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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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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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익두(金翼斗)
    광주(光州) 출신. 삽봉 김세근, 경당 김희환 후손이다. 호는 죽재(竹齋)이다.천성이 착하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부친이 병이 났을 때 의원이 웅자치(雄紫雉)를 구해야 한다고 말하자 크게 통곡하였다. 때마침 산 꿩이 사냥꾼에게 쫓기다 앞에 떨어져 구할 수 있었다. 이 꿩을 들고 가는데 사냥꾼이 말하길 자신이 잡으려던 꿩이라며 내놓으라고 말하자 그가 부모님 약에 쓸 것이라며 사정을 말했다. 사냥꾼이 허락하여 부친에 효도할 수 있었다. 김익두의 부인 김씨도 손가락에서 피를 부친의 입에 흘려 넣어 드시게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호남지> 5권 열행(烈行)편에 있다.순종(純宗) 때에 정려를 내렸다고 전한다.
    2020-03-09 | NO.152
  • 김인후
    문정공 하서 김인후 선생은 울산 김씨 이름은 인후 자는 후지 호는 하서 또는 담재 시호는 문정이다. 1510년에 장성 맥동에서 태어나니 자질이 비범하여 6세에 시를 짓고 8세 때 조원기 관찰사와의 시문답으로 신동의 명성을 얻다. 이듬해 기안재가 보고 세자지신을 예언하다. 세에 김모재(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우니 모재가 3대 상의 인물이라 하고 소우로 대하다. 13세에 경서공부에 정진하고 글씨도 체마다 신묘한 경지에 들다. 18세에 최신재에게 배우니 신재는 선생의 학문이 이미 심오함에 경탄하다. 19세에 상경하고 성균관시회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떨치다. 22세에 진사가 되고 24세에 성균관에서 퇴계와 학문을 강론하고 이후 그의 추중을 받다. 31세에 문과급제 승문원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호당에 들다. 34세에 홍문관박사 겸 세사시강원설서로 세자 곧 인종과 수어지교를 맺고 묵죽도 한 폭을 받아 제시를 써넣다. 유월에 홍문관부수찬이 되어 기묘사화에 관해 극렬히 논변하고 귀향하여 옥과현감이 되다. 36세에 제술관으로 일시 상경하였으나 곧 귀임하다. 7월에 인종이 승하하자 통곡기절을 거듭하며 벼슬을 그만두다. 이후 향리에서 후학교육에 힘쓰며 학문에 전념하다. 거듭 내리는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 효경간오발 대학강의발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천명도 등을 저술하는 한편 인심도심설 이기사칠론 태극론 등 도학의 주요 논점에 관한 치열한 논쟁에 선생은 심오정밀한 학식으로 의문을 명쾌히 풀어 학계의 방향을 바로잡다. 퇴계 고봉의 사칠논변에도 고봉과의 강론을 통해 많은 영향을 주다. 1560년 1월 16일 51세에 서거하다. 1662년 필암서원사액 1669년 문정시호를 받다. 1796년 정조20년 문묘에 종향되고 문정시호를 받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령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증직을 받다.
    2020-03-19 | NO.151
  • 김일(金鎰)
    김일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태숙(台淑). 호는 해은(海隱)이다.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 1261~1330)의 후손이며 동주(東州) 김덕구(金德垢)의 아들이다. 제용감(濟用監)과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숙종 때 광주(光州)로 이사했다. 그 후손들은 여수시 소라면(召羅面) 관기리(館基里)와 여수시 율촌면(栗村面) 구암리(龜岩里)에 살고 있다.*제용감은 조선시대 왕실에 필요한 의복이나 식품 등을 관장한 관서로 왕실에서 쓰는 각종 직물·인삼의 진상과 국왕이 사여하는 의복 및 사(紗)·나(羅)·능(綾)·단(緞)·포화(布貨)·채색입염(彩色入染 : 색을 입히고 물감을 들임)·직조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2020-03-09 | NO.150
  • 김찬순(金燦淳)
    김찬순(1809~?)의 본관은 김해이다. 자는 명수(明修)이고 호는 유헌(幽軒)이다.부 : 金尙白조 : 金海中증조 : 金賁載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2-24 | NO.149
  • 김치원
    김치원(金致謜 1562~?)의 자는 화제(和濟), 호는 수진당(守眞堂)이다.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권율장군을 도와 이치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湖節3上-021-3, 光州, 壬辰, 權慄參佐 -《호남절의록》(1799)칠계(漆溪) 김언거(金彦琚, 1503~1584)의 손자 김치원(金致謜 1562~?)은 ‘수진당(守眞堂)’을 경영하며 풍영정도 관리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수진당이 풍영정 동쪽 산 기슭에 있다(堂在風詠亭東麓)고 적고 2수의 시를 남겼다.(題守眞堂/潭州錄)竹裏茅齋僻 苔庭絶點塵 煙沙一面水 花木四時春 耕釣堪終老 琴棋且樂眞 蕭然北窓下 方見葛天人夜宿仙滄里 林深草閣幽 芭蕉五更雨 蟋蜶一年秋 簪紱非吾好 丘園入客愁 遙知廣津畔 黍稷滿西疇/東岳集시애서 구원(丘園)은 언덕과 전원으로 은사(隱士)가 거처하는 곳을 말하는 데  수진당(守眞堂)을 두고 그는 말하고 있다.다른 비슷한 기록도 있다. 김치원(金致源)은 광주 출신으로 선무랑 군자감주부인 관포당(灌圃堂) 김광부金光符의 아들이다. 조선 선조(宣祖) 때 음사(蔭仕)하였다.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왜병을 격퇴하고자 투필종융(投筆從戎)하고 권율(權慄)의 막료로서 전투를 독전(督戰)하다가 커다란 상처를 입었으나 굴복하지 않고 공을 세웠다. 가산(家産)을 털어 군수(軍需)에 공급하였으며 세운 공으로 인하여 훈련첨정(訓練僉正)에 오르고 공훈이 기록되었다. [참고문헌] 전라남도지 또 임진왜란 때 도원수 휘하에서 활약했던 이세환(李世環)과 재종제 서암 이완근(李浣根)은 정충신(鄭忠信), 이충립(李忠立), 고성후(高成厚), 박대수(朴大壽), 김치원(金致源) 등은 광주팔장사(光主八壯士)의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2020-04-02 | NO.148
  • 김태순(金泰淳)
    김태순(1832~1897)의 본관은 김해이다. 자는 신여(信汝)이고 호는 백봉(白峯)이다.부 : 金尙烈조 : 金海中증조 : 金賁載외조 : 梁錫源처부1 : 權淳宗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1882년과 1885에 光州牧에서 金泰淳에게 준호구를 발급해 주었다.
    2020-02-24 | NO.147
  • 김홍담
    김홍담(金弘淡)의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자원子元, 幸州城戰(1593), 露粱海戰(1598)/ 宣武原從勳湖節2下-204-3, 光州, 壬辰, 一道擧義 -《호남절의록》(1799)*조선시대 1866년(咸豊 5년) 충훈부忠勳府에서 仁祖(1595~1649) 때 宣武功臣 金弘淡의 子孫 金東成 등 5인에게 각종 軍役을 부과하지 말 것을 명기한 계하절목啓下節目이 있다.
    2020-04-02 | NO.146
  • 김희순(金禧淳)
    김희순(1827~?)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명집(明集), 호는 묵재(默齋)이다.부 : 金尙烈조 : 金海中증조 : 金賁載외조 : 梁錫源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2-26 | NO.145
  • 나도규(羅燾圭)
    나도규羅燾圭(1826~1885)의 본관은 나주이다. 자는 경문(敬文)이고 호는 덕암(德巖)이다. 당시 계촌면에 살았는데 오늘날 남구 석정동에 해당한다.부 : 羅禧集조 : 羅錫曾증조 : 羅弼殷처부1 : 李鉉臨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880년 노사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1880년 3월 25일에 奇陽衍에게 편지를 보냈다. 1883년 1월 13일에 광주 石亭에서 羅燾圭가 柏石軒 奇陽衍에게 편지를 보냈다.남덕정覽德亭을 경영했다.『덕암만록德巖漫錄』이 있다.덕암사상연구회에서 『덕암 나도규의 학문과 사상』(심미안, 2013)이라는 책을 안동교.박명희.김봉곤.김덕진.권수용 등이 펴냈다.
    2020-02-26 | NO.144
  • 노재 배승무裵承武(1559~1593)
    본관은 달성이며 호는 노재이다. 조선 1559(명종14년)년 동곡 수성동에서 태어났다.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문원 정자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 장군과 함께 의거하여 영호남 각지에서 격전을 벌였으며 1593년 광주지역에서 복수장 고종후와 함께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성에 들어가 김천일과 함께 7일간 혈전을 치르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진주 남강에서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사후에는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된 나주 무열사에 배현경을 주벽으로 배정지裵廷芝ㆍ배극렴裵克濂이 제향되어 있었는데 1868(고종5년)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려 그 자리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1882(고종19년)년에 다시 복건하여 배운룡裵雲龍ㆍ배공서裵工瑞ㆍ배공보裵工甫ㆍ배승무裵承武ㆍ배세조裵世祚 등 5위를 추배하였다.배승무(裵承武), 湖節1下-173-4, 光州, 壬辰, 高從厚同殉-《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43
  • 노준공(盧俊恭)
    노준공(1340∼1397)은 광주 출신으로 그의 후손들이 일곡동 일곡마을에 자작일촌하고 있다. 호는 심계(心溪), 시호는 절효(節孝), 본관은 광주이다. 고려 말 밀직사를 지낸 사청(士淸)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기개가 높아 학문에 열중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광주에서 최초로 효자 인물로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었다.어머니 병환에는 옆을 지키며 손수 약을 달여 드리고, 변(똥) 맛을 보아 병세를 가늠하여 병세가 위태로울때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어머니 입에 넣어 일시 소생하게 하는 등 극진한 효도에 주위 사람들의 감탄과 함께 그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특히 고려 우왕 때 상례 제도가 폐지되고 없어져 모두 백일 동안 복을 입고 벗는데, 그는 묘의 여막(廬幕)에서 3년을 지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시묘 때 호랑이도 그의 효심에 감동하여 호위하며 따랐다고 전해지고 있다.조선을 창업한 이 태조가 그의 학문과 명성을 듣고 벼슬을 내리고 몇 차례 불렸으나 거절하고 무등산 계곡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광주읍지(1879)》, 《효행열지(1985)》, 《노씨위적사(1988)》
    2020-04-01 | NO.142
  • 농포 류희달(1571~1631)
    류희달柳希達의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호는 농포弄圃이다.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규합하여 활약하였다. 1594년(선조27)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으로 재직하였으며 1599년(선조32)에 죽산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600년(선조33) 의인왕후懿仁王后 국상 때 산릉을 만드는 역군役軍을 늦게 보낸 일로 파직된 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낙향하여 살았다. 1605년(선조38) 선무원종공신의 녹권을 받고 가선대부에 증직되었다. 덕림사德林祠에 제향되었다. 1947년에 농포선생을 기리기 위한 농포류선생신도비가 세워진 바 있다.
    2020-05-11 | NO.141
  • 눌재 박상朴祥(1474~1530)
    박상朴祥(1474~1530)은 진사 박지흥의 차남이며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던 조선 중종 때의 관료로 사림 운동에 전력한 학자이자 정치가였으며 호남 사림의 대부이다.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이다. 눌재는 1474(성종5년)년에 광주 방하동 본가에서 성균관 진사였던 부친 지흥과 모친 계성서씨 사이에서 삼 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박씨 집안은 대대로 송경에서 살아왔는데 조고판서공 때 호서의 회덕현으로 이주하였으며 부친인 찬성공이 다시 부인서씨의 고향인 서창 방하동 봉황산 아래로 옮겨 터를 잡았다. 눌재의 아버지가 호남으로 내려오게 된 이유는 부인의 고향이기도 했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과 관련하여 벼슬길을 포기한 것으로 눌재의 집안이 절의파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눌재는 태어날 때부터 생김새가 단정하고 얼굴빛이 영명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학문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눌재의 첫번 째 스승은 아버지인 찬성공이었는데 부친은 그가 1488년 15세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후 눌재의 백형인 하촌 박정이 눌재의 학문을 담당했다. 학업에 정진하는 동안 눌재의 기억력은 비상하였으며 부친과 백형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명예와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통감하여 더욱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경술에 널리 통하였고 문사에도 큰 진보가 있었다. 1496년 진사시를 지냈고 1501년 28세에 정시 을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는데 첫 관직으로 교서관 정자를 제수받았고 이듬해 승문원 교검과 시강원 사서를 제수 받았으며 1년 뒤에 병조좌랑을 제수 받았다. 눌재는 관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학문으로 닦아왔던 의리정신을 실제 정치현장에서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의리 정신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사건은 전라도사로 부임하였을 때에 일으킨 김소부리(우부리) 장살 사건이다.훈구 공신들의 전횡을 지속적으로 고발해 권신들의 미움을 사 관직 대부분을 외직으로 나가있었으며, 가는 곳마다 사림 후배들을 챙겼다. 특히 기묘사화 이후 살아남은 조광조의 문하생들을 거둬 사림 운동의 맥을 이어줬다. 단경왕후 복위에 관한 상소로도 유명한데 이에 대해 생전의 조광조가 '강상의 법도를 세웠다'라고 칭찬한 바 있다. 평소 그의 학식과 인품에 대해 후배였던 퇴계 이황이 ‘하늘이 내린 완인完人(행동과 인품에 흠이 없는 사람)이라 평하기도 했다. 성정은 참으로 곧았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고 정의를 세우고자 노력하였으며 가난한 백성을 위해 아낌없는 선정을 행했다. 전라도사 시절 나주의 우부리가 연산군의 후궁으로 있는 딸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자행하자 그의 죄상을 물어 곤장으로 때려죽였다. 그 성품이 얼마나 곧고 굳센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세른 세 살 때인 1506년 사간원 헌납이 되어 사헌부와 더불어 임금의 내척과 외척 등의 성급한 발탁을 간언하는 등 간관으로서의 직책을 다하였다. 당시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과 재신들의 간곡한 상소로 풀려나왔다.그러나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와 병조 등의 전관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군수로 좌천되기에 이르렀다. 사헌부가 대간을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논핵하여 곧 종묘서령, 소격서령으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고향이 가까운 전북 군산의 임피현령으로 나아갔다. 임피현령으로 3년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가 독서로 소일했다.서른여덟 살 되던 1511년 홍문관 수찬을 역임하고 담양부사가 되었다. 마흔 두 살인 1515년 봄 또 다시 필화에 얽혔다. 장경왕후章敬王后 상빈上賓 문제로 바른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순창군수 충암 김정, 무안현감 유옥과 함께 전 왕후 신씨愼氏를 복위시키려 바른말을 하였다.조광조와 교유했던 박상은 신비복위상소를 올린 후 남평 오림역烏林譯으로 유배를 가자 조광조가 박상을 옹호하며 유배를 풀어줄 것을 주장한다. 조광조는 1519년에 능성(현재 화순 능주)으로 유배를 가며 광주를 거치자 박상은 광주 읍성 남문 밖 10리에 있는 분수원에서 그를 만나 면회하였다.박상은 모재 김안국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였고, 광산 출신의 하서 김인후와는 교분이 깊었다. 임억령, 송순, 정만종 등이 박상의 문하에서는 직접 사사했다. 임억령과 깊은 교유를 한 사람이 고경명이고, 송순의 문하에서 정철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호남지방에 성리학을 보급하고 호남사림을 형성.발전한 대표적 인물이다. 박상은 호남사림의 원조인 셈이다.1516년에 대한발로 인해 석방되어 향리에 있다가 다시 부름을 받아 의빈부도사,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모친상으로 곧 사직했다. 1519년 기묘사화 후 중앙부처에 염증을 느껴 상주목사, 충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526년 일종의 승진시험인 중시에 장원급제했지만 훈구파에 밀려 승진하지 못하고 나주목사로 선정을 베풀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머물다 1530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를 문간공으로 하였으며 광주의 월봉, 순창의 화산, 담양의 구암서원에 제향되었다.여러 차례의 혹독한 변고를 당하였어도 위엄이 사그러들지 않았으니 퇴계 이황은 그의 고상한 기품과 탁월한 식견을 칭찬하여 행동과 인품에 흠이 없다며 ‘하늘이 내린 완인’이라 하였다. 청백리로 추천받았고 문장가로 이름이 높아 성신 신광한, 황정욱과 더불어 서거정 이래로 사가로 높이 칭송되었다. 정조의 시문과 논음, 교지 등을 모아 만든 홍재전서에서 조선 5백년의 으뜸가는 시인이라 일컫는 읍취헌 박은과 비교하면서 눌재 시의 우월함을 찬양하기도 했다.당대의 명현인 사암 박순과 숙질간이다. 저서는 <눌재집訥齋集> 8권이 있다.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는 역사서를 저술한 바 있다.눌재가 호남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그가 생존했던 16세기부터 17세기를 거치는 사이 호남에서는 훌륭한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그 수준에 있어서도 절정기에 이르렀는데 이 호남 시단의 첫머리에 눌재가 자리하고 있다. 눌재는 주로 호남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이는 자신이 광주 출신이므로 교유의 범위가 호남 위주가 되었을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이들이 대부분 호남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알려진 혁혁한 문사들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눌재의 교유 시인 중에서 또 하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무리는 기묘사화에 관련되었던 기묘 제현들이다. 눌재는 기묘사화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눌재와 기묘 제현들과의 관계는 밀접하다. 신잠, 김세필, 윤구, 고운, 김정, 소세양, 임억령, 조신, 정사룡, 정만종 등이 눌재의 교유 시인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들인데 그 가운데 신잠부터 김정까지가 눌재와 함께 기묘명현으로 일컬어지는 시인들이다. 또한 눌재에게 사사하였거나 교유 이외에도 기묘사림과 뜻을 같이 하였던 복재 기준의 조카 고봉 기대승과 기묘명현의 한 분인 하천 고운의 손자 제봉 고경명 등도 눌재의 문하라고 할 수 있다.
    2018-08-19 | NO.140
  • 동국여지지 제1권; 권율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철(權轍)의 아들이다. 뜻을 독실하게 지니고 학문에 힘썼다. 소경왕 15년(1582)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였다. 25년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권율은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어 남원(南原) 이현(梨峴)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얼마 뒤 본도 관찰사로 승진하여 병사를 이끌고 왕을 근위하기 위해 고양(高陽)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이르렀다. 당시 왜의 장수들이 모두 경성에 모여서 왜적의 형세가 매우 성대하였으므로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해 왔는데, 권율이 힘써 싸워서 그들을 대파하자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졸한 뒤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권율은 중후하고 기량(氣量)이 있었으며 아랫사람들을 성의로 거느리고 위엄과 굳건함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회복할 수 있었고 명장(名將)으로 명성이 천하에 알려졌다. 행주대첩 때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개성(開城)에 있으면서 유격 사대수(査大受)를 보내어 함께 만나 보기를 청하고 감탄하기를 “권가군(權家軍)은 다른 부대에 비할 바가 아니니 외국에 참된 장수가 있었구나.” 하였다. 왜의 우두머리가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권 원수(權元帥)의 안부를 물었다.
    2022-05-06 | NO.139
  • 동국여지지 제2권; 박순(朴淳)
    박순(朴淳) 광주(光州) 사람이다. 본조 선조(宣祖) 때에 재상이 되었는데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공의 청렴한 지조를 존경하였다. 만년에 당시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아 영평현의 백운계 가로 물러났는데, 거처하던 곳에 배견와, 이양정이 있었다. 입을 닫고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고 약초를 심고 고기 잡으며 책을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촌사람과 야로(野老)가 술을 가지고 찾아오면 기쁘게 마주하여 술을 마셨고, 학자들이 와서 강론할 때는 매번 추위나 더위를 잊었다. 끝내 이곳에서 졸하였는데, 공이 죽자 성혼(成渾)이 만시(挽詩)를 지어 애도하였다. 그 만시에,세상 밖 백운산 깊고도 깊은데 / 世外雲山深復深시냇가 초가집 이미 찾기 어렵네 / 溪邊草屋已難尋배견와 위에 삼경의 달 / 拜鵑窩上三更月응당 선생의 일편단심 비추리라 / 應照先生一片心하였다.
    2022-05-06 | NO.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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