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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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伯氏判書公文 서형수가 형 서호수에게 쓴 제문

祭伯氏判書公文 : 서형수가 형인 서호수(徐浩修, 1736~1799)를 위해쓴 제문이다.

명고전집(明臯全集) 권 13

서형수(徐瀅修, 1749~1824)의 자는 유청(幼淸), 여림(汝琳)이고 호는 명고(明臯), 오여(五如)이다.

백씨 판서공에게 올린 제문

아우 형수(瀅修)가 삼짇날의 제사로 인해 제문을 지어 백씨(伯氏) 판서공(判書公)의 영전에 곡하며 아룁니다.
아! 형님께서 무오년(1798, 정조22) 제석(除夕)에 성상께 문후하는 반열에서 물러 나와 제가 있는 곳으로 오셔서 저의 침소에서 머무시며 흘러가는 세월을 탄식하시고 인생이 덧없다고 개탄하신 지 겨우 두 달이 지났습니다. 형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가셨기에 빈 들보에는 먼지가 끼고 난데없이 여막이 보인단 말입니까? 형님께서 진실로 저를 버리고 먼저 가셨으니, 저는 앞으로 형님 없이 홀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한 배에서 나서 기운이 이어진 형제간의 지극한 사랑으로 머리 허연 노년에 서로 영결하는 것은 인사(人事)에 지극히 견디기 어려운 것이며 인정(人情)에 크게 슬픈 일입니다. 저와 형님의 관계로 말하면 어찌 형제일 뿐이겠습니까.
《시경》 〈육아(蓼莪)〉 편에서 길러주고 돌보며 어디서든 생각한다고 읊은 부자와 같고, 〈치효(鴟鴞)〉 편에서 부지런히 갈대를 물어오고 비바람 치면 울부짖는다고 말한 군신과 같습니다. 〈여왈계명(女曰鷄鳴)〉 편에서 주살로 잡아오면 그대와 맛있게 요리하겠다고 읊은 부부와 같고, 〈북풍(北風)〉 편에서 은혜롭게 나를 좋아하는 이와 손잡고 함께 돌아가겠다고 말한 붕우와 같습니다. 그리고 〈소완(小宛)〉 편에서 날이 밝도록 잠 못 이루며 부모님을 생각하고, 곡식을 쥐고 나가 점을 쳐서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라고 읊은 형제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어찌 형제간의 윤리 하나만을 지키면서도 죽고 살고 헤어지는 다른 사람의 형제들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장단(長湍)은 서울과 80리 거리이고, 광산(光山)과 서울도 천 리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제가 장단에서 호남으로 옮겨오자 아우를 버리지 못하여 가족을 다 거느리고 따라오셨고, 제가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자 부단히 왕래하였지요. 3년 동안 머문 적이 없었는데도 형님께서 늘 송매(宋妹)에게 “벼슬하는 사람이라고 한 끼에 두 그릇을 먹겠는가. 내가 이제 늙었으니, 늙은 사람은 마음이 약하여 아우가 멀리 떠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하셨다지요. 아, 형님께서는 제가 멀리 가는 것을 견디지 못했거늘 저는 홀로 형님께서 먼저 가신 것을 견뎌야 한단 말입니까.
형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위문하러 온 친지와 빈객들은 저마다 형님에 대해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내직으로 팔좌(八座)를 두루 지내고 외직으로 사절(四節)을 쥐었으니 영화와 존귀함이 더할 나위 없었고, 슬하에 아들 넷을 두어 소과와 대과에 급제하였으니 자손이 번성하였고, 예순이 넘은 연세에도 건강하여 책을 읽고 일을 처리하였으니 장수하고 강녕하였다. 공이 무슨 복을 누리지 못해 유감이 있겠는가.” 하고, 어떤 이는 “주인(疇人)의 자제들이 주(周)나라 말기에 흩어진 뒤로 율력(律曆)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어, 아무리 소옹(邵雍)과 주자(朱子) 같은 대현(大賢)과 채(蔡)ㆍ허(許) 같은 대유(大儒)라 할지라도 아득하여 상고하기 어려운 기수(器數)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공은 변방의 후학으로서 단절된 천문(天文)과 역산(曆算)에 직접 통하여 책을 저술하였다. 가령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재상이 되고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가 대제학이 된다면, 공이 서운관(書雲觀)과 이원(梨苑)에서 어깨를 나란히 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안목 있는 사람은 인정할 것이다. 공이 무슨 명성을 이루지 못하여 미련이 있겠는가.” 하고, 어떤 이는 “효자의 소원은 어버이를 영화롭게 봉양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는데, 어느 누가 이러한 소원이 없겠는가마는 이룬 사람이 드물다. 공은 젊은 나이에 총재(冢宰 이조 판서)가 되어 집안이 전성했던 시기에 몸소 양친을 봉양하여 천하의 즐거움을 다 누렸으니, 효자로서 원하는 일에 빠진 것이 없었다. 공이 무슨 소원을 이루지 못해 여한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복록과 명성과 소원으로 말하면 옛사람이 행실을 살펴 길흉을 상고하여 그에 알맞은 하늘의 보답을 부르는 것입니다. 형님께서 이것을 모두 누리셨으니, 혹자(或者)의 설이 옳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형님을 위해 원통해하여 하늘을 불러 따지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몽장씨(蒙莊氏)는 벼슬을 감옥으로 여겼고 반백씨(班伯氏)는 명성을 족쇄로 여겼으니, 저것들은 사람 몸에 있어서 본래 외부적이며 말단적인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일생에서 두려움과 근심이 우리의 마음을 크게 어지럽히지 않은 뒤에야 날로 아름다워지고 날로 졸렬해지는 것이 여기에서 판연히 구분되어, 살아서 순조롭고 죽어서 편안한 경지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아, 간사한 무리들이 우리 집안에 대해 시종 짖어댄 것이 지금까지 3, 40년이 되었습니다. 계교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 시기하는 사심으로 이어져서, 권력을 잡으면 달려와 애걸하다가 권세를 잃으면 야유하며 돌을 떨어뜨려 아첨하고 배반하는 행태가 몇 번이나 급변한 줄 모릅니다. 그러나 선군자께서는 산처럼 요지부동하여 두려워하거나 갈등하지 않았고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으로 그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나가서는 관망하고 들어와서는 애태우며 몸은 사통팔달한 드넓은 길에 있었으나 마음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험로에 얽매인 것은 오직 형님 한 분이었고 저는 아직 어렸습니다.
형님께서 일찍이 돌아가신 어머니께 다음과 같이 슬피 고하셨지요. “일생 몸을 편히 모시는 것이 하루 동안 마음을 편히 해드리는 것만 못하니, 마음을 편히 해드린다면 일생의 수고를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다음 세상에서 또다시 모자간이 되어서 칠리탄(七里灘)에서 아무 걱정 없는 가정을 편안히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할 수 있을지요?” 이 말씀이 몹시 비통하니, 형님의 몸속에 가득한 진정을 볼 만합니다. 그런데 술잔 속의 활 그림자는 참으로 역노(蜮弩)가 되고 창틈으로 보이는 기왓장은 헛되이 적포(賊礮)가 되어, 마침내 임자년(1792, 정조16)에 망극한 참언(憯言)이 나오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형님께서 이때 육순의 쇠약한 몸으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갖은 수모를 당하고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리하여 수십 년의 헛된 부귀가 홀연히 환영처럼 되었으니, 앞서 말한 외부적인 것과 말단적인 것조차도 후하게 누린 것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아, 원통합니다.
형님은 기상이 맑고 풍채가 좋아 조정의 모임에서든 사적인 자리에서든 바라보면 옥산(玉山)과 요림(瑤林)이 하늘 높이 솟은 것 같아 아무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기상이 이러한데도 복록이 돌아가지 않으랴.” 하였습니다. 형님은 효성과 우애가 월등하고 지극정성이 외모로 드러나, 수저 하나 약물 하나에서부터 장례와 제사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모두 손수 담당하여 기쁨만 가득하고 유감이 없었으며, 잠시라도 부모를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우들과 누이들에 대해서는 보지 않으면 그리워하고 보면 기뻐하였으며, 나이도 잊고 지위도 잊은 채 서로 즐겁게 어울렸지요.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행실이 이러한데도 복록을 누리지 못하랴.” 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기상과 행실은 참으로 사람의 한평생을 점칠 것이 못 됩니다. 눈썹을 치켜들고 기운을 토하며 아침저녁으로 떠들어대는 용렬하고 쥐새끼 같은 저 무리들로 말하면 진실로 말세의 기수(氣數)에서 정도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인가 봅니다.
더욱 원통한 것은 갑인년(1794, 정조18)에 해와 별처럼 빛나는 윤음으로 찬란히 문모를 천양해주시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은택이 지하에까지 널리 미쳤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이 전후로 받은 은혜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마는 시든 나무를 꽃 피워주고 죽은 뼈에 살을 붙여준 깊은 사랑과 큰 덕을 입은 것은 이때가 제일입니다.
형님께서는 감격하여 생사도 잊은 채 서울의 저택에 들어가 머무셨지요. 당시에 벼슬에 나아가 성상을 모시는 정성을 다하였고, 또 형제자매와 가까이 살아서 가는 곳마다 술잔을 주고받았지요. 마음속에 맺혀 털어놓지 못하고 목이 메어 말할 수 없었던 일들을 남김없이 말하고 후련하게 들었으니, 우리 형님께서 만년의 즐거움으로 지난날의 답답했던 심정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듯했지요.
그런데 겨우 4년 만에 느닷없이 돌아가셔서 여러 사람들이 했던 말들이 모두 한낱 망상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어찌하여 자질을 후하게 주셨다가 이리도 급히 앗아간단 말입니까. 돌아가신 날에 누차 탄식하며 석연치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이 점 때문일 텐데, 하늘이 우리 형님께 후하게 내리신 것이 그만임을 어찌하겠습니까. 아, 원통합니다.
그러나 형님의 부음이 전해지자 성상께서 누차 애석해하는 뜻을 보이셨고, 또 형수께서 중도에 위태하고 유구(有榘)가 천 리를 급히 달려간 일로 슬퍼하시는 전교가 정중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연신(筵臣)이 돌아와서는 대궐 사람들이 슬피 울고 각중(閣中)의 상하 신료들과 겸임했던 관직의 관원들이 누구나 아까운 분을 잃었노라 안타까워하고 몹시 애통해하였으며, 형님의 공적을 열거하며 이제 누구를 믿고 살까 하였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형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다만 문중의 성쇠가 걸린 일일 뿐만 아니라 세도(世道)와 시운(時運)에 크게 관련된다는 것을 여기에서 증험할 수 있습니다. 생전에는 아무런 보탬을 주지 못하고 죽어서는 아무런 명성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형님께서는 우리 성상께 이런 대우를 받고 관료들에게 이러한 평판을 얻고 또 사람들의 한결같은 칭송을 받았습니다. 아, 이 결함투성이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심신의 영췌(榮悴)와 고락(苦樂)이야 지금 형님을 위해 따져볼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저의 번뇌와 원통한 마음으로 말하면 끝내 이로써 슬픔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 군자의 죽음을 종(終)이라 하고 소인의 죽음을 사(死)라고 하는 것은 《예기(禮記)》에 실린 말입니다. 그러나 군자가 바르게 임종하기는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형님께서는 병환이 깊어진 뒤에 말씀과 행동이 평소에 비해 더욱더 차분하였습니다. 한번은 제 손을 잡으시고서 국은(國恩)을 헛되이 저버리지 말고 가사(家事)를 잘 맡으라고 차근차근 말씀하시고 수의와 관곽을 어떤 것을 사용하고 묘와 의물(儀物)을 어떻게 하라고까지 말씀하여, 중요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할 것 없이 빠트리지 않고 세세히 지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여쭤보면 대답하시고 말씀드리면 반응하셨습니다. 이처럼 바르게 임종하셨으니, 옛날의 군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마 형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의리로 어찌 감히 일체 유언을 명심하여 그대로 시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임좌(壬坐)의 언덕은 지관(地官)이 이의를 제기하여 방향을 살펴 기좌(己坐)로 다시 잡았으니, 누차 살펴 자리를 택한 것은 알맞기를 기약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실로 정간공(貞簡公 서문유(徐文裕))과 문민공(文敏公 서종옥(徐宗玉)) 양대의 묘와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고 문정공(文靖公)의 묘와는 더욱 가까워 바라보이니, 형님을 그 사이에 묻은 것은 선영에 묻히기를 원하던 형님의 소원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아, 형님의 발인이 지금 10일도 남지 않았으므로 제가 형님보다 앞서 가서 학산정사(鶴山精舍)에서 형님을 기다리려 하였습니다. 가마 타고 왕래했던 자취가 있기에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저의 원통한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고, 반들거리는 궤안(几案)과 정돈된 서적도 차마 어루만질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고향의 원숭이와 학과 더불어 송운(松雲)과 회월(檜月) 아래에서 슬피 울어야 한단 말입니까? 소장공(蘇長公)이 자기 아우 자유(子由)에게 준 시에 “자네와 대대로 형제가 되어, 내세에도 인연 맺어 끊지 않으리.[與君世世爲兄弟 更結來生未了因]”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형님께서 선비(先妣)께 고한 뜻이며 또한 지금 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형님께서 저의 말을 들어주시겠지요?
아, 제가 형님을 영결하는 자리에서 아뢰고자 하는 애통한 심정으로 말하면 비록 수미산(須彌山)을 붓으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는다 한들 어찌 가슴속에 가득한 슬픔을 만의 하나라도 쏟아놓을 수 있겠습니까? 형님을 잃은 뒤로 바보인 듯 술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하여 아뢸 일이 생기면 형님이 집에 계시다고 착각하여 일어나 찾아가려던 적이 여러 번이니 어이합니까? 넋이 나가 마음은 멍하고 손은 뜻대로 되지 않으며 한 글자 쓸 때마다 눈물 떨어져 작은 종이가 다 젖었습니다. 계절이 바뀌어 시식(時食)을 올리오니, 길게 말해봤자 이별이며 구구절절 말해봤자 이별입니다. 아, 형님이여! 아, 형님이여!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주-D001] 백씨 …… 제문 : 
【작품해제】 큰형 서호수(徐浩修, 1736~1799)에게 올린 제문이다.
[주-D002] 장단(長湍)은 …… 거리이고 : 
원문의 단산(湍山)은 경기도 장단(長湍)을 말하고, 원문의 상유순(上由旬)은 불교에서 말하는 거리의 단위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 권55 〈화산(花山) 용주사(龍珠寺) 봉불식(奉佛式)에 복을 기원하는 게송[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 결게분(結偈分) 정토 극락(淨土極樂)에, “단 이슬은 청정한 국토에 두루 내리고, 가을 달빛은 넓은 하늘에 가득하도다. 한 언덕에 있는 아란야는, 왕성과의 거리가 팔십 리도다.[甘露遍淨界, 秋月滿長天. 一曲阿蘭若, 王城上由旬.]” 하였는데, 그 주석에서 “유순(由旬)은 중국 말로 한량(限量)이며, 세 등급이 있는데 다르다. 상(上)은 80리(里)이고, 중(中)은 60리이며, 하(下)는 40리이다. 용주사(龍珠寺)는 왕성(王城)과 80리 거리이다.” 하였다.
[주-D003] 송매(宋妹) : 
송위재(宋偉載)에게 시집간 누이동생을 말한다.
[주-D004] 팔좌(八座) : 
육조(六曹)의 상서(尙書) 및 좌우 복야(僕射)의 총칭이다. 서호수가 판서의 반열에 올랐으므로 이와 같이 말하였다.
[주-D005] 사절(四節)을 쥐었으니 : 
네 고을의 관찰사를 역임했다는 뜻이다. 서호수는 1774년(영조50)에 전라도 관찰사를, 1779년(정조3)에 함경도 관찰사를, 1782년(정조6)에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나머지 한 곳은 미상이다.
[주-D006] 주인(疇人) : 
대대로 부조(父祖)의 업을 계승하는 자를 말하는데, 후세에 와서는 오로지 역산가(曆算家)를 일컫게 되었다.
[주-D007] 몽장씨(蒙莊氏)는 …… 여겼으니 : 
몽장씨는 장자(莊子)를 말하고, 반백씨는 반고(班固)를 말한다. 구양수(歐陽脩)가 〈방희칙을 전송하는 서(送方希則序)〉에서 “몽장은 벼슬을 감옥으로 여겼고, 반백은 명성을 족쇄로 여겼다.” 하였다. 《文忠集 卷64 送方希則序》
[주-D008] 날로 …… 것 : 
《서경》 〈주관(周官)〉의 “덕을 행하면 마음이 편안한 가운데 날로 아름다워지겠지만, 그 반면에 거짓을 행하면 마음이 수고로운 가운데 날로 졸렬해지게 될 것이다.[作德, 心逸日休: 作僞, 心勞日拙.]”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9] 살아서 …… 경지 : 
《논어》 〈이인(里仁)〉 편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구절에 대한 주희의 집주에 보이는 말이다.
[주-D010] 돌을 떨어뜨려 : 
위급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보고 구해주기는커녕 더욱 곤경에 빠뜨리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志銘)〉에 “사람들이 작은 이해에 걸리면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안면을 몰수하는 경우가 있고, 함정에 빠졌을 경우에 손을 내밀어 구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밀어 넣고 돌을 던진다.” 하였다.
[주-D011] 칠리탄(七里灘) : 
은거지를 말한다. 동한(東漢)의 은사(隱士) 엄광(嚴光)이 은거하여 낚시하던 곳이다.
[주-D012] 술잔 …… 되고 : 
재앙의 조짐이 보이다가 기어이 재앙을 입게 되었다는 말이다. 역(蜮)은 일명 단호(短狐)라고도 하는데, 자라처럼 생기고 세 발이 달렸으며, 입속에 가로질러 있는 뿔로 만든 쇠뇌[弩] 같은 물건에 기(氣)를 화살[矢]로 삼아 물속에서 사람을 쏘아 해친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모래를 입에 물었다가 사람을 쏘아 맞히면 부스럼을 앓게 되며 그림자를 맞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즉 몰래 사람을 해치는 것을 말한다.
[주-D013] 창틈으로 …… 되어 : 
미상이다.
[주-D014] 결함투성이의 세상 : 
도가(道家)에서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사는 도읍을 백옥경(白玉京)이라고 하는데, 백옥경은 천상의 세계로 인간의 생로병사가 없는 완전무결한 세계이다. 이와 반대로 생로병사로 고통받는 이 세상을 결함투성이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주-D015] 군자의 …… 말입니다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D016] 소장공(蘇長公)이 …… 하였으니 : 
소장공은 소식(蘇軾)이고, 자유(子由)는 소철(蘇轍)의 자이다. 소식이 사건에 연루되어 어사대(御史臺) 옥에 갇혀 있을 때 옥리(獄吏)의 괴롭힘이 심하여 살아서 나갈 수가 없다고 생각되자, 영결의 뜻을 담은 칠언율시 두 수를 지어 옥졸(獄卒)을 통해 아우 소철에게 보냈는데, 이 구절은 바로 그 첫 수의 마지막 부분이다. 《東坡全集 卷29 獄中寄子由 二首》

弟瀅修。因三月三日之奠。爲文哭告于伯氏判書公靈筵曰。嗚呼。公於戊午除夕。退自候班。臨弟之所。欹弟之枕。歎年光之如流。而慨人生之不足把翫者。堇月兩易耳。公今安往。而空樑欲塵。倚廬忽現也。公誠棄弟而先逝。弟將無公而獨存耶。夫以分形連氣之至愛。而相失於望秋紛白之頹景。此人事之至難遣而物情之所大慼也。若弟之於公。則奚但曰兄弟而已。其長育顧復。出入腹我。蓼莪之父子也。拮据捋荼。風雨嘵嘵。鴟鴞之君臣也。弋言加之。與子宜之。鷄鳴之夫婦也。惠而好我。携手同歸。北風之朋友也。而明發不寐。有懷二人。握粟出卜。自何能穀。又小宛之兄弟也。若是者。豈他人之兄弟。只處一倫。而猶可以死生契濶者比耶。湍山上由旬地也。光山之於日下。亦不盡千里而遙也。然弟之自湍移湖也。公不能捨弟盡室而從焉。弟爲光牧。往來如梭。盖未甞終三年淹。而公常謂宋妹曰。做官豈必每食兩盂。吾今老矣。老人心弱。不耐渠遠遊。嗚呼。公不耐弟遠遊。而弟獨耐公先逝乎。自公之沒。親賓之來慰者。亦各有其說矣。或曰。內遍八座。外按四節。榮貴極矣。庭蘭四茁。蓮桂芬芳。子姓繁矣。耆年精強。劬書幹務。壽而康寧矣。何福之不除。而公其有餘憾耶。或曰。自疇人子弟之周末分散也。律曆之不傳於世久矣。雖以邵朱之大賢。蔡許之宏儒。無奈乎器數之邈難考信。則公以偏邦後學。身通絶藝。著有成書。藉令蕭曺作相。韓歐典文。公於雲觀梨苑。幷駕而無愧色。具眼者當許之。何名之未成。而公其有餘戀耶。或曰。孝子之願。莫大於榮養其親。而人孰無此願。得之者盖鮮。公以黑頭冢宰。躬奉兩親於門闌全盛之日。擧天下之樂。而所願於孝子之心者。未或闕焉。何願之未酬而公其有餘恨耶。夫福也名也願也。古人所以視履考祥。而徵天報之厚薄者也。公之庶幾乎此。或者之說。非曰不是。獨弟之爲公煩寃。呼天而欲問之者別有之。蒙莊氏以紳笏爲柴柵。班伯氏以聲名爲韁鎖。則彼於人身。固外也末也。惟吾少壯老之間。不大有恐惧憂患者亂我方寸。然後日休日拙。於斯乎判。而生順死安。可得以言。嗚呼。羣壬之於吾家。其首尾狺狺。迨今三四十年矣。始以計較之心。仍之忮忌之私。當其柄用。則望走而乞憐。及其勢去。則揶揄而下石。側媚反覆之態。不知爲幾番狂劫。而先君子凝然山立。不懾不撓。利害禍福。無纖毫動其中。則其出而觀玩。入而薰灼。身處乎八達康莊之衢。而心纏乎九折羊腸之塗。獨有公一人。而弟則幼耳。公甞悽告于先妣曰。百年之身泰。不如一日之心安。吾生之勞。汔可休矣。願與吾慈。復爲後生之母子。穩做七里灘中無思無慮之一家計。可乎。此言絶悲。足見公滿腔熱血。而盃心之弓影。眞作蜮弩。牎隙之瓦礫。幻成賊礟。遂至有壬子罔極之憯言。公於是乎六旬衰境。東西漂泊。多歧受侮。靡苦不甞。而數十年富貴空花。忽焉若前塵影事。向所謂外也末也者。亦何有於厚享哉。嗚呼寃矣。公風神淸娟。骨相遒俊。朝會私集。望之如玉山瑤林。秀出天外。不可梯接。故人皆曰氣象如此而福祿有不歸者乎。公孝友出人。至誠見貌。自夫一匕箸一藥物。以至送死奉祭。必皆手自經理。有恔無憾。未曾頃刻忘父母。而其於弟妹。未見而思。旣見而喜。忘年忘位。相與嬉戱。故人皆曰實行如此而福祿有不副者乎。由今觀之。氣象也實行也。果未足以占人平生。而彼闒茸之倫。狐鼠之輩。揚眉吐氣。朝咻而夕嚇者。固叔世氣數之不得不反常也歟。尤可寃者。甲寅日星之綸。煌煌乎文謨之闡揚。而沒世不忘之澤。旁達于九地之下。則吾家之前後恩造。亦復何限。而其深仁大德。華枯而肉骨者。此爲第一蒙被。公卽感激忘生。入處京第。時因起居之班。自竭瞻覲之誠。又與兄弟娚妹。接屋連墻。杖屨所至。杯盤錯互。凡胸中之結轖不可解。喉間之塡咽不能道者。言之傾倒。聽之愉快。則我公桑楡之樂。若可以少舒前日欝悒之懷。而纔及四載。一朝至此。使多少擬議之成說。都不免於浮根妄想。何侈於分。而奪之斯速。臯復之夕。屢唏而不釋然者。豈亦爲此。而天所以厚我公者。其如台已乎。嗚呼寃矣。雖然公之訃聞也。自上屢示嗟惜之意。又以嫂氏之中路阽危。有榘之千里戴星。憫惻之敎。不啻鄭重。筵臣歸傳。闔門感泣。而閣中上下。兼綰率屬。莫不有百身之思。殄瘁之慟。歷擧實績。云今誰恃。則公之亡。不但爲一門盛衰之大關。而其於世道時運。綦有輕重者。此可驗矣。生無益而死無聞者。滔滔皆是。而公能得此於吾君。得此於僚寀。又得此於大同之衆論。噫。彼缺陷世界。心身之榮悴苦樂。今不須爲公較絜耶。然後死之煩寃。則終不可以此塞悲矣。嗚呼。君子曰終。小人曰死。禮之建言也。然君子之於正終。自古盖難之。而公則疾革之後。言語動止。視平昔愈益雍容。間甞執弟之手。諄諄語國恩之虛負。家事之句當。推及衣衾棺槨之節。宅兆儀物之圖。細大不遺。曲加指導。而乘化之刻。尙且有問則答。有聲則喏。似此正終。未知古君子何如也。在後人不忍死之義。曷敢不一遵治命。服膺勿替。而惟是壬坐之原。以有堪輿家之異議。見方更卜己坐。謀所以屢審擇决。期於允叶。此實貞簡文敏兩世塋域之隔岡。而於文靖公幽宅。密邇而相望焉。則公居其間。亦合公首邱之願故也。嗚呼。公之引期。今不滿十日。而弟將先公而行。待公於鶴山精舍矣。肩輿往來之陳跡未入室。已涌我千斛寃淚。而楚楚之几案。秩秩之琴書。又不忍堪余摩挲。則逝將與故山猿鶴。相與哀號於松雲檜月之下耶。蘓長公贈子由詩曰。與君世世爲兄弟。更結來生未了因。此公告先妣之餘義。而亦弟之今日情事。公其許我乎。否乎。嗚呼。弟於公終天之訣。所欲訢衷者。雖須彌爲筆。大海爲墨。顧安能輸寫其弸中之萬一。而奈自失公以來。神精惝怳。如痴如醉。遇有可告可禀之事。謂公在堂。起身且向者數矣。心不守舍。手不從心。一字一涕。腐盡寸牘。而節物易遷。時食告辦。則長言之亦別。緖言之亦別。嗚呼我公。嗚呼我公。尙饗。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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