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555
게시물 검색 폼
  • 정중수 鄭中守 세종 19년(1437) 1월 19일∼?
    정중수 鄭中守 세종 19년(1437) 1월 19일∼?정중수(?∼?)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1418년 5월에 ‘호군(護軍) 정중수(鄭中守)’라는 기록이 있으며, 1427년 7월에 옥구첨절제사, 1434년 4월에는 첨지중추원사에 임용되었다. 『세종실록』에는 1436년 11월 성주목사로 재직 중인 것은 기재되어 있으나, 그 이후의 기록은 없어 나주목사의 부임 시기는 확인이 안 된다. 『금성일기』 「정사년 1437년」에 “신임 목사 통정대부 정중수가 1월 19일 도임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정사(1437년) 1월 19일 도임,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자는 기록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75
  • 정지익 鄭志翼 영조 32년(1756) 7월 30일∼영조 34년(1758) 8월 28일
    정지익 鄭志翼 영조 32년(1756) 7월 30일∼영조 34년(1758) 8월 28일정지익(1700∼1767)의 본관은 영일(迎⽇)이며, 자는 군경(君敬)이다. 아버지는 통정대부 성주진 병마첨절제사를 지낸 정건일(鄭健⼀)이다. 1738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선공 가감역, 1739년 사옹주부, 1741년 공조좌랑, 1743년 의성현령, 1745년 사복판관, 1748년 예천군수, 1751년 장성부사, 1754년 평양서윤, 1755년 평양부사를 지냈다. 1756년 5월 22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7월 11일 하직하고 7월 30일 부임하였다.1757년(영조 33) 3월 1일 『승정원일기』에 나주는 역변이 있었던 곳이지만 정지익 목사가 잘 다스릴 거라는 내용이 있다. 1761년에는 진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자(1756년) 7월 30일 도임하였고 무인(1758년) 8월에 사직하였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9 | NO.74
  • 정지호 鄭之虎 효종 1년(1650) 12월 25일∼효종 5년(1654) 1월
    정지호 鄭之虎 효종 1년(1650) 12월 25일∼효종 5년(1654) 1월현감 정지호(1605∼1678)의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자피(⼦⽪), 호는 무은(霧隱) 이다. 아버지는 진사 정응원(鄭凝遠)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 홍요좌(洪堯佐)의 딸이다. 163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세마(洗⾺)가 되었으며, 163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전적, 공조좌랑, 예조좌랑이 되었다. 1638년 병조정랑·전라경시관, 1639년 황주판관, 1643년 용강현령·개성부경력, 1645년 형조정랑·개성부 유수, 1647 년 성균관의 사예, 1648년 장령, 1649년 해주목사를 지내고 1650년 12월 금성현감 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펼친다. 1652년 7월에는 전라감사 심택의 장계에 따라 “부임한 뒤로 직무에 전념하고 청렴결백으로 자처하며 아랫사람을 대함에 성의로 대하고 여러 가지의 오래된 폐습을 적의 조치하여 이속과 백성들이 스스로 두려워하고 감히 속이지 못하며 온 고을이 태평하고”, “학교와 군정(軍政)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의하여 권장하고 전세(⽥稅)와 공급(貢物)은 비록 바루어졌다고는 하나 일정하게 바치는 공물이 허다 한데도 상납하는 물품을 하나 흠궐한 것이 없었고, 1652년 봄의 빈민구호에 있어서도 스스로 비축하였다가 백성들을 구제하였다.”는 돈유문과 함께 표리 일습을 하사받는다.1653년(효종 4) 8월에는 사마교비(駟⾺橋碑)를 세운다. 사마교는 고려 현종 2년(1011) 거란이 쳐들어오자 왕은 남쪽으로 피신하는데 나주에서 10여 일 동안 머무를 때, 왕이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지나갔다 해 불린 이름이다. 사마교비는 이다리를 수리한 기념비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이다. 정지호 현감의 선정으로 1654년 1월 6일 금성현이 나주목으로 승격·복호되었고, 정지호도 목사로 승임되었다. 이에 따라 전남도가 전라도로 복호되었다. 1656년 통례, 1657년 좌승지·도승지·대사간 등을 지냈다. 1658년 길주목사, 1659년 성절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오고, 오위장·첨지, 1660년 조사위장·원주목사, 1669년 울산부사, 1675년 공조참의·동부승지·우승지·대사간, 1676 년 도승지, 1677년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 “경인(1650년) 12월 25일 도임하였고 갑오(1654년) 1월에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나주객관 금성관 안에는 「목사정후지호 자혜선정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73
  • 정진 鄭津 태종 7년(1407) 12월 26일∼태종 8년(1408) 7월 22일
    정진 鄭津 태종 7년(1407) 12월 26일∼태종 8년(1408) 7월 22일정진(1361∼1427)의 본관은 봉화(奉化),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의 아들이다. 1380년 성균관시 합격, 낭장이 되고 사재령, 영주지주사, 전농령을 지냈다. 1391년 정몽주 등고려를 지키려는 구세력의 탄핵을 받아 아버지 정도전과 함께 삭직되었다가, 1392년에 조선이 개국되자 풀려나와 연안부사에 등용되었다. 1393년 판사재감사를 거쳐 경흥부 윤, 영원주목사, 공조전서, 형조전서, 중추원부사를 지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주살되고, 삭직당하여 전라도 수군에 충군되었다. 1407년 판나주목사로 다시 관직에 들어서서 1416년 인녕부윤 이후 충청도관찰사, 판한성부사, 평안도도관찰사, 공조판서, 개성유후사 유후,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금성일기』 「정해년 1407년」에는 부임과 이임 기록이 없다. 『금성읍지』에 “정해(1407년) 10월 26일 도임, 무자(1408년) 7 월 22일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희절(僖節)이다. 『세종실록』 그의 졸기에, 공신의 아들이었으나 겸손하고 정사에 부지런하였으며, 공명하고 진실하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72
  • 정충신
    정충신(鄭忠信, 1576~1636), 湖節4中-078-1, 光州, 甲子, 樹勳 -《호남절의록》(1799)정충신의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고려 말의 명장 정지(鄭地)의 9세손으로, 아버지는 광주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금천군(錦川君) 정윤(鄭綸)이다. 어머니는 영천 이씨(永川李氏)로 이인조(李仁祚)의 딸이다. 어머니는 노비 신분이라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서 노비가 되는 노비종모법에 따라서 노비가 되었다. 부인은 하양 허씨(河陽許氏)이다. 아들은 정빙(鄭砯)이다.1592년(선조 25) 17세의 어린 나이로 임진왜란 중에 광주목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정충신이 가기를 자청하고는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이해 가을에 행재소에서 실시하는 무과에 합격하였다.1623년(인조 1) 안주목사로 방어사를 겸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활약해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하여졌다.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서산 일대의 토지를 사패지로 받게 되어 그 후손이 서산으로 입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청나라와 절교(絶交)할 것을 결정하자, 청나라와의 소통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이를 재고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당진에 유배되었고,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1636년에 세상을 떠났다.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서 정통했으며, 저서로는 『만운집(晩雲集)』, 『금남집(錦南集)』과 이항복이 귀양갈 때 정충신이 수행하며 당시의 상황을 일기로 기록한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등이 있다.광주광역시 구도심의 주요 도로인 금남로는 정충신의 군호 금남군에서 따온 것이다. 
    2020-04-02 | NO.71
  • 정협 鄭悏 숙종 27년(1701) 7월 19일∼숙종 28년(1702) 5월 27일
    정협 鄭悏 숙종 27년(1701) 7월 19일∼숙종 28년(1702) 5월 27일정협(1642∼?)의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가숙(可叔)이다.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정극지(鄭克智)이다. 1675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676년 사직참봉을 시작으로 1677년 광흥봉사, 1681년 호조좌랑·호조정랑, 1682년 금천군수·한산군수, 1685년 평양서윤, 1688년 강화경력, 1689년 함흥판관, 1690년 형조정랑·남원부사, 1693년 원주목사를 역임하였고 1696년 백성을 잘 다스리는 수령 19명에 뽑혔다. 1697년 호조 정랑·통천군수를 거쳐 1701년 6월 6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7월 19일 부임, 1703년 부사과, 1704년 호조정랑, 1705년 성천부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신사 (1701년) 7월 19일 통천군수에서 이동하여 재직한 후 임오(1702년) 5월 27일에 병으로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70
  • 정홍명(鄭弘溟) 기암기(畸庵記)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시문집 《계곡집(谿谷集)》권3 / 잡저(雜著) 편에 '서석산부 뒤에 제함[題瑞石山賦後]'이란 제목으로 정홍명鄭弘溟(1582~1650)을 평했다.기암자(畸庵子 정홍명(鄭弘溟)는 체격도 작은 데다 병에 많이 시달려 언뜻 보면 초췌하고 왜소한 하나의 남자에 불과할 뿐인데, 그가 지은 서석산부(瑞石山賦)를 보니 광대하고 기걸차고 탁절(卓絶)하고 엄려(嚴厲)하여 그 토해 내는 기염(氣燄)이 무시무시하기만 하였다. 재자(才子)는 참으로 헤아릴 수가 없는 법, 이를 인해 상쾌한 느낌을 갖게 되다. ○ 기옹(畸翁)의 글을 보건대, 소작(小作)의 경우는 대부분 소루하고 느슨하여 묘한 경지에 이른 것이 드문 반면, 그 웅사(雄詞) 대편(大篇)을 보면 기걸차서 남의 추종을 불허하니, 그는 대체로 크게 쓰는 데에는 능하고 작게 쓰는 데에는 재주가 모자란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를 만약 하늘로 날아오르고 물속에 잠기는 등 대소의 변화를 측량할 길이 없는 신룡(神龍)과 비교한다면 물론 조금 양보해야 할 점이 없지 않겠지만, 고래가 땅덩어리를 집어삼키고 자라가 삼신산(三神山)을 내던지듯 하는 면이 있어 또한 일세지웅(一世之雄)이 되기에 충분하니, 아, 대단하다 하겠다.[주-D001] 고래가 …… 내던지듯 하는 : 《진서(晉書)》 효회효민제기찬(孝懷孝愍帝紀贊)에 “자라가 삼신산을 동댕이치고 고래가 땅덩어리 집어삼키네.[鼈墜三山 鯨呑九服]” 하였다.또한 《계곡집(谿谷集)》권8 / 기(記) 편에는 '기암기(畸庵記)'가 있다.조화(造化)의 공이라는 것도 음양(陰陽)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음양의 수(數) 역시 기우(奇偶 홑과 겹. 즉 홀수와 짝수)일 따름이다.양의 수는 ‘홑[奇]’이니 홑은 외롭게 마련이고, 음의 수는 ‘겹[偶]’이니 겹은 짝이 있게끔 되어 있다.이를 유추하여 사물에 적용해 보면, 홑은 어울리기 어렵고 주체성이 강하며 도와주는 이가 없는데 그 부류는 속성상 군자가 되고, 겹은 서로들 빌붙으며 기회 포착을 잘하고 원조해 주는 이가 많은데 그 무리는 속성상 소인이 된다.그런데 사람의 보편적 정서로 볼 때 이익을 좋아하는 경우가 대다수인 반면 의리를 지키는 경우는 드물기만 하다. 이런 까닭에 너나 할 것 없이 겹에 속하는 것을 선호하면서 홑의 처지가 되는 것은 꺼리고들 있는 것이다.오천(烏川 영일(迎日)의 옛 이름) 정자용(鄭子容 자용은 정홍명의 자(字))이 자기 거처를 기암(畸庵)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기(畸)’는 바로 ‘홑’이라는 ‘기(奇)’의 뜻과 같다. 그래서 내가 언젠가 그에게 힐문하기를,“대저 기(畸)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인데, 어찌하여 그대만 유독 이를 취하여 자호(自號)로 삼는 것인가. 그리고 그대로 말하면 무척이나 기(畸)의 환경 속에 떨어져 있다고 할 것인데, 어찌하여 그만 염증을 내고 청산해 버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하였더니, 자용이 대답하기를,“그렇지 않다. 내가 유독 기(畸)의 처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바로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취한 것일 따름이다. 내가 그대에게 기(畸)에 얽힌 나의 사연을 이야기해 주겠다.나의 선인(先人 정철(鄭澈)을 말함)께서는 몸가짐을 정결(貞潔)하게 지켜 오면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허투루 내놓은 적이 없으셨고 조정에서는 강직한 면모를 보이며 털끝만큼도 국가를 등진 일이 일찍이 없으셨는데, 그만 거꾸로 세상의 엄청난 비난을 한 몸에 뒤집어쓴 채 억울하게도 신원(伸寃)되지 않은 지가 지금 벌써 20년이 되었다.그리고 불초(不肖)인 내가 선인께서 남겨 주신 가르침을 받들어 계속 문학에 정진하면서 밤이고 낮이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니, 비록 견문은 넓지 못하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세상 사람들 사이에 끼일 수 있으리라고도 여겨진다. 그런데 시대의 버림을 받은 채 불우한 처지에 빠져 고난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다.그런데도 거리낌없이 배척이 가해지고 무책임하게 짓밟는 행동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사귀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친척마저도 돌아보지 않게 된 나머지 뜨내기처럼 떠돌아다니면서 스스로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의 이른바 기자(畸者)치고 나만큼 혹독한 처지에 빠진 경우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지금 내가 만약 아름다운 이름을 도둑질하고 그럴듯한 호칭을 내세우면서 스스로 으스대려고 한다면 어찌 안 될 것이 있기야 하겠는가마는, 어떻게 내가 감히 실상을 숨기고 거짓 칭호를 가탁하여 식자들의 꾸지람을 중하게 자초할 수가 있겠는가.”하기에, 내가 말하기를,“훌륭하다, 자용의 뜻이여. 곤궁한 처지에서 자신의 신조를 바꾸지 않고,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타인을 원망하지 않으며, 지조를 굳게 지키면서 그 말이 방자하지 않고, 압축된 형식 속에 드넓은 내용이 함축되고 있으니, 그 명호(名號)를 보기만 하면 그가 바로 그런 인물임을 믿을 수가 있게 될 것이다.그리고 그대가 기(畸)의 상황에 처한 것을 병되게 여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천도(天道)의 입장에서 보면, 양(陽)만 늘 있고 음(陰)이 없을 수도 없으며, 동시에 늘 음만 있고 양이 없을 수도 없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괘(否卦)와 태괘(泰卦)가 서로 뒤를 잇고 박괘(剝卦)와 복괘(復卦)가 서로 이어받게 되는 것인데, 치란(治亂)과 궁통(窮通)이 상호 엇바뀌어 성쇠(盛衰)를 거듭하는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이치라고 하겠다. 따라서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나면 군자가 우(偶)의 입장에 서게 되는 반면 소인은 기(畸)의 입장이 되고,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게 되면 역시 이와는 정반대의 현상을 보이곤 하는 것이다.그러나 세상의 운세는 일정함이 없다 하더라도 선비의 지조만은 확고하게 정해진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니, 옛날부터 군자가 고달픈 처지에 빠졌다고 하여 자기의 절조를 바꾼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을 보면 험난한 지경에 처했다가 뒤에 가서 뜻대로 풀린 경우도 있었고 처음에는 곤궁했다가 나중에 형통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가령 좋은 세상을 끝끝내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입장에서는 또한 충분히 자적(自適)할 수가 있는 것이니, 어찌 그것을 병되게 여기고 말 것이 있겠는가.지금 자용으로 말하면, 빛나는 문채와 확고한 뜻을 갖추고 있는 위에 지조를 지키며 몸가짐을 단속하여 선대(先代)의 공업(功業)을 실추시키지 않고 있으니, 위에 계신 성명(聖明)께서 어찌 유독 그만 기(畸)의 처지에 오래도록 놔두시기야 하겠는가.장주(莊周)는 말하기를 ‘기인(畸人)이란 세속과는 맞지 않지만 하늘과는 화합하는 사람이다.’고 하였다.대저 세속과는 맞지 않아도 하늘과 화합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하다고 할 것인데, 더더구나 또 두 가지를 모두 얻으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자용은 힘쓸지어다.”하였다.[주-D001] 기인(畸人)이란 …… 사람이다 :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말이다.
    2020-08-26 | NO.69
  • 정효성 鄭孝成(孝誠) 인조 9년(1631) 11월∼인조 11년(1633) 8월 26일
    정효성 鄭孝成(孝誠) 인조 9년(1631) 11월∼인조 11년(1633) 8월 26일정효성(1560∼1637)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술초(述初), 호는 휴휴자(休休⼦)이 다. 할아버지는 승문원박사 정주신(鄭⾈⾂)이고, 아버지는 참봉 정원린(鄭元麟)이다. 1589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5년 음직으로 회덕현감에 발탁되었다. 1607년 삭녕군 수, 1612년∼1616년 은진현감, 1623년 충주목사, 1625년 호조참의, 1626년 강화유 수, 1628년 청주목사, 1630년 공청감사를 역임하였으며, 1631년 9월 15일 특지(特 旨)로 나주목사가 되고 11월에 부임하여 1633년 8월에 이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청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금성읍지』에는 “신미(1631년) 11월에 도임하였고 계유 (1633년) 8월 26일에 사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68
  • 조덕수 趙德洙 영조 45년(1769) 5월 24일∼영조 45년(1769) 8월 14일
    조덕수 趙德洙 영조 45년(1769) 5월 24일∼영조 45년(1769) 8월 14일조덕수(1714∼?)의 본관은 임천(林川)이며, 자는 도원(道源)이다. 1710년 6월 6일부터 1712년 5월 20일까지 나주목사를 지낸 조정만(趙正萬)이 할아버지다. 친아버지는 가선 대부 대사헌 조명익(趙命翼)이고 큰아버지 조산대부 내시교관 조명두(趙明⽃)에게 입적 하였다. 1744년 식년시 진사로 합격하여 1746년 세마(洗⾺)를 시작으로 1747년 부솔, 1749년 증산현감, 1754년 사복첨정, 1755년 영천군수, 1759년 청송부사, 1764년 고양군수를 지냈다. 1768년 7월 29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었으나 홍명한 등 이조에서 격에 맞지 않다하여 취소가 되어 부사과로 근무하다 1769년 5월 11일 다시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5월 12일 하직하고 5월 24일 부임하였다. 1769년 11월 진주목사, 1773년 선혜낭청, 1778년 적성현감, 1789년 통정대부까지 올랐다. 『금성읍지』에는 “기축 (1769년) 5월 24일 부임하였고 같은 해 8월 14일에 전라도관찰사인 홍인한(洪麟漢)과 외척관계가 된다 하여 피하게 되어 상경 체직하였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67
  • 조박 趙璞 인조 3년(1625) 2월 22일∼인조 3년(1625) 2월 24일
    조박 趙璞 인조 3년(1625) 2월 22일∼인조 3년(1625) 2월 24일조박(1577∼1650)의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자는 숙온(叔薀), 호는 석곡(⽯⾕)이다. 아버지는 조희윤(趙希尹)이며, 어머니는 성순원(成順元)의 딸이다. 1603년 생원이 되고, 1606년 식년시 문과에 갑과 3위로 급제하였다. 아들 조전소(趙全素)와 손자 조시구(趙 始久)도 문과에 급제하였다. 1614년 공조정랑·배천현감, 1617년 무장현감, 1618년 평안도 도사가 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1625년 2월 4일 나주목사로 제수 받았으나 2월 14일 어리석다하여 탄핵을 받고 해임되었다는 내용이 실록에 전한다. 『인조실록』에 헌부가 아뢰기를, “나주는 오늘날 보장이 되는 곳으로서 소산이 많고 지역이 넓어 다스 리기 어렵기로 유명한 곳인데, 신임 목사 조박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용렬하여 이 어려운 임무를 감당하기에 적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떳떳치 못한 행동을 한 것이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었으니 큰 고을을 제압할 소임을 결코 이런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 다.”하여, 체차되었다. 『금성읍지』에는 “을축(1625년) 2월 22일 도임하였고, 같은 달 24일에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충남 부여의 퇴수서원(退修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석곡유고(⽯⾕遺稿)』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66
  • 조병로 趙秉⽼ 고종 12년(1875) 10월 3일∼고종 13년(1876) 9월 16일
    조병로 趙秉⽼ 고종 12년(1875) 10월 3일∼고종 13년(1876) 9월 16일조병로(1816∼1886)의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자는 유원(孺元)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행 임피현령 조이순(趙頤淳)이다. 1846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849년 동몽교 관, 1854년 휘경원령, 장수현감, 감찰, 1856년 광주(廣州)판관, 1858년 보성군수, 1862년 공주판관, 1864년 밀양부사, 1866년 영유현령, 부평부사, 홍주목사, 1867년 충주목사, 1871년 상주목사, 1873년 청주목사를 지냈다. 1875년 9월 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0월 3일 부임하였다. 1879년 동부승지, 1881년 봉산군수, 1884년 공조참 의, 1886년 호조참판 가선대부를 역임하고 사망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해(1875년) 9월 3일에 청주목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10월 3일 부임하여 재직하다 병자(1876년) 9월 16일에 모친상을 당하여 이임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충주목사 재임 시 읍성을 개축하고, 충주 관아를 재축하였다. 1869년에 세운 「축성사적비(築城事蹟碑)」가 충주 중앙공원 안에 있다. 상주목사 때에도 읍성과 조공제(趙公堤)를 수축하였고, 청주목사 때에는 만동묘(萬東廟)를 수축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65
  • 조석영 趙奭永 고종 21년(1884) 1월 30∼고종 21년(1884) 8월 16일
    조석영 趙奭永 고종 21년(1884) 1월 30∼고종 21년(1884) 8월 16일조석영(1828∼?)의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춘경(春經)이다. 초명이 조정화(趙正和)로 1868년 3월 조석영(曺奭永)으로 바꾸었다. 아버지는 덕천군수 조운섭(趙雲涉)으로 통덕랑 조운적(趙雲迪)에 입양되었다. 동생 조만화(趙晩和)는 문과 급제 후 이조참판을 역임 하였다. 1864년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여 1867년 예릉참봉, 1868년 우부승지, 1869 년 사재봉사, 1871년 사재직장, 1873 장릉령, 1874년 홍천현감, 1877년 재령군수, 1882년 서흥부사를 지냈다. 1883년 11월 15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884년 1월 30 일 부임하였다. 8월 16일 나주목사가 말미를 받아 상경하였는데, 신병이 갑자기 중해 져서 고을으로 돌아갈 가망이 전혀 없다는 정장을 이조가 보고하자 거창부사 박규동 (朴奎東)과 서로 바꾸라고 전교가 내렸다. 이후 1885년 진주목사, 1886년 금천(⾦川) 군수, 1888년 회인현감, 1889년 광주(廣州)판관·단양군수, 1890년 안성군수를 역임하 였다. 『금성읍지』에는 “계미(1883년) 11월 15일에 서흥부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갑신(1884년) 1월 4일 임금에게 사조하고, 1월 30일 부임하였고 1884년 7월 21일 휴가를 얻어 상경한 후 8월 16일에 거창부사와 맞바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64
  • 조선시대 관찰사와 유수
    강원감사, 경기감사, 경상감사, 전라감사, 충청감사, 평안감사, 함경감사, 황해감사그리고 강화유수, 광주유수, 송도유수,  수원유수 등아래를 클릭하세요.https://hanjaexam.tistory.com/306
    2024-08-03 | NO.63
  • 조성보 趙聖輔 숙종 13년(1687) 8월 7일∼숙종 14년(1688) 7월 21일
    조성보 趙聖輔 숙종 13년(1687) 8월 7일∼숙종 14년(1688) 7월 21일조성보(1634∼1692)의 본관은 풍양(豐壤)이며, 자는 사준(⼠俊)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행 의흥현감(⾏義興縣監) 조백운(趙伯耘)이다. 장인 이동직(李東稷)과 처남 이수언(李 秀彦)이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1660년에 식년시 진사와 같은 해 증광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1661년 가주서, 1664년 정언, 1665년 지평, 1667년 정언, 1669년 평산 부사, 1675년 종성부사, 1677년 문천군수, 1681년 부호군, 1682년 병조참의·동부승 지, 1684년 서원현감·강양도관찰사, 1685년 양주목사, 1687년 8월 7일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1688년 7월 21일에 이임하였다. 1687년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금성읍 지』에는 “정묘(1687년) 8월 7일 도임하였고 무진(1688년) 7월 21일 사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62
  • 조수준 趙守準 선조 31년(1598) 12월 25일∼선조 32년(1599) 8월
    조수준 趙守準 선조 31년(1598) 12월 25일∼선조 32년(1599) 8월조수준(1544∼?)의 본관은 풍양(豐壤)이며, 자는 국균(國均)이다. 아버지는 과의교위(果 毅校尉) 조정권(趙廷權)이다. 1576년 식년시 생원으로 합격하였고, 1590년 증광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7년 병조좌랑, 문학, 병조정랑, 필선 등을 역임하였고, 1598년에는 장령을 거쳐 12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599년 사간원으로부터 성품이 완만하여 정무 처리를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당한 후 1599년 8월에 교체된다. 1600년 군자감정, 1604년 숙천부사, 1605년 봉상시정, 1606년 영접도감낭 청(迎接都監郞廳)에 재직 중 사헌부로부터 아전들을 단속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교체를 당하였으나 1607년 여주목사, 1611년 영흥부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술 (1598년) 12월 25일 도임하였고 기해(1599년) 8월에 체직되었다. 청덕비를 세워 만인이 칭송하였다.”고 되어 있다. 현재 청덕비 소재는 확인되지 않는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61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