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55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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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숭조 ⾦崇祖 중종 3년(1508) 9월 13일∼?
- 김숭조 ⾦崇祖 중종 3년(1508) 9월 13일∼?김숭조(1461∼?)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자는 희지(禧之), 호는 서청자(西淸⼦)이다. 아버지는 훈련원참군 김충손(⾦衷孫)이다. 김굉필의 문인으로 148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5년 증광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였으며, 1507년 중시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 다. 1501년 정언을 시작으로 지평, 성균관 전적, 헌납,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514년 나주 금성산 산신의 폐해를 아뢰어 폐지를 건의한다. “나주 금성산은 국사(國 祀) 인데, 먼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이 무당에게 혹해서, 봄가을이 될 때마다 원근의 남녀들이 시끄럽게 모여들어 남에게 뒤질세라 기도하여 앙운을 면하려고 밤을 지내기까지 하여 추한 소문이 많으니, 풍속을 손상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호조수교에는 퇴미(退⽶)를 거두어 귀후서로 나르되 1년에 받아들이는 양을 60석 으로 항규(恒規)를 삼았으므로, 수령이 능히 금하지 못하니, 빨리 쌀을 받아들이라는 영을 거두시어 음사의 폐해를 엄하게 금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금성산 신당에서 바치는 쌀이 그런 줄 몰랐다. 이렇게 풍속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엄하게 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금성읍지』에 “무진(1508년) 9월 13일 도임하였으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은 기록이 없다. 1480년에 김숭조를 비롯한 나주향교 생도 10명이 사마시에 급제하는 큰 경사를 맞게 되는데, 이때 나주향교의 교수였던 박성건(朴成乾)이 이를 기뻐하며 경기체가 「금성별곡」 6장을 지어 노래한다. 제5장에 10명의 이름들이 나온 다. 김숭조는 진사시 급제 후 28년만에 나주목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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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안국(金安國, 1478~1543)
- 김안국(金安國, 1478~1543)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 하며, 전고(典故)에 통달하였으나 학문에서는 드러나지 않음
- 2023-08-02 | NO.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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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억룡
- 김억룡(金億龍, 1561~1592)의 자는 내무(內武), 호는 송암(松岩)이다. 절효공 후손이며 공신 모재 김사모(金嗣牟)의 차남이다.1589년(선조22) 무과 급제하여 용분위부사정(龍賁衛副司正)이 되었다. 정유재란때 형 억명, 아우 억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으로 가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영광 송촌사(松村祠)에 제향했다. 湖節5上-105-2, 光州, 丙子, 扈從 -《호남절의록》(1799)송촌사는 원래 군서면 송학리에 소재한 것으로 철종때 향중유림의 발의로 모재 김사모, 송은 김억명, 송암 김억룡, 송정 김억호, 송포 김억련 다섯부자(五父子)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시 순절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창건하고 유림들이 제향해 오던 곳이다. 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가 지난 1971년 향중유림의 재발의에 의해 현소재지인 만금리 만호동에 예전의 사우를 복원, 지금까지 매년 음력 9월21일을 향사일로 정하고 제향해오고 있다.
- 2020-04-01 | NO.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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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언 ⾦漹 명종 3년(1548) 3월∼명종 3년(1548) 4월
- 김언 ⾦漹 명종 3년(1548) 3월∼명종 3년(1548) 4월김언(1495∼1553)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호원(浩源)이다. 할아버지는 우의정 김질(⾦礩), 아버지는 부평부사 김성동(⾦誠童), 외할아버지는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으로 모두 문과 급제자이다. 1523년 기사관을 시작으로 사간원 정원, 홍문관 부수찬, 사헌부 지평, 수원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1539년 군기시 부정, 1546년 원주목사를 거쳐 당상관인 절충장군 호분위대호군을 제수 받았으나, 1547년 동지사 때의 일로 사헌부의 상소로 당상관이 취소되어 3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게 되나 바로 4월에 파직을 당하게 된다. 『금성읍지』에는 “무신(1548년)에 도임하였고, 동년 4월에 파직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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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언거(1503~1584)
- 김언거(金彦琚, 1503∼1584)의 본관은 광산,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漆溪)이다. 김정(金禎)의 셋째 아들로 광주에서 태어났다.김언거는 1525년(중종20) 사마시司馬試, 1531년 문과에 병과 12위로 급제한 뒤 이듬해 예조좌랑 및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1542년에는 낭관을 지내다가 체직되었고, 1545년에는 금산군수에서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며, 1546년(명종1)에는 경상도 상주목사가 되었다. 1550년에 통정, 응교, 사헌부 장령을 거쳐 1552년에는 사헌부 헌납, 1553년에는 연안부사가 되었고, 1555년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체직되었다. 1557년에 승문원 판교에 올랐으며 1560년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저서로는 <죽와휘어竹窩彙言>, <송사절요宋史節要>, <가례초家禮抄>, <역대명신간소초歷代名臣諫疏抄> 등의 책이 있다.풍영정 앞을 흐르는 극락강은 칠천이라 불렸는데, 자신의 호를 여기에서 따온 것으로 볼 때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강호자연을 애호하는 높은 풍류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광주 신창동 극락강변의 선창산 위에 자리한 풍영정은 근동에서 으뜸의 풍광을 가진 곳으로, 칠계 선생이 1560년(명종15) 내직과 외직의 오랜 관료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으로돌아온 직후에 지었다. 이곳에서 그는 82세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송순, 이황, 김인후, 기대승, 고경명 등 이름난 문인들과 교우하며 지냈다.풍영정에 남아있는 이들의 제영현판은 이때의 흔적이다.또한, 여기에는 '제일호산'이라는 편액도 걸려 있는데, 이는 명필 한석봉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풍영정 원운은 병조판서 조계원이 이곳을 지나면서 지은 것으로, 그의 6대손광주목사 조진민이 새겨 걸었다. 1948년 후손들이 지붕을 수리하였는데, 당시의 기록이 풍영정수리후추모서실 현판으로 남아있다.풍영정 내에는 김인후, 이황, 박광옥, 기대승, 고경명, 이덕형, 송인수, 이호민, 권필, 이안눌, 박언침 등의 제영이 걸려있다.《조선왕조실록》에 김언거는 14회(중종실록 1회, 명종실록 13회) 언급된다. 그런데 그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사관은 그가 임백령 등에게 붙어 벼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이상하, 퇴계생각, p 113-114 참조)회재 박광옥이 지은 묘지명에는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시렁 위에 만권의 책을 꽂아놓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적고 있어 이들 정자에서 많은 독서를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 2020-03-27 | NO.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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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언복
- 김언복(金彦福)의 자는 복우(福宇). 본관은 김해(金海). 고려조 때 판도판서(版圖判書) 관(管)의 후예이며, 문민공(文愍公) 탁영(濯纓) 일손(馹孫)의 증손이다. 어려서부터 기국(氣局)이 크고 영매하며 힘이 또한 장사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 자질들 수십 명을 이끌고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의병진에 달려갔다. 군 참모로써 많은 훈공을 세웠다.금산이치(錦山梨峙) 싸움에서는 몸을 날려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수많은 적의 목을 자르고 용전분투하였으나 패세를 만회할 길이 없어 고경명과 더불어 같은 날 순절(殉節)하였다. 뒤에 혼을 불러들여 장사지내고 선무훈(宣武勳)에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담양삼강록 다른 기록도 있다.본관(本貫)은 김해(金海), 판서(判書) 효심(孝芯)의 후손(後孫), 봉사(奉事) 분(芬)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9년에 무과(武科)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의주(義州)에서 왕(王)을 호위했본관(本貫)은 김해(金海), 판서(判書) 효심(孝芯)의 후손(後孫), 봉사(奉事) 분(芬)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9년에 무과(武科)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의주(義州)에서 왕(王)을 호위하고 또 아들 직장(直長) 경입(敬立), 아우 언수(彦壽)와 함께 군량을 모집(募集)하여 도원사 권율(都元師權慄)을 따라 전공(戰功)을 세우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참여했다. 湖節3下-173-1, 光州, 壬辰, 熊峙殉節 -《호남절의록》(1799)
- 2020-04-01 | NO.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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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휘(金永暉)- 정홍명의 기옹만필(畸翁漫筆)
- 정홍명(1582~1650)의 기옹만필(畸翁漫筆) ○ 김영휘(金永暉)는 자는 국서(國舒)요, 집이 광주(光州) 석보촌(石堡村)에 있었는데, 한평생 문을 닫고 양생(養生)하며 매우 수련(修鍊)하는 방법을 좋아하였다. 집 둘레에 구기(枸杞)를 가득 심고, 그 뿌리와 가지로 좁쌀을 쪄서 밥을 지으며, 그 잎과 열매로 나물을 하고 술을 빚어서 항상 먹고 마시며 때로 뜻이 맞는 친구가 오면 문득 내놓고 권하였다. 재주와 학식이 비범하고 언어가 강개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하였다.내가 소시적에 함께 놀게 되었는데, 미목(眉目)이 환하여 산택(山澤) 간의 높은 선비의 골격이었으며, 술자리에는 반드시 마음을 털어놓고 못할 말이 없이 하면서, 서로 알기가 늦었다고 하였다. 나이 60이 못되어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영남 사람 곽재우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연히 난리 중에 김영휘를 만나서 양생법을 알았다.” 하였다.
- 2022-05-03 | NO.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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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淳 순조 6년(1806) 7월 13일∼순조 8년(1808). 4월
- 김용순 ⾦⿓淳 순조 6년(1806) 7월 13일∼순조 8년(1808). 4월김용순(1754∼1823)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시백(施伯)이다. 아버지는 김이기(⾦ 履基)인데 1787년 8월부터 1790년 6월까지 광주목사를 지냈다. 1777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86년 원릉참봉, 1787년 내섬봉사, 1788년 전생봉사(典牲奉事), 1790년 종묘직장, 1792년 내섬직장, 1793년 상의직장, 1794년 제용주부, 형조좌랑, 1795년 제용판관, 1797년 신천군수, 1801년 고양군수, 1804년 부평부사를 지냈다. 1806년 6 월 22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7월 2일 하직하고 7월 13일 도임하였다. 1808년 3월 27일 전라도우수사 권탁(權逴)의 장계에 따라 나수(拿囚)되었는데 4월 11일 기록에 전선관리를 못한 죄상이 나온다. 1810년 3월에 호조정랑, 8월에 서원현감, 1813년 청주 목사, 1817년 5월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1819년 6월까지 역임하였고, 1819년 평양서 윤, 1821년 장악원정을 역임하였다.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병인 (1806년) 7월 13일에 도임하였고 무진(1808년) 4월에 수군 훈련을 위한 전선(戰船)을 출발시키지 않는 일로 4월 11일에 나포되어 파직 당하였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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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현 ⾦佑鉉 고종 2년(1865) 8월 16일∼고종 5년(1868) 9월 17일
- 김우현 ⾦佑鉉 고종 2년(1865) 8월 16일∼고종 5년(1868) 9월 17일김우현(1800∼1881)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우보(佑輔),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 의주부윤 김재원(⾦在元), 형 김공현(⾦公鉉)은 문과 급제자이다. 1844년 45세에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여 1845년 창릉참봉, 1847년 제용 부봉사, 상서 부직장, 1848년 조지 별제, 사직령, 1849년 공조정랑, 1850년 휘경원령, 1852년 의릉령·토산현감, 1855년 과천현감·포천현감, 1856년 강서현령, 1857년 부안현감, 1861년 고부군수, 1862년 삼척부사를 지냈다. 1865년 6월 22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고, 1868년 9월 17일 신병이 중하여 파직되었다. 1875년 통정대부·첨지·공조참의, 1879년 호군, 1881년 동의 금부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축(1865년) 6월 22일에 삼척부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8월 3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8월 16일에 나주에 부임하여 재직하다 1868년 9월 17일 신병이 있어 이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척도호부 옛 관아 터에 「부사 김우현 흥학비(府使 ⾦佑鉉 興學碑)」가 세워져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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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홍 ⾦宇弘 선조 5년(1572) 5월 7일∼선조 6년(1573) 9월
- 김우홍 ⾦宇弘 선조 5년(1572) 5월 7일∼선조 6년(1573) 9월김우홍(1522∼1590)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면부(勉夫), 호는 지족당(知⾜堂) 또는 이계(伊溪)이다. 아버지는 삼척부사를 지낸 김희삼(⾦希參)이며, 동생으로 광주목 사를 지낸 부제학 김우굉(⾦宇宏), 전라감사를 지낸 예조참판 김우옹(⾦宇顒)이 있는데 모두 문과 급제자다. 1546년에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155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에 등용되었다. 1558년 승정원 주서, 1562년에 병조좌랑, 1563년 경상도 도사, 1564년 함양군수, 1572년 5월 나주목사로 부임했다. 1575년에는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고, 그 뒤 통정대부가 되어 영흥부사, 밀양부사를 지냈다. 『금성읍지』에는 “임신(1572년) 5월 7일 도임하였고, 계유(1573년) 9월에 재난으로 파직을 당하였다. 갑술(1574년) 봄에 자혜비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다. 나주 객관 금성관 경내에 「목사김우홍자혜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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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 ⾦濰 영조 13년(1737) 7월 8일∼영조 13년(1737) 10월 4일
- 김유 ⾦濰 영조 13년(1737) 7월 8일∼영조 13년(1737) 10월 4일현감 김유(1685∼?)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아버지는 단양군수 김중우(⾦重禹)이다. 1702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고, 1710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 1715년 승문원 부정자·황해감사, 1715년 주서, 1717년 전적, 1718년 연기현감, 1720년 부사과, 1722년 금성현령(⾦城縣令), 1723년 장령, 1724년 정언, 1725년 집의, 1727년 사간, 1728년 남원부사, 1729년 부사과, 1731년 승지, 1733년 안동부 사, 1735년 호조참의, 1736년 승지를 역임하였다. 1737년 5월 22일 금성현감에 제수되어 7월 8일에 부임하였다. 1737년 예조참의·대사간, 1738년 부사직·우부승지·경 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1739년 대사간, 1741년 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 읍지』에는 “정사(1737년) 7월 8일 도임하였고 같은 해 10월 4일에 대간의 장계에 의하여 체직 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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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현
- 김유현(金裕鉉) ; 동학 광주접주-백년약사(상권)
- 2020-04-03 | NO.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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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희 ⾦有喜 헌종 10년(1844) 7월 27일∼헌종 13년(1847) 5월 9일
- 김유희 ⾦有喜 헌종 10년(1844) 7월 27일∼헌종 13년(1847) 5월 9일김유희(1787∼?)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대이(⼤⽽)이다. 부친은 김노창(⾦魯昌) 이며, 서울 출신이다. 1819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820년 원릉참봉, 1821년 금부도사, 1822년 군자감봉사, 1823년 도청부사직·군자직장, 1824년 군자주부, 1827년 순안현령, 1830년 재령군수, 1835년 익릉령, 1836년 의빈도사·무장현감, 1841년 고원군수, 1843년 청풍부사를 지냈다. 1844년 6월 2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7월 27일 부임하여 재직하다 1847년 5월 9일 휴가를 얻어 상경하였다가 1847년 7월 6일병이 심하여 파직되었다. 1847년 11월 29일 『승정원일기』에 전 목사 김유희의 궁가의 전결, 섬의 세미(稅⽶), 삼향창 환미, 사송(詞訟)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나주객사 내 1849년에 세운 「목사김후유의거사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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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제 ⾦允悌
- 김윤제 ⾦允悌 김윤제(1501∼1572)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자는 공로(恭⽼), 호는 사촌(沙村)이다. 장례원 사평을 지낸 김후(⾦詡)의 아들로 광주 출신이다.1528년 식년시에 진사 합격 하였고, 1531년 식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직강, 홍문관 교리와 전중어사겸 춘추관편수관을 역임하고, 지방수령으로 나아가 고창현감, 부안군수, 전주진관 병마절제사를 거쳐 1555년 나주목사에 부임하였다. 나주목사로 있을 때, 기대승(奇⼤升)이 엮은 《주자문록(朱⼦⽂錄)》 4책을 간행하였다. 1560년 나주목사를 마치고 향리 광주에 환벽당을 짓고 시를 읊으며 후학을 양성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서하당(棲霞堂) 김성원(⾦成遠)이 대표적인 제자다. 『금성읍지』에는 “을묘(1555년) 6월 1일 도임하였 고, 체직일은 기록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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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제(金允悌)
- 김윤제(1501~1572)의 자는 공로(恭老)이며 호는 사촌(沙村)으로 광주인이다. 증조부인 김자침(金自沈)은 진사를 하였으며 참의에 증직되었고, 조부 김문손(金文孫)은 진사를 하였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부친 김후(金珝)는 진사를 하였으며 음직으로 정랑과 현감을 지냈다. 모친은 礪山 金氏로 석저촌(石底村)에서 김윤제를 낳았다. 지금의 북구 충효동이다.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수학하였는데 明敏하여 일반인과 다른 자품이 있었으며 文藝를 일찍 성취하였다. 1528년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153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숙부 김함(金瑊, 1476~1538)과 더불어 나란히 입조하니 당세의 聲望이 무거웠다. 直講·弘文館敎理·殿中御使兼春秋館編修官을 역임하였고 지방 수령으로서의 능력이 있어 全州鎭營 兵馬節度使, 扶安郡守, 羅州牧使 등 13개 고을에 수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사촌 김윤제는 16세기 호남사림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息影亭, 瀟灑園과 함께 星山詩壇의 한 부분인 環碧堂을 중심으로 시단을 이루어 당대 명류 시인들과 수창하였다. 사촌은 말년에 환벽당에 은거하면서 후인의 교육에 전념하여 鄭澈, 金成遠, 金德齡 등을 계발시켰다.김윤제가 교유한 대표적 인물들을 살펴보면, 宋純, 林億齡, 金麟厚, 蘇世讓, 梁山甫 부자, 奇大升, 梁應鼎, 金成遠, 鄭澈, 高敬命, 白光勳 등 湖南詩壇의 대표적 시인들이었다. 이런 인물들에 의해 환벽당을 주제로 한 제영과 풍경을 배경으로 한 시가 많이 남아있다. 문학공간 환벽당에서 탄생한 시들은 시어의 이미지가 맑고 그 소리가 유려하여 가락이 붙어 있어 맑고 담박한 인상을 준다. 이런 시들은 당시 호남시단의 시적 특성이 보인다. 환벽당 시인들은 호남시단의 중심인물들이었고 당시풍을 추구하던 시인들이었다. 그들의 시는 기본적으로 흥감을 중시 한다. 환벽당에서 제작된 시들은 대상과 합일을 추구하거나, 시인 자신을 공간 속에 대상화 객관화하여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대체적으로 시적 대상과 시인의 감정이 융합된 함축성이 강한 시들이 많다.
- 2020-03-19 | NO.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