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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 참판 이공(李公) 신도비명- 이경함

병조 참판 이공(李公) 신도비명- 이경함(1553~1627)

광주목사 1604.1.28. 제수


약천집 제18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약천집(藥泉集)》

공은 휘(諱)가 경함(慶涵)이고 자가 양원(養源)이고 호는 만사(晩沙)이고 관향은 한산(韓山)이다.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부터 비로소 가문이 커져서 명망과 덕업(德業)이 이어져 왔다. 선조(宣祖) 때에 명신이 있었으니, 예조 판서로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된 의간공(懿簡公) 휘 증(增)이 바로 공의 선고이다. 배위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사직(司直) 몽원(夢黿)의 따님인데, 가정(嘉靖) 계축년(1553, 명종 8)에 공을 낳았다.

공은 기묘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을유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혀 들어가고, 전적(典籍), 정언(正言), 지평(持平), 직강(直講), 사예(司藝), 북평사(北評事), 필선(弼善), 겸 교서관 교리(兼校書館校理), 장령, 군기시 정(軍器寺正), 통례(通禮),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역임하였는데, 남양에서는 송덕비가 있었으며, 사간, 집의, 승지, 광주 목사(廣州牧使), 호조 참의, 성주 목사(星州牧使),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는데, 두 번이나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성절사(聖節使)로 명 나라에 조회하였으며 경주 부윤(慶州府尹), 황해 감사, 호조 참판, 경기 감사, 한성부 좌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역임하였으며, 전위사(餞慰使)로 명 나라 사신을 국경에서 전송하였고 부총관(副摠管)을 겸하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수하는 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였으며 병조 참판을 지내었다.

광해군 정사년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자, 공은 간흉의 뜻을 거슬러 탄핵을 받고 삭거사판(削去仕版)당하였다. 계해년 인조(仁祖)가 반정한 후 인조가 일찍이 옛날 배운 은혜가 있다 하여 불러서 한성부 우윤을 제수하고 도총부 총관과 의금부를 겸하게 하였다. 갑자년 이괄(李适)의 역변(逆變)에 공주(公州)에 대가를 호종하였으며, 호조 참판으로 옮기고 봉상시 제조(奉常寺提調)가 되었다. 을축년 나이가 70이 넘었다 하여 물러날 것을 청하자, 상은 마지못해 허락하고 해임하여 중추부(中樞府)의 직임에 임명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 5) 오랑캐가 침입하였는데 공은 병환 때문에 대가를 호종하지 못하게 되자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공은 상소를 올리고 대죄하였는데, 분한 마음으로 병환이 심해져서 이해 10월 29일에 별세하였다. 상은 놀라고 서글퍼하여 예관(禮官)을 보내어 규례와 같이 치제(致祭)하였다. 광주(廣州) 번천리(樊川里) 자좌(子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공의 초취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직장(直長) 의충(義忠)의 따님이고, 재취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진사 덕수(德秀)의 따님이고, 삼취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찰방 오(悟)의 따님인데, 세 부인의 묘소는 모두 같은 고을의 낙생리(樂生里)에 있는 아천군 묘소 왼쪽 기슭에 있다.

세 부인이 모두 자식을 생육하지 못하여 아우인 군수 경황(慶滉)의 아들 판교(判校) 전(䆄)을 양자로 삼았다. 측실에서 난 딸 하나는 군수 신희계(辛喜季)에게 시집갔다. 전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통덕랑(通德郞) 서우(瑞雨)이고, 딸은 사인(士人) 신창(申㫤)에게 출가하였다. 서우는 2남을 두었으니 형(泂)은 현재 용담 현령(龍潭縣令)을 맡고 있으며 염(濂)은 일찍 요절하였다.

공은 외모가 빼어나고 훤칠했으며 의표와 법도가 정돈되고 엄숙해서 앉을 때에는 무릎을 꿇고 앉고 설 때에는 바르게 서서 진흙으로 만든 소상(塑像)과 같았다. 때에 알맞은 뒤에야 말씀하여 함부로 희롱하거나 친압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공의 환대를 받는 것을 백붕(百朋)의 선물을 받는 것보다도 소중히 여겼다.

경자년 의간공(懿簡公)의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슬퍼하고 훼손함을 예보다 더하였으나 오히려 대부인(大夫人)이 집에 계시다 하여 슬픔을 억제한 적이 많았다. 임자년 대부인의 상을 당하자, 스스로 “내 나이가 이미 하수(下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한스러울 것이 없다.” 하여, 밤낮으로 슬피 곡하고 하루에 몇 홉의 미음만을 먹었다. 집안사람들이 공이 생명을 잃을까 우려하여 음식을 더 들기를 권하자, 공은 크게 한하며 말씀하기를 “내 날마다 죽 한 그릇을 먹었더니,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몸을 온전히 하려 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다시 나를 보통 사람으로 자처하게 하려는가.” 하고는 마침내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몸소 제사를 올리다가 넘어져 이가 부러지는 지경에 이르니, 친척들이 차마 그 뜻을 상하지 못하여 감히 다시는 맛있는 음식을 들라고 말하지 못하였다.

상을 벗은 뒤에 경상 감사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늙고 병들었다고 하여 해임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아뢰기를 “이모(李某)는 내직과 외직을 맡았을 적에 모두 직책을 잘 수행하여 칭찬을 받았습니다. 다만 노쇠한 나이에 상을 당하여 예보다 지나치게 슬퍼해서 몸이 손상되어 번거롭고 힘든 임무를 맡을 수가 없으니, 그의 사직을 허락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공이 평소 조정에서 벼슬할 적에 말씀하신 언론과 행하신 사적은, 여러 번 병난(兵難)을 겪어서 가승(家乘)이 대부분 없어져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선배와 늙은 신료들의 귀와 눈에 전해지는 것이 또한 한두 가지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

공이 처음 사헌부에 제수되었을 적에 상공(相公) 정철(鄭澈)을 추탈(追奪)해야 한다는 의논이 나와 형세가 장차 점점 퍼져 나가려 하였다. 그리하여 사림(士林)들 사이에 이견을 내세우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중한 견책을 당하니,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내 몸이 언로에 있으니, 사사로이 내 한 몸을 생각하여 국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하고는 들어가 의간공에게 여쭈니, 의간공은 막 식사를 하시다가 수저를 놓고 군주를 섬기는 대의(大義)로 권면하였다.

이에 공은 여러 사람들의 비난을 개의치 않고 터무니없는 무고임을 통렬히 변론하니, 상의 뜻이 크게 깨달아 화기(禍機)가 공의 변론에 힘입어 다소 잦아들게 되었다. 이백사(李白沙)와 김선원(金仙源) 형제는 공의 부자간이 말씀하신 것을 듣고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정사년 폐모론을 수의(收議)할 때에 백사 등 여러 공이 큰 절의를 세우다가 멀리 유배가게 되었다. 이때 공은 의금부에 있으면서 유배 보낼 곳을 의논하였는데, 마침내 공석(公席)에서 탄식하기를 “이공(李公)과 같은 분들을 어찌 세상의 의론에 영합하여 사지(死地)에 보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배지를 정하여 들이자 승지 백대형(白大珩)과 한찬남(韓纘男)은 노하여 공을 꾸짖고 아뢰는 단자(單子)를 땅에 던졌으며 사헌부의 탄핵이 뒤이어 나왔다. 아, 이 두 가지 일을 본다면 그 나머지를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이 조정에 오르던 초기에 곧바로 임진왜란을 만나 아우인 좌랑(佐郞) 경류(慶流)가 상주(尙州)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공은 의간공을 따라 아우의 시신을 찾아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으며, 대가(大駕)가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할 적에 고삐를 잡고 따라갔다. 그리고 지위와 명망이 다소 높아지자 또 윤리강상이 무너지는 변고를 만나서 여러 소인들에게 곤액을 당하여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다. 다행히 인조(仁祖)의 중흥(中興)을 만나서 여러 인재들이 모두 분발하였고, 공은 또 감반(甘盤)의 옛 은혜가 있어서 세상에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듯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치사할 때에 이르러서 끝내 명성이 그 실제에 미치지 못하고 지위가 그 덕에 차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후인들이 깊이 개탄하는 바이다.

명 나라 사신 주난우(朱蘭嵎 주지번(朱之蕃) )가 왔을 적에 스스로 주량이 크다고 자부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을 천거하여 상대하게 하였는데, 주난우가 먼저 의자 아래로 쓰러졌다. 공이 대궐에 나아가 복명하자, 상은 말씀하기를 “더 마실 수 있겠는가?” 하고는 또다시 큰 그릇으로 술 석 잔을 하사하였는데, 공은 이것을 마시고 나서 하직하고 물러갈 적에 걸음걸이가 평상시와 똑같았다. 공은 일찍이 말씀하기를 “사람의 주량은 술을 마신 뒤에 경연(經筵)의 자리에 들어가 강(講)을 마치고 나와서 공무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을 가지고 기준을 삼아야 하니, 술 마시고 취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위의(威儀)를 손상하는 자는 아무리 많이 마신들 어찌 이것을 주량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군자의 행실은 / 君子之行
효도와 충성이니 / 惟孝與忠
효도는 힘을 다해야만 하고 / 孝當竭力
충성은 몸을 돌보지 않아야 하네 / 忠則匪躬
효도에 힘을 다하였고 / 旣竭其力
또 정성을 지극히 하였으며 / 又用其誠
몸을 돌보지 않았고 / 旣匪其躬
또 명분을 바루었도다 / 又正其名
정성을 씀은 어떤 것인가 / 用誠伊何
그 큰 것이 상에 있으며 / 其大在喪
명분을 바로잡음은 어떤 것인가 / 正名伊何
그 소중함이 강상(綱常)에 있다오 / 其重在綱
공은 이 두 가지에 / 公於二者
직분을 다했다 할 수 있으니 / 可謂盡職
명문을 지어 이것을 밝혀서 / 銘以昭之
무궁한 후세에 기약하노라 / 期于無極
[주-D001] 백붕(百朋) : 
많은 돈 또는 큰 보물을 이른다.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이미 군자를 만나보니 나에게 백붕을 주신 듯하다.〔旣見君子 錫我百朋〕” 하였는바, 옛날에는 자개〔貝〕를 화폐로 썼는데, 5패를 붕(朋)이라 하였다.
[주-D002] 이백사(李白沙)와 김선원(金仙源) 형제 : 
백사는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의 호이며, 선원은 김상용(金尙容)의 호로 아우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덕망과 지위가 모두 높았다.
[주-D003] 감반(甘盤) :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즉위하기 전에 수학한 스승이다. 이경함(李慶涵)이 인조의 잠저(潛邸) 시절 스승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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