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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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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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현호 李⽞好 헌종 4년(1838) 3월 17일∼헌종 6년(1840) 2월 12일
    이현호 李⽞好 헌종 4년(1838) 3월 17일∼헌종 6년(1840) 2월 12일이현호(1781∼1842)의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공(⼦孔)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해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 이양회(李良會)이고, 명필 수헌(秀軒) 서무수(徐懋修, 1716∼ 1785)의 사위이다. 1818년 광릉참봉, 1821년 의영봉사·금부도사, 1823년 선릉직장· 인의, 1824년 사복주부·현륭원령, 1826년 돈녕판관, 1827년 과천현감·강서현령, 1829년 영산현감, 1833년 김제군수, 1834년 청송부사, 1837년 청주목사를 지냈다. 1838년 2월 30일 나주목사에 제수되고 3월 17일 부임하였다. 1840년 3월 18일 신병으로 파직되었다. 1841년 선혜청 낭청을 거쳐 1842년에 사망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술(1838년) 3월 17일에 부임하였고 경자(1840년) 2월 12일에 중(中)으로 평가 되어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나주목사 재임 시 1839년에 나주향교를 보수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120
  • 이협 李埉 영조 21년(1745) 6월 1일∼영조 21년(1745) 8월
    이협 李埉 영조 21년(1745) 6월 1일∼영조 21년(1745) 8월 이협(1696∼?)의 본관은 덕수(德⽔)이다. 아버지는 이희술(李喜述)이다. 1723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31년 순릉참봉, 1732년 금부도사, 1734년 이천현감, 호조정랑, 1735년 대구판관, 1739년 청도군수, 1743년 광주(光州)목사, 1745년 원주목사를 거쳤다. 1745년 4월 19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5월 19일 하직하고 6월 1일에 부임하 였지만 행정능력이 부족하다는 중론에 따라 바로 8월에 사직 처리가 되고, 11월에 의금부에 체포되었다. 1746년 상주목사, 1752년 파주목사, 1753년 삼척부사, 1755년 전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축(1745년) 6월 1일 도임하였고 같은해 8월에 대언(坮⾔)을 만나 체직 되었다.”라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상주시 남적동에는 1748년에 세운 「목사이후협승인선정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9 | NO.119
  • 이형곤 李衡坤 영조 3년(1727) 9월 15일∼영조 9년(1733) 4월
    이형곤 李衡坤 영조 3년(1727) 9월 15일∼영조 9년(1733) 4월이형곤(?∼?) 4) 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710년 영소전 참봉, 1712년 경기전 참봉·예 빈봉사, 1714년 사옹직장, 1716년 장악주부·의금부도사, 1717년 홍산현감, 1722년 의금부도사·한성판관·대구판관·안성군수, 1723년 공산현감, 1724년 첨지, 1727년 9월 15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0월 3일 하직하고 10월 13일 부임하였다. 1728년에는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나주목이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 『승정원일기』에 1729년 8월 23일 금성현 강등 윤허 기록이 있다. 이현곤은 파직되지 않고 종6품 현감으로 재임하게 된다. 1729년(영조 5) 2월 25일 『승정원일기』에는 나주의 해도(海島)에 관한 일에 대한 병조판서 조문명의 상소가 있는데, “나주목이 관할하는 서해와 남해에 있는 여러 섬은 57개나 됩니다. 그 넓이를 모두 합하면 길이는 모두 640여 리이고 너비도 300여 리이며, 민호의 숫자는 모두 4380여 호이고 전결(⽥結)의 총수는 모두 4010여 결입니다. 그 밖에도 누락된 섬이 23개인데 비록 작은 섬들이지만 각각 섬의 이름이 있고 또 주민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전 전라 병사 조경(趙儆)이 체차되어 돌아올 때 나주 목사 이형곤과 함께 각 섬의 형지(形⽌)를 자세하게 논하고 온 것입니 다. 이곳의 여러 섬은 바로 양남(兩南)의 조운이 거치는 길이니 조정으로서는 등한한 곳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1730년(영조 6) 12월 29일 기록에는 사간원에서 전라도 금성현의 하의(荷⾐)·태금(苔錦) 등 위아래 세 섬의 절수 문제로 인한 송사를 거론하는 내용이 있다. 1731년 선정하였다 하여 통정대부로 가자되고, 1732년 의금부 에서 체포되었는데, 그 사유는 “사사로이 1천 석에 가까운 쌀을 보내어 경강(京江)에서 발매하다가 마침내 양천현(陽川縣)에서 붙잡혀 진휼청에 보고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금성읍지』에는 “정미(1727년) 10월 13일 도임하였고 계축(1733년) 4월에 정배온 죄인을 체포하지 못한 일로 나포되어 체직 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18
  • 이호석 李鎬奭 광무 2년(1898) 12월 27일∼광무 4년(1900) 2월 8일
    이호석 李鎬奭 광무 2년(1898) 12월 27일∼광무 4년(1900) 2월 8일이호석(1854∼?)의 본관은 우봉, 할아버지는 봉조하로 치사한 이휘정(李輝正), 아버지는 이정(李 )이다. 1867년 가감역, 1873년 광릉참봉, 1874년 구일제(九⽇製) 합격, 1876년 좌부솔·조지별제·한성주부·한성판관, 1877년 문화현령, 1880년 옥천군수, 1883년 좌위솔·사옹원 첨정, 1885년 우사어를 지내고 증광시 문과 갑과에 3위로 급제, 동부승지·우부승지·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1889년 형조참의·대사성, 1894년 병조 참의, 1897년 봉상사 부제조·비서원 승, 1898년 상의사장을 지냈다. 1898년 12월 27일 나주군수에 임용되어 재직하다가 1900년 12월 8일 성주군수로 이임하였다. 1901 년 광주(廣州)부윤, 1902년 중추원 의관, 1903년 우주 서사관(虞主書寫官), 1904년 봉상사 제조, 1905년 영희전 제조를 역임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117
  • 이회연 李晦淵 순조 33년(1833) 6월 4일∼헌종 3년(1837) 3월 21일
    이회연 李晦淵 순조 33년(1833) 6월 4일∼헌종 3년(1837) 3월 21일이회연(1779∼1850)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경양(景養)이다.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이여(李璵)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1775년 3월부터 1776년 7월까지 나주목사를 지낸 이명중(李明中)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이의열(李義悅)이다. 형 이지연 (李⽌淵)은 1830년 9월부터 1831년 7월까지 나주목사를 지냈다. 1805년 증광시 진사에 합격, 1816년 온릉참봉, 1821년 제용 부봉사·빙고별검·호조좌랑, 1822년 신계현 령, 1823년 함양군수, 1824년 호조정랑, 1830년 해주판관을 지냈다. 1833년 5월 10 일 나주목사에 임명되어 6월 4일 부임하였다. 1838년 군자정, 1839년 여주목사, 1840년 재령군수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계사(1833년) 6월 4일에 부임하였고 정유(1837년) 3월 21일에 병으로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나주목사로 재직 시 나주향교의 「사마재개건기」를 지었으며, 나주시 영산동주민센터 광장에는 1836년 흑산도 주민들이 세운 「목사이공회연선정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116
  • 이후 李 영조 22년(1746) 4월 24일∼영조 22년(1746) 4월 29일
    이후 李 영조 22년(1746) 4월 24일∼영조 22년(1746) 4월 29일이후(1694∼1761)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후옥(厚⽟), 호는 구옹(癯翁)이다. 아버지는 참판 이명희(李命熙)이다. 1726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뒤 문음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746년 윤3월 11일 나주목사로 제수되고 4월 24일 부임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4월 29일 이임하였다. 1750년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그해에 호남균전세사(湖南均⽥稅使)가 되었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호남균세사가 되었 다. 이어 대사간을 거쳐 1752년 동의금이 된 뒤 한성부우윤·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 였다. 1755년 이조참판, 형조판서·병조판서·우빈객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58년 이조 판서 때 김상로(⾦尙魯)를 천거하였던 문제로 평안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가 그 해에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1760년 좌의정으로 세자부(世⼦傅)를 겸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인(1746년) 4월 24일 도임하였고 같은 달 29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체직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시호는 충현(忠顯)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9 | NO.115
  • 이후 李垕 효종 7년(1656) 7월 11일∼효종 8년(1657) 4월 5일
    이후 李垕 효종 7년(1656) 7월 11일∼효종 8년(1657) 4월 5일현감 이후(1611∼1668)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자중(⼦重), 호는 남곡(南⾕)이 다. 아버지는 봉래군(蓬萊君) 이형윤(李炯胤)이다. 163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44년 정시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였다. 동생 이무(李堥)도 문과 급제자이다. 검열을 거쳐 1647년 승문원 저작, 1650년 지평으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4년 장령, 1655년 필선·사간·함경도 어사, 1656년 5월 18일 금성현감 으로 제수되어 7월 11일 도임하여 1657년 4월 5일 이임하였다. 1658년 사간, 1659 년 보덕·집의, 1660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사간원 사간·부호군, 1660년 9 월 광주목사(光州), 1662년 종부시정·사성, 1663년 사복시정, 1664년 봉사시정·집의· 홍양현감, 1667년 사간을 거쳐 온성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금성읍지』에는 “갑오 (1654년) 2월 19일 도임하였는데 동년 8월에 영장 성익(成釴)의 장계에 의하여 파직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14
  • 이후원 李厚源 정조 13년(1789) 8월 27일∼정조 14년(1790) 3월 12일
    이후원 李厚源 정조 13년(1789) 8월 27일∼정조 14년(1790) 3월 12일이후원(?∼?)의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전라감사를 지낸 부제학 이석표(李錫杓)이다. 음관으로 관직에 나아가 1776년 순릉직장, 1778년 전설별제, 1779년 신녕현감, 1782 년 금부도사, 홍산현감, 1785년 안산군수, 1788년 선산부사를 지냈다. 1789년 8월 6 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792년 의성현령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기유 (1789년) 8월 6일 선산부사에서 옮겨 왔다. 8월 27일 부임하였는데, 경술(1790년) 3 월 12일 대계(臺啓)에 의해서 나포되어 파직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113
  • 이희년 李喜年 숙종 1년(1675) 9월 25일∼숙종 2년(1676) 7월
    이희년 李喜年 숙종 1년(1675) 9월 25일∼숙종 2년(1676) 7월이희년(1618∼?)의 본관은 한산(韓⼭)이며, 자는 자수(⼦壽)이다. 아버지는 조산대부 행승 문원 저작을 지낸 이적(李), 동생 이연년(李延年)은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1639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고, 1648년∼1652년 의금부 도사, 1652년 목천현감, 1656년 호조 좌랑, 1657년 횡성현감·경산현령, 1663년 형조정랑, 1665년 안악군수, 1666년 남원부 사, 1671년 사복시 첨정, 1672년 밀양부사를 거쳐, 1675년 9월 25일 나주목사로 도임 하였다. 1676년 2월 과거시험 시관으로서 술을 마셨다 하여 파직되었다, 1676년 나주 목사로 있을 때 최부의 『표해록』을 재발간하였다. 1677년 공조정랑·원주목사, 1679년 배천군수·사복판관, 1680년 파주목사, 1689년 제용감 정, 1697년 통정대부가 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밀양부사에서 이동하여 을묘(1675년) 9월 25일 도임하였다.”라 되어 이임일은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실록에 의하면 병진(1676년) 7월에 파직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12
  • 이희두 李羲⽃ 순조 24년(1824) 윤7월 10일∼순조 25년(1825) 9월 9일
    이희두 李羲⽃ 순조 24년(1824) 윤7월 10일∼순조 25년(1825) 9월 9일이희두(1768∼?)의 본관은 한산(韓⼭)이며, 자는 칠여(七汝)이다. 아버지는 경상감사를 지낸 이태영(李泰永)으로 통덕랑 이규영(李奎永)의 양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태영이 경상감사 재임 시 7개의 바위에 7명의 아들 이름을 하나씩 새겨 기원하였더니 형제 일곱이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칠성바위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일곱 형제중 둘째 아들로 형 이희갑(李羲甲), 동생 이희준(李羲準)·이희조(李羲肇)가 문과에 급제 하였다. 1795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06년 동몽교관, 1809년 금부도사, 1810년 전생판관, 1811년 평강현감, 1814년 청도군수, 1821년 선산부사를 지냈다. 1824년 6월 25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윤7월 10일에 도임하였다. 1827년 사복첨정, 1837년 70세가 되어 통정대부가 되고, 1847년 호군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 “갑 신(1824년) 윤7월 10일 부임하였고 을유(1825년) 8월에 상경한 후 사표를 내고 체직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 의하면 1825년 2월 18일에 의금부가 전라도관찰사 보고를 빌어 죄상을 고한다. 3월 13일에는 병이 심해 보방해서 조사를 하겠다고 하였 으며, 3월 17일에는 의금부에 의해 죄상이 밝혀지고 난 후 9월 9일에 파직당했다. 6)확인 불능이므로 삭제*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111
  • 이희룡 李喜⿓ 숙종 6년(1680) 7월 20일∼숙종 9년(1683) 8월 7일
    이희룡 李喜⿓ 숙종 6년(1680) 7월 20일∼숙종 9년(1683) 8월 7일이희룡(1639∼?)의 본관은 덕수(德⽔)이며, 자는 군서(君瑞)이다. 아버지는 이륙(李稑)이 다. 1672년 별시 문과에서 병과에 급제하였다. 1673년 사변가주서·부사정, 1674년 현종의 국장도감 감조관, 1675년 안주판관, 1676년 병조정랑, 1677년 영광군수를 지냈 다. 1680년 7월 8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7월 20일 도임하였다. 향약을 시행하기도 했다. 1683년 8월 7일 전라도관찰사의 장계에 의해서 파직되었다. 1684년 사간, 우부 승지, 홍주목사, 1686년 강양감사, 1688년 제주목사, 1694년 동래부사, 1697년 여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신(1680년) 7월 20일 도임하였고 계해 (1683년) 7월에 사직하였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10
  • 이희보 李希輔 중종 21년(1526)∼중종 22년(1527) 2월 4일
    이희보 李希輔 중종 21년(1526)∼중종 22년(1527) 2월 4일이희보(1473∼1548)의 본관은 평양(平壤)이며, 자는 백익(伯益), 호는 안분당(安分堂)이 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이극문(李克⽂)이다. 1496년 식년시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50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이조정랑, 내수사별제, 부평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직제학에 재직 중 장녹수(張綠⽔)에게 아부하였다는 사헌 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509년에 다시 기용되어 선산부사, 예빈시 첨정, 돈령 부정, 장례원 판결사,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26년에 나주목사에 부임하였으나 1527년에 “정령(政令)을 잘못 시행하고 세금을 끝없이 징수하는데다가 폐단을 일으킨 일이 많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2월 4일 파출된다. 이후에도 1542년 파주목사, 1547년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안분당시집(安分堂詩集)』 2권이 전한다. 『금성읍 지』에는 “병술년(1526년)에 도임하였으나 8개월만에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109
  • 일성록 : 전 광주 목사(光州牧事) 윤명렬(尹命烈)
    일성록, 순조 8년 무진(1808) 8월 27일(경신)[06] 시수 윤광안(尹光顔) 등은 의처(議處)하고 장현택(張鉉宅) 등은 조율(照律)하며 이신경(李身敬) 등은 감방(勘放)하라고 명하였다.의금부가 아뢰기를,“전 광주 목사(光州牧事) 윤명렬(尹命烈)의 원정에 ‘방폐(房嬖)와 간교한 아전이 결탁하고 농간을 부렸다고 한 것은 한마디 말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1000금(金)의 뇌물을 바치고 창색(倉色)에 차임되려고 꾀하였다는 말은 가장 핵심이 되는 판단 근거이지만, 일의 진행 과정이나 결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입증하지도 않았고 관련자의 성명(姓名)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지적하지 않았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이른바 창색은 혹 남몰래 챙기는 이득이 생길 수 있는 자리이지만 1000금이나 되는 뇌물을 사사로운 경로를 통해 보냈다고 한다면, 이득은 적고 쓰는 돈은 많으니 결코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차임된 창색은 모두 새로 부임할 때 맞이하였던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한결같이 고을의 규례를 준용하였으니 뇌물을 받고 차임했다는 말은 애당초 가당치도 않습니다. 우금(牛禁)을 어긴 데 대한 속전으로 수천 금을 사사로이 징수하였다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부임한 지 수년 동안 도축에 대한 금령을 범한 자를 적발하는 대로 보고하였는데 그 수가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16명은 감영에 보고하고 속전을 거두었고 2명은 형신을 가하여 징계하고 풀어 주었으며 1명은 논하여 보고하고 배소(配所)로 보냈고 4명은 마침 공해(公廨)를 짓는 일로 인해 거둔 속전을 감영에서 떼어서 보태도록 허락하였으니, 그동안 거두어들인 속전의 수효가 감영과 본읍의 문안(文案)에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민역의 비용을 방납해 주어 백성들의 입을 막았다는 말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본주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관리는 으레 돌아가기에 앞서 200금을 출연하여 각 면에 나누어 주고 이것으로 민역을 방납하는 밑천으로 삼게 합니다. 저 또한 규례를 살펴 행한 것이지 어찌 백성들의 입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이 일을 하였겠습니까. 본읍의 환정(還政)으로 말하자면 본래부터 곡식이 정실(精實)하였는데 근래 들어 아전들의 농간이 점점 발생하였기 때문에, 제가 부임한 뒤로 과연 아전들의 포흠을 징수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해마다 포흠 낸 것을 바치도록 독촉하여 징수한 것이 3000섬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반대로 아전들의 포흠을 덮어 주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실상에 가까운 말이겠습니까. 이른바 번질(反作)이란 곧 환곡을 거두어들이지도 않고 이미 거두어들인 것처럼 꾸미고서 다음 해 봄이 되면 그대로 나누어 준 것처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작년의 경우는 풍년이 크게 들었으므로 애당초 1포(包)도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이 없었고, 아전들의 포흠도 조사하고 징수하여 역시 조금의 곡식도 남기지 않았으니, 어사가 번질하였다고 운운한 것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킨단 말입니까. 더구나 저는 작년 10월에 말미를 받아 상경하였고 고을로 돌아온 것은 창고를 봉한 뒤였으니, 지레 창고를 봉하였다는 말은 더욱 논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어사는 이미 번고(反庫)하지도 않았고 게다가 문안을 조사하지도 않고서 이처럼 논열하였는데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일찍이 시종을 거쳤으니 의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2022-03-08 | NO.108
  •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
    정의림鄭義林의 자는 계방季方, 호는 일신재日新齋이며 본관은 광산으로, 綾州 大德에서 鄭濟玄과 珍原朴氏 致聖의 딸 사이에서 1845년(憲宗 11) 11월 출생했다. 그의 선조들은 조선시대 때 纘 이후 나주에 줄곧 거주하였으나, 그의 증조 埰가 영암으로 이주하고 조부 加錫이 다시 능주에 이주하였으며, 정의림의 조부와 부친은 각각 81세를 살아 壽職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정의림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사색을 좋아하였는데, 이미 서당을 다니기 전에도 華夷에 대해 구분하고, 화이는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신상에도 華夷가 있는데 아름다운 것은 華이고 악한 것은 夷라고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10세에 明村 黃綺顯에게서『小學』을 배우고 13세에 觀水齋 朴永柱에게서 四書를 배웠으며, 17세부터는 山寺에 들어가 스스로 三經을 읽었다. 이어 그는 20세 때에 서울을 다녀오는 길에 부여에서 族大父 石塘 鄭龜錫을 배알하고 ‘日新齋’라는 아호를 받고 기정진에게서 수학할 것을 권유받았다. 정의림은 4년 후 1868년에 장성의 하사로 노사 기정진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정진한 결과 기정진으로부터 김석구, 정재규와 함께 노사학파를 이끌어갈 인물로 기대되었다. 동문들로부터 蘆門三子로 불리게 되었다. 기정진은 1875년 10월 자신의 평생의 역작인 『納凉私議』를 김석구, 정의림, 정재규 3인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4일 밤낮을 강론하였으며, 다시 1879년 정월에 「納涼私議」와 「猥筆」을 강론하게 되자 이들은 기정진의 학설을 이해하고 기정진의 학설을 독실하게 믿고 따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의림은 학문적인 명성이 점점 높아지자 전라감사였던 韓致肇나 능주목사였던 南學熙로부터 강학과 향음례에 초대되어 일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879년에 스승인 기정진의 별세, 다시 3년 뒤인 1882년에는 부친의 별세로 한동안 강학활동에 전념하지 못하였다가, 부친상을 마친 1884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강학활동을 시작하였다.그는 大德에서 品村, 墨谷, 星洞, 佳山 등으로 자주 옮겨 다니면서 강학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곳곳마다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어 정의림의 강학활동은 능주목사에게도 알려져 1886년 학행으로 능주목사가 도백에게 천거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1887년에는 여러 친구들과 문인들을 데리고 무등산 일대를 유람하였는데, 이 때 유람한 인물들과 詠歸會를 조직하고 1891년 겨울에는 평생의 강학처인 詠歸亭을 축조하고 5성 4현을 모시고 춘추로 享祀하고 강론에 힘썼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문인들이 크게 늘어났다. 그는 영남의 기정진 문인과도 활발하게 교유하여 1891년 2월에는 삼가의 정재규를 방문하여 뇌룡정에서 강회를 개최하였으며, 다시 그해 8월에는 지리산 화엄사에서 鄭載圭와 崔琡珉, 金顯玉 등 영남문인과 鄭義林과 鄭時林 등 호남 문인들이 모두 모여 대규모 강회를 실시하였다. 이후 그는 정재규와 함께 기정진의 학설에 대해 토론하는 한편, 金平黙, 柳重敎, 崔益鉉 등 화서학파와의 교류에도 힘썼다. 또한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招討使 閔種烈에게 편지를 보내 동학이 극성하다고 하여 백성을 죽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정학을 높여 이단에 물들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1896년 기우만이 나주에서 의병운동을 일으키자 적극 가담하였다. 또한 1902년 스승인 기정진의 문집 간행시, 영남의 노론들로부터 기정진의 「猥筆」이 이이의 학설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고 문집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정의림은 영남과 호남의 각 읍에 통문을 보내 기정진은 이이의 학설을 篤信하였으며, ‘기틀이 스스로 그럴 뿐이다(機自爾也)’고 한 이이의 주장이 주기로 이해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변론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역적들을 처단하자고 유소를 작성하였으며, 최익현이나 정재규, 기우만의 거의에도 참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의병운동이 실패하게 되자, 정의림은 일체 두문 불출 자정하다가 1910년 10월 10일 별세하였다. 사후에 문인들이 그의 학덕과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화순의 七松祠, 三山祠, 龍山祠와 담양의 金谷祠 등에 제향하였다. 그는 驪興 閔致煥의 딸 사이에서 슬하에 아들 尙默과 光山 李進休, 洪州 宋光壽, 密陽 朴敬東에게 시집간 세 딸을 두었다. 한편 『日新齋集』은 21권 12책으로 문인 朴準基, 洪承渙 등과 族人 鄭炳海 등이 유고를 모아 1927년 간행했으며, 서문과 발문이 없다. 문집에는 정의림이 정재규나 황철원, 양회락 등과 토론한 많은 성리학적 관련 자료, 능주나 화순, 보성 지역과 관련된 많은 인물에 대한 정보,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관련 자료를 남기었다.특히 1902년 송병선 문인이나 전우 등에 의해 기정진 학설이 논란되었을 때, 영, 호남 일대에 통문을 보내 기정진이 이이의 학설을 계승하여 주리설을 주장하였음을 밝혔다. 문집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2020-06-06 | NO.107
  • 임구 林球 태조 7년(1398) 10월 22일∼정종 2년(1400) 12월 22일
    임구 林球 태조 7년(1398) 10월 22일∼정종 2년(1400) 12월 22일임구(?∼?)의 본관은 상산(常⼭, 진천)이며, 아버지는 상산군(常⼭君) 임지(林智)이다.『태조실록』 1393년 3월 23일 기록에 삼사좌승에서 경기우도안렴사로 임명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권근의 『양촌선생문집』 15권(서류)에 「교주도 안렴사 임구를 전송하는 서」라는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임구는 진천에 있는 장렬사(莊烈祠)에 고려 무신 집권기의 권신 임연(林衍)과 상산임씨의 시조인 임희(林曦)와 함께 배향되어 있다. 벼슬이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금성일기』「계유년 1393년」 “목사 임구가 10월 22일 도임하였 다가 경진(1400년) 12월 22일에 돌아갔다.” 『금성읍지』에는 “무인(1397년) 10월 22 일 도임, 경진(1400년) 12월 22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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