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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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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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덕령(金德齡)
    임란 최후 의병장이자 조선의병 총수인 김덕령(1568∼1596)의 자는 경수(景樹)로 광산이다. 양녕대군의 장인인 한로(漢老)의 12세손이며 1470년 무렵 광주 서구 금호동에서 충효마을(당시, 석저촌)로 터를 옮긴 문손(文孫)은 그의 고조부이다. 1568년 12월 29일 붕변(鵬變)과 남평 반씨 3남 3녀 중 둘째아들로 석저촌(石底村)에서 태어났다. 종조인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17세에 향해(鄕解, 초시)에 합격하고, 18세 때 담양에 사는 흥양이씨 부인과 혼인하였다. 20세 되던 해에는 형 덕홍과 자부(姊夫) 김응회(金應會)와 함께 우계 (牛溪)  성혼(成渾)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월 형 덕홍과 함께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지만 어머님 봉양을 위해 다시 광주로 귀향 후, 주검동(鑄劒洞)에서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로 보급하는 등 후방에서 관․의병 지원활동을 하였다. 김덕령(金德齡), 湖節2上-001-1, 光州, 壬辰, 忠勇將 -《호남절의록》(1799)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함에 따라, 조정에서 호남에서 유능한 장수를 뽑아 경상도로 보내기로 하여 김덕령을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과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추천하고, 전라도순찰사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의 조정에 천거가 있은 뒤, 12월 27일 분조인 전주 무과시험장에서 수많은 수험생들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임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곧바로 세자(광해군)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고, 왕(선조)으로부터 충용군(忠勇軍)이란 호칭을 받게 된다.1594년 1월 22일 담양을 출발하여 남원에서 도착하여 남원사람 최담령(崔聃齡)을 별장으로 삼고, 군사훈련을 시킨 다음, 함양, 산청을 거쳐 4월 초 진주 대곡면 대곡리에 도착하여 이곳에 진을 치고 있을 무렵, 왕의 특명으로 제도의 의병을 혁파하여 장군에게 예속시킴에 따라 조선의병의 총수가 된다. 그해 여름 진지를 대곡리에서 대여촌(현, 금산면 가방리)으로 진을 옮기고 군사 훈련에 박차를 가하면서 진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월아산(482m) 정상에 목책을 설치하여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는가 하면 정상부근에 제무소를 두어 무기를 직접 만들기까지 하였다.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시기는 강화교섭기로서 큰 전과는 없었지만, 고성․창원․정암진 전투의 전과를 통해 왜군이 진주 일원의 지역에 다시는 출현할 수 없도록 하여 결국 전라도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1594년 9월, 곽재우․이순신․원균과 함께 참전한 수륙연합 장문포 해전에서의 별 전과를 거두지 못하자 도체찰사 윤두수가 체직되고, 김덕령 장군 또한 조정과 여러 사람들로부터 기대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1595년 12월, 김덕령은 엄격한 군율 적용하였다하여 살인죄로 체포 구금되지만 무고가 드러나, 왕의 특명으로 이듬해 2월 말 석방된다. 하지만 1596년 7월,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로 다시 잡혀가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한 장군은 “충효로서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1596년 8월 21일 여섯 차례의 고문을 받은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당시 장군의 나이는 겨우 29세였다. 장군이 죽기 직전 옥중 생활의 심정을 한탄하면서 춘산곡 을 노래했는데 현대어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봄철의 산에 불이 나니 피지도 못한 꽃들이 불이 붙어 다 타는구나.저 산에 일어난 불은 물을 뿌려 끌 수 있지만이 몸에 연기도 없는 불이 일어나니 이 불은 끌 물조차 없는 것을 한탄하노라.이 노래는 억울한 누명을 내(연기)없는 불에 비유해 산불은 끌 수 있으나 자기의 몸속에 붙어 타오르고 있는 억울한 마음의 불은 끌 수 없음을 비유하여 한탄하는 의기가라 하겠다.김덕령 장군이 억울하게 죽은 지 65년이 지난 1661년(현종 2) 왕의 특명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이후 1668년(현종 9)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1681년(숙종 7) 병조판서로 가증되었다.1785년(정조 9) 충장(忠壯)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3년 뒤인 1788년(정조 12) ‘정려비와 충효리’를 하사한다.1789년(정조 13) 또다시 종1품 관직인 좌찬성(左贊成)에 가증되었다. *《광주읍지(1879)》, 《국역 김충장공유사(1979)》, 《김덕령 평전(2006)》
    2020-03-06 | NO.167
  • 김덕보
    김덕보(金德普), 湖節4下-127-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호남절의록》(1799)김덕보(金德普)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룡(子龍), 호는 풍암(楓巖).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박씨(南平朴氏)로 직장 박계종(朴繼宗)의 딸이다. 형이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다.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 지금의 충효동에 살았다.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고로 형 김덕홍(金德弘)·김덕령(金德齡) 등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을 전라도 곳곳에서 격파하였다. 그 뒤 김덕홍이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금산에서 전사한 데다가 김덕령이 무고에 의해 옥사하자 향리에 돌아가 세상의 일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힘을 기울였다.1626년(인조4) 2월 3일에 김덕보가 안방준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을 장원서별좌(掌苑署別坐)에 추천해준 일은 감사하지만 병으로 부임할 수 없음을 밝히고, 안방준과 함께 산방(山房)에서 지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이는 안방준의 교유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노병이므로 전장에는 나가지 못하고 죽었다.  1785년(정조 9) 전라도 유생 기석주(奇錫周) 등의 상소에 의해 큰형 김덕홍과 함께 포상, 추증되었다.
    2020-03-30 | NO.166
  • 김덕홍(金德弘)
    김덕홍(1558∼1592)은 김덕령의 형이다. 호는 성암(省菴)으로 아우 덕령과 매형 김응회와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덕령과 덕보 두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모셨는데 효우가 지극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의의 뜻을 가지고 어머니께 하직하고 아루 김덕령과 함께 의병을 불러 모아 전주에 이르렀을 때 적세가 매우 성함을 보고 금산으로 진격하기 전 덕령에게 말하기를 “노모가 집에 계시는데 아우만이 혼자 있으니 우리 형제가 모두 나선다면 어머님을 보호할 사람이 없게 되니,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니 너는 돌아가서 어머님을 봉양하여라.”고 당부하였다.그해 7월 10일 제1차 금산전투에서 고경명 장군과 함께 순절하였다.  김덕홍(金德弘), 湖節1上-046-1,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 -《호남절의록》(1799)김덕보는 큰형 김덕홍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하고 작은형 김덕령이 무고죄로 옥사하자 무등산 계곡에 풍암정을 짓고 은둔했다.1785년(정조 9) 지평(持平)으로 증직하고 광주 ‘의열사’에 배향하였다. 슬하에 딸 2명을 두었다. * 《광주읍지(1879)》, 《국역 김충장공유사(1979)》, 《호남절의록(1799)》, 《김덕령 평전(2006)》
    2020-03-06 | NO.165
  • 김방 金倣
    광산김씨 김방(金倣)의 아버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승노(承魯)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 민부상서(民部尙書) 복득(福得)의 딸이다. 고려 우왕(禑王) 때를 거쳐 조선(朝鮮)초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통훈대부, 김제(金堤)군사 겸 권농병마단련부사로 근무할 때 황폐해 가는 김제 땅 벽골제(金堤 碧骨堤= 저수지)를 확장 보수하여 김제 만경(萬頃) 평야를 옥토(沃土)로 만들었다. 그 후 광주 목사로 재임시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중농정책으로 경국제민하는 뜻을 받들어 공의 개인 소유지인 저습지(低濕地) 수만평(현 광주시 중흥동 효죽동 계림동의 일부)에 전천후(全天候) 사업으로 3년간에 걸쳐 경양제(光州 景陽堤) 방죽을 만들어 광주 일원의 농토를 옥답(沃畓)으로 만들어 국리민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공이 죽은 후 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향인(鄕人)이 광주 증심사(증心寺) 능주(綾州)의 쌍봉사(雙峰寺) 낙안(樂安)의 (증光寺)에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였다. 후손이 남면(南面) 재궁동(梓宮洞)에 재실을 지어 세일사를 봉행하고 있다. (見勝覽及兩郡誌) 배(配)는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다.
    2020-05-17 | NO.164
  • 김석구金錫龜
    金錫龜의 자는 景範, 호는 大谷, 본관은 金海이다. 1835(헌종 1) 2월 남원 松洞面細田에서 金國賢의 아들로 출생했다. 김국현은 아들 김석구가 학문에 힘쓰자 그를 위하여 곡성으로 옮겨 글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는 隣里書塾에서 『小學』을 배우고 이어 맹자를 배우자 스스로 맹자를 자처하였다. 이후 그는 17․8세에 蘆沙 奇正鎭를 뵙고 사사한 지 몇 개월 만에 光州 大谷(現, 潭陽 大峙里 金谷)으로 옮겨서 기정진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이후 김석구는 학문에 더욱 전념하여 정진으로부터 자신의 문하 중 당세의 輔弼治澤을 맡길 만한 인물로 지목받았으며, 문인 중에서도 기정진의 철학과 사상을 가장 깊이 이해하여 스승인 기정진에 의해 김석구, 老栢軒 鄭載圭, 日新齋 鄭義林 등 蘆門三子 중에서도 첫 번째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는 평생 場屋(과거 보는 곳)에 드나들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처는 베를 짜고 아들은 밭을 갈아 독서하면서 그를 봉양했다. 기정진의 喪에 三年持服하였고, 內難母喪을 만나 3년 상을 마치고 1885년 고종 22년 8월 8일 별세했다. 기정진은 김석구를 일컬어 ‘夫人不言 言必有中(말을 하지 않으나 말하면 반드시 이치에 맞는다)’이라 하여 공자의 제자 안자에 비유하였으며, 최익현은 스승인 기정진에 대한 관계를 주렴계와 정명도 형제와 비유하기도 하였다.
    2020-08-03 | NO.163
  • 김선지
    김선지(金銑之, 1570~1597), 湖節3下-182-2, 光州, 壬辰, 熊峙殉節-《호남절의록》(1799)김선지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여휘(汝輝), 호는 제남(濟南)이며 참봉 김하(金河)의 후손, 생원 김안방(金安邦)의 아들이다. 지혜와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 선조 21년 戊子에 무과에 합격했다.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전관(宣傳官) 곡포만호로 전함을 만들어 이순신 정운 어영담 배흥립 신호등과 더불어 한산 사천 부산 당포 당항포 옥포 노량싸움에서 연전연승 함으로써 군공(軍功)을 세우고 좌부장을 역임했다. 또한 의주(義州)에서 왕을 호위하고 보성군수(寶城郡守)로 임명받았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전사하니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기록되었다. 1867년 기정진(奇正鎭, 1798 ~1879) 선생이 撰書한 宣武原從功臣 行寶城郡守 김선지(金銑之, 1570~1597) 선생의 <제남공묘갈명(濟南公墓碣銘)>이 있다. 
    2020-04-01 | NO.162
  • 김성원
    김성원(金成遠, 1525~1597), 湖節2下-162-1, 光州, 壬辰, 一道擧義-《호남절의록》(1799)김성원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광주 출생. 본관 광산(光山), 자 강숙(剛叔). 호 서하당(棲霞堂)ㆍ인재(忍齋). 아버지는 교위(校尉) 홍익(弘翼)이며, 어머니는 해주최씨(海州崔氏) 장사랑(將仕郞) 한종(漢宗)의 딸이다.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7세 때 아버지는 잃고 숙부에게 수학하여 1551년(명종 6) 향시(鄕試)에 일등하였으며, 정철(鄭澈)과 특계(特契)를 맺고 <근사록(近思錄)> <주역(周易)> 등을 공부하였다.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60년 침랑(寢郞)에 임명되었다. 1581년(선조 14) 제원도찰방(濟原道察訪)을 역임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가관(同福假官) 및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역임하면서 군량과 의병을 모으는데 큰 공을 세웠다. 1596년 조카 김덕령(金德齡)이 무고로 옥사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하고 말았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던 중 성모산(聖母山)에서 왜병을 만나자 부인과 함께 몸으로 어머니를 보호하다 살해되었다. 저서에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가 있는데, 여기에는 서문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濯熱圖)’와 한시 외에 부록으로 한시(漢詩) <식영정십이영(息影정十二詠)>, 송강(松江)의 <성산별곡(星山別曲)>과 이의 한역(漢譯) 및 단가(短歌) <헌작북당시월미명우역작작가(獻酌北堂時月微明雨亦作作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 수록된 <성산별곡>은 <송강가사(松江歌辭)>에 수록된 것과 비슷한데, 송강이 25세 때 김성원을 위하여 지어 준 것이라 한다.  그는 <성리서(性理書)> <주역(周易)>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으나 시(詩)로서도 이름이 높아 <식영정잡영(息影亭雜詠)> <척서도(滌署圖)> 등은 세상에 유행하였다.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는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인 식영정(息影亭)이 있다. 식영정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이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는데, 없어졌다가 후에 복원되었다. 식영정(息影亭)은 주변 무등산과 광주호 등이 있어 자연환경과 조화미가 뛰어나고 주변의 소나무 고목과 송림, 배롱나무 등이 있어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명승 제57호. 소재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1. 조선 명종 때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그의 장인 석천(石川)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송강(松江) 정철이 성산별곡, 식영정 20영 등 한시와 가사 및 단가 등을 남겨 송강 문학의 산실이 되었고, 우리나라 고전문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곳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저서】<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
    2020-04-01 | NO.161
  • 김안국(金安國, 1478~1543)
    김안국(金安國, 1478~1543)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 하며, 전고(典故)에 통달하였으나 학문에서는 드러나지 않음
    2023-08-02 | NO.160
  • 김억룡
    김억룡(金億龍, 1561~1592)의 자는 내무(內武), 호는 송암(松岩)이다. 절효공 후손이며 공신 모재 김사모(金嗣牟)의 차남이다.1589년(선조22) 무과 급제하여 용분위부사정(龍賁衛副司正)이 되었다. 정유재란때 형 억명, 아우 억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으로 가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영광 송촌사(松村祠)에 제향했다. 湖節5上-105-2, 光州, 丙子, 扈從 -《호남절의록》(1799)송촌사는 원래 군서면 송학리에 소재한 것으로 철종때 향중유림의 발의로 모재 김사모, 송은 김억명, 송암 김억룡, 송정 김억호, 송포 김억련 다섯부자(五父子)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시 순절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창건하고 유림들이 제향해 오던 곳이다. 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가 지난 1971년 향중유림의 재발의에 의해 현소재지인 만금리 만호동에 예전의 사우를 복원, 지금까지 매년 음력 9월21일을 향사일로 정하고 제향해오고 있다.
    2020-04-01 | NO.159
  • 김언복
    김언복(金彦福)의 자는 복우(福宇). 본관은 김해(金海). 고려조 때 판도판서(版圖判書) 관(管)의 후예이며, 문민공(文愍公) 탁영(濯纓) 일손(馹孫)의 증손이다. 어려서부터 기국(氣局)이 크고 영매하며 힘이 또한 장사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 자질들 수십 명을 이끌고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의병진에 달려갔다. 군 참모로써 많은 훈공을 세웠다.금산이치(錦山梨峙) 싸움에서는 몸을 날려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수많은 적의 목을 자르고 용전분투하였으나 패세를 만회할 길이 없어 고경명과 더불어 같은 날 순절(殉節)하였다. 뒤에 혼을 불러들여 장사지내고 선무훈(宣武勳)에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담양삼강록 다른 기록도 있다.본관(本貫)은 김해(金海), 판서(判書) 효심(孝芯)의 후손(後孫), 봉사(奉事) 분(芬)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9년에 무과(武科)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의주(義州)에서 왕(王)을 호위했본관(本貫)은 김해(金海), 판서(判書) 효심(孝芯)의 후손(後孫), 봉사(奉事) 분(芬)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9년에 무과(武科)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의주(義州)에서 왕(王)을 호위하고 또 아들 직장(直長) 경입(敬立), 아우 언수(彦壽)와 함께 군량을 모집(募集)하여 도원사 권율(都元師權慄)을 따라 전공(戰功)을 세우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참여했다. 湖節3下-173-1, 光州, 壬辰, 熊峙殉節 -《호남절의록》(1799)
    2020-04-01 | NO.158
  • 김영휘(金永暉)- 정홍명의 기옹만필(畸翁漫筆)
    정홍명(1582~1650)의 기옹만필(畸翁漫筆) ○ 김영휘(金永暉)는 자는 국서(國舒)요, 집이 광주(光州) 석보촌(石堡村)에 있었는데, 한평생 문을 닫고 양생(養生)하며 매우 수련(修鍊)하는 방법을 좋아하였다. 집 둘레에 구기(枸杞)를 가득 심고, 그 뿌리와 가지로 좁쌀을 쪄서 밥을 지으며, 그 잎과 열매로 나물을 하고 술을 빚어서 항상 먹고 마시며 때로 뜻이 맞는 친구가 오면 문득 내놓고 권하였다. 재주와 학식이 비범하고 언어가 강개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하였다.내가 소시적에 함께 놀게 되었는데, 미목(眉目)이 환하여 산택(山澤) 간의 높은 선비의 골격이었으며, 술자리에는 반드시 마음을 털어놓고 못할 말이 없이 하면서, 서로 알기가 늦었다고 하였다. 나이 60이 못되어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영남 사람 곽재우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연히 난리 중에 김영휘를 만나서 양생법을 알았다.” 하였다.
    2022-05-03 | NO.157
  • 김유현
    김유현(金裕鉉) ; 동학  광주접주-백년약사(상권)
    2020-04-03 | NO.156
  • 김윤제(金允悌)
    김윤제(1501-1572)의 자는 공로恭老이며 호는 사촌沙村으로 광주인이다. 高祖 有章은 진사를 하였다. 曾祖 自沈은 진사를 하였으며 參議에 증직되었다. 조부 文孫은 진사를 하였고 參判에 증직되었다. 부친 珝는 진사를 하였으며 음직으로 正郞과 縣監을 역임하였다. 모친 淑夫人은 礪山 金氏로 辛酉(1501)년에 석저촌石底村에서 김윤제를 낳았다. 지금의 북구 충효동이다.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수학하였는데 明敏하여 일반인과 다른 자품이 있었으며 文藝를 일찍 성취하였다. 嘉靖 戊子(1528)에 進士에 합격하였고, 辛卯(1531)에 文科에 급제하였다. 숙부 瑊과 더불어 나란히 입조하니 당세의 聲望이 무거웠다. 直講·弘文館敎理·殿中御使兼春秋館編修官을 역임하였고 지방 수령으로서의 능력이 있어 全州鎭營 兵馬節度使, 扶安郡守, 羅州牧使 등 13개 고을에 원님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사촌 김윤제는 16세기 호남사림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息影亭, 瀟灑園과 함께 星山詩壇의 한 부분인 環碧堂을 중심으로 시단을 이루어 당대 명류 시인들과 수창하였다. 사촌은 말년에 환벽당에 은거하면서 후인의 교육에 전념하여 鄭澈, 金成遠, 金德齡 등을 계발시켰다.김윤제가 교유한 대표적 인들을 살펴보면, 宋純, 林億齡, 金麟厚, 蘇世讓, 梁山甫 부자, 奇大升, 梁應鼎, 金成遠, 鄭澈, 高敬命, 白光勳 등 湖南詩壇의 대표적 시인들이었다. 이런 인물들에 의해 환벽당을 주제로 한 제영과 풍경을 배경으로 한 시가 많이 남아있다. 문학공간 환벽당에서 탄생한 시들은 시어의 이미지가 맑고 그 소리가 유려하여 가락이 붙어 있어 맑고 담박한 인상을 준다. 이런 시들은 당시 호남시단의 시적 특성이 보인다. 환벽당 시인들은 호남시단의 중심인물들이었고 당시풍을 추구하던 시인들이었다. 그들의 시는 기본적으로 흥감을 중시 한다. 환벽당에서 제작된 시들은 대상과 합일을 추구하거나, 시인 자신을 공간 속에 대상화 객관화하여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대체적으로 시적 대상과 시인의 감정이 융합된 함축성이 강한 시들이 많다.
    2020-03-19 | NO.155
  • 김윤현
    김윤현金胤鉉은 광산김씨로 자는 영보(永甫) 호 모체당(慕體堂),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화순현감(1878), 서흥부사, 안주목사, 남원부사(1886), 광주목사, 보성군수,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다. 화순현감으로 있을 때  화순군 화순읍 대리 154번지(한고을길 16)에 있는 충신 정려각인 칠충각의 기문을 지었다.1885년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봉급을 털고 호남 지방의 종인들의 협조로 종회소 10칸, 제사(齋舍) 8칸, 문청(門廳) 5칸을 지었고 문헌공 대제학 김영수가 취사당(聚斯堂)이라 이름을 지었다. 취사당이란 의미는 광산김씨 후손이 이곳에 (斯: 이사) 모이는(聚: 모일 취)는 집(堂: 집당)이라는 뜻이다.
    2020-04-10 | NO.154
  • 김응복
    김응복(金應福)의 자(字)는 경서(慶瑞), 호는 서봉(瑞峰). 문경공(文敬公) 탁(琢)의 후손이며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김세천(金世天)의 둘째 아들이다.선조 때 무과급제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고종후(高從厚)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조부 송암공(松庵公)과 함께 순절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기록되었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湖節1下-176-1, 光州, 壬辰, 高從厚同殉 -《호남절의록》(1799)- 김윤해(金允諧) : 김응복의 아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응복공의 손자 김철생 공이 광산구 첨단1동 미산마을을 개촌하였다.
    2020-04-02 | NO.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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