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56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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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율 權慄 선조 25년(1592) 7월 13일∼선조 25년(1592) 7월 20일
- 권율 權慄 선조 25년(1592) 7월 13일∼선조 25년(1592) 7월 20일권율(1537∼1599)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월 1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가 7월 22일 전라도관찰사감사로 제수되어 전란 지휘를 맡게 된다. 1599년 병이 들어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금성읍지』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선조실록』에 나주목사 제수 기록이 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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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인행
- 권인행(權仁杏)의 자는 석과(碩果),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거주지는 광주이다. 증조부는 권극화(權克和)[文], 조부는 권기(權琦)[文], 부친은 권은영(權恩榮)이다.1507년(중종2) 증광시 진사 3등 5위였다.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 2024-11-18 | NO.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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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천 權踐 세종 5년(1423) 7월 19일∼세종 6년(1424) 10월 7일 상경
- 권천 權踐 세종 5년(1423) 7월 19일∼세종 6년(1424) 10월 7일 상경권천(?∼1431)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수(伯修)이다. 아버지는 의정부찬성사(議政 府贊成事)를 지낸 권근(權近)이다. 4형제 중 맏이로, 동생 권제(權踶)는 장원급제하고 숭정대부에 올랐으며, 권규(權跬)는 1403년 태종의 셋째 딸 경안공주와 혼인하였고, 권준(權蹲)은 세조 때 정난공신에 책봉되어 지중추원사를 역임하였다. 1406년 지평을 시작으로 사헌부 장령, 판전농시사, 1419년 상호군, 1425년 우군동지총제가 되었는데, 1429년에 기한 내에 가묘(家廟)를 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천에 중도부처(中途付處) 당하였으나, 동생 권도(權蹈)가 상소하여 1430년 4월 8일에 석방되었다. 고려 말의 학자 이색(李穡)의 아들인 이종선(李種善)과 권근의 아들 권천은 처남매부 사이였다. 『금 성일기』「계묘년 1423년」의 기록에 “판목사 권천이 7월에 나주에 왔다가 갑진(1424년) 10월 7일에 목사를 대행하다 상경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계묘(1423 년) 7월 19일 도임, 갑진(1424년) 10월 7일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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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첨
- 권첨(權簷), 湖節3下-185-4, 光州, 壬辰, 熊峙殉節-《호남절의록》(1799)권첨의 본관은 안동이고 생원시 문과에 급제했다. 관찰사를 지냈다. 부친은 권항(權恒).이고 동생은 권반(權磐)이다.
- 2020-04-01 | NO.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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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필
- 권필은 광해군(光海君)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의 전횡을 보다 못한 임숙영(任叔英)이 대책문(對策文)에서 그의 무도함을 공박하였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서 분함을 참지 못하고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풍자하였다. 시의 원래 제목은 〈문임무숙삭과(聞任茂叔削科)〉인데, 그 내용은 “궁궐의 버드나무 푸르고 버들개지 어지러이 흩날리는데 장안에 가득 찬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첨하네. 온 조정 모두 태평성세를 축하하는데 그 누가 직언을 포의에게서 나오게 하였는고.[宮柳靑靑花亂飛 滿城冠蓋媚春暉 朝家共賀昇平樂 誰遣危言出布衣]”이다. 권필은 이 시에서 은연중에 유희분을 궁류에, 임숙영을 포의에 비유하였다가 임금을 무시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결국 친국(親鞫)을 당하고 경원(慶源)에 유배되었는데, 숭인문(崇仁門)을 나가 유배를 떠나다가 길가의 민가에서 44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石洲集 卷7 聞任茂叔削科, 韓國文集叢刊 75輯》 《明齋遺稿 卷43 童蒙敎官贈司憲府持平權公行狀, 韓國文集叢刊 136輯》
- 2022-05-08 | NO.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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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협 權悏 선조 33년(1600) 2월 8일∼선조 34년(1601) 10월 19일
- 권협 權悏 선조 33년(1600) 2월 8일∼선조 34년(1601) 10월 19일권협(1553∼1618)은 1605년 전라감사 겸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앞서 1600년 2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1601년 10월 19일 이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자(1600 년) 3월 18일 도임하였고 체직 일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되어 있으나, 1601년 10월 19일에 체직되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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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희맹 權希孟 중종 11년(1516) 3월 27일∼중종 16년(1521)
- 권희맹 權希孟 중종 11년(1516) 3월 27일∼중종 16년(1521)권희맹(1475∼1525)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자순(⼦醇), 호는 수암(⽔庵)이다. 아버지는 어모장군 권상(權詳)이다. 1498년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 증광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등용되고 추성정난공신 3등에 책록되어 승훈랑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이어서 정언, 헌납, 지평, 장령을 거쳐 1516년 나주목사로 부임했다. 나주목사 재임 시 산신당(⼭神堂)에 제사를 못 지내게 하고 무녀(巫⼥)들에게 퇴미세(退⽶稅)를 거두는 등의 방법으로 음사(陰祀)를 금지시킨 일을 전라감사 허굉(許硡) 이 보고하니, 중종이 칭찬하고 옷감 한 벌을 하사하였다. 또한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능성(綾城)에서 죽음을 당하자 연루됨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를 성심껏 지내 주었다 한다. 1521년 나주목사에서 장악원 정으로 옮겨 가 7 월에 통정대부로 가자되었으며, 형조참의와 1524년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금성 읍지』에는 “병자(1516년) 3월 27일에 도임하였고, 신사(1521년) 통정대부로 승진하였 다.”는 기록이 있다. 나주객관[금성관] 안에 「행목사권공희맹자혜선정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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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귤정 윤구(橘亭 尹衢, 1495~1549) 행장
- 귤정 윤구(橘亭 尹衢, 1495~1549) 행장 조선 중종과 명종 연간에 살았던 귤정 윤구는 호남 사림의 초창기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문장과 절의, 그리고 학문적 교유로 이름을 날렸으며, 기묘명현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의 생애는 개인의 학문적 성취에 머물지 않고, 가학(家學)과 문풍을 이어 지역적·전국적 차원에서 사림의 도학을 실천한 과정으로 평가된다. * 귤정 윤구의 초상화, 이 글의 내용과 증손자인 고산 윤선도의 초상화를 기반으로 인공지능이 그렸다.윤구는 1495년(연산군 1)에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남, 자는 형중(亨仲), 호는 귤정(橘亭)이다. 조부는 윤경이며, 부친은 해남윤씨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이다. 모친은 해남정씨로, 집안은 학문과 인품을 중시하는 명문가로 알려져 있었다.부친인 윤효정은 성리학의 대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금남 최부(1454~1504)가 해남에 거주하며 학문을 강론하던 시기, 그를 찾아가 글을 배우며 학문적 교유를 쌓았다. 총명하고 준수한 인품을 갖추었던 그는 해남의 거부 정귀영(鄭貴瑛)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되었다. 이 인연으로 해남윤씨 가문이 처음으로 해남 땅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금남 최부와도 종동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윤효정은 해남 연동리, 덕음산 아래 백연동에 터를 잡고 자리를 굳혔다. 윤구는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형제로는 윤항(尹衖)·윤행(尹行)·윤복(尹復)·윤종(尹從)·윤후(尹後) 등이 있었는데, 그중 아우 윤복은 명종 대에 정계에 나서 청요직을 역임하며 관찰사까지 올랐다. 특히 윤복은 안동부사로 재직하며 퇴계 이황과 서신을 주고받고, 아들을 퇴계의 문하에 보내 수학하게 하는 등 영남 사림과도 활발히 교유하였다.윤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평택임씨 임휴(林畦)의 딸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윤홍중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조 정랑을 지냈으며, 차남 윤의중은 역시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판서와 의정부 참찬을 역임했다. 가문은 이후로도 인재를 끊임없이 배출하여, 맏손자 윤유기가 과거에 급제해 관찰사가 되었고, 증손자 윤선도는 조선 남인의 거두로 문과에 급제해 예조 참의를 지냈다. 이후 공재 윤두서, 낙서 윤덕희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예술의 명가를 이루었다.윤구는 중종 8년(1513)에 사마시 양과에 합격했고, 중종 11년(1516) 식년문과 을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어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제수되며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승정원 주서에 임명되었고, 중종 13년(1518)에는 홍문관 수찬과 지제교, 경연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그는 호당에 들어 사가독서를 하며 이황·유희춘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또한 조광조·최산두·박상·김인후·임억령·양팽손·윤개·권운 등과 교유하여 사림파의 주요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성리대전》을 강의할 학자 26명을 뽑을 때, 그 명단에 윤구가 포함되었을 정도로 그의 학문적 역량은 당대에 높이 평가되었다.중종 14년(1519)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윤구는 승정원 주서로 재직 중이었다. 사림과 훈구의 갈등 속에서 오해를 받아 예조좌랑 시절 삭직되었고, 이어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낙인찍힌 그는 한동안 고향에서 은거하며 학문과 문장에 몰두했다.그러나 그의 학문과 인품은 여전히 높이 평가되었다. 중종 33년(1538) 서용되어 전라도도사로 복귀하였고, 중종 36년(1541)에는 순창군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송사를 지체함이 없고 백성을 어루만지는 덕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명종 즉위년(1545) 홍문관 부교리로 임명되었으나, 이내 사헌부의 건의로 체직되어 다시 좌절을 겪었다.1549년 정월, 모친상을 치른 후 병세가 악화되어 별세하였다. 향년 55세였다. 묘소는 해남군 북일면 금당리에 있으며, 후일 해남의 해촌서원에 최부·임억령·유희춘·윤선도·박백응과 함께 배향되었다. 사후에는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그는 고향 해남에 귤나무를 심고 귤밭 한가운데 정자를 지었다. 여기서 호를 ‘귤정(橘亭)’이라 정하고, 고향의 벗들과 함께 술을 나누고 시를 읊으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호에는 고향과 자연, 그리고 은일적 학자의 기품이 깃들어 있다.윤구는 문장과 절행으로 이름 높았으며, 광양의 최산두, 해남의 류성춘과 함께 ‘호남삼걸’로 칭송받았다. 제자로는 풍암 문위세와 사매당 이응종이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스승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하였다.그의 문장은 중국에도 전해졌다. 대표작 〈의제발상론(義帝發喪論)〉은 중국 과거제의 지방 관문 시험인 《향시록(鄕試錄)》에 실렸다고 한다. 참판 나세찬(羅世纘)이 북경에 가서 보았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한 학자의 문장이 국경을 넘어선 드문 사례로, 귤정의 문학적 위상을 보여준다.유고집 《귤정유고》에는 시·부·논·잠·책·묘갈명·송·잡저 등 33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일부는 《연방집》 권1에 목활자본으로 남아 있으며, 2005년에는 국역본이 간행되어 오늘날까지 전한다. 그의 문장은 수신과 절의를 강조하며, 권력자의 오만과 불의를 비판하는 정치관을 드러낸다.윤구의 교유는 매우 폭넓었다. 그는 하서 김인후, 눌재 박상, 신광한, 심언광, 임억령 등 당대의 문인들과 시문을 주고받았다. 김인후의 ‘上尹員外(衢)橘亭’와 최산두가 보낸 시 등이 전한다. 또한 선조 대에 이발의 증조부 묘비 신도비명을 지었는데, 이산해가 글씨를 쓰고 이이가 지문을 남긴 사실은 그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알려졌음을 방증한다.윤영표가 엮은 필사본으로 《海南 尹氏文獻》이라고 하는 《당악문헌》,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의 주요인물들의 행적과 그들이 편찬한 글을 수록한 《당악유사》, 그의 부친 윤효정과 윤구, 윤복이 글이 있는 《어초은유고》, 《해남삼강록》의 ‘사우’의 오현사제실록, ‘윤구전’이 수록된 《기묘록보유》, 해남 윤씨 가문에서 200년 동안 각종 서간과 서찰 등을 모은 《영모첩》 등이 있고 또 하서 김인후의 유고집인 《하서집》, 눌재 박상의 유고집인 《눌재집》, 신광한의 유고집인 《기재집》, 김정국의 유고집인 《사재집》, 심언광의 유고집인 《어촌집》, 정사룡의 시문집인 《호음잡고》, 임억령의 문집인 《석천집》 등 외부 문헌에도 귤정에게 보낸 시문, 귤정이 직접 지은 글, 귤정에 관한 만사 등 관련 기록이 추가로 상당수 확인되었다. 윤구의 학문은 가학 전통과 맞닿아 있었다. 해남윤씨 가문은 《소학》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녔고, 그는 이를 토대로 덕과 절의를 실천하였다. 유배와 좌절 속에서도 절개를 지키며 문학으로 도학적 신념을 펼쳤다. 이는 이후 고산 윤선도에 이르는 문풍 형성에 결정적 토대를 마련하였다.선조 때 동인(東人)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인 이발(李潑)이 그 증조부 이달선(李達善)의 묘비(墓碑)를 세울 때 윤구가 그 신도비명을 지었고,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그 글씨를 썼다. 또 후면은 이이(李珥)가 지문(識文)을 짓고 친필로 글씨를 써주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 윤구는 비록 전라도 해남의 바닷가에 있었지만, 이발・이산해・이이와 같은 당대의 거물들과 교유하였다. 또 이발처럼 동인・서인(西人) 양쪽을 드나들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교유하던 사람의 비문을 해남의 윤구에게 부탁한 것을 보면, 윤구의 문명이 호남 지방뿐만 아니라, 전국에 널리 알려진 사실을 알 수 있다.균형 잡힌 학문과 강직한 절의, 그리고 교유의 폭넓음으로 윤구는 당대 사림 사회의 정신을 대표했다. 그는 호남 학문과 문풍의 뿌리를 굳건히 했고, 가문을 통해 후대에까지 학문과 예술적 명맥을 이어갔다. 그의 삶은 바닷가 해남에 머물렀으나, 그 문명은 조정과 중국에까지 미쳤다.그는 고향 해남에다 귤을 심고 귤밭 속에 정자를 지은 후에 스스로 호를 귤정(橘亭)이라고 불렀다. 그가 남긴 이름 귤정은 단순한 호가 아니라, 절개와 은일의 정신을 담은 학자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리고 고향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여생을 보냈다. 연표1495년(연산군 1) 전남 해남 출생1510년대 초반 평택임씨와 혼인1513년(중종 8) 사마시 합격1516년(중종 11) 문과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 제수1517년(중종 12) 승정원 주서1518년(중종 13) 홍문관 수찬·지제교·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 등 역임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연루, 삭직·영암 유배1533년(중종 28) 직첩 회복1538년(중종 33) 전라도도사1541년(중종 36) 순창군수, 덕정으로 칭송1545년(명종 즉위년) 홍문관 부교리, 곧 체직1549년(명종 4) 모친상 후 병세 악화, 별세. 묘소는 해남 북일면 금당리.해촌서원에 배향되었고, 이조판서로 증직.
- 2025-09-09 | NO.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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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 기효간(1530~1593)
- 기효간의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자는 백고(伯顧), 호는 금강錦江 또는 인재忍齋이다. 아버지는 호조판서로 추증된 고흥군(高興君) 기대유(奇大有), 어머니는 함양오씨이다. 기효근奇孝謹의 형이며 장성에 정착한 기원의 후손으로 아곡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외모는 엄격하였다. 이는 소학의 법도를 널리 익혔기 때문이다. 그는 효성도 지극했다. 부친상을 당하여 죽을 마시며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하여 산 이름을 제청산祭廳山이라 하였다. 김인후金麟厚와 이항李恒의 문인이며 기대승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기효간은 시간이 있는대로 종숙되는 고봉 기대승(1527~1572)에게 찾아가 학문의 의문점을 토의하였다. 기효간은 한평생 조용히 살았다. 이는 증조인 복재 기준의 기묘사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영향으로 일생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후진양성에 주력하여 호남의 은덕군자隱德君子로 불렸다. 특히 하서 김인후(1510~1560)에게 배웠는데 하서는 내 정통을 이을 사람은 오직 그대라 하며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주었다.하늘과 땅 사이에 두 사람이 있으니공자의 참된 기운 주자에게 전하여졌네.학문에 잠긴 마음 의혹하지 말고병들어 쇠약한 이내 몸 위로하게.김인후가 그에게 지어준 "우주의 중간에 두 분이 있는데, 공자는 원기이고, 주자는 참됨이다."라는 시는 도를 전해 받은 시로 알려졌다. 동문인 김천일, 정철, 변이중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오희길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기효간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김경수(金景壽) 윤진(尹軫) 김홍우(金弘宇) 이수일(李守一) 등과 함께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아 11월 초단(草壇)을 설치한 바 있다. 김경수를 맹주로, 김제민(金齊閔)을 의병장으로 삼았는데 1902년 호남의 유림들이 건립한 남문창의(현 북일면 오산리) 에 77선열(승려 9명, 노복 1명) 이 기록돼 있다. 사후에는 호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장성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제향되었다.장성군 황룡면 이곡리(아치실)에 그의 제각과 유적비, 묘갈명 등이 있다. 조선 중기의 시인 백광훈(白光勳, 1537~82)의 옥봉시집玉峰詩集에 기효간에게 보내는 시가 있다.贈奇伯顧(증기백고)백고(伯顧) 기효간(奇孝諫)께相思幾歲隑音塵(상사기세개음진) 우리가 그리워 서신에만 의지한 지 몇 해든가요?千里空驚夢裡人(천리공경몽리인) (어젯밤엔 당신께서) 천리 먼 길을 건너 (제) 꿈에 나오시어 놀랐습니다.聚散元來無定算(취산원래무정산) (허나) 사람의 만나고 헤어짐은 (그렇게) 늘 뜻밖인 거지요海城花柳一番新(해성화류일번신) 바닷가 마을에서의 멋들어진 풍류(라) 더욱 새롭더이다
- 2020-05-06 | NO.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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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호 임형수(1514~1547)
-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1514~1547)는 병마절도사 임준林畯의 아들로 1514년 나주 송현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택이고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이다. 18세 때인 1532년(중종26) 진사과에 급제하고 1536년(중종30) 22세에 대과인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국한림 시강원설서를 거쳐 홍문관 수찬으로 있었다. 1537년에 중종이 서울 서쪽 교외에 행차하여 농사일을 시찰하고 망원정에서 시 한 편을 짓게 했는데 병조판서 소세양이 1위를, 임형수가 2위를 하여 임형수는 사서삼경과 말 1필을 하사받을 정도로 문예가 뛰어났다.그의 시는 허균의 '학산초담'이나 '성수시화'에 실릴 정도로 걸작이었다. 허균은 임형수의 호방한 시를 칭찬하면서 그가 원통하게 일찍 죽은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생전에 호당(湖堂)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1538년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하고 1539년 명나라 사신 원접사 종사관으로 있을 때 그 고상한 인품과 건아발속한 시재는 외국 사신들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1542년 임형수의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는 3월 15일부터 21일까지의 비와 눈을 무릅쓴 산행 유람기이다. 칠보산은 함북팔경의 하나인데 그 이름에서 보듯 원래 일곱 개의 산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여섯 개의 산은 바다에 가라앉고 이 산만이 남았다는 전설이 있다. 1544년(중종39)에 검상이 되었을 때 중종의 국상을 당하여 대제학 성세창 등 10인과 함께 대행왕의 행장을 짓는데 참여하였다.1545년(인종1) 정3품 당상관인 부제학에 올랐으며 사인이 되어 어명으로 중종의 묘지문과 명나라에 보내는 치적 및 시호를 청하는 대행왕의 시책문을 지었다.군기사정과 도감랑청으로서 왕릉의 묘역을 감독하였으며 그해 9월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년이 다 못되어 1546년(명종1)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가 일어나 제주목사로 쫓겨났다가 파직되어 귀향하였다.1547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영의정 이기 등의 정권농락을 비난하는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이 생기자 소윤 윤원형(尹元衡)에게 대윤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처음에는 소재 노수신, 미암 유희춘과 함께 절도안치하는 벌이 내려졌으나 벽서사건의 고발자인 부제학 정언각이 문정왕후에게 너무 가볍게 처벌한다는 상소가 있어 자택에서 사사되었다. 홍명희가 쓴 「임꺽정」에 의금부 금부도사가 가져온 사약을 임형수가 받는 장면은 유명하다. 퇴계 이황은 그를 '문무의 재능을 겸비한 호걸남아'라고 하였고 하서 김인후는 국가의 큰 인물이 원통하게 처형된 것을 슬퍼하여 시를 짓기도 하였다. 임형수는 34세로 임종 때 부모님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장남 구가 당시 8세였는데 훈계하기를 '글을 안배우면 무식한 사람이 되니 글을 배우되 과거를 보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하였다.선조 초에는 제일 먼저 을사사화의 억울한 옥사에 대한 원통함을 풀게 하고 구관직이 회복 되었으며 이조판서의 벼슬을 증직 받게 되었다. 사후에는 광산구 임곡동 등임사와 1702년(숙종 28) 나주의 송재서원(松齋書院)에 제향되었다. 정부인 하동정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으며 저서로는 『금호유고』가 있다.
- 2020-04-28 | NO.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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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경섭
- 기경섭(奇景燮, 1852~1916)의 본관은 행주이며 행주기씨(幸州奇氏)이다. 자는 백행(伯行), 호는 벽서(碧捿)이다.부 : 奇東燁 조 : 奇夏麟 증조 : 奇師達 외조 : 昌寧 曺亨振 처부1 : 長興 高濟運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914년 6월 20일에 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다
- 2020-02-05 | NO.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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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만(奇東萬)
- 기동만(1856~1917)의 본관은 행주이다. 자는 사일(士一)이고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1906년 6월 28일에 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다.부 : 奇貞鉉조 : 奇命國증조 : 奇象默외조 : 南平 文在洙처부1 : 羅州 羅燾元처부2 : 錦城 羅承文
- 2020-02-24 | NO.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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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운(奇東雲)
- 기동운(1855~1919)의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명국(明國)이다.부 : 奇德永조 : 奇師九증조 : 奇商浚외조 : 晋州 姜東桓처부1 : 全州 崔正煥『蘆沙執紼錄』에 따르면 1880년 노사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 2020-02-24 | NO.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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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익(奇東益)
- 기동익(1829~1897)은 본관이 행주이며 자는 노일(魯一), 호는 수곡(水谷)이다. 광주 우치동에 거주했다. 부 : 奇正鉉조 : 奇思淳증조 : 奇商師외조 : 咸陽 吳漢應처부1 : 光山 金江稷처부2 : 全州 李培煥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889년에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참고 眉巖先生墓下會案 , 『蘆沙門人錄』
- 2020-02-21 | NO.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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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찬(奇東燦)
- 기동찬(奇東燦, 1823~1853)의 본관은 행주, 자는 경문(敬文) , 호는 매천(梅泉)이다.부 : 奇恒錫조 : 奇師忠증조 : 奇商胤외조 : 高時奎처부1 : 宋文信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 2020-08-08 | NO.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