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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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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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광욱 ⾦光煜 인조 16년(1638) 8월 24일∼인조 17년(1639) 8월
    김광욱 ⾦光煜 인조 16년(1638) 8월 24일∼인조 17년(1639) 8월김광욱(1580∼1656)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회이(晦⽽), 호는 죽소(⽵所)이다. 아버지는 형조참판 김상준(⾦尙寯)이며, 어머니는 이천우(李天祐)의 딸이다. 1606년 증광시에 진사시와 문과에 병과로 동시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배속되었다가 1608년 검열, 1609년 대교·설서, 1610년 사서·사간원 정언, 1611년 부수찬, 1612년 병조좌랑, 1613 년 계축옥사 때 아버지와 함께 연루되었으나 풀려났다. 1633년 양서 관향사, 1637년 동부승지, 1638년 좌부승지를 역임하다가 7월 25일 나주목사를 제수받았다. 8월 24일 하직하고 9월 12일 부임하여 1639년 8월에 이임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전라감사가 올린, 나주의 양전 감관(量⽥監官)을 조사한 계문에 대하여 아뢰는 이후원(李厚源)의 계가 있다. 쌀을 징수하여 폐단을 야기한 무리에 대한 형률에 대해 나주목사 김광욱이 사핵한 것과 해조의 회계가 모두 적절하지 않다는 내용이다. 1641년 황해도관찰사, 1643년 좌승지, 1644년 우승지·우부빈객, 1646년 도승지·예문각 제학, 1648년 도승지, 1650년 동지중추부사·경기감사, 1652년 개성유수, 1654년 동지정사, 1655년 좌참찬을 역임하다 1656년 사망하였다. 문집으로 『죽소집(⽵所集)』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무인(1638 년) 9월 12일 도임하였고 체직 일자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으나 다음 목사의 부임일 등을 보아 1639년 8월까지 재임한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문정(⽂貞)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480
  • 김국광(1415~1480)
    성종실록 123권, 성종 11년 11월 11일 정해 5번째기사 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광산 부원군 김국광의 졸기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김국광(金國光)이 졸(卒)하였는데, 철조(轍朝)·조제(弔祭)·예장(禮葬)을 예(例)대로 하였다. 김국광은 자(字)가 관경(觀卿)인데, 광주인(光州人)으로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철산(金鐵山)의 아들이다. 정통(正統) 신유년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뽑혀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천전(遷轉)되어 박사(博士)에 이르렀다. 을축년 에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에 승직(陞職)되고,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성균 주부(成均主簿)·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을 역임(歷任)하였다. 경태(景泰) 을해년 에 조모(祖母)의 상(喪)으로 복(服)을 입었는데, 세조(世祖)가 ‘김국광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으니, 좌우에서 상을 당했다고 대답하였다. 삼년상을 마치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가, 이어서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에 승직되었으며,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고, 성균 사예(成均司藝)·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으로 천전(遷轉)되었었다. 경진년 에 특별히 중훈 대부(中訓大夫) 사섬시 윤(司贍寺尹)을 더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천전되었으며, 신사년 에는 가선 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승계되었다. 세조가 항상 그의 암련(?鍊) 을 칭찬하여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서 내려 주었다. 그때 승지(承旨)들이 일로 인하여 견책(譴責)을 받으니, 김국광에게 명하여 승정원(承政院)의 출납(出納)을 관장하게 하였다. 갑신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초배(超拜)되고 성화(成化) 을유년에 정헌 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승계되었으며, 병술년에는 숭정 대부(崇政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승계되었다. 정해년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천전되었다가, 이어서 우찬성(右贊成)에 승직되었는데, 그때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의 주벌(誅伐)로 정충 출기 적개 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숭록 대부(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으로 승계시켰으며, 광산군(光山君)으로 봉하였다. 한때 김국광을 비방(誹謗)하는 익명서(匿名書)가 붙은 적이 있었는데, 간관(諫官)이 이것에 의거하여 죄를 청하니, 세조가 크게 노(怒)하여 간관을 저촉시켜 대죄(待罪)하게 하였으며, 김국광이 일찍이 의정(議政)을 역임한 적이 있다 하여 원상(院相)을 삼으니, 김국광이 찬성(贊成)으로서 또한 참여하였다. 기축년에는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승계되었는데, 주상(主上)이 즉위하여 좌의정(左議政)으로 진배(進拜)하였다. 신묘년에는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봉하였다. 계사년에 어미의 상을 당했는데, 을미년에 삼년상을 마치니,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을 제수하고, 정유년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수하였으며, 무술년에 도로 부원군으로 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66세였다. 시호(諡號)가 정정(丁靖)인데,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정(丁)이요, 공손하여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정(靖)이다.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은 이간(吏幹)이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데 치밀하고도 명료하였다. 세조조(世祖朝)에 함안(咸安) 사람 최옥산(崔玉山)이 그 아비를 죽였다 하여 옥사(獄事)가 거의 이루어지자, 세조가 놀라서 말하기를, ‘어떻게 이같은 일이 있는가?’ 하고, 김국광을 보내어 다시 국문하게 하였는데, 김국광이 그 옥사를 모두 뒤집으니, 최옥산은 마침내 죄를 면하게 되고, 추문(推問)하던 관리들이 모두 중죄(重罪)를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자못 임금에게 사랑받게 되었었다. 상정국관(詳定局官)이 되어서는 주대(奏對)하는 것이 임금의 뜻에 맞으니, 세조가 사리(事理)를 아는 것이 제일이라고 지목하였다. 몇 년이 되지 아니하여 판서(判書)에 발탁되고,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가니, 총애(寵愛)를 받아 임명된 것이 견줄 데가 없었다. 오랫동안 무선(武選)543) 을 관장하니, 문정(門庭)이 저자[市]와 같았고, 집안이 크게 부유하게 되었으며, 아우 김정광(金庭光)과 사위 이한(李?)이 모두 장죄(贓罪)로 패몰(敗沒)하였다. 재상(宰相)이 되어 대간(臺諫)에게 두 번이나 논박(論駁)을 받았는데, 주상 또한 그 간악(奸惡)함을 알았다. 무릇 대신(大臣)으로서 졸하면 으레 특별한 부의(賻儀)가 있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구례(舊例)를 써서 바치니, 명하여 정지시켰으며,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諡號)를 정(丁)으로 의정(議定)하자, 아들 김극유(金克?)가 여러 번 글을 고칠 것을 논하였으나, 끝내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하였다.【태백산사고본】 18책 123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173면【분류】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2020-05-08 | NO.479
  • 김귀인
    김귀인(金貴仁), 湖節2下-131-1, 光州, 壬辰, 一道殉節-《호남절의록》(1799)
    2020-04-01 | NO.478
  • 김규식 ⾦奎軾 고종 26년(1889) 8월 22일∼고종 27년(1890) 7월 1일
    김규식 ⾦奎軾 고종 26년(1889) 8월 22일∼고종 27년(1890) 7월 1일김규식(1838∼1896)의 본관은 청풍(淸⾵)이며, 자는 우약(⾬若)이다. 아버지는 이세호 (李世鎬)이다. 1870년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검교대교(檢校待敎)를 시작으로 1872년 우부승지, 1873년 우승지, 1879년 행부호군·이조참의, 1880년 원임대교,1882년 우승지, 1886년 부호군, 1887년 병조참지, 1888년 병조참의·우부승지, 1889 년 수궁검교대교(守宮檢校待敎)를 지냈다. 1889년 6월 30일 나주목사에 제수되고 8월 22일 부임하였다. 1890년 동부승지, 1892년 좌부승지, 1893년 행우승지·호군, 1895 년 5월 진주부관찰사, 1895년 7월 충주부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기축 (1889년) 6월 30일에 제수받아 8월 6일 임금에게 사조하고 8월 22일 부임하였으며 경인(1890)년 2월에 민란(광양)을 다스리고 7월 1일에 진향사(進⾹使)가 되어 경성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축(1889년) 9월 17일에 광양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가 되어 진압에 나섰고, 10월 30일 “안핵사(按覈使) 김규식(⾦奎軾)이, ‘광양현 백성들의 소란에 수창(⾸倡)한 죄인 정홍기(鄭洪基), 박상룡(朴尙⿓)을 이달 14일에 효경 (梟警)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금성읍지』의 기록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6년 2월에 “충주부관찰사 김규식, 청풍군수 서상기, 단양군수 권숙이, 난민들이 소동을 일으켰을 때 해를 입었습니다.”라는 보고를 통해 사망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1910년 8월 24일 충헌(忠憲)이라는 시호와 은전이 하사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477
  • 김극추金克秋(1552~1610)
    김극추(金克秋), 湖節1上-084-2,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여직汝直, 호는 절봉節峰이다.  탁영 김일손의 증손으로 알려져 있다. 김극추金克秋(1552~1610)는 어렸을 때부터 용감했을 뿐 아니라 학문도 깊어 주변의 부러움을 샀으며 의병장군 권율과 인연으로 의병에 투신했던 의로운 선비이다. 1552년 4월 8일 광주시 서구 서창동 사동 절골마을에서 참봉을 지낸 김필金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기 드물게 문무를 두루 갖춰 권율과 인연으로 의병에 투신했던 의로운 선비였다.당시 광주 목사로 부임했던 권율은 그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해 그의 역량이 소문과 같은 것을 확인한 후 지근거리에 두고 친교를 나눴다. 학문을 논했을 뿐 아니라 무예 겨루기를 즐겨했다. 의기를 갖춘 권율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그는 권율의 막하에 들어가 앞장서서 왜군과 싸웠다.권율이 피로써 맹세하고 있는 힘을 다해 왜군을 함께 무찌르자고 호소하자 1천 5백여명의 의병이 모였다. 광주관내 5백명 전라도 인근 1천명이었다. 광주공원에서 광주 향교 가는 길 오른 편 기슭 철제계단을 올라가면 비석 스무개가 있다. 이 중 맨 앞줄 은행나무 바로 앞에 광주 목사 권율과 관련된 비가 하나 있다.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碑이다. 이 비의 옆면 두 곳에 권율과 같이 전투에 참여한 인사의 명단이 적혀 있다. 김극추의 이름이 올려 있는 것은 당연하다.『호남절의록』에는 1592년 7월 전북 금산 근처의 이치梨峙 전투에 참가해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훈상으로 훈련원주부에 임명되었다고 했다. 『충의사록』에서는 자세하게 이치전투에서 고을장정들을 인솔하여 영정곡永貞谷에 복병하였다가 큰 전과를 올려 훈련원 주부에 임명된 뒤 행주전투에 참전하여 끝까지 싸워 큰 공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그 뒤에 한성참군이 되었다가 정우위별무사로 선별되었다. 권율 막하에 다시 들어가 활약할 때 정충신, 이충립, 고성후, 이완근, 이세환, 박대수, 김치원 등과 광주 8장사의 한사람으로 꼽혔다.그는 행주전투 이후 특진하여 내직으로 병조좌랑, 군기첨정을 지냈고 외직으로 경성판관, 해미현감을 거쳐 영천군수로 있을 때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으로 파면을 당했다. 그를 따르던 군민들의 탄원으로 다시 군자감정이 되었다. 1605년에 선무후종3등공신에 책록되었다.그러나 임진왜란 때 입은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1610년 1월 9일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좌승지로 중직정려를 명하여 광산구 우산동에 있는 삼강정려에 모셔졌으나 주택단지에 편입됨에 따라 현재는 이설되었다. 충남 금산 금곡사에 배향되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증손으로 알려져 있다.
    2018-05-28 | NO.476
  • 김기현 ⾦箕絢 철종 4년(1853) 12월 27일∼철종 6년(1855) 10월 15일
    김기현 ⾦箕絢 철종 4년(1853) 12월 27일∼철종 6년(1855) 10월 15일김기현(1779∼1866)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자는 성소(聖素)이다. 아버지는 사옹원 주부 김상종(⾦相種)이다. 1816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829년 정릉참봉, 1831년 사재봉사, 1834년 종묘 부봉사, 1835년 상서 부직장, 선공감 주부, 1836년 충훈도사, 1837년 삼등현령, 1843년 예천군수, 1844년 울산부사, 1846년 대구판관, 1850년 여주목사를 지냈다. 1853년 11월 15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2월 17일 부임하였다.1854년 윤7월 3일에 전라우도암행어사 박인하(朴麟夏)의 서계에 따라 이조에서 “장부를 결부(結簿)에 넣고 양호(養⼾)의 폐단을 막았고, 군정(軍丁)의 원망을 살피고 균포(均布)의 규정을 혁파하여 2만 냥의 공납(公納)을 쇄환(刷還)하고 마을에는 엄히 독촉하는 근심이 없고, 300명의 굶주린 가호를 진휼하고 들에는 안집하는 기쁨이 있으며 고을의 일은 삼정(三政)을 모두 거행하였고 민정(民情)은 10년 동안 유임 되기를 원한다.”고 고하였으니, “이를 기원(飢願)으로 삼고, 300년의 기호(飢⼾)를 진휼하고, 들에는 안집하는 기쁨이 있을 것이고 고을의 일은 세 가지 정사가 모두 거행될 것이니, 민정(民情)은 10년 동안 유임(留任)되기를 원할 것입니다.”라 하면서 승서(陞敍)의 논의가 있었다. 신병으로 파출되었다. 1860년 남원부사, 1862년 인천부사, 1862년 함평현감, 진주목사, 1865년 남양부사, 1865년 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계축(1853년) 12 월 27일에 여주목사에서 옮겨 부임하였고 을묘(1855년) 10월 15일에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나주시 영산동주민센터, 신안 자은면,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에도 김기현 선정비와 영세불망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8 | NO.475
  • 김노종 ⾦魯鍾 순조 25년(1825) 10월 13일∼순조 27년(1827) 3월
    김노종 ⾦魯鍾 순조 25년(1825) 10월 13일∼순조 27년(1827) 3월김노종(1764∼?)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대응(⼤應)이다. 아버지는 첨지 김건주 (⾦健柱)이다. 1804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809년 건릉참봉, 1811년 선공부봉사, 1812년 상서부직장, 평시령, 1813년 금구현령, 1819년 부평부사를 지냈다. 1825년 9월 10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0월 13일 도임했다. 1827년 예문관 제학을 역임하였 다. 『금성읍지』에는 “을유(1825년) 10월 13일 부임하였고 정해(1827년) 3월에 체직되 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474
  • 김달생(金達生)
    풍영정 주인 김언거의 9대손 거이당(居易堂) 김달생(金達生 1745~1791)은 대를 이어 풍영정을 운영하며 거이(居易)하며 지냈다.이곳에 김달생과 유유상종했던 시기에 서유승(徐有升), 정기정(朴基正), 이복영(李復永), 윤치용(尹致容), 심의복(沈宜復) 등이 들려 시문을 남겼다.여기에서 읊은 시들은 모두 풍영정의 정취를 읊고 있으며, 55수 가량이나 된다. 
    2020-03-11 | NO.473
  • 김덕령(金德齡)
    임란 최후 의병장이자 조선의병 총수인 김덕령(1568∼1596)의 자는 경수(景樹)로 광산이다. 양녕대군의 장인인 한로(漢老)의 12세손이며 1470년 무렵 광주 서구 금호동에서 충효마을(당시, 석저촌)로 터를 옮긴 문손(文孫)은 그의 고조부이다. 1568년 12월 29일 붕변(鵬變)과 남평 반씨 3남 3녀 중 둘째아들로 석저촌(石底村)에서 태어났다. 종조인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17세에 향해(鄕解, 초시)에 합격하고, 18세 때 담양에 사는 흥양이씨 부인과 혼인하였다. 20세 되던 해에는 형 덕홍과 자부(姊夫) 김응회(金應會)와 함께 우계 (牛溪)  성혼(成渾)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월 형 덕홍과 함께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지만 어머님 봉양을 위해 다시 광주로 귀향 후, 주검동(鑄劒洞)에서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로 보급하는 등 후방에서 관․의병 지원활동을 하였다. 김덕령(金德齡), 湖節2上-001-1, 光州, 壬辰, 忠勇將 -《호남절의록》(1799)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함에 따라, 조정에서 호남에서 유능한 장수를 뽑아 경상도로 보내기로 하여 김덕령을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과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추천하고, 전라도순찰사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의 조정에 천거가 있은 뒤, 12월 27일 분조인 전주 무과시험장에서 수많은 수험생들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임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곧바로 세자(광해군)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고, 왕(선조)으로부터 충용군(忠勇軍)이란 호칭을 받게 된다.1594년 1월 22일 담양을 출발하여 남원에서 도착하여 남원사람 최담령(崔聃齡)을 별장으로 삼고, 군사훈련을 시킨 다음, 함양, 산청을 거쳐 4월 초 진주 대곡면 대곡리에 도착하여 이곳에 진을 치고 있을 무렵, 왕의 특명으로 제도의 의병을 혁파하여 장군에게 예속시킴에 따라 조선의병의 총수가 된다. 그해 여름 진지를 대곡리에서 대여촌(현, 금산면 가방리)으로 진을 옮기고 군사 훈련에 박차를 가하면서 진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월아산(482m) 정상에 목책을 설치하여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는가 하면 정상부근에 제무소를 두어 무기를 직접 만들기까지 하였다.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시기는 강화교섭기로서 큰 전과는 없었지만, 고성․창원․정암진 전투의 전과를 통해 왜군이 진주 일원의 지역에 다시는 출현할 수 없도록 하여 결국 전라도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1594년 9월, 곽재우․이순신․원균과 함께 참전한 수륙연합 장문포 해전에서의 별 전과를 거두지 못하자 도체찰사 윤두수가 체직되고, 김덕령 장군 또한 조정과 여러 사람들로부터 기대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1595년 12월, 김덕령은 엄격한 군율 적용하였다하여 살인죄로 체포 구금되지만 무고가 드러나, 왕의 특명으로 이듬해 2월 말 석방된다. 하지만 1596년 7월,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로 다시 잡혀가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한 장군은 “충효로서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1596년 8월 21일 여섯 차례의 고문을 받은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당시 장군의 나이는 겨우 29세였다. 장군이 죽기 직전 옥중 생활의 심정을 한탄하면서 춘산곡 을 노래했는데 현대어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봄철의 산에 불이 나니 피지도 못한 꽃들이 불이 붙어 다 타는구나.저 산에 일어난 불은 물을 뿌려 끌 수 있지만이 몸에 연기도 없는 불이 일어나니 이 불은 끌 물조차 없는 것을 한탄하노라.이 노래는 억울한 누명을 내(연기)없는 불에 비유해 산불은 끌 수 있으나 자기의 몸속에 붙어 타오르고 있는 억울한 마음의 불은 끌 수 없음을 비유하여 한탄하는 의기가라 하겠다.김덕령 장군이 억울하게 죽은 지 65년이 지난 1661년(현종 2) 왕의 특명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이후 1668년(현종 9)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1681년(숙종 7) 병조판서로 가증되었다.1785년(정조 9) 충장(忠壯)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3년 뒤인 1788년(정조 12) ‘정려비와 충효리’를 하사한다.1789년(정조 13) 또다시 종1품 관직인 좌찬성(左贊成)에 가증되었다. *《광주읍지(1879)》, 《국역 김충장공유사(1979)》, 《김덕령 평전(2006)》
    2020-03-06 | NO.472
  • 김덕보
    김덕보(金德普), 湖節4下-127-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호남절의록》(1799)김덕보(金德普)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룡(子龍), 호는 풍암(楓巖).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박씨(南平朴氏)로 직장 박계종(朴繼宗)의 딸이다. 형이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다.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 지금의 충효동에 살았다.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고로 형 김덕홍(金德弘)·김덕령(金德齡) 등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을 전라도 곳곳에서 격파하였다. 그 뒤 김덕홍이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금산에서 전사한 데다가 김덕령이 무고에 의해 옥사하자 향리에 돌아가 세상의 일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힘을 기울였다.1626년(인조4) 2월 3일에 김덕보가 안방준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을 장원서별좌(掌苑署別坐)에 추천해준 일은 감사하지만 병으로 부임할 수 없음을 밝히고, 안방준과 함께 산방(山房)에서 지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이는 안방준의 교유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노병이므로 전장에는 나가지 못하고 죽었다.  1785년(정조 9) 전라도 유생 기석주(奇錫周) 등의 상소에 의해 큰형 김덕홍과 함께 포상, 추증되었다.
    2020-03-30 | NO.471
  • 김덕우(1548~1633)
    양촌 김덕우(金德宇, 1548~1633) 는 명종과 인조 때인 조선 중기 의병으로 자는 언용(彦容), 호는 양촌(良村)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노동(蘆洞)에서 출생하였다.판서(判書) 김인우(金仁雨)의 후손으로, 부친 생원(生員) 김경희(金景熹)와 모친 사과(司果) 이세원(李世元)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유학(遊學)하였으며 경학(經學)에 전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장성(長城) 남문(南門) 밖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고 무장군유사(茂長郡有司)로서 의병 8백 인을 모집하여 진주성(晉州城) 김천일(金千鎰)의 진중에 보냈다. 의곡(義穀) 5백 석을 모취(募聚)하여 의곡장(義穀將) 기효증(奇孝曾)을 통해 행재소(行在所)로 조납(漕納)하도록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에도 유사로서 의곡을 모아 행재소로 운송하였다. 뒤에 조정에서 동지사를 제수(除授)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임명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의병 모집 격문에 응하여 호우의곡장(湖右義穀將)으로 활약, 군량미를 강화도에 보냈다. 마침 의병을 인솔하여 여산(礪山)에 이르렀을 때, 화의(和議)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인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除授)하였고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의 녹권을 내렸다.  묘지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송암에 있고, 장성 오산사(鰲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2024-11-08 | NO.470
  • 김덕홍(金德弘)
    김덕홍(1558∼1592)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증조부는 김후(金珝), 조부는 김극효(金克孝)이다. 부친은 습독(習讀) 김붕변(金鵬變)이다. 동생은 김덕령(金德齡), 김덕보(金德普)이다.김덕홍의 호는 성암(省菴)으로 아우 김덕령과 매형 김응회와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김덕령과 김덕보 두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모셨는데 효우가 지극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의의 뜻을 가지고 어머니께 하직하고 아루 김덕령과 함께 의병을 불러 모아 전주에 이르렀을 때 적세가 매우 성함을 보고 금산으로 진격하기 전 김덕령에게 말하기를 “노모가 집에 계시는데 아우만이 혼자 있으니 우리 형제가 모두 나선다면 어머님을 보호할 사람이 없게 되니,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니 너는 돌아가서 어머님을 봉양하여라.”고 당부하였다.그해 7월 10일 제1차 금산전투에서 고경명 장군과 함께 순절하였다.  김덕홍(金德弘), 湖節1上-046-1,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 -《호남절의록》(1799)김덕보는 큰형 김덕홍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하고 작은형 김덕령이 무고죄로 옥사하자 무등산 계곡에 풍암정을 짓고 은둔했다.1785년(정조 9) 지평(持平)으로 증직하고 광주 ‘의열사’에 배향하였다. 슬하에 딸 2명을 두었다. * 《광주읍지(1879)》, 《국역 김충장공유사(1979)》, 《호남절의록(1799)》, 《김덕령 평전(2006)》
    2020-03-06 | NO.469
  • 김동선 ⾦東選 철종 13년(1862) 3월 15일∼철종 14년(1863) 7월 3일
    김동선 ⾦東選 철종 13년(1862) 3월 15일∼철종 14년(1863) 7월 3일김동선(1800∼1874)의 본관은 청풍(⾭⾵)이며, 자는 자의(⼦儀)이다. 아버지는 성균진사 김기협(⾦基恊)으로, 예조참의 김회연(⾦會淵)에게 입양 되었다. 1837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39년 영희전 참봉, 1841년 금부도사, 1842년 사재직장, 1844년 활인별제·제용주부·가례도감 낭청, 1845년 의빈도사, 1847년 백천군수, 1849년 합천군 수, 1853년 이천부사, 1855년 성주목사, 1858년 의성현령을 지냈다. 1862년 1월 28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3월 15일에 부임하였다. 9월 8일에 대동(⼤同) 결전(結錢) 상납을 지체한 일로 나수하라는 전교가 있었다. 조운의 출발을 지연시킨 일이었다. 1869년 통정대부에 오르고, 돈녕도정, 조사 오위장, 1874년 부호군, 1874년 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임술(1862년) 1월 28일에 제수되어 3월 4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3월 15일에 부임하였으며 계해(1863년) 4월에 대동선 1척이 치패된 일로 취리차 상경하였는데 용서를 받고 7월 3일에 서원현감으로 이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천시 안흥동 안흥지에 「부사김공동선 청근선정비」가 서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468
  • 김만증 ⾦萬增 숙종 25년(1699) 윤7월 22일∼숙종 26년(1700) 6월 10일 파직
    김만증 ⾦萬增 숙종 25년(1699) 윤7월 22일∼숙종 26년(1700) 6월 10일 파직김만증(1635∼1720)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자는 경능(景能), 호는 둔촌(遯村)이다. 아버지는 판서 김익희(⾦益熙)이며, 김장생(⾦⾧⽣)의 증손이다. 승지 김만균(⾦萬均)의 동생이다. 166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64년 음보로 내시교관, 1669년 사옹참봉, 1670년 세마, 1672년 우수운판관, 1674년 신녕현감, 1680년 공조좌랑·좌수운판관, 1681년 임피현령, 1685년 돈녕판관, 1686년 호조정랑, 1689년 사복첨정, 1694년 한성판관·선산부사, 1698년 좌윤을 지냈다. 1699년 7월 22일 나주목사에 부임하였다. 1701년 부호군, 1702년 청주목사, 1704년 오위장, 1708년 첨지, 1709년 돈녕도정, 1716년 부호군, 1718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금성읍지』에는 “기묘(1699년) 윤7월 22일 도임하였고 경진(1700년) 6월 10일에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467
  • 김말문 ⾦末⽂ 중종 8년(1513) 10월 17일∼중종 11년(1516) 1월
    김말문 ⾦末⽂ 중종 8년(1513) 10월 17일∼중종 11년(1516) 1월김말문(1469∼1525)의 본관은 광산(光⼭)이다. 149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98년 별시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였다. 아버지 김성원(⾦性源), 할아버지 김예몽(⾦禮蒙), 증조할아버지 김소(⾦遡)와 형 김윤문(⾦胤⽂), 김철문(⾦綴⽂), 동생 김내문(⾦乃⽂)까지 모두 문과에 급제한 명문가이다. 형제 여덟 명이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중 네 명이 대과에 합격해 ‘팔문(⼋⽂)’으로 이름을 높였다. 1501년 예문관 대교(待敎)를 시작으로 사간, 동부승지를 거쳐 1513년 8월 21일 통정대부 나주목사로 제수를 받아 부임하여 1516년 1월까지 재직하고 형조참의로 영전했다. 1522년 우승지, 1524년 좌승지를 거쳐 1525년 사망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계유(1513년) 10월 17일 도임하였고, 병자 (1516년) 1월에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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