自公之沒。親賓之來慰者。亦各有其說矣。或曰。內遍八座。外按四節。榮貴極矣。庭蘭四茁。蓮桂芬芳。子姓繁矣。耆年精強。劬書幹務。壽而康寧矣。何福之不除。而公其有餘憾耶。或曰。自疇人子弟之周末分散也。律曆之不傳於世久矣。雖以邵朱之大賢。蔡許之宏儒。無奈乎器數之邈難考信。則公以偏邦後學。身通絶藝。著有成書。藉令蕭曺作相。韓歐典文。公於雲觀梨苑。幷駕而無愧色。具眼者當許之。何名之未成。而公其有餘戀耶。或曰。孝子之願。莫大於榮養其親。而人孰無此願。得之者盖鮮。公以黑頭冢宰。躬奉兩親於門闌全盛之日。擧天下之樂。而所願於孝子之心者。未或闕焉。何願之未酬而公其有餘恨耶。夫福也名也願也。古人所以視履考祥。而徵天報之厚薄者也。公之庶幾乎此。或者之說。非曰不是。獨弟之爲公煩寃。呼天而欲問之者別有之。蒙莊氏以紳笏爲柴柵。班伯氏以聲名爲韁鎖。則彼於人身。固外也末也。惟吾少壯老之間。不大有恐惧憂患者亂我方寸。然後日休日拙。於斯乎判。而生順死安。可得以言。嗚呼。羣壬之於吾家。其首尾狺狺。迨今三四十年矣。始以計較之心。仍之忮忌之私。當其柄用。則望走而乞憐。及其勢去。則揶揄而下石。側媚反覆之態。不知爲幾番狂劫。而先君子凝然山立。不懾不撓。利害禍福。無纖毫動其中。則其出而觀玩。入而薰灼。身處乎八達康莊之衢。而心纏乎九折羊腸之塗。獨有公一人。而弟則幼耳。公甞悽告于先妣曰。百年之身泰。不如一日之心安。吾生之勞。汔可休矣。願與吾慈。復爲後生之母子。穩做七里灘中無思無慮之一家計。可乎。此言絶悲。足見公滿腔熱血。而盃心之弓影。眞作蜮弩。牎隙之瓦礫。幻成賊礟。遂至有壬子罔極之憯言。公於是乎六旬衰境。東西漂泊。多歧受侮。靡苦不甞。而數十年富貴空花。忽焉若前塵影事。向所謂外也末也者。亦何有於厚享哉。嗚呼寃矣。公風神淸娟。骨相遒俊。朝會私集。望之如玉山瑤林。秀出天外。不可梯接。故人皆曰氣象如此而福祿有不歸者乎。公孝友出人。至誠見貌。自夫一匕箸一藥物。以至送死奉祭。必皆手自經理。有恔無憾。未曾頃刻忘父母。而其於弟妹。未見而思。旣見而喜。忘年忘位。相與嬉戱。故人皆曰實行如此而福祿有不副者乎。由今觀之。氣象也實行也。果未足以占人平生。而彼闒茸之倫。狐鼠之輩。揚眉吐氣。朝咻而夕嚇者。固叔世氣數之不得不反常也歟。尤可寃者。甲寅日星之綸。煌煌乎文謨之闡揚。而沒世不忘之澤。旁達于九地之下。則吾家之前後恩造。亦復何限。而其深仁大德。華枯而肉骨者。此爲第一蒙被。公卽感激忘生。入處京第。時因起居之班。自竭瞻覲之誠。又與兄弟娚妹。接屋連墻。杖屨所至。杯盤錯互。凡胸中之結轖不可解。喉間之塡咽不能道者。言之傾倒。聽之愉快。則我公桑楡之樂。若可以少舒前日欝悒之懷。而纔及四載。一朝至此。使多少擬議之成說。都不免於浮根妄想。何侈於分。而奪之斯速。臯復之夕。屢唏而不釋然者。豈亦爲此。而天所以厚我公者。其如台已乎。嗚呼寃矣。雖然公之訃聞也。自上屢示嗟惜之意。又以嫂氏之中路阽危。有榘之千里戴星。憫惻之敎。不啻鄭重。筵臣歸傳。闔門感泣。而閣中上下。兼綰率屬。莫不有百身之思。殄瘁之慟。歷擧實績。云今誰恃。則公之亡。不但爲一門盛衰之大關。而其於世道時運。綦有輕重者。此可驗矣。生無益而死無聞者。滔滔皆是。而公能得此於吾君。得此於僚寀。又得此於大同之衆論。噫。彼缺陷世界。心身之榮悴苦樂。今不須爲公較絜耶。然後死之煩寃。則終不可以此塞悲矣。嗚呼。君子曰終。小人曰死。禮之建言也。然君子之於正終。自古盖難之。而公則疾革之後。言語動止。視平昔愈益雍容。間甞執弟之手。諄諄語國恩之虛負。家事之句當。推及衣衾棺槨之節。宅兆儀物之圖。細大不遺。曲加指導。而乘化之刻。尙且有問則答。有聲則喏。似此正終。未知古君子何如也。在後人不忍死之義。曷敢不一遵治命。服膺勿替。而惟是壬坐之原。以有堪輿家之異議。見方更卜己坐。謀所以屢審擇决。期於允叶。此實貞簡文敏兩世塋域之隔岡。而於文靖公幽宅。密邇而相望焉。則公居其間。亦合公首邱之願故也。嗚呼。公之引期。今不滿十日。而弟將先公而行。待公於鶴山精舍矣。肩輿往來之陳跡未入室。已涌我千斛寃淚。而楚楚之几案。秩秩之琴書。又不忍堪余摩挲。則逝將與故山猿鶴。相與哀號於松雲檜月之下耶。蘓長公贈子由詩曰。與君世世爲兄弟。更結來生未了因。此公告先妣之餘義。而亦弟之今日情事。公其許我乎。否乎。嗚呼。弟於公終天之訣。所欲訢衷者。雖須彌爲筆。大海爲墨。顧安能輸寫其弸中之萬一。而奈自失公以來。神精惝怳。如痴如醉。遇有可告可禀之事。謂公在堂。起身且向者數矣。心不守舍。手不從心。一字一涕。腐盡寸牘。而節物易遷。時食告辦。則長言之亦別。緖言之亦別。嗚呼我公。嗚呼我公。尙饗。
    2023-07-17 | NO.687
  • 祭文[趙顯錫]- 柏谷集 附錄 김득신(金得臣, 1604~1684)
    祭文[趙顯錫]柏谷集 附錄김득신(金得臣, 1604~1684), 자는 자공(子公)이며 호는 백곡(柏谷), 구석산인(龜石山人)이다.先君石友。匪公伊誰。崇禎庚午。始遌洛師。心志俱同。雷陳相許。聯榻攻詩。必偕赴擧。公書試牋。惟己是後。竝轡騷壇。騰華藝囿。曷嘗久別。兩地參尋。柏莊煙月。蓮洞園林。歲在辛丑。小子銜恤。路隔京鄕。時當暑熱。公卽奔哭。羸弱奴馬。辭意懇惻。恤我諸孤。輓詩兩章。寫盡哀思。交友之情。罔間終始。不肖兄弟。義當父事。南郭書齋。屢陪杖几。述作甚多。幾盡披示。詩將東溟。文如簡易。公嘗有言。幼甚魯鈍。孜孜讀書。蓋自齠齓。嗜文成癖。至老不衰。馬書列傳。尤好伯夷。攷其所讀。十有二萬。本之有得。詞氣雄渾。見知澤堂。猶賀奬李。價增一顧。名動遐邇。不特吾東。皆推宗匠。華人採詩。首加稱賞。文雖大鳴。乃公餘事。信以持身。剛以固志。忠孝之門。家聲益播。尙書朴爺。雅少許可。膠漆我公。曰士類最。俗眼未奇。以其韜晦。權門斂跡。玉潔淸氷。一心所願。惟在成名。竟至蓮榜。復折桂枝。春官水部。館職憲同。位雖通顯。匪其所好。命駕還鄕。田園送老。宅近先隴。情篤永思。好水佳山。吟嘯自怡。寶樹盈庭。家訓切至。齒踰八帙。邵德彌隆。聖朝敬耇。世勳襲封。文聲壽福。孰如公盛。鳩杖逍遙。鄕黨加敬。久稽趨庭。歲月屢徂。山川悠遠。音信頓疏。曠世先分。有若都忘。罪恨曷極。徒勞瞻望。雖甚無狀。蓋亦有由。老母嬰疾。沈綿未瘳。夙夜煎憂。西山日薄。比年以來。奔走醫藥。家又甚貧。了無易事。茲未抽身。鄙懷莫遂。癸亥中秋。西赴于沔。白袍荊園。方酣蟻戰。辛勤訪我。乃公賢孫。謂承祖命。來問寒睻。遂呈一札。略敍衷情。前秋石邑。復聞康寧。纔及一月。遽承凶報。光牧李公。慘然傳道。適値庭擧。黽勉赴洛。反至還家。私故又迫。祖墓營遷。弟嫂更定。肆致遷延。時月荏苒。門人金生。安邑拆簡。獲聞旣葬。益切痛恨。孟春己卯。茲行乃啓。拜辭先廟。遺意用體。行行策馬。險路泥淖。稍近槐鄕。彌增酸悼。旣造遺居。荒寒籬落。老鶴癯形。今不復觀。九流百家。蘊奧誰解。篆刻雕蟲。推敲孰政。公身雖逝。名耀來世。詩卷長留。江河不廢。士生世間。所貴不朽。九原千秋。柳何恨有。夙余承敎。可行終身。今其已矣。脩夜無晨。斂不憑棺。葬未執紼。餘生人世。此恨無絶。嗚呼先人。曁我先生。從先乘化。間二十齡。幽明何異。定付神交。敢綴哀辭。長些▦招。懷似羊曇。誄慙任昉。奠觴一慟。淫淚斯逬。
    2023-07-13 | NO.686
  • 與蟾村閔公 (庚午)
    與蟾村閔公 (庚午)역천선생문집(櫟泉先生文集) 권6송명흠(宋明欽, 1705~1768)의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櫟泉) 頃於禮郞之過。伏覩議紙。手墨爛然。怳如親奉顔采。欽玩不能釋手。兼亦深有警悟。玆更仰質。葢自昔隱遯高尙之士。雖遺外榮利。擺落名敎。而至於君上禮問。則鮮有不對者。豈不以祿仕與問對。大煞不同故耶。若吾儒平正法門。則尤不宜打乖。迫斯可見。有問則對。恐是恰當道理。近世遂翁所處。亦似如此。故年前皇壇事。不免冐對。當時倉卒。未及稟裁。伊後獲見過去謄本。則執事謙挹之義。尤中語默之節。始覺孤陋猥越。擬引不倫。惶愧何及。今番則謹已畫葫。可幸無罪。然須一經稟請。爲終身誦法之地。故不敢自隱。以俟鐫誨耳。歲月流駛。宗伯父三年垂訖。兩世祧廟。禮當遷奉長房。而家叔父。自以與光牧叔父。皆已臨年。而支庶散居。竆不自立。若不及今變通。則將日遠日怠。終至於不忍言。故詢議一家。依問解所論。營立別廟於宗家之東偏。略起義例。而係是私家大事。不可苟率。玆敢具禀。伏望卽賜批諭。俾得久行無廢。如何如何。
    2023-07-13 | NO.685
  • 與許尙書
    與許尙書歸巖先生文集 권5 / 書再昨撥便。伏承去月二十六日下覆書。憑審趨朝供劇。氣體有相。燕山奉璧。出於格外。一慰一慮。無任下誠。灣尹之事。驚心則極矣。而非繫宗社安危。則請處囊中。無乃過乎。長府事備在推緘。不必縷陳。城內移倉。出於朝命。旣撤倉庫。而露置米穀。任其潦雨之所朽。盜賊之所竊。則方可謂能勝其任乎。不得已面議於方伯。加糶於民戶。秋捧之耗。箇箇公用。糶陳糴新。賑餓莩而厚保障。息耗取贏。備器械而完鉅役。未知玆事害於國乎。病於民乎。年前長倅輕播逋欠之說。盛傳中外。當繡衣査覈之日。必欲以逋爲過。實其前言。而光牧爲差員。詳査實數。有賸無縮。故長倅羞其言之不售。乃於啓下公事之外。搜出己亥分給文書。生事於無事之中。原其本意。非必欲陷我也。不過一時無聊之致。而旋卽悔恨。使吏輩訟冤於繡衣。指陳別備之數。蓋耗米盡歸於別備價故也。繡衣亦頗後悔。捧別備成冊意。欲申解於書啓云。縛之解之。果出一手。則亦可見其公心。而夫豈易哉。初免就理。專荷首揆之德。雖非有私於元禎。而惟邊事之是重。席藁之中。禍機稍緩。人非木石。寧不知感。倭人之利。專在釜山。雖日鞭撻而驅之。日設宴而請之。斷無移佗之理。初不敢直請堂船。假借釜城。以爲換面之語。終不忍無端還島。降請熊浦。欲爲遮面之資。其間情態。明若觀火。元禎之前後狀啓中。備陳其形勢。試取而考之。則其詳可得也。兩差所供凡百浮費。姑舍勿論。一月米穀。通計粮料與魚價而三百有餘石。八朔之用。已至於二千五百四十六石。列邑財力。旣已竭矣。本府庫儲。亦已罄矣。馬島一種。無非商賈。雖出沒風濤。備嘗危險。一年之利。能幾何哉。而今乃偃卧淨館。白得厚利。安有速還之意哉。三浦土兵。逼居館側。男女交淫。言語相慣。漏我機事。捷於影響。探我動靜。速於置郵。雖嚴法刻刑。日誅一人。奸細成風。懲戢無路。脫有邊警。則釜山之民。擧將相率而爲敵向導。其爲寒心。不特不可使聞於鄰國而已也。彼雖不欲棄舊而就新。我宜速令撤此而移彼。使約束申明。防禁稍嚴。然後可以有爲也。直患其詐請移館。而實非眞情耳。苟其眞情。實欲移設。則釜城堡障。雖難輕許。熊浦空地。乃其舊基。又何重難而堅持至此耶。今姑快許。促令移去。待彼懇請仍存然後。不得已而停止則容或可也。彼自爲請而我反牢塞。經歲相持。重困民力。爲盜齎粮。亦已多矣。一邊年少之輩。或以爲彼以詐而請之。我以權而許之。則甚非待強鄰忠信之道。羣非衆訾。媒孼其短。廟堂亦不得不動於淸議云。古人所謂束之高閣。竢天下太平者。正爲此輩發也。諸葛武侯忠信智武。豈不及於今世之淸流。而猶曰兵不厭詐。則待鄰敵之道。其可徒經而無權乎。桓溫上疏。請遷都洛陽。自永嘉之亂。播流江表者。一切北徙。以實河南。朝廷畏溫。不敢爲異。至欲遣侍中止之。王述獨言溫欲以虛辭威朝廷。非事實也。但從之。自無所至。詔從其計。溫果不行。今以酬應外敵。比之節制強臣。則權經取舍。宜如何也。以移設倭館。比之遷都徙民。則事體輕重。又如何哉。而王述之策。當時賴以爲便。後世不以爲非。况玆化外殊俗。不可以中國之治治之者乎。且元禎之所謂當許者。非必以權許爲得也。許之而彼果移去則可飭邊關之舊禁。許之而彼自中止則猶不失爲今日。以此言之則權許之可也。眞許之亦可也。何必徒權哉。初斥僭妄。不許館接。一如元禎所云。則深得事體。了無勞費。而廟堂不惟不施。至欲加以重罪。催送侍從。顚倒迎接。使其驕氣倍增。妄心益肆。然後卽今所以處之者。斷其歸路。使不得還。不啻若縶之維之。於焉嘉客。而乃以不能開諭速送。欲罪邊臣。爲邊臣者。不亦冤乎。夫邊臣之所建明。有所施行而不效則罪之可也。廟堂之所指揮。有所違越而僨事則罪之可也。今也不然。前後建請。率被沮格。終無一事如意。片言半辭。皆禀廟堂而酬酢。以此爲罪則其肯心服乎。最後回下措語尤緊。有曰今見李某狀啓。有似旣發難止者然。殊未曉其所以云。其所謂旣發難止者何謂也。抑以爲朝廷之所不許而邊臣輕自先發於彼人。難於結局之意耶。我國邊臣雖一動一靜之微。亦難擅便。矧玆大段所爭。而輕發朝廷所不許之言耶。不愚不狂。不蹈河而入海。則不當如許也。廟堂之意。終以爲勞費不暇計。熊浦不可許。則雖欲開諭防塞。業已辭竭計竆。有何新語可以動彼狡心。惟撤去日供之需。召還接慰之官。以杜覬覦之望。永絶希冀之路。使其去留決在一著。亦或一道也。何用曠日持久。苟冀回聽使之擧踵引頸。有若痿人之不忘起者哉。當此之時。領台與執事。幷有萬里之行。前頭可虞之勢。不待思量而可想。欲趁星軺未發之前。以還送首譯。面稟備局之意。啓聞于朝。因送金謹行於京中。細陳曲折。得以停當。則口達必詳於文字。須將此意。商議於領台。趁卽回示如何。귀암집 12권, 귀암이원정연행록(歸巖李元禎燕行錄) 1670년(현종11, 경술) 8월 7일 이원정(李元禎, 1622~1680)은 인조~숙종대의 문신으로 1670년 사은부사로 북경에 다녀간 바 있다. 그는 계주에서 출발해 방균점(邦均店)에 들르면서, 이 곳의 바늘이 중국 최고란 기록을 남긴다. 바늘을 샀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방균점의 바늘에 대한 최초 기록으로 보아 분명 바늘을 샀을 것으로 읽혀진다.방균점(邦均店)은 계주(薊州)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현재의 방쥔진(邦均镇)으로 추정된다. 점(店)이란 상인이 모이는 곳을 지칭하는 오래된 지명이고, 청나라의 공식적인 지명은 방균진(邦均鎮)이었던 것 같다.
    2023-07-28 | NO.684
  • 與金羲瑞 (김희서에게)
    與金羲瑞 (己亥)三淵集拾遺 권18 / 書김창흡(金昌翕, 1653~1722), 자는 자익(子益)이며 호는 낙송자(洛誦子), 삼연(三淵)이다. 김희서(1675~1742)의 호는 환암(喚菴). 본관은 울산, 기하(器夏, 1649~1701)의 아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5세손이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다. 학문이 독실하며 효도가 후순 지행(厚純至行)하고, 향리의 화목을 도모하여 그 명성이 방방곡곡에 알려졌다. 일찍이 《격치지설(格致之說)》을 저술하여 후학을 장진(獎進)함으로써 풍속(風俗)을 돈독히 하였다.阻懷襞積不在言。卽日霜冷。緬惟靜履佳迪。曾承惠札。有遭慽奔避之報。有駭遙聞。未知今已底定否。服人慘遭仲婦喪。並緦功疊制。八九在身。淚眼枯矣。氣力之摧損可知。爲吊切人于恩津。作此遠來。光牧適同發。邀以過冬于環碧。而中路深思。有些不便者數件。未免改計中止于高山近處。前頭觀勢進退。有未可預卜者。與左右接面遅速。又難準擬。浩嘆奈何。此去家奴。卽春金同榻者也。使之歷拜。實有意在。想爲之興悲且憐也。所住安心。距完山只宿舂。倘蒙命駕則奇矣。
    2023-07-13 | NO.683
  • 莫向春風賦式微- 점필재집 시집 제22권
    광주 목사 유양이 판관의 화살 맞은 사건으로 재차 형신을 받고 지금 남평현으로 옮겨져 수감되어 있으므로 시 두 수를 부치다[光州柳牧使壤以判官中箭事再被刑訊今移繫南平縣寄詩二首]  - 점필재집 시집 제22권봄바람을 향하여 식미를 짓지 마소 / 莫向春風賦式微강매는 눈송이 같고 버들은 무성하구려 / 江梅如雪柳依依내일 아침 천묘에 빈아를 연주하거든 / 明朝千畝吹豳雅응당 사면령 받고 한번 웃으며 돌아가리 / 應逐金雞一笑歸봄 경치 화창하니 술이나 사서 마셔야지 / 春光淡蕩酒須賒고르지 못한 세상일에 서두를 것 없어라 / 世事參差莫畫蛇한 조각 시 생각을 좋이 수습했다가 / 一段吟魂好收拾목란의 배를 장차 한강 물결에 띄우자꾸나 / 蘭舟將泛漢江波[주-D001] 식미 : 《시경(詩經)》 패풍(邶風)의 편명인데, 내용은 국운(國運)이 쇠함을 슬퍼한 노래이다.[주-D002] 빈아를 연주하거든 : 빈아는 《시경(詩經)》 빈풍(豳風) 칠월(七月)을 이르는데, 《주례(周禮)》 춘관(春官) 약장(籥章)에 의하면 “무릇 나라에서 신농씨(神農氏)에게 풍년을 기원할 적에는 빈아를 피리로 연주한다.” 하였다.
    2020-09-26 | NO.682
  • 蓬海錄- 安村集 권3
    蓬海錄- 安村集 권3박광후(朴光後, 1637~1678), 자는 사술(士述)이며 호는 안촌(安村)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丁巳九月二十七日。與高斗經,柳漢徵,柳應壽,三從弟光一同行。十月十一日。到長鬐縣。尋先生謫廬。兩三茅屋。依在山下。中有稍大一家。以山竹作編爲籬。高可三四丈。南有一小門。僅僅出入。人聞先生在此荊棘中。益不堪傷時之痛。仍到邑之東一村。得占所寓之家。然後吾五人連袂步行。至于棘門外。使所帶奴招得應門之童。使之通刺于先生前。俄有一少儒自棘裏而出。引我輩至一空舍。乃本縣禀官家云。少儒卽先生之孫疇錫也。形容端正。行止安詳。可知爲先生長者門下人。問先生安否。相與語。少頃。少儒還入于棘裡。以告吾輩必欲進拜之意。先生乃令少儒傳辭于吾輩曰。聞跋涉遠來。慰喜且感。卽欲相見。而所入來穴門至小且高。不敢請客而入云云。吾五人卽與少儒同入棘門之內。有大杏樹立在門內。可作壇盤旋。其下有竹床二。一高而一低。意者先生避暑于此。諸門生或且講業也。圍籬內。有三間廳堂頗精灑。又其內有三間屋。二間房。一間竹床。卽先生所寓之室也。吾五人幷入參拜。則先生手小竹杖。迎我輩於房中。逢迎之喜。藹然可掬。叙暄凉畢。以諸友及吾輩所封之物。親自入納。則先生曰。來見旣感。而且有惠物。還切不安。光後跪而言曰。自先生遭禍以來。久欲來候。而以疾病事故。人事有不如意者。先生曰。道里夐絶。何可易也。復跪曰。此來高儒年近六十。而必欲候先生。跋涉而來矣。先生向高丈曰。尊果爲霽峯後乎。高丈曰。霽峯乃侍生傍親也。先生曰。霽峯爺兄弟行。有以履字爲名。是於尊爲何也。高丈曰。乃侍生曾祖之四寸也。侍生曾祖之諱。某字也。先生曰。吾曾聞愼獨齋爺之言則高某甫 指高進士敬履 上䟽中。只擧四賢而遺晦齋。故其時一邊人。大斥高進士。愼獨齋適於其時爲泮中掌議。以高進士爲執事。一邊物議有不怏者。故乃遞其執事。則吾邊儕輩。皆以愼獨齋輕遞執事爲咎云云。此丈有子孫乎。光後曰。其曾孫有進士高斗翼。而其他子孫亦盛耳。柳應壽以城主所封錦湖集跪進之。則先生曰。錦湖集幸得刊行。光後乃指昌老而告之曰。彼乃錦湖之外孫也。昌老亦曰。錦湖乃生之外先祖也。光後又指光一而告曰。此乃前日往復論理某字叔之子也。先生卽有欣慰之色。乃向光一曰。尊大人平安否。先生披覽諸簡。使疇錫坼封而進。先生見奇子亮挺翼之書。光後乃跪而言曰。奇某自數年前。慘遭喪禍。故曾未得一候於先生。常以爲媿嘆。先生曰。何其喪禍之此甚也。先生又見吳百汝朋錫之書。光後又跪而言曰。吳友朋錫。去侍生居二十餘里。故知侍生來此而寄送候書矣。先生曰。吳之所居。非羅州耶。光後曰。雖羅州地。而近於侍生之居也。光後又跪而言曰。往者河西金先生之孫亨祉甫。往來于先生之門。尙亦記得乎。先生曰。其人短壽。甚以爲惜。光後曰。其人有子。今欲與侍生同來。緣有疾故。以待冬間必來候矣。朴掌令世采甫所製河西狀草。先生亦已得覽否。先生曰。未及見也。光後曰。河西子孫。欲書送其狀草。而意必先生已覽。故只送此年譜矣。先生曾許墓道文字之製。而危禍中未及搆成耶。先生曰。未成也。先生仍披閱年譜。後曰。年譜與狀體相異。狀則必書撰者之名。譜則只以記其事蹟。故不書撰者之名。撰年譜者。其祖先之名。或可入於年譜中則當諱之耶。仍指奇錦江一段而告之曰。此譜乃奇挺翼之撰也。錦江乃其曾祖。故不書其名而只書其號矣。先生曰。書錦江姓名。而於註脚。乃曰某之曾祖云者。似得其宜云。又於崔新齋一欵。後乃跪進曰。河西先生旣受業於新齋之門。則只以出入崔新齋山斗書之者。似近於泛然。添之門二字則如何也。先生曰。如崔新齋。何可不書先生乎。以出入於新齋崔先生之門書之似當。乃於註脚。曰崔某可也。先生又指靜庵一欵而言之曰。靜庵何可書名也。或以謚號。或以別號書之。乃以姓名錄出於註脚可也。後又問曰。司醞直長同正。是何官也。先生曰。國初之官。多用前朝爵名。至於中代。亦難詳知云。先生曰。痛哭卯山中之卯字。以卵字書之云。然耶。後曰。卵山乃實辭也。河西所居村前。有卵山故云。先生曰。實辭雖卵山。而卵字氣像似庸拙云云。後乃跪進族譜曰。前日書辭。間有誤達之辭者。乃仍人聞先生曾爲侍生門族製給序文。故敢欲得先生手筆。爲弁卷之計。今仍濟州判官有鋟刊之勢。故汲汲奉請于先生前矣。先生曰。爲朴判書元象已撰文字。而未及作序文矣。後又跪而懇告曰。欲得先生序文以弁于譜牒之首。先生曰。屢蒙勤請。欲從盛敎。但卽今形勢。有不便者。昔朱夫子在罪時。有人請文字。朱先生曰。若以今時製給則似不便。若退計製給則又不當云云。今日之事。殆近於是。後曰。若以今時製給爲不便。則當得序文付刊。仍藏其板。以待後日傳之。猶或可也耶。先生笑。曰退計而製給旣不當。則留時而傳之。其可乎哉。然朱夫子製給陳俊卿之狀。考其時則極遭危禍時也。然則朱夫子亦或製之矣。後乃欣然更進曰。請得如陳俊卿之狀。先生之意。似將許製矣。日已暮矣。將告退於主人家。後乃跪言曰。侍生等不遠千里而來者。必欲侍先生也。若以出入棘裏。添今日之禍。則侍生等何敢請之乎。若不爾則侍生請連日出入以侍先生也。先生曰。此亦勢也。往者或人來見。而不敢入棘門。吾或立見于門內。向日李監司䎘,李兵使重臣。不意馳來。不通於內。卛爾入來。自是之後。外人之來見者。不忌入此門。吾亦無禁憚之心。後曰。然則侍生當連日入來矣。遂退宿於主人家。十二日。促飯而齊進。暫休于外舍。與宋疇錫,晦錫兄弟及周希濂相話。俄而使一小婢。促令延客而入。吾五人以疇錫爲前導而進候于先生。後曰。夜來痔疾何如。先生曰。苦歇無常。非朝夕可差之疾。後曰。已成腫乎。先生曰。此疾之根已久。而及其成濃之後始知之。柳漢徵叔起曰。人言此疾乃壽證也。先生初以水疾誤聽而曰。乃濕症也。後曰。非水疾也。乃長壽之證云。先生微哂曰。卽今七十。旣爲長壽。更何望哉。後乃以牧使所贈詩跪進曰。侍生來時。光州牧李令公贈別詩一篇。敢請先生之次韻以惠。先生手自捧之。再讀其詩曰。此令公元是鈍根。而以勤讀之故。遂已成章。卽今亦能讀書乎。後曰。罷衙之後。必讀書云。仍以後之次牧使韻一詩跪進之曰。侍生來路。拙次光令之韻。無足登淸案而敢進之。先生又捧而讀之畢。乃向後而言曰。吾不知從事之至於此也。仍以詩二章幷給疇錫而觀之。俄而先生曰。吾向來赴京中。則京中人有曰。退溪書院在眞寶。沙溪書院宜設於光州云。後卽答曰。侍生於辛亥冬拜先生。則先生之敎如此。故卽與鄕中多士相議。呈禮曹受題。已奉沙溪,愼獨齋兩先生享于月峰。而兩先生春秋祭文。乃先生點撰之文也。先生曰。吾亦知之。仍問其神位坐次。後乃自訥齋先生次次明數則先生曰。位板皆書謚號乎。後曰。四先生皆書謚號。而唯訥齋無謚號。故以訥齋朴先生書之。先生曰。訥齋之官止於何。後曰。止於羅州牧使。先生曰。然則訥齋上䟽之後。更不得爲仕乎。後曰。復愼妃之䟽。在潭陽時。其後爲牧使矣。先生曰。平章洞在何里耶。後曰。平章洞在大峙村之後。先生曰。其基所結之山。自何而來也。後曰。自內藏山逶迤遠來。到平章洞後。大山高立。石峯森列。翻身入首之際。峯巒甚姸。及其成基之處。僅可作三間屋。左右龍虎。如人兩手之衛。但白虎邊。明有築土成山之痕。外白虎下。古有林藪云。先生曰。平章之金。自前極盛。而猶未出王妃。今始出中殿。向者仁宣王后擇中殿之際。聞爲沙溪之孫。而極以爲幸云。後曰。沙溪門下。谿谷曾已出入。故大妃亦甞聞之矣。先生曰。谿谷實受業於沙溪。而自少稱弟子矣。世禍未起之前。欲立碑於平章洞。使我爲文字。吾亦許之。今已如此奈何。後曰。侍生亦曾知有立碑之意。計終不成。甚可恨也。後又跪而言曰。先生爲光州兩書院洞主。卽今不吉輩。作亂於月峯書院。而汚穢諱字。至今思之。不覺憤痛。非但此也。又將有作亂褒忠祠之擧。故年老諸儒。恐復有汚穢之患。敢撤先生諱字於院籍矣。厥後卽宜仰報。而多士之事。自至於遷延。光儒之恥。何可喩哉。盖於乙卯五月。光儒與羅州多士。會于山寺。欲伸先生之寃。將以七月望間。定䟽會於長城矣。光州有數三不吉輩。呈于官家。訴于方伯。終至於囚械五人。而使不得䟽事矣。先生曰。其時方伯及牧使誰人耶。後曰。權大載爲方伯。朴興文爲牧使。盖其亂始起於羅州及南平。有若干大北之後。送通於光州。而語極凶悖。侍生等七十餘人。適會于鄕校。不忍見賊孽輩通文來到公會。卽令燒火。凶輩以焚通爲執言而治之甚毒。侍生與柳應壽則以攻斥大北之後。至受笞五十之刑矣。先生酸鼻驚慄曰。何其甚耶。後曰。若以法論之則方伯,守令。何可加笞於侍生。而近日之官。蔑法恣行。是所憤也。先生曰。生進何可加笞乎。卽今方伯爲誰也。黃敎官其終免杖耶。後曰。方伯報于朝廷。而朝廷不爲深治。朴信圭亦不無無聊之心。以此止其杖云矣。先生曰。唯唯。後又跪而進曰。今年六月得地師。往見李潑先代之墳。有李達善墓碑。外面卽尹衢之文而李山海書之。陰有栗谷先生誌文。不過五六行。而其字畫似是栗谷親筆。先生曰。栗谷之筆。雖非有名。而端正可愛。李達善於李潑。爲幾代祖耶。高丈卽對曰。李潑之曾祖也。後曰。聞朴掌令世采甫,李三陟選甫。有收拾栗谷遺文之事。卽謄送于李三陟家矣。先生曰。果有收聚之事矣。完南爲光牧時。尊與李選相見乎。後曰。完南爲光牧時。是侍生幼少時也。何可及見乎。中年遊洛時。與之相知耳。先生曰。栗谷先生。初與李潑相親。爲共濟國事計也。重峯元是潑黨。而終至於絶交也。後曰。侍生亦聞而知之。後曰。李潑之弟溭之外孫李韶甫。方居于李潑之基。先生曰。是何人也。後曰。是石灘李愼儀之孫。而曾以請石灘墓道文字事。進謁先生者也。先生曰。吾亦始記之矣。李愼儀。卽昏朝立節之士。故吾亦許其文字而未及構成也。若是李溭外孫。則李溭終不叛牛溪先生。李韶輩亦不變否。後曰。李韶甫尙不變。故使其子雲標。參於今夏卞誣之䟽章矣。後曰。其姪李雲搏。光州高霽峰之外孫而朴判官之妹夫也。但李家皆以松江爲讐矣。先生曰。若知李潑母之忌日。則松爺之不殺潑母。分明可知矣。後曰。侍生今年春三月。過李韶甫家問之。則亦以松爺爲怨而言曰。己丑禍後庚寅十月。外曾祖母自此移于彼上村。村卽李潑村之上也。十二月。被連累而捕致于京。其時趙重峯來要于路傍。贈以毛裘俾禦寒。外曾祖母多致慰謝之言。以辛卯五月二十二日。死於壓膝之禍云。侍生曰。若然則李家元無歸怨於松爺之事。松爺以辛卯二月遞相職。仍爲遠竄於江界。果如李丈之言。則尹氏之死。政在松爺謫在江界之時。而柳成龍委官時盡殺。昭可知矣。李韶甫專信傳來之訛言。而不以爲然曰。鄭相被謫與否及其某年某月。吾不及知。而尹氏之死。果如此云云。侍生聞其言而卽記之。以爲發明松江搆殺潑母之說矣。先生曰。若果如此則松爺之不殺潑母。不攻自敗矣。壬辰亂時。松爺見柳相西崖而責之曰。大監何忍殺潑母與其子也。西崖曰。大監若在則可救乎。松爺曰。吾何忍不救哉。其時答問旣如此。潑母之死。又在辛卯五月。則柳相之殺潑母無疑矣。尹氏旣有子孫而行忌祀。則以忌日推之。豈不分明乎。後曰。松爺事實如此。而怨歸於松爺矣。侍生外高祖李察訪某。亦死沈守慶爲委官時。而其子孫歸怨於松爺。甚可異也。後又作而言曰。先生見佔????齋文集乎。先生曰。未甞得覽矣。文集板本在於何處。後曰。未知板本之所在。而借得於人而見之。則其集中甚有可疑之文。所謂萬卷堂。卽高麗忠肅王往在元朝時。聚得萬卷書。作堂而置之。號曰萬卷堂。其文所錄中。初以李益齋諸人。亦皆同坐陪侍云。而佔????公乃成廟朝人也。何可廁乎其中。而以余亦廁乎其中書之。又於末端。以翰林學士承旨某記云云。此官名未知果國初所有耶。先生曰。吾不知國初有此官名。忠肅王在高麗之末。佔????齋何可廁於其中耶。必是誤錄於集也。佔????文字。柳子光輩皆令焚燒。此必出於傳記而不實也。後作而言曰。物格知至之說。向於答書中。不啻若面命。今無所疑。而第致知在格物。諺解。知  致 홈이 物 을 格 의잇다 解之。而或人曰。物 이 格 홈의잇다 如是解之。然後方爲分明。何可改解乎。後曰。章句曰窮至事物之理。欲其極處無不到也。所謂窮字。是窮究之義。而所謂至字。何以解之。先生曰。窮夫物而使之至者。乃使事物之理而至其極處也。後曰。然則事物 의 理 을 窮 야 至 케홈은 如是解之耶。先生曰然。後曰。欲其極處。口訣或以 로 讀之。或以 이로 讀之。未知孰是。先生曰。旣知物理到其極處之義。則 이 之分。何必強辨乎。然不若以 로 讀之也。後曰。大學在明明德在新民。此皆止於至善者也。宜以二節分之。而反以止至善對明德,新民而並爲三者。有若以至善爲明德新民之外別樣物者然。未知何如。章句之意。不必強分爲三。而至於末端。曰三者大學之綱領者。何意耶。先生曰。至善雖是明德新民中事。而明德新民。不止於至善。則不可謂明德新民。至善是恰好道理也。旣下三在字。則分三之義。可知也。後曰。事物之義。何以分之。先生曰。明德新民。兩事相對。故謂之物。知止能得。是一事。故謂之事也。後曰。以復其初下附註。須是磨去如塵垢之如字。似是衍。此乃洪夔所考正之板也。先生曰。必是衍字。乃取語類而考之。果無如字。後曰。誠意章附註有賺。此何音而何義也。先生曰。此字音有二。或談或占也。其意則重複放賣之義也。重複放賣云者。太近於陋。以賣物失實訓之。可也。後曰。然則賺連下文云者。何義也。先生曰。如惡惡臭。如好好色。此之謂自慊云。而旣下愼獨於此。又於下文小人爲不善。亦下愼獨。似近於賣物失實矣。後曰。治國章推化之道。乃孝悌慈。而獨以如保赤子解其慈。而不及於孝悌。何也。先生曰。慈是人所易行者。而孝悌之道亦如慈。故獨擧慈也。先生曰。識其端而推廣之端字。何以解之。後曰。因其發端而推廣之意也。此非如四端之端字也。先生曰然。先生曰。治國章第一節。化也。如保赤子一節化也。一家仁。一節推也。率天下以仁。一節推也。後曰。末章章句下附註。眞是眞非莫辨。而後何所適從之後字。似是復字之誤。知行自是一串事。何以謂之後乎。先生曰。此是蔡氏之註。則無從可質。而以文義求之。似是復字之誤也。工人鋟刊之際。例有誤刊之弊矣。後作而言曰。性情中和之說。固難解知。以中爲狀性之德者。先生所敎。而眞谷族叔。猶不免有疑。故今復有所禀矣。先生曰。所見如何。可聞其說乎。此以下。族弟光一對之。先生答族弟無徵不信之問。而仍言閔愼家喪禮曰。此則不可謂無徵也。朱子上寧宗箚。不啻分明。而反不信矣。後曰。喪不可以無主。而愼之父。狂易之甚。侍生目見也。愼之父。家在京中。故往者鄭直長涖從仕時。寓於其家。侍生爲見鄭涖而往。則滿壁以墨畫之。如蠱虫之雕食。而終日讀此。其聲似非人聲。若是則其不可主喪也明矣。愼之代服。似無疑矣。而但其遞遷。似難處矣。先生曰。愼之代服固也。而至於遞遷一欵。吾亦以爲重難。吾之門族。有三代喪性者。如此可遷祖與父神主。是爲大慮。故使閔家呈于禮曹。得朝家制爲一王之禮。然後行之。則似無紛紛之㢢。故以此言於閔家。閔家依吾言呈于禮曹。則鄭致和爺以禮判。終拒不受矣。又曰。鄭涖眞佳士也。禍斯將及於松江。而棄職而歸。誠未易也。後曰。非但此一欵。其人多美行。故湖南士類。與之許交矣。柳應壽跪而請曰。願得先生之文。以爲錦湖集序也。先生曰。光牧之文。足以傳遠矣。若使吾強爲之。則吾當爲跋語。後曰。此友請於先生者。欲得先生之文。以爲弁卷之計也。看他文集中。序文不止一二。况朱子旣製陳俊卿之狀於危禍中。則先生何可固辭乎。先生曰。朱子於危禍中。爲跋文則多矣。後乃以族譜所寫空冊進之。柳應壽亦袖出錦湖集所書空冊以進。先生皆親受。而使疇錫各表記以置之。日已暮矣。拜辭而退。十三日。促飯入先生所問候。先生於昨日。終日酬應。氣不安節矣。後曰。光州舊有司馬齋。廢棄於城中久矣。今城主使之移建於鄕校之旁。斯齋適成。城主以文會齋名之。欲得先生之筆揭諸額矣。先生披覽光後所編譜牒而敎曰。宋判書麒壽。明是蔡忱之婿。而今錄於蔡忱妹夫行。必是誤書矣。仍以退溪先生所製宋世忠墓碑文示之。世忠。麒壽之父也。果爲誤書。卽改之。後問曰。退溪作此墓道文字。在麒壽爲小人之前乎。先生曰。旣封麒壽爲德恩君。則在乙巳之後矣。後曰。然則退溪何以製之也。先生曰。退溪以應敎。亦參於請殺鳳城君之箚。故不爲深罪乙巳小人矣。其時李晦齋爲委官。而杖殺諸賢類。終至於錄其勳。郭詢不忍其杖。乃呼於庭中曰。豈料吾輩死於復古之手乎。復古卽晦齋字 其後栗谷先生爲都憲。鄭仁弘爲掌令。仁弘欲駁沈靑陽義謙。栗谷欲不從。則仁弘將有下歸之勢。仁弘若下歸。則國事頗有難處者。以此相議於牛溪。則牛溪亦曰。當強從靑陽之駁云。栗谷先生作啓草。付諸仁弘曰。此啓極穩當。愼勿加减也。仁弘曰。何可增减乎。及啓達之際。仁弘又添論思庵與松江。栗谷先生大以爲駭。大責仁弘。則仁弘亦自服其非。栗各先生敎仁弘曰。君當引嫌。吾將處置而以便公私。仁弘初若順從。而終違栗谷之旨。松江乃大怒曰。豈料吾輩死於叔獻之手乎云。後問晦齋至今爲士類所疑。栗谷先生亦不無貶辭。先生曰。沙溪先生親禀於栗谷先生曰。晦齋,退溪皆參於乙巳戕賢之啓。而先生獨疑晦齋而尊崇退溪。何耶。栗谷先生曰。觀人必於成德後。其時晦齋年已老。退溪年尙少。所以獨咎晦齋也。後曰。贒人所爲。或有所未盡者。於此之時。其氣反有些濁也耶。先生曰然。後問朱子氣質。以十分論之。當至九分淸耶。先生曰。未知其淸之至於幾分。而但其少時爲宰。以心之走作爲悶。此心之操存。實爲難事。後曰。成德之後。猶可爲九分淸耶。先生曰。雖未知幾分淸。而幾乎爲聖人也。後問曰。日行所謂起度端。終度端。無盈縮之說。未知其詳。若起度端。終度端。周得無盈縮。則何甞有退一度處耶。先生曰。此惟我孝宗大王明知其所以然。甞下敎曰。二人同入房中。與之參坐。而其間雖襯。亦不無絲毫之相間。故終至於一坐於東。一坐於西。其所以退一度者。盖如此也。聖學高明處。於此可見矣。後曰。以文勢觀之。則同起於一度處。窮之難得。二人同入房之諭。雖似分明。而亦未知退度之妙矣。先生曰。參坐之際。不無絲毫之間。故一日二日而積以至於七十五年則乃退一度也。是故。孝宗大王亦甞下敎曰。三十年退一度云。則是太過也。若百十二年退一度云。則是差緩也。唯七十五年退一度。乃爲不差矣。此聖學極其高明處也。十四日曉。登縣之後山看日出。食後往遊小蓬島。當午。自海島至先生所入拜。問夜來調候何如。以寫事貽勞。甚爲未安。先生曰。放意書之。何勞之有。後曰。今日往觀東海則雖無風。而喧如怒而壯於雷矣。先生曰。若風勢不順之日。則其聲振動。此後山若將崩破矣。後進錦湖集。請得題目之筆。先生受置之。先生以錦湖集跋及吾門族譜序文搆草者。示之後曰。吾搆草。諸君見之。後及柳應壽受而讀之訖。後乃俯伏致謝曰。不但吾身之榮感。將有光於祖先矣。先生曰。何至於此乎。日已昏矣。將欲辭退而不忍告別。後曰。侍生等初欲留許多日侍先生矣。行糧已盡。勢不得不以明日歸。心甚缺然。先生曰。臨別之際。固難堪悵懷。遠道來見。已極感荷。何敢望久留乎。窮索之人。賴諸君不遺。得數日之欵。良幸良幸。後曰。明早當更來拜辭。兼受諸簡也。先生曰。聞諸君早發。深以不得摻別爲歎。明若更枉則幸何喩哉。十五日曉飯。待東方之明。齊進于外舍。坐移時。先生使人引入。五人俱進則先生曰。今方作行乎。後曰卜馬已出送矣。先生以族譜及錦湖集及諸書封。出付於後焉。後乃跪進而手捧。以文谷答簡授柳漢徵。後曰。先生豈久處於炎瘴之地耶。侍生等當隨先生所寓。更爲進拜矣。先生曰。有此生前。豈離於此耶。於是拜辭而出。先生下竹床下。佇立而望之。有悵然之色矣。
    2023-07-28 | NO.681
  • 謚狀[趙甯夏] -석산유고(石山遺稿) 附錄
    謚狀[趙甯夏] -石山遺稿 附錄치강(致剛), 호는 이성오(李星五), 김익용(金益容), 한경원(韓敬源) 등과 교유했다. 의정부좌참찬, 비변사유사, 경연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崇政大夫行龍驤衛上護軍趙甯夏謹撰。이지광(李趾光), 1734∼1800 양녕대군派, 자(字)는 자응(子應), 호(號)는 행와(行窩),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정윤(靖胤).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종정경 이조(吏曹)참판(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행(行) 통훈대부(通訓大夫) 충주(忠州)목사(牧使) 겸(兼) 충주진영(忠州鎭營)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에 올랐다.이지광(李趾光)에 얽힌 야사사당(祠堂) 앞의 나무를 베고 발복(發福)하다.이지광(李趾光)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十三대 종손(宗孫)으로 영조(英祖) 시대의 인물이다. 남대문 밖의 관왕묘(關王廟‥南廟) 건너편 언덕에 살았는데, 가세가 심히 가난하여 생계를 이어갈 계책이 없어 천역(賤役)이라도 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하루는 탁발(托鉢)을 하는 걸승(乞僧)이 밥을 구걸하므로 李공은 스님을 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고 멀건 죽(粥) 한 그릇을 나누어 먹었는데, 날이 이미 저물어 차가운 방에서 하룻밤을 함께 유숙하였다. 이에 스님은 "그렇다면 내일 사당 주위의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시오 그렇게 하면 몇 일 안에 가히 발복(發福)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을 마치고는 떠나갔다. 李공은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스님의 말대로 사당 주위의 나무를 모두 베어버렸다. 몇 일이 지난 뒤에 영조(英祖)대왕께서 헌릉(獻陵‥太宗陵)에 행차하셨다가 돌아오시는 길에 남산 아래에 있는 관왕묘에 들리셨다. 어연(御輦)에서 내리시어 건너편을 바라보니 산기슭에 퇴락한 고묘(古廟)가 덩그렇게 드러나 보이므로 좌우의 신하에게 "저 사당은 뉘 집 사당인고" 라고 하문하셨다. 모시고 있던 승지(承旨)가 "이는 양녕대군을 모신 지덕사(至德祠)이옵니다" 라고 아뢰니, "사손(祀孫)이 있는가" 라고 다시 하문하시어 승지는 다시 "듣기로는 사손이 지극히 가난하고 궁색하여 천역(賤役)이라도 나가야 할 형편이라고 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리고 호조(戶曹)에 명하여 사당을 중수(重修)하게 하고 또 전곡(錢穀)을 넉넉하게 보내 주도록 하였다. 李공은 사은(謝恩)을 하고 물러 나온 후, 남부도사로 부임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고을 수령(守令)으로 발탁되어 벼슬이 목사(牧使)에 이르렀으며, 고을을 잘 다스려 선치(善治)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남겼다. 李공의 증손 승보(承輔)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고 고손 근수(根秀) 역시 문과에 올라 판서에 이르러 대대로 부귀를 누렸다. 죽(粥) 한 그릇을 나누어 준 덕(德)이 이처럼 두터운 보답으로 돌아왔으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23-07-31 | NO.680
  • 賀趙侯(雲漢) 晬宴(조후의 생신을 축하하다)
    성   명 :장태경(張泰慶)자       :자화(子華)호       :우잠(愚岑)생몰년 :1809~1887문집명 :우잠만고(愚岑漫稿)葭籥云暮 桃符更新 伏念我侯遐祺 卽仰希七之華甲 微民賤跡 亦幸順五之同庚 桑門煉丹 自切壽鄕之祝 梅閣依斗 尤倍京華之望 玆將菲薄之儀 敢陳忻忭之意 伏望同抱之澤 無物不容 用蘄遐齡 願享熙熙之樂 務察窮巷 俾副區區之忱가약이 저물어 도부가 다시 새롭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조후께서는 복이 많아 칠순을 바라보는 화갑이 되셨습니다. 미천한 백성인 저의 삶도 또한 다행히 쉰 살 생일이 되었습니다. 사찰이나 도관에서나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가 절절하고, 매화 핀 관청에서는 더욱 서울 인사들의 존경이 배가됩니다. 이에 별 것 아닌 선물로 감히 기쁨의 뜻을 전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함께 품어안는 은택으로 어떤 존재라도 용납하십시오. 천수를 누리시길 기원하고 화락한 즐거움을 누리십시오. 곤궁한 동네를 힘써 살피셔서 작은 저의 마음에 부응해주십시오.¹ 조운한(趙雲漢) : 고종 9년(1872년) 8월 25일 광주목사에 임명
    2021-04-09 | NO.679
  • 贈光州使君李士深 (이후원 광주목사)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 1602~1654), 학주집 詩/七言律詩贈光州使君李士深 厚源○二首○與林學士載叔。同直玉堂。語及前日南行時。與羅牧具景輝鳳瑞,光牧李士深會話。因示唱和諸十。次韻。寄光牧。誰言交契白頭新。晩景相看轉覺親。算去浮生眞幻妄。讀來佳句摠精神。南州聲績聞絃誦。東壁風流壓搢紳。何日淸樽拚勝會。相思俱是夢中人。其二秋來愁緖劇紛繽。聞說南州賞更新。海內難逢天下士。樽前還對眼中人。鳴琴花月分符地。策馬風塵報主身。他日安危公等在。各須努力保霜筠。2023.6.16.
    2023-06-16 | NO.678
  • 贈光州使君李士深 (사심은 이후원 광주목사의 자이다)
    鶴洲先生全集 권6 / 詩○七言律詩 一百二十首김홍욱(金弘郁, 1602~1654), 자는 문숙(文叔), 호는 학주(鶴洲), 강빈(姜嬪)의 원억(寃抑)을 말하다 옥사(獄死)하다.贈光州使君李士深 (사심은 이후원의 자이다)厚源○二首○與林學士載叔。同直玉堂。語及前日南行時。與羅牧具景輝鳳瑞,光牧李士深會話。因示唱和諸十。次韻。寄光牧。誰言交契白頭新。晩景相看轉覺親。算去浮生眞幻妄。讀來佳句摠精神。南州聲績聞絃誦。東壁風流壓搢紳。何日淸樽拚勝會。相思俱是夢中人。其二秋來愁緖劇紛繽。聞說南州賞更新。海內難逢天下士。樽前還對眼中人。鳴琴花月分符地。策馬風塵報主身。他日安危公等在。各須努力保霜筠。*이후원(李厚源, 1598~166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진(士晋)·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 광평대군(廣平大君)의 7세손이며, 배천군수 한(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아산현감 인건(仁健)이고, 아버지는 군수 욱(郁)이며, 어머니는 장수 황씨(長水黃氏)로 정욱(廷彧)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김집(金集)·조속(趙涑)·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다.  벼슬은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고,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추진했다.
    2023-07-13 | NO.677
  • 追次洪群玉及光牧。西浦船遊韻。홍군옥
    睡隱集 권1 / 七言律詩追次洪群玉及光牧。西浦船遊韻。百常門觀斷崖傍。十頃平湖淨鏡光。漕轉漢都靑雀溢。海連胊界碧波長。雲開遠岫明如畫。潮落寒沙白似霜。形勝有餘城市隔。洞天端合着吾狂。
    2023-07-06 | NO.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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