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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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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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대준 任⼤準 고종 28년(1891) 8월 19일∼고종 28년(1891) 11월 13일
    임대준 任⼤準 고종 28년(1891) 8월 19일∼고종 28년(1891) 11월 13일임대준(1857∼?)의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부친은 진사 임백희(任百熙), 동생은 문과에 급제하고 중추원고문을 지낸 친일파 임선준(任善準)이다. 1882년 증광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1883년 가주서, 1885년 주서, 1886년 병조정랑, 1890년 장악원정, 승지,1891년 형조참판을 지냈다. 1891년 6월 22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8월 19일 부임하 였다. 1891년 9월 22일 제주목에서 선후 운송한 공마(貢⾺)를 연로(沿路)에서 제대로 호송하지 않아 고실(故失) 된 것이 많다하여 나주목사 등을 나문하라는 사복시 제조의 계에 따라 전교가 내린다. 10월 11일에는 죄를 진채 거행하라 한다. 11월에 안악군 수, 1893년 영변부사, 황해도 재령군 안핵사가 되어 농민봉기 조사, 1894년 부호군, 1895년 한성재판부 판사5등, 1896년 중추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신 묘(1891년) 6월 22일에 형조참판에서 제수되어 8월 19일 부임하여 재직하다가 신묘 (1891)년 11월 13일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105
  • 임식(林植)
    임식(林植, 1539~1589)의 자는 숙무 호는 송파이다. 금호의 종자(從子)로 1539년 출생, 1564년 사마시에 합격, 1572년 문과급제 하여 승문원에 보직하였다. 영남호송관, 승정원주서를 거쳐 공조, 병조좌랑, 성균관 전적, 호남순무어사, 4조정랑(이조, 병조, 예조, 형조), 호서경차관, 홍문관 교리, 평안도사, 해운, 영변판관, 구성, 강계부사 등을 두루 역임했다. 1586년에 충남 결성 용호해구에 부해정을 짓고 은거하다가 1589년 51세로 졸(卒)하였다. 유고 《송파집》 1권이 남아있다.
    2020-07-15 | NO.104
  • 임육 任焴 정조 19년(1795) 9월 3일∼정조 24년(1800) 4월 24일
    임육 任焴 정조 19년(1795) 9월 3일∼정조 24년(1800) 4월 24일임육(1736∼?)의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자는 여휘(汝輝), 호는 서하(西河)이다. 아버지는 유학 임항주(任恒周)이다. 1774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779년 선공봉사, 1781 년 서부도사, 1782년 인제현감, 1788년 고양군수, 1789년 영해부사, 1790년 홍주목 사를 역임하였다. 1795년 8월 22일에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월 3일 도임하였다. 1796년(정조 20) 5월 25일 『승정원일기』에 나주 군병 신창련(申昌連)은 그 형 수군보 대(⽔軍保⼤)를 대신 보내고 김금이(⾦⾦伊)는 그 형인 청대죽(⾭⼤⽵)의 보명군(保明軍) 을 대신 보내는 등 엄중한 상번군(上番軍)의 점고를 대신하다가 적발되어 붙잡힌 사례에 대해 나문하여 처리하라는 논의가 있다. 5월 28일 나문하라는 전지가 계하되었다. 1801년 통정대부, 동부승지, 1803년 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묘 (1795년) 9월 3일에 도임하였고 경신(1800년) 4월 24일에 상경하여 체직 되었다. 나주 월정서원의 강당 중수상량문을 1796년에 지었으며, 남간 나해봉(羅海鳳, 1584∼ 1638)의 『남간유집』의 서문을 짓기도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103
  • 임장 任章 광해군 10년(1618) 7월 15일∼광해군 11년(1619) 2월 8일
    임장 任章 광해군 10년(1618) 7월 15일∼광해군 11년(1619) 2월 8일임장(1568∼1619)의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자는 자룡(⼦⿓)이다. 할아버지는 한성부 판윤 임열(任說), 아버지는 종부시정 임영로(任榮⽼)이며, 어머니는 청릉부원군 심강(沈 鋼)의 딸이다. 159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05년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가 되었다. 1606년 승정원 주서·기사관·예문관대교·시강원 설서, 1607 년 형조좌랑·사간원 정언·성균관 전적, 1608년 사간원 정언, 부수찬, 1609년 지평, 수찬, 헌납, 1610년 이조좌랑, 이조정랑 등 요직에 임명되었다. 『선조실록』의 편찬 때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하였으나, 1613년 영창대군(永昌⼤君)을 옹립하려 한 혐의로 발생한 박응서(朴應犀) 옥사 사건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1618년 6월 8일에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7월 15일에 부임하였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권130에 “본주(本州)는 호남의 큰 고을로서 위급한 일이 있을 때 믿고 의지할 만한 곳이니, 군병을 조련하고 성지를 수리하고 군량을 쌓아두고 기계를 갖추는 등의 일을 각별히 마음을 다해 착실히 거행하라고 나주목사 임장(任章)에게 이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무 오(1618년) 7월 15일 도임하였고, 기미(1619년) 2월 8일에 별세하여 3월 12일에 발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를 기리는 시 「만임자룡(挽任⼦⿓)」이 심희수(沈喜壽)의 문집 『일송집(⼀松集)』에 수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102
  • 임홍망 任弘望 숙종 9년(1683) 9월 24일∼숙종 10년(1684) 1월 22일
    임홍망 任弘望 숙종 9년(1683) 9월 24일∼숙종 10년(1684) 1월 22일임홍망(1635∼1715)의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자는 덕장(德章), 호는 죽실(⽵室)이다. 아버지는 증좌참찬 임환(任喚)이다. 165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66년 별시 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소속되었다. 1671년 찰방, 1674년 지평·정언, 1682년 승지, 1683년 8월 16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9월 24일 도임하였다. 이후에도 1685 년 승지, 1687년 공흥도관찰사, 1694년 승지, 1696년 광주(光州)목사, 1699년 도승 지를 거쳐 1715년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저서로 『죽실집』 2책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계해(1683년) 9월 24일 도임하였고 갑자(1684년) 1월 22일 병으로 체직하였다.”라 하였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01
  • 임회 林誨 선조 1년(1568) 7월 27일∼선조 2년(1569) 5월
    임회 林誨 선조 1년(1568) 7월 27일∼선조 2년(1569) 5월임회(1508∼1573)의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헌가(獻可), 호는 죽곡(⽵⾕)이다. 참봉 임경손(林景孫)의 아들이다. 장흥 기산리 출신이다. 처음 이름은 회(薈)라 했는데 회(晦), 회(誨)로 고쳤다. 1534년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고 1540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여 호당에 뽑혔다. 공조정랑, 담양군수, 순창군수, 남원부사를 거쳐 1568년 7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1569년 5월에 이임하였다. 지방의 여러 고을을 다스릴 때 선정을 베풀었기에 가는 곳마다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 그곳 문인 들과 교유하였는데 모두 선생의 덕행과 문장을 칭찬했다고 한다. 장흥 기양사와 강진 서봉서원에 배향되었다. 형인 임분(林賁, 1501∼1556)의 자료를 함께 모은 『서곡선생사실 (書⾕先⽣事實)』이 전한다. 형 임분과 기봉(岐峰) 백광홍(⽩光弘), 옥봉(⽟峯) 백광훈(⽩光 勳), 남계(南溪) 김윤(⾦胤), 동계(東溪) 백광성(⽩光城), 풍잠(⾵岑) 백광안(⽩光顔), 지천(芷 川) 김공희(⾦公喜)와 더불어 기산팔문장(岐⼭⼋⽂章)으로 불렸다고 한다. 『금성읍지』에는 “무진(1568년) 7월 27일 도임하였고, 기사(1569년) 5월에 파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100
  • 자후 ⿈⼦厚 세종 7년(1425) 7월 6일∼세종 8년(1426) 3월 24일
    자후 ⿈⼦厚 세종 7년(1425) 7월 6일∼세종 8년(1426) 3월 24일황자후(1363∼1440)의 본관은 회덕(懷德)이며, 자는 선양(善養)이다. 태종 초에 성주목 사를 거쳐 1412년 인녕부사윤(仁寧府司尹), 1413년 형조좌참의가 되어 호패법의 제정을 건의하였다. 1414년 호조참의·경기도관찰사·개성유후사 부유후, 1415년 충청도관찰 사를 거친 후 공안부윤이 되어 동전의 사용을 건의하였다. 1416년 전의감제조 때 가짜 약재 구입에 연루되어 귀양 갔다가 두 달 만에 풀려났다. 1421년 좌군총제, 1422년 충청도관찰사, 1423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다. 1431년 한성부윤, 1432년 중추원 부사, 1436년 동지중추원사, 1437년 중추원사로 승진하였다. 의약(醫藥)에 정통하여 전의감의 제조를 맡았다. 『금성일기』 「을사년 1425년」의 기록에 “윤7월에 신임 판목사 가정대부 황자후가 같은 달 6일에 도임하였다.”라 되어 있고, 1426년 기록에 “전 판목사 황자후가 정무를 마치고 같은 달 상경하였다.”라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을사(1425년) 7월 6일 도임, 병오(1426년) 3월 24일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혜의(惠懿)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99
  • 장수련
    장수련(張守連)의 본관은 흥성으로 1592년 6월에 김천일 의병에 가담하여 부장이 되었더,湖節2下-213-2, 光州, 壬辰, 一道擧義  -《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98
  • 장유 張維 인조 7년(1629) 9월 15일∼인조 8년(1630) 8월
    장유 張維 인조 7년(1629) 9월 15일∼인조 8년(1630) 8월장유(1587∼1638)의 본관은 덕수(德⽔)이며,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 또는 묵소(默所)이다. 할아버지는 목천현감 장일(張逸), 아버지는 판서 장운익(張雲翼)이며, 우의정 김상용(⾦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와 예조판서 장선징(張善澂)의 아버지이다. 160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9년 증광시 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 호당에 들어갔다. 1610년 겸설서, 1611년 주서, 검열, 1612년 봉교 겸 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해 정사공신 2등에 녹훈되고 이조좌랑, 이조정랑, 1624년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신풍군(新豊君)에 책봉되었다. 1626년 대사간, 이조참판, 대사헌, 1627년 이조판서, 원접사, 1628년 대제학, 정헌대부를 거쳐 1629년 7월 21일 나만갑(羅萬甲)을 구제하려 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어 9월 15일 도임하였다. 이후 대사헌, 좌부빈객, 대제학, 예조 판서를 거쳐 1637년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으로 18차례나 사직 소를 올려 사퇴했다. 장례 뒤 과로로 1638년 3월 17일 병사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금성읍지』에는 “숭정연간에 이조판서와 우참찬 때에 대제학을 겸하면서 기사 (1629년) 9월 15일 도임하였고 경오(1630년) 8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올라갔다. 소포에 이르러 형조판서에 제수하는 유지를 받고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630년에 세운 「행목사 신풍군장공유 숭유흥학 청덕선정비」가 지금도 나주객관 금성관 안에 있다. 1626년 대사간 때 「창의사 김공 정렬사비」의 비문을 지었다. 송시열(宋時烈)이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 만한 이가 없다.”고 찬하였음이 전한다. 천문·지리·의술·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하였 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신흠(申欽)·이식(李植)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저서로 『계곡만필(谿⾕漫筆)』, 『계곡집(谿⾕ 集)』, 『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가 전하며, 시호는 문충(⽂忠)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97
  • 전상의(全尙毅)
    후금(청)과 싸우다 안주성전투에서 순절한 전상의(1575∼1627)는 자는 희원(希元) 또는 환중(桓仲), 본관은 천안으로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그는 광주목 도촌면, 현 남구 사구동에서 아버지 용(蓉)과 어머니 평산신씨 사이에서 태어나 정묘호란 때 안주성전투에서 순절하여 북구 화암동 239번지 묻혀 있다.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력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회재서당에서 박붕(朴鵬)에게서 수학하였다. 말타기와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나 그의 나이 29세 때인 1603년에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주부를 거쳐 함경도 갑산도호부 운총만호, 평북 강계도호부의 고산리 첨사, 경기도 통진현의 덕포첨사, 내금위 예차(預差)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1617년(광해군 9) 7월에 오윤겸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150여 명을 송환해 오는데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1618년(광해군 10) 8월에 대궐의 경비를 맡아보는 어모장군, 행중무위겸사복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개천군수로 좌천되었다가 1625년 구성도호부사 겸 좌영장이 되어 반란으로 폐허가 된 관아를 정비하고 군사를 점검하는 등 변방의 방어에 최선을 다했다.1627년(인조 5) 1월 14일 후금(청) 태종이 3만 대군을 몰고 의주까지 진출하여 파죽지세로 남하 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과 안주목사 김준(金浚), 구성도호부사 전상의 등 3인이 안주성에 모여 청천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방어 전략을 수립하고, 남이홍과 김준은 중영(中營)을 지키고 전상의 장군은 남영(南營)인 백상루(百祥樓)에 진을 치고 지키게 되었다.1월 18일 백상루 위에서 적진을 바라보니 적병이 점점 가까이 옴에 따라 일시에 적을 공격하니 포성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날 적병은 크게 패하여 일시 후퇴하였다가 전열을 가다듬어 대군으로 다시 침범함에 장병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으나 진영이 적에게 함락되어 남이흥과 김준이 순절하였다. 더욱이 군량이 고갈되고 원병이 오지 않자 전 장병과 함께 죽기를 결의하고 누상에 올라 적을 맞아 5일간 싸우다가 그 또한 장렬히 순절하고 말았다.1627년(인조 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으며, 1684년(숙종 10) 안주의 충민사에 배향되고, 1849년(헌종 15) 광주 경렬사에 배향되다가 1985년 그의 묘소가 있는 곳에 ‘충민사’라는 사우를 건립하여 배향하고 있다. *《광주읍지(1879)》, 《구성공 전상의장군 실기(2010)》
    2020-03-06 | NO.96
  • 정각선 鄭覺先 경종 2년(1722) 6월 17일∼영조 1년(1725) 7월
    정각선 鄭覺先 경종 2년(1722) 6월 17일∼영조 1년(1725) 7월정각선(1660∼1743)의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도보(道甫), 호는 두릉(杜陵)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행 강화부경력 정재대(鄭載岱)이며, 1719년 6월부터 1720년 7월까지 나주목사로 재임한 정욱선(鄭勗先)의 동생이다. 1682년 증광시에 진사로 합격하였 으며, 1696년 세마(洗⾺), 1698년 부솔, 1699년 장악주부, 1699년 호조좌랑, 1700년 호조정랑, 1701년 공조정랑·금화현감, 1704년 배천군수, 1708년 평산부사, 1712년 한성부서윤·청풍부사, 1714년 충주목사, 1719년 무주부사, 1721년 공주목사, 1722년 5월 15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6월 17일 부임하였다. 1739년 부호군·오위장, 1739년 돈녕도정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임인(1722년) 6월 17일 도임하였고 을사 (1725년) 7월에 폄하 체직되었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95
  • 정경세 鄭經世 광해군 2년(1610) 12월 22일∼광해군 2년(1610) 12월 29일
    정경세 鄭經世 광해군 2년(1610) 12월 22일∼광해군 2년(1610) 12월 29일정경세(1563∼1633)는 1611년(광해군 3)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1610년 가선대부에 올라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12월에 나주목사에 부임하였으나 바로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금성읍지』에는 “경술(1610년) 12월 21일 도임하였고, 같은 달 29일에 본도 순찰사로 이동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94
  • 정귀세
    정귀세(鄭貴世, ?~1592)의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여화(汝華), 호는 금강(錦岡)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 등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담양(潭陽)에서 거의한 고경명(高敬命)의 휘하로 들어갔다.그해 6월 고경명이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과 승장 영규(靈奎) 등과 합세하여 8월 금산성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할 때 참전하였다. 적군에게 포위된 가운데 온힘을 다해 싸웠으나 병력 수의 열세로 의병 700여 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 때 전사한 700의사의 무덤은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하여 금산에 있다.湖節1上-051-1,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  -《호남절의록》(1799)또 월파 류팽로장군 의병일기 임진(壬辰) 6월 10일자에 따르면 "6월 10일 무술 : 광주의 전 봉사 정귀세(奉事 鄭貴世)와 함평의 전 주부 박응주(主簿 朴應柱) 영광의 선비 이인우(李仁佑) 옥주의 선비 전용관(田用灌) 정읍의 선비 김봉학(金奉鶴) 조식(趙軾)이 가동(家僮)을 거느리거나 혹은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왔다."라는 내용이 있다.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금산 종용사(從容祠)에 배향되었다.
    2020-04-02 | NO.93
  • 정기광 鄭基廣 인조 3년(1625) 3월 28일∼인조 3년(1625) 6월 2일
    정기광 鄭基廣 인조 3년(1625) 3월 28일∼인조 3년(1625) 6월 2일정기광(1579∼1645)의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자는 자거(⼦居), 호는 추재(追齋) 또는 토곡(⼟⾕)이다. 할아버지는 전라감사를 지낸 정종영(鄭宗榮)이고, 아버지는 진사 정약(鄭爚)이며, 1654년 나주목사로 재임한 정기풍(鄭基豐)이 형이다. 160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11년 주서, 1613년 예조좌랑·사서·병조좌랑을 거쳐 1618년 평안 도도사를 역임하였다. 1625년 2월 18일에 통정대부 나주목사를 제수받고 3월 28일에 부임하여 6월 2일에 이임한다. 『승정원일기』에 “남방의 수령 가운데 나주목사 정기광이 본디 부지런하고 유능한 재능이 있으니 차사원(差使員)으로 정하여 그로 하여금 주관하게 한다면”이라는 기록이 있다. 일부 결락된 글이 있으나 앞의 내용을 보면 “하삼 도의 선세(船稅)는 호조가 쓰고 염분(鹽盆)과 어전(漁箭)은 검찰사(檢察使)가 써서 양곡을 마련하는 밑천으로 삼았는데 경관(京官)을 보내어 주관하도록 하자”고 하여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627년 동래부사, 1629년 좌부승지, 1630년 참찬관, 1631년에는 형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 1636년 우승지에 이르렀다. 『금성읍지』에는 “을축(1625년) 3월 28일 도임하였고, 같은 해 6월 2일에 모친상을 당하여 체직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92
  • 정기풍 鄭基豊 효종 5년(1654) 9월 9일∼효종 7년(1656) 1월
    정기풍 鄭基豊 효종 5년(1654) 9월 9일∼효종 7년(1656) 1월정기풍(1594∼?)의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자는 형백(亨伯)이다. 할아버지는 전라감사를 지낸 판중추부사 정종영(鄭宗榮), 아버지는 절충장군 행충무위부호군(⾏忠武衛副護軍) 정약(鄭爚)이다. 1628년 3월에 나주목사로 재임한 정기광(鄭基廣)의 동생이다. 1615년 식년시에서 생원으로 합격하였고, 1648년 55세의 나이에 식년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 였다. 1629년 세마, 1639년 부사과, 1640년 신계현령, 1646년 공조정랑, 1649년 옥천군수 재직 중 표창을 받고 지평을 지냈다. 1651년 장령·양양부사, 1653년 종부시 정·사간, 1654년 통례·집의를 지내고 7월 22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9월 9일 부임, 재직하다가 1655년 1월 17일 전패가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전라감사가 내용을 보고하고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 결과 나주목을 금성현으로 다시 강등하게 된다. 그뒤로 1657년 보덕, 1658년 집의·승지, 1662년 서원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 에는 “갑오(1654년) 9월 9일 도임하였는데 병신(1656년) 1월에 위판이 파손되는 일로 체직되었고, 읍호가 강등되었다.”라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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