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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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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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지 許墀 숙종 17년(1691) 8월 12일∼숙종 19년(1693) 7월 16일
    허지 許墀 숙종 17년(1691) 8월 12일∼숙종 19년(1693) 7월 16일허지(1646∼1719)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옥경(⽟卿)이다. 아버지는 매화와 난을 잘 그린 서화가 허징(許徵)이며, 어머니는 박민수(朴敏修)의 딸이다. 1678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83년 지평, 1685년 장령, 1691년 7월 20일에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8월 12일 도임하여 1693년 7월 16일에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이임하였다. 1694년 동래부사, 1699년 승지, 1701년 우부승지, 1706년 황해도관찰사, 1707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신미(1691년) 8월 12일 도임하였고 계유 (1693년) 7월 16일 광주(廣州)부윤으로 이임하였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5
  • 허질 許秩 현종 13년(1672) 10월 10일∼숙종 1년(1675) 8월 4일
    허질 許秩 현종 13년(1672) 10월 10일∼숙종 1년(1675) 8월 4일허질(?∼?)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아버지는 이천부사 허한(許僩)이다. 1656년 선공 가감역, 1658년 은율현감, 1661년 임피현령, 1664년 마전군수, 1665년 풍덕부사, 1666년 원주목사, 1672년 8월 28일 나주목사 제수되어 근무하다가 1675년 2월 25 일 전라도관찰사로 임용하자 형인 허적이 개차할 것을 건의하자 나주목사를 그대로 재직하게 되었고, 4월 19일에는 가의대부로 가자되었다. 8월 4일까지 만기 재직하고 강화유수가 되어 떠났다. 1677년에 강화산성을 고려 때의 내성 규모로 크게 고쳐 쌓고 만기가 되었으니 사직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계속 근무하라 하자 세 번의 상소로 사퇴하고 좌윤으로 이동하다. 1678년 성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임 자(1672년) 10월 10일 도임하였고 을묘(1675년) 8월 4일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되었 다.”는 기록이 있다. 미수 허목(許穆)이 그를 위해 쓴 글 「나주목사(羅州牧使) 허질(許 秩)에게 주다」가 『기언별집(記⾔別集)』에 수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4
  • 홍감보 洪鑑輔 영조 31년(1755) 3월 5일∼영조 31년(1755) 3월
    홍감보 洪鑑輔 영조 31년(1755) 3월 5일∼영조 31년(1755) 3월홍감보(1701∼1763)의 본관은 풍산(豐⼭)이며, 자는 명원(明遠)이다. 친아버지는 형조 참판을 지낸 홍중주(洪重疇)이고 밀양부사를 지낸 홍중연(洪重衍)에게 입적되었다. 음직 으로 벼슬에 나서 1739년 사산감역, 1740년 사옹주부·사포별제·금성현령, 1742년 사복첨정, 1745년 고양군수, 1747년 파주목사, 1748년 사복주부, 1753년 청주목사를 거쳤다. 1755년 2월 4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755년 3월 5일 청주에서 출발하여 3 월 27일 청주로부터 전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소식을 접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7월 17일에는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1756년 충원현감, 1757년 가의대부로 승진, 경주부윤, 1760년 홍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해(1755년) 3월 5일 청주목사에서 이배되어 같은 달 27일에 청주에서 출발하여 전주부에서 부친이 병들었음을 알리자 이조에서 돌아가라는 체직을 허용한다.”고 기록되 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9 | NO.13
  • 홍득일 洪得⼀ 인조 11년(1633) 11월 13일∼인조 13년(1635) 4월
    홍득일 洪得⼀ 인조 11년(1633) 11월 13일∼인조 13년(1635) 4월홍득일(1577∼1655)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형제(亨諸), 호는 만회(晩悔) 또는 후포(後浦)이다. 아버지는 공주목사 홍사효(洪思斅)이며 장인이 예조판서 윤돈(尹暾)이 다. 160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13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 호조좌랑, 1618년 예조좌랑, 1620년 독운어사, 1623년 봉산군수, 1624년 동래부사, 1628년 동부승지·승지·우승지를 거쳐 1633년 10월 6일 통훈대부 행 나주목사로 제수 되어 11월 부임하여 1635년 4월에 이임하였다. 1640년∼1643년 좌승지, 1646년 강원감사, 1647년 좌승지, 1649년 경주부윤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계유(1631 년) 11월 13일 도임하였고 을해(1635년) 4월에 전라도관찰사의 계에 의하여 파직당하 였다.”고 되어 있는데 관찰사의 장계는 확인할 수 없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12
  • 홍명한 洪名漢 영조 41년(1765) 6월 21일∼영조 42년(1766) 6월 5일
    홍명한 洪名漢 영조 41년(1765) 6월 21일∼영조 42년(1766) 6월 5일홍명한(1724∼1774)의 본관은 풍산(豊⼭)이며, 자는 군평(君平)이다. 할아버지는 숙종대 전라감사 겸 전주부윤을 역임한 홍중하(洪重夏)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홍경보(洪景 輔)이며, 어머니는 심계량(沈季良)의 딸이다. 문음(⾨蔭)으로 입사하여 의금부도사로 재직 중 1754년 증광시 진사시와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여 부수찬에 특제되었으며, 1755년 교리, 1758년 우승지·삼척부사, 1761년 동래부사, 1762년 대사간, 1763년 경기도관찰사, 1764년 대사헌·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65년 6월 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6월 21일 부임하였다. 1766년(영조 42) 5월 29일에 나주목사 홍명한에 대하여 재신(宰⾂)으로 지방에 나간 지 1년이 되었고 또 질병이 있어 구임하기 어려우니, 전조(銓曹)로 하여금 내직(內職)으로 옮기자는 논의를 한다. 1768년 승지·형조참판·도 승지를 거쳐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771년 형조판서를 역임한 뒤 개성유 수가 되었다. 영조의 문예진흥책의 하나인 편찬사업에 관여하여 1770년 『동국문헌비 고』의 감인당상(監印堂上)이 되어 이의 간행에 책임을 맡았다. 『금성읍지』에는 “을유 (1765년) 6월 21일 부임하였고 병술(1766년) 6월 5일 형조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11
  • 홍병주 洪秉周 순조 16년(1816) 6월 29일∼순조 20년(1820) 2월
    홍병주 洪秉周 순조 16년(1816) 6월 29일∼순조 20년(1820) 2월홍병주(?∼?)는 1777년 성균관 유생, 1789년 가감역, 1791년 감역, 1792년 종묘 부봉사, 1792년 상서 직장, 종묘령, 1793년 창녕현감, 1796년 온양군수, 1798년 원주 판관, 1811년 선공부정, 1814년 순천군수를 지냈다. 1816년 5월 10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6월 29일 도임하였다. 1611년 월 5일 나수하라는 전지가 계하되었다가 5) 1817년 2월 22일 형추는 그만두고 의처하라고 하였다. 세곡(稅穀)의 운송 지연에 관한 것이었다. 『금성읍지』에는 “병자(1816년) 6월 29일 부임하였고 경진(1820년) 2월에 상경하여 중(中)으로 평가를 받아 4월 7일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10
  • 홍양묵 洪養黙 순조 14년(1814) 6월 7일∼순조 15년(1815) 6월 1일
    홍양묵 洪養黙 순조 14년(1814) 6월 7일∼순조 15년(1815) 6월 1일홍양묵(1764∼?)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백회(伯晦)이다. 아버지는 부사(府使) 홍술조(洪述祖)이다. 1786년 성균관 유생, 1787년 조경묘 참봉, 1788년 선공 부봉사, 11790년 상서 직장, 1794년 장흥고 주부, 양구현감, 1796년 원주판관, 1801년 금부 도사, 1802년 간성군수, 수원판관, 1804년 온양군수, 1805년 아산군수 겸임, 1807년 사옹첨정, 서원현감, 1809년 밀양부사, 1810년 4월 광주목사를 지냈다. 1814년 5월 2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이 6월 7일 도임하였다. 1815년 4월 11일 나주(拿囚) 논의가 있었고 5월 10일 전지가 내렸다. 5월 30일 “연해의 큰 고을은 거듭 흉년을 만나 백성 들의 사정과 형편을 진념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동(⼤同)의 일과 환향(還餉)의 법의 뜻이 지극히 중하고 엄하니 고신을 추탈하자.”는 의금부의 계가 윤허된다. 1817년 면천군수, 1819년 성주목사, 1823년 안주목사·강계부사, 1827년 연천현감, 1832년 부사과, 1834년 통정대부 가자, 부호군, 1835년 돈녕 도정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 에는 “갑술(1814년) 6월 7일 부임하였고 을해(1815년) 6월 1일 갑술년의 추환(秋還) 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마감한 일로 나포되어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광주 공원 내에 1908년 3월 광주군수 홍양묵의 종증손(從曾孫)인 홍난유(洪蘭裕)가 다시 세운 「목사홍공양묵선정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9
  • 홍역 洪櫟 영조 34년(1758) 10월 18일∼영조 38년(1762) 9월 7일 =
    홍역 洪櫟 영조 34년(1758) 10월 18일∼영조 38년(1762) 9월 7일 =홍역(1708∼1767)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수옹(壽翁), 호는 의재(毅齋)이다. 아버지는 대사간을 지낸 홍용조(洪⿓祚)이다. 형이 광주부유수를 지낸 지중추부사 홍억(洪 檍)이고, 아들이 실학자 홍대용(洪⼤容)이다. 1744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처음으로 장릉참봉에 보임되었고, 1746년 군자감 봉사, 1748년 금부도사가 되었다. 1749년 상의원 별제, 1750년 문경현감, 1754년 호조정랑, 영천군수, 1755년 봉산군수, 해주목 사, 1758년 9월 17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0월 4일 하직하고 1758년 10월 18일 부임하였다. 1759년(영조 35) 5월 30일 기록에 전문(箋⽂)을 봉과(封裹)한 여러 도구 들이 매우 정교하지 못하다 하여 추고하여 경책하라는 데 대하여 윤허 전교가 내렸다. 『영조실록』에 “전 나주목사 홍역을 멀리 유배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호남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나주는 환곡 4만 곡(斛)을 하나도 저축하여 둔 것이 없어 백성들이 호구 (糊⼝)할 길이 없으므로 온 고을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들이 모두 분통하게 여겼 다. ……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엄중히 징계할 것을 다시 청하여 드디어 예천(醴泉) 에 정배하고 금고 5년에 처하였다.”라는 기록을 통해 원망을 사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아전을 다스렸고, 간편함으로써 백성들을 대하였다.”고 전한다. 아들 홍대용은 동복 실학자 석당(⽯堂) 나경적(羅景績)을 나주로 초빙하여 아버 지의 후원 하에 철제(鐵製) 혼천의를 제작하여 자신의 사설 천문대인 농수각(籠⽔閣)에 설치하고 천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인(1758년) 10월 18일 도임하였고 임오(1762년) 9월 7일에 모친상을 당하여 같은 달 26일에 발인하였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9 | NO.8
  • 홍익필 洪益弼 영조 49년(1773) 9월 15일∼영조 51년(1775) 3월 3일
    홍익필 洪益弼 영조 49년(1773) 9월 15일∼영조 51년(1775) 3월 3일홍익필(1721∼?)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직(⼦直), 아버지는 통덕랑 장릉참봉 홍제유(洪濟猷)이다. 음관으로 1741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52년 내시교관, 1754 년 사축별제, 1755년 공조정랑, 1756년 안음현감, 1758년 사복판관, 1759년 해주판 관, 1764년 배천군수, 1767년 장성부사, 1770년 성주목사를 지냈다. 1773년 8월 5 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월 15일 부임하고 1774년 6월 11일에 통정대부에 올랐다. 1774년(영조 50) 6월 11일 기록에 기민(飢民)을 뽑은 것이 매우 정밀하였으니 진휼을 잘했음을 알 수 있으니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1775년 3월 3일에 이임하였다. 1776년 양주목사, 1777년 광주부윤, 1778년 안동현감, 1780년 상주목사, 1783년 강계부사, 1785년 형조참판, 1786년 승지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 에는 “계사(1773년) 9월 15일 부임하였고 을미(1775년) 3월 3일에 체직 하였다.”고 되어 있다. 1786년에 원정면(元井⾯, 현재 영암군 금정면, 당시 나주)과 세화면(細花⾯,현재 나주시 세지면) 주민들이 함께 세운 「행목사홍공익필휼민영세불망지비」가 나주시 세지면사무소 안에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7
  • 홍재기 洪在祺 융희 1년(1908) 10월 1일∼융희 2년(1909) 11월
    홍재기 洪在祺 융희 1년(1908) 10월 1일∼융희 2년(1909) 11월홍재기(1873∼1950)는 서울 출생으로, 홍정섭(洪正燮)의 아들이다. 1895년(고종 32) 8 월 안동관찰부 주사로 임명되었다가 관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1899년 일본 도쿄의 백과학교(百科學校), 1902년 도쿄법학원을 졸업하였다. 190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길리중학교(吉利中學校)를 졸업, 1905년 8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강사가 되었고, 12월 법관양성소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 3월에는 한성재판소 판사로 임명되었다. 1908년 1월에 무안군 궁장정리관(宮庄整理官), 1908년 5월 17일 무안부윤, 5월 21일 에는 무안항재판소 판사를 겸임한다. 1908년 10월 1일자로 나주군수와 해남군수를 겸임하였고, 1909년 11월에는 대심원판사, 1910년 1월부터는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 판사직도 겸임하였다. 1910년 이후에도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1948년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원장으로 발령받았으나, 1950년 9월 29일 인민군에 의해 납치, 총살되었다. 저서로 『민사소송법』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6
  • 홍재응 洪在應 철종 11년(1860) 10월 20일∼철종 13년(1862) 1월 19일
    홍재응 洪在應 철종 11년(1860) 10월 20일∼철종 13년(1862) 1월 19일홍재응(1801∼1860)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자성(⼦聲)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홍기섭(洪箕燮)이다. 1834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35년 온릉참봉, 1837년 사재 봉사, 1838년 평시직장, 1842년 종묘직장, 사복주부, 1843년 영산현감, 1847년 마전 군수·담양부사, 1860년 2월 청풍부사를 역임하였다. 경신(1860년) 10월 21일 청풍부 사에서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일 사조하고 부임하였다. 임술(1862년) 1월 19일 목사 내아 금학헌에서 이질로 별세하였으며, 2월 20일 발인하였다. 경기도 연천문화원에 「행군수홍재응영세불망비(⾏郡守洪在應永世不忘碑)」가 서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5
  • 홍처윤 洪處尹 효종 7년(1656) 2월 29일∼효종 7년(1656) 윤5월 27일
    홍처윤 洪處尹 효종 7년(1656) 2월 29일∼효종 7년(1656) 윤5월 27일현감 홍처윤(1607∼1663)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지임(之任), 호는 안분재(安分 齋)이다. 아버지는 광주목사를 지낸 홍명원(洪命元)이며, 어머니는 부호군 윤민준(尹民 俊)의 딸이다. 형 홍처후(洪處厚)는 현종대 전라감사를 역임하였고, 홍처대(洪處⼤)는 전주부윤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아들 홍수주(洪受疇)도 문과 급제자이다. 1639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에 오르고, 1640년 승문원 정자·예문관 검열, 1641년 봉교·감찰, 1642년 홍산현감, 1646년 병조정랑, 1648년 정언·충청도 시관·전옥봉사, 1649년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하고, 1650년 응교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2년 보덕으로 승진되고, 1653년 교리가 되었다. 1654년 다시 보덕에 임명되어 직강·교리를 지냈다. 1656년 1월 16일 금성현감에 제수되어 2월 29일 부임하였다. 1658년 응교·사간·사인, 이듬해 수찬·사간·사예·종 부시정 등을 지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사인 겸 빈전도감도청이 되고, 이어 교리 겸 한학교수를 거쳐 통정대부로 승진, 동부승지가 되었다. 1660년 형조참의·황해도 관찰사, 1663년 첨지중추부사·예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신(1656 년) 2월 29일 도임하였는데 동년 윤5월 2일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윤5월 29일에 떠났 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4
  • 화암 송타宋柁(1567~1597)
    송타(宋柁, 1567~1597)의 자는 시정(時正)이고, 호는 화암(禾庵)이다. 본관은 홍주(洪州)이다. 아들 송수(宋燧)가 있다. 조부는 송정황(宋庭篁, 1532~1557)이고, 부친은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1549∼1601)이며 처부는 성주김씨(星州金氏) 김의백(金義伯)이다. 매형은 석주 권필(權韠)이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화암당에서 지낸 송타는 조선중기 의병으로 1597년(선조30)에 왜적이 호남을 도륙하자 피난해 전남 무안현 사포에 살면서 이곳에서도 당堂을 짓고 화암이라 편액하고 백일홍정百日紅亭을 지었다.  선조 때 지평(持平)을 지냈다.송타 집안의 불운은 임진왜란 때 풍지풍파를 겪게 되었다. 송타는 어느 날 밤에 길을 가다가 길을 잃고 적에게 붙들려 바다를 건너게 되었는데 적의 숫자가 10명이 채 되지 않고 한 배에 붙들려 가는 자가 많은 것을 보고 은밀히 한 배에 탄 사람과 모의하여 틈을 노려 적의 칼을 빼앗아 거의 다 찔러 죽였다. 그런데 마침 한 왜적이 물에 뛰어들어 달아나 다른 적에게 고하였으므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정의 특명으로 초혼장을 치르게 하였다.송타는 죽음에 임하여 크게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나는 광주에 사는 송제민의 아들이다. 불행히 적에게 붙들렸고 지금 또 불행히 죽게 되었다. 그대들 여러 배의 포로된 자들은 혹 언젠가는 탈출하여 돌아갈 것이니 나의 부모에게 전해주기 바란다." 하였었는데 4년이 지나 1600(선조33)년에 태초太初 강항姜沆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 이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강항의 『간양록』과 문정공 송시열이 지은 송제민의 묘포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순절 후 조봉대부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 1706(숙종32)년에 광주에 건립된 운암사에 부친인 해광 송제민과 석주 권필, 창랑 고경리, 별제 신필, 도계 신한상 등과 같이 배향하고  있다.정유재란 때 한산도(閑山島)에서 왜적에게 붙잡혔다. 기회를 엿보아 왜검(倭劒)을 탈취하여 일선(一船)의 적을 거의 작살(斫殺)하였는데 적 하나가 몰래 빠져나가 다른 배를 데리고 왔다. 수많은 왜적이 일시에 강박(强迫)하자 창파(滄波)에 투신하여 자진(自盡)하였다. 이 사실을 함께 붙잡혔던 전라도 담양(潭陽) 창평(昌平)의 진사(進士) 이신(李紳)이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에게 전하여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입던 옷만으로 화암(花岩) 아래 장사하였다. 평거(平居)에 정원 앞에 있는 큰 바위의 주위와 그 틈에 백일홍(白日紅)을 많이 심고 화암당(花岩堂)이라 편(扁)하였다. 운암사(雲岩祠)에 배향(配享)하였다.
    2020-03-19 | NO.3
  • 황호
    황호黃顥의 본관은 장수이며 자는 사서士瑞, 호는 남제南齊, 풍암동 운리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품이 대범화통하여 글을 잘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의병을 이끌고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南의 막하에 들어가 각지를 전전하면서 전공을 세웠다. 이복남은 우계羽溪 사람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황호는 남원에서 대군의 적을 만나 분전 중 순절했다. 전쟁이 끝난 후 어모장군禦侮將軍 및 판결사判決事의 증직이 내려졌다.
    2018-05-28 | NO.2
  • 황흠 ⿈欽 숙종 1년(1685) 9월 7일∼숙종 12년(1686) 6월 10일
    황흠 ⿈欽 숙종 1년(1685) 9월 7일∼숙종 12년(1686) 6월 10일황흠(1639∼1730)의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자는 경지(敬之)이다. 아버지는 황신구(⿈ 藎耉)이며, 어머니는 김취겸(⾦就兼)의 딸이다. 그로부터 아들 황계하(⿈啓河), 손자 황재(⿈梓), 증손자 황인검(⿈仁儉)까지 4대까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166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80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83년 정언, 1684년 지평, 1685 년 7월 19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월 9일 도임하였다. 1686년 수찬, 1687년 부교 리, 1688년 사간, 1694년 승지, 1698년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 다. 1699년 충청도관찰사, 1702년 대사간, 1705년 도승지, 1706년 이조참판, 1707 년 강화유수, 1708년 좌참찬, 1710년 예조판서, 1711년 형조판서, 1713년 이조판서, 1715년 우참찬, 1717년 판돈녕부사, 1718년 판윤, 1719년 공조판서, 1725년 판돈녕 부사로 재직하다 1730년 사망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축(1685년) 9월 9일 도임하 였고 병인(1686년) 6월 10일 홍문관 수찬으로 이임하였다.”라 하였다. 『영조실록』 그의 졸기에, “황흠은 조정에선 50년 동안에 팔좌(⼋座, 육조판서)를 거쳤고 나이가 90이 넘었다. 사람들이 청렴하고 근신하며 소탈하고 검소함을 칭찬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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