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55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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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직(奇師稷)
- 기사직(1780~1858)의 본관은 행주이다. 1842년 11월에 奇象忠 奇象黙 등과 함께 고양군 元堂面에 마련한 祭田을 奇宗秀가 문서를 위조하여 金正黙에게 팔았으니, 이 둘을 처벌해줄 것을 청원하는 내용으로 고양군수와 관찰사에게 소지를 올렸다. 부 : 奇商學조 : 奇宗壽증조 : 奇重勳외조 : 羅星燁처부1 : 金致勳
- 2020-02-24 | NO.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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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상규(奇象奎)
- 기상규의 본관은 행주이다. 1842년 11월에 奇象忠 奇象黙 등과 함께 고양군 元堂面에 마련한 祭田을 奇宗秀가 문서를 위조하여 金正黙에게 팔았으니, 이 둘을 처벌해줄 것을 청원하는 내용으로 고양군수와 관찰사에게 소지를 올렸다.부 : 奇彦升조 : 奇宗文증조 : 奇挺尙외조 : 江陵 金命演처부1 : 全州 李처부2 : 驪州 李
- 2020-02-24 | NO.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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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상묵(奇象黙)
- 기상묵(1835~1904)의 본관은 행주이고 자는 성회(聖會)이다. 부 : 奇學元조 : 奇彦漸증조 : 奇挺鮮외조 : 金白亨처부1 : 宋繪相1842년 11월에 奇象忠 등과 함께 고양군 元堂面에 마련한 祭田을 奇宗秀가 문서를 위조하여 金正黙에게 팔았으니, 이 둘을 처벌해줄 것을 청원하는 내용으로 고양군수와 관찰사에게 소지를 올렸다.
- 2020-02-24 | NO.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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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상춘(奇象春)
- 기상춘(奇象春, 1777~1849)의 본관은 행주, 자는 원중(元重)이다.부 : 奇學祿조 : 奇彦鼎증조 : 奇挺後외조 : 朴重一처부1 : 梁瀚觀처부2 : 金璲1842년 11월에 광주 유학 奇象忠 奇象黙 등 54명과 함께 경기도 순찰사와 高陽郡守에게 단자를 올렸다.
- 2020-08-08 | NO.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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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상충(奇象忠)
- 기상충(奇象忠, 1760~1846)의 본관은 행주, 자는 대숙(大叔)이다.부 : 奇學心조 : 奇彦復증조 : 奇挺範외조 : 權世僖처부1 : 金夢洙1842년 11월에 광주 유학 奇象忠 奇象黙 등 54명과 함께 경기도 순찰사와 高陽郡守에게 단자를 올렸다.
- 2020-08-08 | NO.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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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언관
- 기언관(奇彦觀, 1706~1784)의 자는 백담(伯瞻), 호가 국천재(菊泉齋),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광산 임곡 두정리(光山 林谷 斗亭里) 출신으로 고봉 기대승의 6대손이며, 낙암 기정용(樂菴 奇挺龍)의 조카이고 기정후(奇挺後, 1676~ 1722 :덕성군(進), 19세)의 아들이다. 1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母親)의 슬하에서 공부하여 1744년(영조 20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한림천거(翰林薦擧)에 그가 차점(次點)이 되었는데 영조가 고봉의 후예라 하여 특별히 점수를 더 주어 입선시키고 궁중소시(宮中召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하지만 그는 특점(特點)을 가산한 것은 공평한 선례가 아니라며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왕의 노여움을 사서 북방으로 3년간 귀양을 갔다. 그는 종성(鍾城)에 3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국역조선왕조실록 영조 20년(1744) 5월22일에 " ......임금이 기언관(奇彦觀)을 종성(鍾城)에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 기언관은 고(故) 명신(名臣) 기대승(奇大升)의 후예이다. 임금이 그가 명현(名賢)의 후손이라 하여 어필로 특별히 한권(翰圈)에 2점을 더해 주어 선발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김양택 등이 함께 같이 나아와 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이 그가 향곡(鄕曲)의 사람을 권장하여 발탁하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곧 당목(黨目)을 배웠다는 것을 미워하여 특별히 심하게 죄를 주어....."라고 적고 있다.귀양에서 풀려나 승문원(承文院)에 들고, 이어 연원찰방(連原察訪)으로 나갔다. 1780년에 대신들의 추천으로 통정대부로 승진되고 입조(入朝)한 지 30여 년 동안, 병조정랑(兵曹正郞),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헌납(獻納), 개성경력(開城經歷), 봉상사정(奉常寺正), 곽영도정(郭寧都正), 첨지중추(僉知中樞), 호조(戶曹),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오직 개성경력(開城經歷)만 취임했다. 《국천재유고(菊泉齋遺稿)》가 있다.
- 2020-04-13 | NO.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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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윤헌
- 기윤헌(奇允獻, 1575~1624)의 본관은 행주, 초명은 기충헌(奇忠獻) 또는 기내헌(奇乃獻), 자는 헌보(獻甫). 응교 기준(奇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윤(漢城府尹) 기대항(奇大恒)이고, 아버지는 기응세(奇應世)이며, 어머니는 우찬성(右贊成) 임백령(林百齡)의 딸이다. 형이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奇自獻)이다.현감으로 있다가 1605년(선조 38)에 증광문과에 병과 23위로 급제하여 1608년에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가 되고, 광해군 때는 공조좌랑·군기시정(軍器寺正)·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장령(掌令)·안악군수 등을 역임하였다.1617년(광해군 9)에 형인 영의정 기자헌이 광해군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반대하여 유배될 때 형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그 뒤 진사 이건원(李乾元)이 서궁폐출(西宮廢黜)에 반대한 이각(李覺)과 함께 처형하자고 주장하여 수차에 걸쳐 국문을 받았으나 뚜렷한 실증이 없어 방면되었다.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오히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제거할 때 동조하였다는 죄목으로 국문을 받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난군과 내응하였다는 혐의로 온 집안이 추국을 받아 끝까지 불복하다가 형이 먼저 죽고, 그 뒤 임강(林茳)과 더불어 장살되었다.허균과는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허균이 기윤헌에게 보낸 편지에 “나 또한 떨어지고 떨어져 가소로운 사람인데/높은 사람 바라보며 절하기 싫어하네/(중략)/꾸지람과 배척함이 어찌 그리 분분한지/벼슬이야 뺏길망정 기개 어찌 뺏길손가”라며 은둔자로서의 심성과 기개를 드러낸 글이 있다.
- 2024-11-19 | NO.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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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정룡 奇挺龍
- 奇挺龍의 자는 見卿, 호는 樂庵, 본관은 幸州다. 그의 5대조 大林은 기대승의 형이며, 고조는 孝芬, 증조는 琛, 조부는 義憲이다. 그는 光州 小古龍里 泉洞에서 奇震省과 平陽朴氏 尙鉉의 딸 사이에서 현종 11년(1670)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태도가 정중하고 말이 적으며 마음이 너그러웠다. 그는 외가댁에서 遜齋 朴光一로부터 공부를 익혔으며, 부모의 뜻에 의해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자 중단하고 취향에 따라 열심히 학문을 연구하였다. 이에 손재 박광일은 高峰 奇大升 이후의 제1인자라 칭찬했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斷指하여 피를 넣어드렸으며, 喪을 당하여 朱子家禮를 지켜 소홀함이 없었다. 그는 학문과 행실이 뛰어나서 方伯과 御史들이 그를 방문하기도 하고 나라에 추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상을 당하면 후하게 재물을 보내 장례를 도와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훌륭한 인품과 학문으로 그가 영조 14년(1738)에 69세로 별세하자 원근의 인사들이 모두 조의를 표하여 현인이 가셨다고 애도했다. 그는 星山李氏 南老의 딸 사이에서 齊勳, 弘勳, 衡勳 등 세 아들과 梁命虎와 玄明直에게 시집간 두 딸을 얻었으며, 부인이 일찍 죽자 다시 재취한 光山李氏 萬輝의 딸 사이에서 炳勳, 充勳 등 두 아들과 朴鳳采, 宋商復에게 시집간 두 딸을 얻었다.
- 2020-08-04 | NO.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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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정해(奇挺海)
- 기정해(奇挺海, 1650~?)의 본관은 행주, 자는 여대(汝大)이다.부 : 奇震燁생부 : 奇震爀조 : 奇秀栢증조 : 奇邦獻외조 : 竹山 安守一처부1 : 坡平 尹天民 1716년 11월 3일에 田主 奇挺乾이 全羅道 長城府 內西面 會龍洞에 있는 田畓을 奇挺海에게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이 있다
- 2020-08-08 | NO.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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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주택(奇柱宅)
- 기주택(奇柱宅, 1675~?)의 본관은 행주이다.부 : 奇元聖조 : 奇東奭증조 : 奇翊외조 : 完山 李後奭처부1 : 江陵 崔濟岱1798년 10월 18일에 幼學 奇珍이 京畿道 高陽郡 元堂面 沙根寺에 있는 논을 族叔인 奇柱宅에게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이 있다.
- 2020-08-08 | NO.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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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학경奇學敬(1741~1809)
-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중심(仲心). 호는 겸재(謙齋). 대승(大升)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참의 언관(彦觀), 어머니는 여흥민씨이다. 나면서부터 초매하여 학문에 힘썼으며,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7년 문학사에 선임되어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교정하였다. 1801년(순조 1) 문과에 급제한 뒤 곧 정자(正字)를 거쳐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다. 이때 국정에 관한 칠조소(七條疏)를 올렸으며, 그뒤 무장현감(茂長縣監)을 거쳐 홍문관수찬, 교리에 이르렀다. 기학경은 기대승의 후손으로 수신과 세상에 쓰임이 된 인물로서 그의「칠조소(七條疏)」나 「퇴율량선생사칠리기전말(退栗兩先生四七理氣顚末)」, 「회퇴량선생자의변(晦退兩先生疵議辨)」은 전인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권1은 시(詩)로서 모두 41수가 수록되어 있다. 시체(詩體)의 구분 없이 친구 간에 경사가 있거나 송별, 별세하였을 때 보낸 글, 한가로이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 선현들의 유적지나 글을 보고 느낀 시 등을 수록하였다. 기학경은 자신이 사는 곳을 노래한 「겸재(謙齋)」를 남겼는데, 만년에 강호에 은퇴하여 선현들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따라 풍월과 자연을 일삼으니 그지없는 낙이라고 읊조리고 있다. 저서로는 《겸재집謙齋集》이 있다.
- 2020-09-23 | NO.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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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효증(1550~1616)
- 기효증(奇孝曾), 湖節2上-066-2, 光州, 壬辰, 義穀將 -《호남절의록》(1799)기효증奇孝曾(1550~1616)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백로(伯魯), 호는 함재(涵齋). 청백리 기건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기진(奇進)이고, 아버지는 고봉 기대승(奇大升)이며,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이임(李任)의 딸이다. 1550(명종5년)년 임곡 용동마을에서 기대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호를 함재라고 한 것은 '넣고 들이며 가라앉히고 쌓아 두어라'라는 아버지 기대승의 훈계를 따르기 위해 지은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현감에 이르렀으나 1572년에 기대승이 별세하자 광주시 광산구 광곡마을 백우산 아래에 정자를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후 그는 벼슬에는 큰 뜻이 없이 초야에 묻혀 살았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金德齡)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6월 10일 도유사(都有司)로 격문을 짓고 군사와 의곡을 모집하였다. 이어서 그는 8월1일에 선조가 압록강 끝 의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모집격문'을 써서 각 고을에 돌린다. 1592년 8월 19일, 광주의 선비 기효증은 용진산 가학정의 주인 박경과 함께 장성 남문 의병청에서 김경수, 기효간, 윤진 등을 만나 그들은 양곡을 보으고 운반하는 일에 기효증은 의곡장으로 임명되고, 박경은 기효증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다. 선유사 윤승훈이 도내에 내려와서 선조의 전지(傳旨)를 가져온 것에 크게 고무되어 격문을 쓴 것이다. 그 결과 의병 1,000인과 군량미 3,000여 석을 확보하였다.그 뒤 휘하 의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용만에 이르러 왕의 행재소에 나아가 시위하였는데 왕의 총애를 크게 받아 형조정랑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군기시첨정에 올랐다.'호남절의록'에는 기효증과 함께 의곡을 모은 이는 영광의 이굉중·이용중 형제, 오귀영, 이희룡, 송약선, 이헌, 임수춘, 이안현, 최희윤, 이곤과 이분, 김재택이고, 광주의 이운홍, 남평의 송기원, 무장의 오희량, 순천의 이안현, 고창의 김홍우, 무안의 윤황 등이다. 특히 전 참봉 이굉중은 고봉 기대승의 문인이어서 기효증을 적극 지원하여 영광 도유사가 되었고 영광출신들의 많은 참여를 유도하였다. 송약선은 중종 때 청백리인 지지당 송흠의 4대손으로 영광에서 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고봉의 장남 함재 기효증(1550~1616)의 <근왕록>(勤王錄)은 귀중한 사료적 가치가 높은데도 시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고 한글 번역도 되지 않았다. 기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함재근왕록'에는 의곡을 모은 사람으로 이굉중, 민근, 이영립, 임업, 이운홍, 이천룡, 기효분, 기효민, 박경, 이한, 이녕 등의 이름이 나오고, 무안생원 김충수가 쌀 2백석, 순천 낙안 유생이 3백석, 태인 유생 안광주가 2백석을 보낸 것으로 적혀 있다. 여기에서 기효민은 기효증의 동생이고 기효분은 기효증의 사촌이다.<근왕록>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기효증이 군량미 3200석을 모아 바닷길로 임금이 있던 용만(龍灣) 의주까지 수송했던 내역 등이 기록돼 있다. 기효증은 의곡과 의병을 배에 싣고 서해안을 따라 의주로 향한다. 맨 먼저 9월16일에 영광군 의곡도유사인 이굉중과 생원 이용중, 유학 이홍종, 생원 이극부 등이 함께 모은 의곡 1.200석이 영광 법성포에서 출발하였다. 9월21일에는 나주에서 양곡을 실은 배 3척이 출항한다. 기효증은 이 나주 배를 타고 간 것으로 보인다. 배들은 서해안을 거치면서 점점 늘어났다.함재근왕록에 의하면 의곡을 실은 배는 모두 24척으로서, 강진 1척, 영암 2척, 나주 3척, 무안 1, 임치 1척, 함평 1척, 영광 2, 무장 2, 흥덕 1, 고부 1, 금모포1, 부안 2, 임피 1, 옥구 1, 태안 2, 근포 2척이다.쌀과 의병을 실은 배들은 10월15일에 고부에 도착하고, 11월6일에는 군산포(羣山浦) , 11월10일 충청도의 람포(藍浦), 12월3일에 태안(泰安)에 도착한다. 그리고 12월6일에 근포진, 12월10일 독진을 거쳐서 1593년 1월19일 강화도에 도착한다. 포구에 이를 때마다 배가 안전 운항을 할 수 있도록 제문을 올리고 해신에게 제사를 드리었다. 이를테면 11월6일 군산포에 도착하였을 때 수행원 임업이 제문을 지은 제서해신문祭西海神文이 '함재근왕록'에 실려있다.1592년 겨울은 너무 추웠나 보다. 의병선 5척이 풍랑에 표류되기도 하였고 바다가 얼어서 제대로 운항을 못하였다. 의주의 행재소는 기효증이 의병과 의곡을 싣고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던 것 같다. 1592년 12월17일 선조실록을 보면 윤두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기효증이 정병 1백 명을 거느리고 올라오고 있는데 삼화도가 얼어붙어 건너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또 이곳 정군을 뽑아 이빈(李薲)에게 주어 싸움터로 보내면, 그는 그곳의 형세를 잘 알고 있고 또 전에 이미 오래 머물면서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스스로 공을 세우려 할 것입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배는 1593년 1월말 경에 평안도 의주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효증이 2월1일에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문을 썼기 때문이다. 기효증은 의주 거련관에서 선조 임금을 뵈었다. 임금께서 불러보시고 따뜻하게 말씀하시길 “고통을 무릅쓰고 먼 곳에서 이곳에 이르니 내가 매우 기쁘도다. 또한 풍랑이 심한 엄동설한에 천리 길을 무사히 도착한 것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라고 위로하였다.이 때 임금의 호위가 허술하였는데 호남에서 정예 근왕병 460명이 오자 비로소 호위병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며, 양곡은 주로 명나라 군사들의 식량으로 쓰였다.조정에서는 도체찰사가 포상을 청하는 보고서를 올려 기효증은 형조정랑 및 군기시 첨정 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 군기시는 병참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그는 신하로서 할 도리를 다한 것이지 별다른 공로가 없으니 4품 벼슬을 사양한다는 사직상소를 올린다. 선조임금은 기효증의 사직 상소를 보고는 “천리 길을 달려와 임금을 도왔으니 그 충의정신이 장하다”고 하였다.이 상소문에는 의병과 의곡의 내역과 각지에서 차출된 배, 그리고 종사자 명단이 상세히 나와 있다. 의곡종사 감수관 전몽성, 참모 최지남, 군량 선물 참모 강형, 주사장(舟師將) 김몽일, 해남의 의곡유사 윤광계, 백진남 이름 등이 나온다. 백진남은 삼당시인 중 한 사람인 옥봉 백광훈의 아들이다.기효증은 나중에 동복현감에 제수되었으나 1593년 3월에 대간들의 논박을 받고 파직된다. 한편 종사관 박경(朴璟 1559-1633)은 평시서 직장에 제수하였으나 그 또한 벼슬을 사양하였다 이에 임금이 궤장과 죽림처사라는 호칭을 내리었다.선조임금은 '천리길을 마다않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충의가 참으로 가상하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함재 선생이 이곳에 7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사계절 불변의 지조를 지닌 소나무의 청고한 절개를 본받았다.고봉의 아들 기효증이 시묘살이하던 위치에 건립된 현재 칠송정의 초건은 1651년 경으로 추정되지만 그 후 누차의 중수를 거쳤다. 정자 내에는 한말의 거유였던 윤용구의 현판 글씨를 비롯하여 1905년 10대손 기동준이 쓴 칠송정 중건기, 호산승처필명정 8세손 기봉국이 쓴 칠송운이 걸려 있다.
- 2020-03-30 | NO.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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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가 ⾦㤎 세조 2년(1456) 11월 22일∼세조 3년(1457) 7월 5일 상경
- 김가 ⾦㤎 세조 2년(1456) 11월 22일∼세조 3년(1457) 7월 5일 상경김가(?∼?)의 인적사항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도 거의 없다. 1454년 선공판사, 1455 년 영녕전의 천조관(薦俎官), 판통례문사(判通禮⾨事)를 지냈고, 1455년에 정난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1456년에는 첨지중추원사를 거쳐 나주목사로 임용된다. 『금성일기』 「병자년 1456년」 “신임 목사 통정대부 김가가 11월 6일 나주에 도임하였고”, 「정축년 1457년」의 기록에는 “행목사 김가가 7월 5일 체임되어 7월 25일 상경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천순 병자(1456년) 11월 22일에 도임하였고, 정축(1457 년) 7월 5일에 교체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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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개 ⾦闓 광해군 8년(1616) 3월 24일∼광해군 9년(1617) 4월
- 김개 ⾦闓 광해군 8년(1616) 3월 24일∼광해군 9년(1617) 4월김개(1582∼1618)의 본관은 상산(商⼭, 尙州)이며, 자는 계숙(啓叔), 군호는 낙천군(洛 川君)이다. 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김귀영(⾦貴榮)이다. 처음에는 무반으로 출사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었다가, 160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0년 알성시 문과 갑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614년 예조참의, 1615년 문과 정시에서 입격하였다. 1615년 동부승지·우부승지, 1616년 1월 가선대부로 승격이 되면서 같은 해 3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금성관(錦城館)을 중건하는 등 업적을 남기고 1617년 4월 좌윤으로 옮겼다. 허균(許筠)과 함께 인목대비 폐비론을 앞장서서 주장하다 1618년 숭례문[남대 문] 격문 사건으로 허균이 역모 혐의로 처형당할 때 심문을 받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장살(杖殺)을 당하였다. 1678년 결정적인 단서 없이 죽었다는 김석주(⾦錫冑)의 주청에 의하여 신원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병신(1616년) 3월 24일 역말을 타고 도임하였고, 정사(1617년) 4월에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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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계희 ⾦係熙 세조 3년(1457) 8월 11일∼세조 4년(1459) 11월 21일
- 김계희 ⾦係熙 세조 3년(1457) 8월 11일∼세조 4년(1459) 11월 21일김계희(?∼?)의 본관은 김해(⾦海)이며, 자는 회숙(晦叔), 호는 퇴은(退隱)이다. 청도군사 (淸道軍事)를 지낸 김순생(⾦筍⽣)의 아들이다. 1435년 생원시에서 갑과 3위, 1441년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 2위로 급제한 뒤 1447년 주서(注書)를 시작으로 경상도 도사, 좌랑, 사간원 우헌납, 사헌부 지평 등을 거쳐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57년 8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나주읍성을 확장 축조하고 나주향교를 중수하는 등의 큰 업적을 이루자 백성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향교에 위패를 봉안하여 춘추로 배향하였다고 『금 성읍지』에 전한다. 나주목사에서 형조참의를 거쳐 이조참판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463년 인수부윤에까지 이르렀다. 『금성일기』「정축년」 1457년의 기록에 “신임 목사 통정대부 첨지중추원사 김계희가 8월 11일 도임하였다.”라 되어 있고, 「기묘년 1459년」에는 “목사 김계희가 형조참의로 선환되어 기묘(1459 년) 11월 21일에 상경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정축(1457년) 8월 11 일에 도임하였고, 기묘(1459년) 11월 21일 형조참의로 승진하여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장흥 수향리 김해김씨 사현사(四賢祠)에 배향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