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555건
-
- 조시만 趙時萬 정조 즉위년(1776) 8월 15일∼정조 3년(1779) 3월 21일
- 조시만 趙時萬 정조 즉위년(1776) 8월 15일∼정조 3년(1779) 3월 21일조시만(?∼?)의 본관은 풍양(豐壤)이고, 자는 경박(敬博)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행 한성부판관 조인명(趙麟命)이고 성균관 생원 조계명(趙啓命)에게 입양되었다. 1793년 5월 부터 1795년 5월까지 나주목사를 지낸 조시순(趙時淳)의 형이다. 1759년 부사과, 1774년 9월 청도군수를 거쳤다. 1776년 7월 13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8월 15일 부임하고 1779년 3월 21일에 이임한 후 호조정랑에 오른다. 1780년 상주목사에 제수되 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부사과에 이르렀다. 『금성읍지』에는 “병신(1776년) 8월 15일 도임하였고 기해(1779년) 3월 21일에 체직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청도군 화양읍에 향인들이 세운 영세불망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5 | NO.60
-
- 조시순 趙時淳 정조 17년(1793) 5월 22일∼정조 19년(1795) 5월 6일
- 조시순 趙時淳 정조 17년(1793) 5월 22일∼정조 19년(1795) 5월 6일조시순(1734∼?)의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자는 경복(景復)이다. 친아버지는 통훈대부 행한성부판관을 지낸 조인명(趙麟命)이고 생원 조계명(趙啓命 1708∼1737)에게 입양되 었다. 1776년 8월부터 1779년 3월까지 나주목사로 재직했던 조시만(趙時萬)의 동생이다. 1777년 증광시 생원으로 합격하여 공릉참봉을 시작으로 1779년 의영봉사, 1781 년 금부도사, 1782년 호조좌랑, 1783년 영유현령, 1785년 단양군수, 1790년 무주부 사를 역임하였다. 1793년 4월 28일에 나주목사로 제수되었다. 『금성읍지』에는 “계축 (1793년) 4월 28일에 무주부사에서 옮겨 와 5월 22일 도임하였고 을묘(1795년) 5월 6일 안핵사 이희갑의 계문에 의해 파직 어 5월 8일에 서울로 잡혀간다.”고 기록되었 다. 『정조실록』에, 호남 암행어사 이희갑(李羲甲)이 복명한 내용에 “나주목사 조시순이 곡식을 나누어 실효성 있게 진휼하지 못한 탓으로 유랑민 및 진휼을 받아야 할 백성 가운데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은 사람이 10여 인이나 된다고 논하였다.”라 하였다. 5월 10일 파출되었고 5월 22일 재조사한 결과 죄상이 더 밝혀져 “사거리에서 엄히 형장을친 뒤 절도(絶島)에 유배하라.”는 형을 받았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59
-
- 조시술 趙時述 정조 5년(1781) 1월 15일∼정조 6년(1782) 9월 27일
- 조시술 趙時述 정조 5년(1781) 1월 15일∼정조 6년(1782) 9월 27일조시술(?∼?)의 본관은 풍양, 아버지는 서윤 조철명(趙哲命)이다. 1776년 부사과, 1777 년 연안부사, 1779년 5월 광주(光州)목사를 역임하였다. 1780년 12월 20일에 나주목 사로 제수되어 1781년 5월 15일 부임하고 1782년 9월 27일 병이 심하여 파직되었 다. 『금성읍지』에 “신축(1781년) 1월 15일 도임하였고 임인(1782년) 9월 25일에 체직 되어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5 | NO.58
-
- 조안국(1501~1573) 광주목사
- 포저집 제33권 / 묘표(墓表) 3수(三首)증조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 증 좌찬성 부군(贈左贊成府君)의 묘표- 조안국(1501~1573)우리 증조고(曾祖考)인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증 의정부 좌찬성 부군은 휘(諱)가 안국(安國)이요 자(字)는 국경(國卿)이니, 동지중추부사 증 병조 참판 휘 현범(賢範)의 차자(次子)이다. 그 묘소는 참판의 묘소와 같은 동(洞)이면서 언덕을 달리하고 있으니, 그곳은 바로 동쪽 언덕이다.조씨(趙氏)가 처음 나오게 된 유래와 그 뒤의 세차(世次)는 이미 참판의 묘문(墓文)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부군(府君)의 증조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 부사(南原府使) 휘 계팽(季砰)이요, 조부는 장사랑(將仕郞) 증 공조 참판 휘 지진(之縝)이다.부군은 나이 24세에 가정(嘉靖) 갑신년(1524, 중종 19)의 무과에 급제하여 바로 선전관(宣傳官)을 제수받았다. 외방에 나가 강동 현감(江東縣監)이 되었으며 임기가 만료된 뒤에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 공조 좌랑(工曹佐郞), 겸내승(兼內乘),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상이 친림(親臨)하여 기예를 시험할 적에 격모구(擊毛毬)에서 1등을 차지하자 통정대부로 올리도록 명하였으니, 그때의 나이가 28세였다.희천 현감(熙川縣監)으로 나가 임기가 만료된 뒤에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선부군(先府君)도 회령 부사(會寧府使)였다. 이처럼 부자가 나란히 육진(六鎭)의 부사가 되었으므로 세상에서 성대한 일이라고 일컬었다.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 승선(承宣)은 문신에게도 청선(淸選)에 해당되었으니, 무신의 경우는 극선(極選)이라고 할 것이요 또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임명되고 또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임기를 끝내고 체차(遞差)되었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임명되어서는, 이때에 대도(大盜) 팔룡(八龍)이 난리를 일으켰으나 관군이 감히 체포하지 못하였는데, 부군이 방략(方略)을 세워서 그를 체포하였다. 이에 상이 가자(加資)를 명하였으나 대론(臺論)으로 개정되어 임소에서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근무하였다.그 뒤에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임명되었다. 그때에도 대도 미이(米伊) 형제가 난리를 일으켰는데, 부군이 또 모두 체포하였다. 팔룡과 미이는 모두 날래고 용맹하기로 유명하였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도 많아서 대적하기 어렵다고 소문이 났는데, 급기야 부군이 부임하자마자 모두 체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오래도록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이에 상의 명으로 가자되었으니, 이것이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 7)의 일이었다.또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에 임명되어 임기를 채우고 돌아왔다. 을묘년(1555)에 왜적이 남해안에 침입하자 국내가 온통 경악하며 장수를 뽑아서 왜적을 막기에 이르렀다. 이에 부군이 전라병사 겸 방어사(全羅兵使兼防禦使)가 되었는데, 순변사(巡邊使)인 남치근(南致勤)과 뜻이 맞지 않아서 결국에는 그의 무함을 받은 나머지 녹도(鹿島)에 2년 동안 유배되었다. 이때 남치근은 살육을 많이 하여 포악하고 위세를 부리는 것으로 소문이 난 반면에, 부군은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논하는 자들이 이것을 가지고 양가(兩家) 자손의 성쇠를 점쳤는데, 결국 남치근의 집안은 후사(後嗣)가 없었고 부군의 자손은 아직도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그 뒤에 함경남도 병사에 임명되고 또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돌아왔다. 경성에서는 관례에 따라 군직(軍職)에 거하였는데, 영흥에서 돌아온 뒤로는 항상 포도대장(捕盜大將)과 오위장(五衛將)과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 6) 7월 14일에 병으로 작고하니 향년 73세였다.전부인(前夫人)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일찍 죽어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후부인(後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생원 휘 세임(世任)의 딸인데, 임진년에 왜적을 피하던 중 양주(楊州) 산골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의 나이가 82세였다. 아들 3인과 딸 1인을 두었다. 장남 휘 엄(儼)은 일찍 죽어서 자식이 없다. 다음 휘 간(侃)은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로 좌찬성을 추증받았다. 딸은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 문정공(尹文貞公) 휘 근수(根壽)에게 출가하였다. 막내아들 휘 경(儆)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격파한 공으로 선무 공신(宣武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풍양군(豐壤君)에 봉해졌으며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이다. 부군과 선부군(先府君) 양세(兩世)가 증직을 받은 것은 풍양군의 훈작(勳爵) 덕분이다.찬성(贊成)은 아들 3인을 두었다. 장남 휘 영중(瑩中)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 아들 익(翼)은 선세(先世)의 유덕(遺德)으로 외람되게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찬성의 자손에 대해서는 원래 그 묘문(墓文)에 구비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문정공은 아들 6인을 두었다. 장남 환(晥)과 다음 질(晊)은 모두 첨지중추부사이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으며, 내외의 손자와 증손이 수십 인에 이른다. 풍양군은 아들 5인을 두었다. 장남 한중(閑中)은 통정대부로 군수이고, 막내 시중(時中)은 현감이며, 그 사이의 세 아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이 역시 수십 인에 이른다.모년 모월 모일에 증손 대광보국숭록대부 행 판중추부사 익(翼)은 짓다.
- 2023-08-09 | NO.57
-
- 조연명 趙然明 철종 2년(1851) 5월 10일∼철종 4년(1853) 1월 15일
- 조연명 趙然明 철종 2년(1851) 5월 10일∼철종 4년(1853) 1월 15일조연명(1797∼?)의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자는 성보(誠甫), 호는 삼암(三嵒)이다. 할아버 지는 홍문관 수찬 조운기(趙雲紀), 아버지는 응교 조민화(趙民和), 동생은 의정부좌참찬 조연창(趙然昌)으로 모두 문과 급제자이다. 1822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음보로 1827년 장릉참봉, 1829년 의영봉사·광흥봉사, 1830년 광흥직장, 1832년 광흥주부, 1833년 진안 현감, 1836년 삼등현령, 1840년 사복주부, 1842년 함양군수, 1845년 장흥부사, 1847년 부안현감, 1849년 예천군수, 1850년 수원판관을 지냈다. 1851년 4월 13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5월 10일 부임하였다. 1853년 1월 15일 충주목사, 1858년 청주목사, 1860년 평양서윤, 1861년 전주판관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신해(1851년) 5월 10일에 부임하였고 계축(1853년) 1월 15일에 충주목사로 자리를 옮긴다.”고 기록되어 있다. 1837 년 전북 진안읍에 세운 「현감조후연명모성애사비」, 1869년 전북 부안읍 서림공원에 세운 「현감 삼암 조후연명 현감 우당 이후필의 임정유애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56
-
- 조영로 趙榮魯 영조 21년(1745) 8월 8일∼영조 22년(1746) 윤2월
- 조영로 趙榮魯 영조 21년(1745) 8월 8일∼영조 22년(1746) 윤2월조영로(1701∼1748)는 1747년(영조 23)년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1745년 8월 8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8월 16일 하직하고 부임하였다. 1747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고 1748년 4월 관찰사 재임 중에 사망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축(1745년) 8월 1일 도임하였고 병인(1746년) 윤2월에 대사간으로 이동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9 | NO.55
-
- 조원영 趙原永 순조 22년(1822) 11월 17일∼순조 24년(1824) 6월
- 조원영 趙原永 순조 22년(1822) 11월 17일∼순조 24년(1824) 6월조원영(1777∼1846)의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자는 철경(喆卿)이다. 아버지는 숭정대부 행호조판서를 지낸 조진관(趙鎭寬)이고 통덕랑 조진의(趙鎭宜)에게 입양되었다. 형은 효명세자빈(익종비)의 아버지인 국구(國舅) 조만영(趙萬永)이고, 동생 조인영(趙寅永)이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1795년 성균관 유생, 1803년 증광시 진사에 합격하여 1810년 동몽교관, 1812년 금부도사, 순릉직장, 1814년 고령현감, 1817년 양근군수, 1819년 호조정랑·서흥부사, 1822년 청주목사를 지냈다. 1822년 9월 2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1월 17일 도임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금성읍지』에는 “임오(1822년)11월 17일 부임하였고 갑신(1824년) 3월에 상경한 후 6월에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병이 심해서 6월 25일 파직을 당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54
-
- 조유성 趙惟誠 선조 2년(1569) 8월 13일∼*선조 3년(1570) 말
- 조유성 趙惟誠 선조 2년(1569) 8월 13일∼*선조 3년(1570) 말조유성(1526∼1575)의 본관은 순창(淳昌)이며, 자는 중실(仲實)로 아버지는 성균 생원을 지낸 조수억(趙壽億)이다. 1555년 식년시에서 생원시 을과 1위, 문과 갑과 2위로 동시에 급제하고, 사헌부감찰로 서장관이 되어 연경에 갔을 때 심부름하는 사람이 길에서 죽자 예로써 장사지내주고, 돌아와서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1567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쳐 1569년 8월에 나주목사로 부임 하였고, 1573년에는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다. 기대승이 그와의 만남을 기록한 시 「나주 목사와 칠두정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봉속집』에 수록되어 있고, 기대 승의 부음을 듣고 그가 쓴 제문과 만장이 『고봉별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묘갈명은 의병장 고경명이 써서 『제봉집(霽峯集)』에 수록되었다. 대각(臺閣)에 있을 때 일을 논함에 흔들림이 없이 바른말로 직언하였고, 성품은 청렴하고 검소하여 행실을 스스로 지키면서 가사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금성읍지』에는 “기사(1569년) 8월 13일 도임 하였는데, 죄수가 죽었을 때 죽은 원인을 밝히기 위한 시체 검증을 하지 않아서 파직 되어 돌아갔는데 그 일자를 기록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이임일은 다음 목사가 1571년 2월에 부임한 것으로 보아 1570년 12월로 추정된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53
-
- 조의방 趙義⽅ 세종 17년(1435) 12월 29일∼세종 19년(1437) 1월 19일
- 조의방 趙義⽅ 세종 17년(1435) 12월 29일∼세종 19년(1437) 1월 19일조의방(?∼?)의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아버지는 고려말 예의총랑(禮儀摠郞)을 지낸 조정(趙靖)이다. 1413년(태종 13) 문과에 급제하여 1415년 사천과 울산에 처음으로 진을 설치할 때 사천진병마사 판사천현사(判泗川縣事)에 제수되었다. 『세종실록』 1435년 12월 17일 기록에 “나주목사 조의방이 하직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고 요역(徭役)을 경하게 하며, 형벌을 줄이게 하라.’하였다.”라고 하였다. 나주목사를 마치고 원평도호부사로 갔다.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금성일기』 「을묘년 1435년」 “신임 목사 조의방이 12월 28일 대안사에서 자고 29일 사당에서 제사를 모시고 도임하였다. 통정대부이다.”라 되어 있고, 정사(1437년) 기록에는 “전임 목사 조의방은 원평도호부사로 이임받아 1월 19일에 광주 선암으로 출발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을묘(1435년) 12월 29일 도임, 정사(1437년) 1월 19일 원평도호 부사(原平都護府使)로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52
-
- 조정만 趙正萬 숙종 36년(1710) 6월 6일∼숙종 38년(1712) 5월 20일
- 조정만 趙正萬 숙종 36년(1710) 6월 6일∼숙종 38년(1712) 5월 20일조정만(1656∼1739)의 본관은 임천(林川)이며, 자는 정이(定⽽), 호는 오재(寤齋)이다. 아버지는 전주진관병마절제도위 조경망(趙景望)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1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유생이 되고, 1694년 의금부도사, 1699년 강서현령, 1705년 공조정랑·평양서윤, 1707년 광산현감(광주목사), 1708년 호조정랑, 1709년 청송부사를 역임하였다. 1710년 4월 28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6 월 6일 부임하였다. 1711년 11월 나주목사가 정초의 전문을 올리지 않았다고 하여 파출한다는 전라감사의 계와 1712년 5월에 체포하였다는 의금부 장계가 있었다. 1723 년(경종 3) 11월 19일 기록에는 사간원에서 나주 등 여섯 고을의 장인(匠⼈)의 포(布) 를 1필(匹)씩 더 거두었으므로 일찍이 비국(備局)에서 조사를 하여 정식(定式)하였었는 데, 조정만이 나주목사 때 정해준 수량보다 더 많이 받아 들여[濫捧] 유산(流散)하는 백성이 많았다.는 애용이 있다. 1713년 성천부사, 1714년 호조정랑·능주목사, 1717년 양주목사, 1718년 안악군수, 1719년 상주목사, 1726년 통정대부·수원부사, 1729년 호조참의, 1730년 공조참의, 1731년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1732년 호조참판, 1735 년 공조판서, 1737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문집으로 『오재집(寤齋集)』이 있다. 『금 성읍지』에는 “경인(1710년) 6월 6일 도임하였고 임진(1712년) 5월 20일에 사직하였 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51
-
- 조지당 趙之唐 세조 7년(1461) 11월 20일∼세조 9년(1463) 10월
- 조지당 趙之唐 세조 7년(1461) 11월 20일∼세조 9년(1463) 10월조지당(?∼?)의 본관은 한양, 할아버지는 우의정 조연(趙涓), 아버지는 판중추원사 조혜 (趙惠)다. 효령대군의 6남인 원천군(原川君) 이의(原川君 (李宜)가 성녕대군의 후사로 입적하게 되는데, 그 원천군의 계부인이 조지당의 딸이다. 1455년 정난원종공신 2등에 책록, 1459년에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461년 9월 27일에 행나주목사, 1466년 8월 17일에는 행충주목사를 제수 받았다. 『금성일기』 「신사년 1461년」에 “신임 목사 통정대부 첨지중추원사 조지당이 11월 20일 도임하였다.”라고 되어 있고, 「계미년 1463년」에는 “목사 조지당이 임오년 동지에 전을 가지고 11월 9 일 상경하였다가 12월 23일 돌아왔다.”고 기록되었으며, “목사 조지당이 부모의 병을 살피기 위해 계미(1463년) 10월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갔다.”고 되어 있다. 『금성읍 지』에는 “신사(1461년) 11월 21일에 도임하였고, 모월일에 부모의 병을 살피러 올라 갔으며 계미(1463년) 10월 상경하면서 사표를 제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50
-
- 조진선 趙鎭宣 순조 15년(1815) 6월 25일∼순조 16년(1816) 5월 10일
- 조진선 趙鎭宣 순조 15년(1815) 6월 25일∼순조 16년(1816) 5월 10일조진선(?∼1833)의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아버지는 정헌대부 형조판서를 지낸 조돈 (趙暾)이며, 아들 조기영(趙冀永)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형조판서를 지냈다. 음직으로 1788년 현릉참봉, 1794년 창모궁 직장, 1795년 신계현령, 1797년 영천군수, 1798년 문화현령, 평강현감, 1800년 해주판관, 1802년 영천군수, 1804년 사복첨정, 1809년 울산부사, 1811년 성주목사, 1814년 임천군수를 지냈다. 1815년 6월 1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6월 25일 부임하였다. 1818년 홍양현감, 1820년 병세로 파직되었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금성읍지』에는 “을해(1815년) 6월 25일 부임하였고 병자(1816 년) 5월 10일 병세가 심하여 상경한 뒤에 이임하였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49
-
- 조필영 趙弼永 고종 27년(1890) 10월 26일∼고종 28년(1891) 6월 22일
- 조필영 趙弼永 고종 27년(1890) 10월 26일∼고종 28년(1891) 6월 22일조필영(?∼?)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1872년 북부도사를 시작으로 1873년 생원으로 회시에 합격, 1875년 사도주부, 교리, 영접도감 낭청, 1876년 형조정랑, 1878년 산릉도감 낭청, 경모궁령, 1883년 김제군수, 1885년 신천군수, 대구판관, 1886년 경남 가도사, 대사간, 무안현감, 1887년 진주목사, 1890년 총무관을 지냈다. 1890년 9월 19일 나주목사와 호남전운사(轉運使)를 겸하여 10월 26일에 부임 하여 재직하다 1891년 6월 22일 폄하되어 이임하였다. 당시 직권을 이용하여 수세미에 대한 불법수탈을 자행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운동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1894년 전라도 강진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이듬해 석방되었다. 『금성읍 지』에는 “경인(1890년) 9월 19일에 본직에 전운사를 겸하여 10월 28일 부임하여 재직하다가 신묘(1891)년 6월 22일에 포폄 결과 중(中)이 되어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철도변 바위에 「전운어사 조필영 영세불망비」가 새겨져 있으며, 대구판관 시절인 1885년에 세운 「조필영 영세불망비」가 대구 경상감영공원에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48
-
- 조함영 趙咸永 순조 27년(1827) 4월 21일∼순조 30년(1830) 4월 8일
- 조함영 趙咸永 순조 27년(1827) 4월 21일∼순조 30년(1830) 4월 8일조함영(1778∼?)의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자는 덕경(德卿)이다. 음직으로 1801년 건릉참봉, 1802년 사옹주부·금부도사, 1803년 종묘령, 1808년 태인현감, 1811년 영천 군수, 1820년 울산부사, 1824년 부사과를 역임하였다. 1827년 3월 27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4월 21일 도임하였다. 1833년 사복첨정, 1834년 낭청, 1836년 진주목사가 되어 통정대부로 가자 되었다. 1839년 돈녕도정·공조참의, 1840년 양주목사, 1842년 승지, 1843년 영변부사, 1844년 가선대부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정해(1827년) 4월 21일 부임하였고 경인(1830년) 4월 8일 상경한 후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는 1828년 3월에는 대동미를 실은 8,9선이 늦게 출발하였다 하여 징계를 받았으며, 1830년 윤4월 7일에 병이 깊어 내려올 수 없다고 하여 파직을 당하였다. 7) 1831년에 세운 「목사조공함영선정비」가 나주객관 금성관 안에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47
-
- 조형(趙珩)
- 조형의 본관은 풍양(豊壤). 광주(光州)출신. 자는 군헌(君獻)이고 호는 취병(翠屛). 1626년(인조 4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630년에 명경과(明經科)에 발탁되어 괴원(槐院)에 들었다가 다시 사국(史局)으로 옮겼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재위: 1623-1649)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어 인조를 호위하였으며, 이듬해 환도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1655년(효종 6년)에 대사간(大司諫)으로서 통신상사(通信上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그 후 병조참판(兵曹參判),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고 다시 병조대간(兵曹大諫)이 되었다가 1659년에 예조참판(禮曹參判), 1660년(현종 원년)에 형조판서(刑曹判書), 그리고 대사헌(大司憲)을 제수(除授)하였다.다음 해 다시 공조(工曹)․형조판서(刑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장렬대비(莊烈大妃)의 복(服)을 정하는 문제에 연루되어 양주(楊洲)에 유배(流配)되었다. 익년에 유혁(宥赥)되어 기사(耆社)에 들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던 공로(功勞)를 추기(追紀)하여 숭록(崇錄)에 진조(進朝)하였으며, 1679년(숙종 5년)에 졸(卒)하였다. 40여 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였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저서로는 일본에 다녀온 과정을 담은 사행록使行錄인 『부상일기扶桑日記』가 있다.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 2020-03-10 | NO.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