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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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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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덕 李宗德 영조 48년(1772) 12월 2일∼영조 49년(1773) 7월 27일
    이종덕 李宗德 영조 48년(1772) 12월 2일∼영조 49년(1773) 7월 27일이종덕(1711∼1773)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소(⼦昭)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 충무위부사직 이형좌(李衡佐)이다. 1738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41년 세마(洗⾺)를 시작으로 1743년 부사과, 1744년 공조좌랑, 1745년 호조좌랑, 1749년 내자시 주부·공 조좌랑, 1750년 문화현령, 1753년 호조정랑·충훈도사, 1754년 김제군수, 1756년 고성 군수, 1758년 충원현감, 1761년 담양부사, 1762년 담양현감, 1767년 광주(光州)목사를 지냈다. 1772년 10월 29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2월 2일 부임하였다. 『금성읍지』 에는 “임진(1772년) 12월 2일 부임하였고 계사(1773년) 7월 27일에 재직 중 이질로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다. 천안에 있는 어사 박문수(朴⽂秀)의 묘비명 글씨를 썼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135
  • 이준민 李俊民 명종 18년(1563) 2월 10일∼명종 19년(1564) 3월
    이준민 李俊民 명종 18년(1563) 2월 10일∼명종 19년(1564) 3월이준민(1524∼1591)은 1568년(선조 1)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1561년 강릉대도호부 사가 되었으나, 관할구역인 대창역(⼤昌驛)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변고가 일어나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다. 1563년 2월 나주목사를 역임하고 1587년 좌참찬,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신암유고(新庵遺稿)』가 있다. 『금성읍지』에는 “계해(1563년) 2월 10일 도임하였고, 갑자(1564년) 3월에 당산관으로 승진하여 강계부사로 이동하였 다.”는 기록이 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134
  • 이준악 李峻岳 현종 6년(1665) 8월 17일∼현종 8년(1667) 5월 19일
    이준악 李峻岳 현종 6년(1665) 8월 17일∼현종 8년(1667) 5월 19일이준악(1610∼1687)의 본관은 용인(⿓仁)이며, 자는 여극(汝極)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전 목사 이후천(李後天)이다. 1635년 증광시 생원으로 합격한 후 강릉참봉이 되었 다. 1649년 사옹원 봉사, 1651년 활인서 별제, 1652년 청하현감, 1657년 호조좌랑, 1659년 원주목사, 1660년 안성군수, 1663년 공조정랑, 1664년 회양부사를 거쳐 1665년 7월 3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8월 17일 도임하였다. 초기에는 너그럽고 공평 하게 다스림에 세간에 후덕한 인물로 칭송이 자자하자 어사(御使)가 말을 내려주기까지 하였다. 1666년(현종 7) 11월 30일 암행어사의 서게에 다라 숙마를 지급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1667년 5월에 제방을 쌓는 일에 무리하게 인력을 동원한 결과 사헌부의 탄핵을 당하였다. 1669년 부사직, 1670년 남원부사를 거쳐 1682년 예빈시정으로 있다 1683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강원도 회양부사에서 전입하여 8월 17일에 도임하였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체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33
  • 이지덕(李志德, 1739~?) - 명고전집 제5권
    이지덕(李志德, 1739~?) - 명고전집 제5권 / 서(書) : 명고(明皐) 서형수(徐瀅修)이지덕(李志德, 1739~?)의 자는 대여(大汝)이고 1777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거주지는 광주(光州)였다. 이 진사(李進士)는 명고가 22세 때인 1777년(정조1) 이후에 쓴 편지 〔答李進士, 志德〕 에서 나온다. 명고보다 10세 연상이다.이 편지는 이지덕이 자문을 구한 7조항에 답하는 내용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①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의 글자 교감 문제:‘戶’가 연자(衍字)임은 옳으나 함부로 글자를 고쳐서는 안 된다. ② 구양수(歐陽脩)의 〈종수론(縱囚論)〉:원칙을 논한 것이므로 혹리의 각박한 글이라 할 수 없다. ③ 구양수의 〈일본도 노래[日本刀歌]〉에 관한 장유(張維)의 논설:장유가 구양수의 본지(本志)를 곡해하였다. ④ 구양수의 《복의(濮議)》에 관한 장유의 논설:구양수가 자신의 과오를 합리화한 것이라는 장유의 평이 옳다. ⑤ 《중용장구》에서 의심스러운 점 세 가지를 든 장유의 논설:장유가 《중용장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한 말이다. ⑥ ‘마음의 출입[心之出入]’에 관한 장유의 논설:이지덕의 반박에 더하여 《대학혹문(大學或問)》 정심장(正心章)의 설을 추가로 인용해야 한다. ⑦ 중국과 우리나라의 학술에 대한 장유의 논설:장유의 말대로 우리나라의 학문은 주자학 일변도로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으나, 사실 주희와 육구연은 상호 존중하는 관계였다. 아울러 명고는 제7항 말미에서 명나라의 순수한 주자학자는 오직 설선(薛瑄)뿐이라고 한 이지덕의 말을 경솔하다고 나무랐다.
    2020-10-08 | NO.132
  • 이지연 李⽌淵 순조 30년(1830) 10월 1일∼순조 31년(1831) 1월
    이지연 李⽌淵 순조 30년(1830) 10월 1일∼순조 31년(1831) 1월이지연(1777∼1841)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경진(景進), 호는 희곡(希⾕)이다. 할아버지는 1775년 3월부터 1776년 7월까지 나주목사를 지낸 이명중(李明中)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이의열(李義悅)이다. 동생 이회연(李晦淵)은 1833년 6월부터 1837년 3월까지 나주목사를 지냈다. 1805년 식년시 진사와 동시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였고, 1806년에는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808년 병조좌랑, 1809년 수찬·공충도 사, 1810년 교리·헌납·무안현감, 1811년 수찬, 1813년 부응교·전라좌도 경성관(京誠 官), 1814년 헌납·승지, 1817년 대사간, 1819년 병조참판, 1823년 도승지, 1824년 경상도관찰사, 1827년 판윤·대호군, 1828년 도총관·형조판서를 지냈다. 1830년 9월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승정원일기』(1830년 9월 18일)에 “형조판서 이지연을 나주목 사로 귀양보내어[謫補] 오늘 안으로 하직하게 하고, 시임(時任)목사는 체차하여 경직(京 職)에 붙이라.”는 기록이 있다. 1831년 한성판윤·홍문관 제학, 1834년 봉상시 제조·예 문관 제학, 1837년 호조판서, 1838년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조대비(趙⼤妃)의 측근자 로서 1839년에 많은 천주교인을 학살한 기해박해를 일으킨 장본인이었으나, 1840년 탄핵되어 명천에 유배된 후 죽었다. 『금성읍지』에는 “경인(1830년) 10월 1일 부임하였고 신묘(1831년) 1월에 한성판윤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기록. 나주시 영산동주민센터 광장에는 1833년에 비금도 인근 섬 주민들이 세운 「행목사 이공지연 영세불망비」가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수동 입석마을에 1833년에 세운 「목사이후지연청덕유애비 (牧使李侯⽌淵淸德遺愛碑)」가 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나주목 여황면에 속했는데 1906년에 함평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에 다시 나주로 편입되어 본량면 산수리라 하였고 1949년 8월 14일 광산군으로 이관되었다. 시호는 문익(⽂翼)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131
  • 이지호 李贄鎬
    이지호(李贄鎬, 1836~1892)는  광주 이씨, 자는 동현(東賢), 호는 지남(芝南)으로 광산(光山)에서 태어났다.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의 후손이다. 아들 이승우(李承愚, 1855~1919)는 화순 출신으로,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서양 오랑캐에 대응하여 자주적인 사상을 내세운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의 대표인물로 꼽힌다.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은 구한말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가 중심이 된 사상으로 기존의 존화양이에서 벗어나 '서양 오랑캐'들의 압력에 직접적으로 대응하자는 자주적인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다른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익현(崔益鉉), 이항로(李恒老), 기정진(奇正鎭), 김평묵(金平默),  이강년(李康秊)  등을 들 수 있다. 존왕양이 사상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서양 오랑캐'를 배척하자는 뜻으로 세운 척화비(斥和碑)에도 잘 나타나 있다. 존왕양이는 '왕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오랑캐'는 물론 '서양 오랑캐'를 지칭하는 어휘이다. 『지남집(芝南集)』은 1909년에 서문은 정의림(鄭義林)이 썼으며, 발문은 윤자현(尹滋鉉)과 정시림(鄭時林)이 각각 쓰고 아들 승우(承愚)가 간행하였다. 11권 1책, 목활자본, 1967년 간행되었다.  내용은 권1에는 100여 수의 시, 권2에는 서(書), 권3에는 기(記), 권4에 서(序), 권5에 발(跋), 권6에 문(文), 권7에 행장(行狀), 권8에 묘갈명(墓碣銘), 권9에 사실(事實), 권10에 잡저(雜著) 순으로 되어있다. 특히 부록에 수록된 제문은 정의림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제문이 총 22편 수록되어 있으며 서(書)중에는 최익현(崔益鉉), 한계원(韓啓源) 등에게 답한 글과 정의림·기우만(奇宇萬) 등에게 안부를 묻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기에는 청심당선생부조묘유지기(淸心堂先生不祧廟遺址記) 등 각종 유적지에 대한 기행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진주(晉州)의 촉석루에서 남강(南江)의 물소리를 들으며, 마치 임진왜란 때 죽어간 삼장사(三壯士)의 천추에 맺힌 한을 듣는 것 같다고 시(題矗石樓)를 남긴다.특히 조선 후기의 학자 박영주(朴永柱)의 시문집인 무사재집(無邪齋集) 에 발문을 쓰기도 했다.
    2020-03-17 | NO.130
  • 이징구 李徵⿔ 숙종 15년(1689) 8월 2일∼숙종 16년(1690) 6월 19일
    이징구 李徵⿔ 숙종 15년(1689) 8월 2일∼숙종 16년(1690) 6월 19일이징구(1641∼1723)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여휴(汝休)이다. 아버지는 현감 이민정(李敏政)이며, 어머니는 한득일(韓得⼀)의 딸이다. 1663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고, 1676년 정시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였다. 형 이태구(李泰⿔)와 아들 이중장(李重章) 도 문과에 급제하였다. 1681년 지평·사헌부 정언, 1685년 광주(廣州)경력, 1688년 장성현감, 1689년 장령·북청 판관을 지냈다. 1689년 5월 22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8 월 2일 도임하고 1690년 6월 19일에 파직당하였다. 1694년 홍문록을 가려서 뽑은 16인 포함되었다. 수찬, 1695년 헌납, 1697년 필선, 1699년 사간, 1701년 교리, 1702년 사간, 1704년 동부승지, 1705년 승지, 1719년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금 성읍지』에는 “기사(1689년) 8월 2일 도임하였고 경오(1690년) 6월 19일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고 하였다. 시호는 정청(靖淸)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29
  • 이징즙 李徵楫 숙종 28년(1702) 8월 11일∼*숙종 30년(1704) 봄
    이징즙 李徵楫 숙종 28년(1702) 8월 11일∼*숙종 30년(1704) 봄이징즙(1656∼1707)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중용(仲⽤)이다. 아버지는 봉렬대부 행사옹원봉사 이만최(李萬最)이며, 성주목사를 지낸 이징해(李徵海)의 형이다. 1683 년 산릉참봉, 1687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689년 사포별제·금정찰방, 1690년 차사원(差使員), 1697년 서흥현감, 1700년 호조정랑, 1701년 영천군수를 거쳐 1702년 윤6월 2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8월 11일 부임하였다. 1705년 한성서윤, 1706년 해주목사로 제수되었다. 『금성읍지』에는 “임오(1702년) 8월 11일 영천군수에서 이동하여 8월에 도임하였고 경포군(京砲軍)의 군량을 늦게 선적한 일로 갑신(1704년) 봄에 체포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나주목사 시절 송재 나세찬을 배향한 송재사(松齋祠) 의 상량문을 지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28
  • 이태진 李泰鎭 고종 19년(1882) 11월 12일∼고종 20년(1883) 11월 4일
    이태진 李泰鎭 고종 19년(1882) 11월 12일∼고종 20년(1883) 11월 4일이태진(1812∼?)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운여(雲汝),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이충영 (李忠永)이다. 1852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53년 경기전 참봉, 1857년 한성주 부·영접도감 낭청, 1861년 장악주부·사옹주부·연기현감, 1865년 괴산군수, 1867년 모친상을 당하였고, 1870년 진산군수, 1873년 거창부사, 1874년 진주목사, 1875년 밀양부사, 1879년 부사과, 1879년 대구판관, 1880년 선산부사, 1881년 울산부사, 1882년 양주목사, 11월 청풍부사를 지냈다. 1882년 12월 12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8883년 1월 29일 부임하였다. 1883년 부호군, 1884년 공조참의·돈녕도정, 1885년 여주목사, 1887년 경주부윤, 1891년 우윤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임오(1882 년) 12월 12일에 청풍부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계미(1883년) 1월 16일 임금에게 사조하고, 1월 29일 부임하여 재직하다 동년 11월 14일에 돈녕도정으로 이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887년 경주부윤이 되면서 아버지 이충영(李忠永)이 이조참판에, 할아 버지 통덕랑 이엽(李燁)이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울산동헌 뒷마당에 「부사 이공태진 청덕불망비(府使李公泰鎭淸德不忘碑)」가 세워져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127
  • 이평형
    이평형(李平亨)의 자(字)는 원지(元之), 본관은 청안으로  봉사(奉事) 이춘영(李春英)의 후손이며, 이환(李煥)의 아들이다. 1561년(명종 16)에 무과(武科)하여 선조(宣祖) 정유왜란(丁酉倭亂)에 감찰(監察)로서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을 따라 남원(南原)에서 함께 전사(戰死)했기에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참여했다.선무원종공신 3등(宣武原從功臣3等)에 녹훈되어 있다.湖節3上-119-3, 光州, 壬辰, 李福男同殉  -《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26
  • 이하악 李河岳 현종 4년(1663) 9월 24일∼현종 5년(1664) 3월 13일
    이하악 李河岳 현종 4년(1663) 9월 24일∼현종 5년(1664) 3월 13일현감 이하악(1610∼1677)의 본관은 용인(⿓仁)이며, 자는 여수(汝壽)이다. 아버지는 이후지(李後地)이다. 163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41년 영릉참봉을 시작으로 1647년 중부참봉, 1649년 산릉도감 감조관, 1650년 보은현감, 1653년 충주목사, 1654년 영천군수, 1658년 금천군수(⾦川), 1661년 장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663년 8월 26일 금성현감으로 제수받아 9월 24일에 부임하였는데, 1664년 1월 9일에 읍호가 금성현 에서 나주목으로 승격, 복호되었다. 『금성읍지』에는 1월 20일 환원으로 나온다. 1664년 2월 14일 장성부사 때 산성수축과 군기 관련 일로 나주목사에서 파직을 당하여 1664년 3월 13일에 이임하였다. 1666년에 직첩을 환급 받았고, 1668년에 서용하라는 허락이 있은 뒤에, 1668년 7월에 충주목사로 발령이 난다. 1672년 풍덕부사, 1676년 단양군수, 1677년 부호군을 지냈다. 『금성읍지』에는 “계묘(1663년) 9월 24일 도임하였고 갑진(1664년) 1월 20일(『현종실록』은 9일)에 읍호가 금성현에서 나주목으로 환원되었으며, 동년 3월 13일에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윤진(尹搢)이 나주목 사로서의 그의 죽음을 기리는 만장 「만이나주장(挽李羅州丈)」을 써서 『덕포유고(德浦遺稿)』에 수록되어 있고, 송시열(宋時烈)이 쓴 그의 묘갈명이 『송자대전(宋⼦⼤全)』에 수록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25
  • 이하징 李夏徵 영조 24년(1748) 12월 14일∼영조 28년(1752) 9월
    이하징 李夏徵 영조 24년(1748) 12월 14일∼영조 28년(1752) 9월이하징(1686∼1755)의 본관은 한산(韓⼭)이다. 아버지는 동래부사를 지낸 이명준(李明 浚)이다. 172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23년 창릉참봉, 1725년 의영봉사, 1728년 감찰, 지례현감, 1733년 호조좌랑, 1734년 호조정랑, 전주판관, 1737년 금부도사, 한산 군수, 1741년 전주판관을 지냈다. 1748년 10월 2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2월 14일 부임하였다. 1752년(영조 28) 3월 22일 전문(箋⽂)에 청첨(⾭籤)을 붙였으니 격례에 어긋나는 점이 있어 추고를 받았다. 한산군수 때의 일로 1752년 8월 11일 나장에게 잡혀갔다. 1753년 3월에 폄하되었다. 나주목사 이임 뒤 1753년 10월에 읍성의 수축을 잘했다 하여 표창을 받고 통정대부로 가자되었다. 1755년 금성관 괘서사건과 관련 되어 대역죄인으로 주살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무진(1748년) 10월 7일 제수 되어 12월 14일에 도임하였고 임신(1752년) 9월에 이전 한산군수 때 있었던 일로 잡혀가 계유(1753년) 3월에 폄하되었고, 을해(1755년) 3월에 대역죄인으로 주살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9 | NO.124
  • 이한 李憪 현종 5년(1664) 4월 8일∼현종 6년(1665) 6월 24일
    이한 李憪 현종 5년(1664) 4월 8일∼현종 6년(1665) 6월 24일이한(?∼?)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정사공신 이시백(李時⽩)의 둘째 아들이다. 1635 년 6월에 나주목사를 지낸 이시방(李時昉)이 큰아버지가 된다. 1639년 청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못했다. 1640년 죽산부사, 1645년 충원현감, 1648년 사재첨정, 상주목사, 1650년 통정대부, 1653년 공산현감, 1655년 여주목사, 1658년 서원현감, 1662년 양주목사를 거쳐 1664년 2월 15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4월 8일 도임하였 다. 『금성읍지』에는 “갑진(1664년) 4월 8일 도임하였고 을사(1665년) 6월 24일에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23
  • 이함일(李涵一)
    이함일(李涵一, 1562~1621)의 본관은 함풍, 자는 양오(養吾), 호는 일사(一査)이다. 이함일의 8대조 春秀는 왜구가 육지와 섬을 노략질을 하자 全羅水使에 제수되어 적을 평정하였으며, 7대조 李競은 兩館大提學을 역임하고 宗系辨誣로 명나라를 두 번이나 방문하였다.부친은 承仕郞 邦弼로 河西 金麟厚의 제자이며, 모친은 光山金氏로 參奉 有仁의 딸이다. 이함일은 光州 梧峙里 집에서 1563년(명종 18) 3월 16일에 태어났다. 그는 재주와 역량이 뛰어났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양친에게 효도하고 세 동생들과 우애하니, 향리인들이 모두 기뻐하고 따랐다. 그는 1589년(선조 22)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임진란 때에 성균관을 지켰다.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집에 돌아갔으나 부모들이 이미 피해를 입어 돌아가신 것을 알자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삼년상을 극진히 치루었다. 이후 그는 1603년(선조 36)의 식년문과에서 병과 1위로 급제하여 1606년부터 관직에 제수되어 成均館學正兼中學訓導, 宗簿寺主簿, 司憲府監察, 司憲府持平, 兵曹正郞, 康津縣監, 保寧縣監, 掌樂院僉正, 寧海府使, 春秋館編修官, 成均館司成 등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1618년(광해군 10)에 仁穆大妃의 廢母로 조정에 나가지 않아 康津縣監에 補任되었으며, 1620년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621년 7월 7일에 병이 들어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光州 斗坊面 角化山이다. 그는 南陽洪氏 進士 景舫의 딸 사이에서 廷彙 등 1남 2녀를 두었다. 
    2020-08-02 | NO.122
  • 이현필 李顯弼 영조 12년(1736) 10월 20일∼영조 13년(1737) 4월
    이현필 李顯弼 영조 12년(1736) 10월 20일∼영조 13년(1737) 4월현감 이현필(1689∼?)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익경(翊卿)이다. 1721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22년 태릉참봉, 1724년 효릉참봉, 1725년 제용직장, 1728년 내사시 직장·사포별제·공조좌랑·호조좌랑, 1729년 호조정랑, 1730년 전주판관, 1732년 형조 정랑·공산현감, 1735년 귀후별제·사직령·한성서윤을 지내고 1736년 10월 10일 금성현 감에 제수되어 10월 20일 부임하였다. 이현필은 1737년 별시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게 되는데, 과거장을 관리하는 고관(考官)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이 발각되어 삭과 (削科)를 당하고 귀양을 가게 된다. 『금성읍지』에는 “병진(1736년) 10월 20일 도임하 였고 정사(1737년) 4월에 사직하였다.”기록.*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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