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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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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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도현 李道顯 영조 11년(1735) 10월 26일∼영조 12년(1736) 9월
    이도현 李道顯 영조 11년(1735) 10월 26일∼영조 12년(1736) 9월현감 이도현(?∼?)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1722년 상의원 별제· 의금부 도사·빙고 별제·사복시 주부, 1723년 고산현감, 1729년 재녕군수, 1732년 부사과, 1733년 대흥군수를 지냈다. 1735년 9월 25일 금성현감으로 제수되어 10월 26일 부임하였다. 1741년 전설별제·사재첨정 등을 역임하였다. 나주에 부임한 이도현 목사가 향풍을 교화시킴은 물론, 나주지역의 오랜 폐단이었던 향교의 제수와 관련된 세금 문제를 해결하였다며 그 공을 높이 평가한 글이 오달운(吳達運, 1700∼1747)의 『해금집(海錦集)』에 실린 「나주향교포수리혁서(羅州鄕校脯修釐⾰序)」이다. 1736년(영조 12) 6월 23일 『승정원일기』에 “어공(御供)을 하는 배에 강제로 곡물을 운반하게 한 금성 현감 이도현 등을 파직하고 감색 등은 형추하여 정배하기를 청하는 사옹원 도제조 등의 계”에 따라 윤허한다는 전교가 있었다. 그러나 6월 25일 기록에 “폐단을 개혁하여 여러 해 동안 쌓인 포흠(逋⽋)을 모두 속속들이 조사해서 징수하였고, 잡힌 감색이 탈출하여 근거없는 말을 지어내 투서하였던 것”으로 밝혀져 파직을 당하지는 않는다. 『금성읍지』에는 “을묘(1735년) 10월 26일 도임하였고 병진(1736년) 9월에 사직하였 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95
  • 이만영 李晩榮 현종 원년(1659) 12월 29일∼현종 1년(1660) 6월 17일
    이만영 李晩榮 현종 원년(1659) 12월 29일∼현종 1년(1660) 6월 17일현감 이만영(1604∼1672)은 현종대 전주부윤을 역임하고 전라감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9년 12월 15일 금성현감으로 제수받아 12월 29일에 부임하여 1660년 6월 16일 이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기해(1659년) 12월 29일 도임하여 경자(1660년) 6월 16일에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상세이력은 전주부윤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94
  • 이만저 李曼著 숙종 19년(1693) 8월 19일∼숙종 20년(1694) 10월 24일
    이만저 李曼著 숙종 19년(1693) 8월 19일∼숙종 20년(1694) 10월 24일이만저(1636∼?)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만경(曼卿)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행제 릉참봉을 지낸 이오(李悟)이다. 1660년 증광시 진사에 합격하였다. 1665년 강릉참봉 (康陵), 1669년 사옹봉사, 1671년 선공직장·사복주부, 1672년 은진현감, 1680년 사복 판관, 1685년 사복첨정, 1688년 호조정랑, 1689년 영천군수, 1690년 능주목사를 지냈다. 1693년 7월 27일 능주목사에서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8월 19일 도임하였다. 1694년(숙종 20) 10월 24일 기록에 집을 판 일과 큰 고을을 맡아 재물 관리 문제로 사판에서 삭제하라는 대사간 조상우(趙相愚)·정언 이희무(李喜茂)가 논계한 내용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능주목사에서 이동하여 계유(1693년) 8월 19일 도임하였고 갑술 (1694년) 10월 24일 재난 피해를 입어 장계에 의하여 파직되었다.”라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93
  • 이만직 李萬稷 숙종 38년(1712) 7월 6일 1715년 8월 8일
    이만직 李萬稷 숙종 38년(1712) 7월 6일 1715년 8월 8일이만직(1654∼1727)의 본관은 한산(韓⼭)이며, 자는 자장(⼦⾧)이다. 아버지는 평안도 관찰사 이태연(李泰淵)이다.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4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701년 후릉참봉으로 관직에 들어서 1702년 전설별검(典設別檢), 활인별제, 1703년 임피현령, 1707년 영천군수, 1711년 선산부사, 1712년 5월 25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7월 6일 부임하고 1715년 8월 8일에 사직하였다. 1717년 원주목사, 1719년 광주 부윤(廣州), 1722년 부호군, 1725년 강원도관찰사, 1726년 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06년 임피현령 재직 시 선정을 펼쳤다 하여 표창을 해야한다는 암행어사의 장계가 있었고, 1714년에는 전라도 감진어사 홍석보(洪錫輔)가 복명하여 나주목사 이만직(李萬稷)이 진휼을 잘하여 한 도의 으뜸이라고 하여 표창하여 줄 것을 건의하였다. 또 1715 년에도 전라우도 암행어사 김상옥(⾦相⽟)이 복명하여 나주목사 이만직을 포상했다는 실록의 기록이 확인된다. 『금성읍지』에는 “임진(1712년) 7월 6일 도임하였고 을미 (1715년) 8월 8일에 사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92
  • 이맹현 李孟賢 성종 14년(1483) 12월 27일∼*성종 15년(1484) 하반기
    이맹현 李孟賢 성종 14년(1483) 12월 27일∼*성종 15년(1484) 하반기이맹현(1436∼1487)의 본관은 재령(載寧)이며, 자는 사성(師聖), 호는 근재(覲齋)이다. 호조참판 이개지(李介智)의 아들이다. 1456년(세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0년 춘당대시에 장원 급제한 뒤 성균관주부가 되었다. 동생 이중현(李仲賢)도 1476년(성종 7) 문과에 급제하고 부제학을 지냈다. 1464년(세조 10)에는 『동국통감』 편수와 『경국대 전』 형전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사헌부장령·이조정랑·예문관응교 등을 지내면서 경연시 독관·시강관 등을 겸하였다. 1475년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災傷敬差官)을 역임하였다. 1477년 형조좌랑, 직제학, 예조참의, 통정대부가 되어 홍문관 부제학, 1478년 11월 황해도관찰사, 1482년 5월 병조참의, 1483년 12월 27일 나주목사로 부임하는데 이임 일시는 정확하지 않지만 1484년 하반기로 추정된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191
  • 이명중 李明中 영조 51년(1775) 3월 14일∼정조 즉위년(1776) 7월
    이명중 李明中 영조 51년(1775) 3월 14일∼정조 즉위년(1776) 7월이명중(1712∼1789)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상경(尙褧)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유(李濡)이고, 아버지는 현감 이현응(李顯應)이며, 영의정 김재로(⾦在魯)의 사위이 다. 1755년 3월부터 1756년 5월까지 나주목사를 지낸 이시중(李時中)이 형이며, 이조 판서를 지낸 이최중(李最中)이 동생이다. 손자 이지연(李⽌淵), 이회연(李晦淵)도 순조대 나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741년 진사가 되어 1744년 3월에 헌릉참봉을 제수받고 관직에 올랐으나, 신병이 막중하여 1744년 11월에 사직하게 된다. 1747년에는 존숭도감 감조관·제용주부·창덕궁행각수리소 낭청·호조좌랑, 1748년 호조정랑·강서현령을 역임하였다. 이어 1753년 금성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춘천부사 김치인(⾦致仁)과 처남매제로 상피법에 따라 금성현령에 부임하지 않고 호조정랑이 되어 추상휘호도감(追上徽號都 監)의 낭청이 된다. 1754년 황주목사, 1761년 파주목사, 1764년 원주판관, 1769년 사복시 판관, 1770년 예천현감, 1773년 이천부사, 1774년 평양서윤을 지냈다. 1775 년 3월 3일에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3월 14일 부임하였다. 1777년 안악군수, 1778년 광주부윤(廣州), 1779년 의금부 동지사를 거쳐 1782년에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금성 읍지』에는 “을미(1775년) 3월 3일 제수되어 동월 14일에 부임하였고 을미(1775년) 10월에 금성관과 성지(城池)를 보수하고 통정대부에 오른다. 병신(1776년) 7월 11일에 봉산군수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고 기록되어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190
  • 이몽량 李夢亮 인종 1년(1545) 4월∼인종 1년(1545) 8월
    이몽량 李夢亮 인종 1년(1545) 4월∼인종 1년(1545) 8월이몽량(1499∼1564)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응명(應明)이다. 아버지는 진사 이예신(李禮⾂)이며, 아들이 오성부원군 이항복(李恒福)이다. 1522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했고, 1528년 식년 문과에 급제했다. 형 이몽윤(李夢尹)도 1528년 식년 문과에 함께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 승정원 주서, 사간원 정언, 집의, 경상도 어사 등을 역임 하였으며, 사헌부 지평과 장령 등에 제수되었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위사공신 3 등으로 광산군(光⼭君)에 봉해졌다. 4월 나주목사가 되었다. 1547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예조참의, 병조참지, 장례원 판결사 등을 역임하고, 1550년 승정원 도승지, 경상도 관찰사, 청홍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로도 대사간, 경기도 관찰사, 예조참판, 대사헌,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564년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렀 다가 66세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금성읍지』에는 “을사(1545년) 4월에 도임하였고, 동년 8월에 동부승지가 되어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명종실록』 그의 졸기에 “성품이 온화하고 부드러워 일찍이 화를 내본 적이 없었다. 강결(剛決)하여 특립(特⽴)하는 자질은 없었으나 또한 아첨하거나 꾸며대는 태도도 없었다.”고 기록되 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189
  • 이몽필 李夢弼 중종 33년(1538)∼중종 35년(1540) 2월
    이몽필 李夢弼 중종 33년(1538)∼중종 35년(1540) 2월이몽필(1507∼1562)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은경(殷卿)이다. 아버지는 이맹원 (李孟元), 어머니는 윤종손(尹宗孫)의 딸이다. 1519년 13세의 어린 나이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 온 후 좌랑,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538년 홍문관 교리, 부응교를 역임하면서 현량과(賢良科) 복원을 주장하다가 사헌부등 대신들의 탄핵으로 나주목사로 좌천이 된다. 1539년 10월 26일 전라도관찰사의 장계에 “나주목사 이몽필(李夢弼)은 간략하게 관직에 임하고 일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며 부지런히 백성을 어여삐 여기고 불쌍히 여겨 부세와 요역을 가볍게 하므로 평민들이 그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하였기에 상을 내려주었다. 그 이후에도 사간원 사간, 홍문관 직제학, 안변도호부사, 예조참의, 병조참의, 청홍도관찰사, 형조참판, 전주부윤, 경주부윤 등을 거쳐 1559년에 승정원 도승지와 호조참판을 역임하고 1562년 2월 24 일 사망하였다. 『명종실록』 그의 졸기에, “사람됨이 간소(簡素)하여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직무를 이행함에 청렴하고 근면하여 훌륭하다는 칭찬이 많았다.”고 기록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무술(1538년)에 도임하였고, 경자(1540년) 2월에 사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188
  • 이민서 李敏敍 현종 8년(1667) 8월 18일∼현종 9년(1668) 12월 22일
    이민서 李敏敍 현종 8년(1667) 8월 18일∼현종 9년(1668) 12월 22일이민서(1633∼1688)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이중(彝中), 호는 서하(西河)이다. 친아버지는 전라감사를 지낸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이고 훈련원 도정(都正) 이후여(李厚 輿)의 양자가 되었다. 증조할아버지 이극강(李克綱), 할아버지 이성록(李成祿), 아버지 이경여(李敬輿)와 자신까지 4대가 문과 급제자이다. 장인은 전주부윤을 지내고 전라감 사를 3번 역임한 원두표(元⽃杓)이다. 1652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한 뒤 1653년 검열, 1655년 정언·지평, 1660년 수찬·부교리, 1661년 교리, 1663년 지평·수찬, 1664년 헌납, 1665년 응교, 1667년 6월 25일 나주목사로 제수, 8월 18일 도임하여 1668년 12월 22일 홍문관 부교리로 이동하였다. 실록에는 “민서는 좌상 허적을 논척하여 상의 뜻을 거슬렸기 때문에 힘써 구하여 나주 목사가 되었었는데, 송시열 등이 소환할 것을 극력 청하였으므로 이때에 홍문관 직책에 제수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1668년 9월 21일에는 광주(光州)목사 윤변(尹抃), 장성부사 소두산(蘇⽃⼭)과 연명으로 상소하여 농사가 결단난 것을 진달하고, 급재(給災)할 것을 청하였다. 1669년 사인(舍 ⼈), 1673년 대사성, 1674년 호조참의, 이조참의, 1677년 광주(光州)목사, 1680년 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1682년 대사헌·이조판서, 1683년 우참찬·강화유수, 1684년 판윤, 1685년 형조판서·이조판서, 1687년 호조판서·예문관 제학을 지냈다. 문집으로 『서 하집』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정미(1667년) 8월 18일 도임하였고 무신(1668년) 12 월 22일에 교리가 되어 이임하였다.”고 하였다. 나주 천동서원에 배향되었다. 1782년 건립한 「천동서원묘정비」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이다. 시호는 문간(⽂簡)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87
  • 이민서(1633~1688)
    이민서(李敏敍, 1633~1688)는 1677년 광주목사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민서는 1670년 부응교로 있을 때 여러 날 동안 술을 마시고 숙직을 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목을 찔렀다. 당시 사람들은 미치광이 병이 발작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조정에 두기 불안하여 외직을 맡겼다고 하며, 현종조에서는 더 이상 청요직에 제수되지 않았다. 그런데 광주목사로 재임 중이던 1678년 9월 다시 자신의 허벅다리를 찌르는 일을 저질러 체직되었다.
    2018-07-03 | NO.186
  • 이민식 李民植 순조 14년(1814) 4월 25일∼순조 14년(1814) 5월 23일
    이민식 李民植 순조 14년(1814) 4월 25일∼순조 14년(1814) 5월 23일이민식(1753∼1817)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799년 성균관 유학, 목릉참봉, 1800 년 한성주부, 1801년 영유현령, 1808년 가평군수, 1811년 선산부사를 역임하였다. 1814년 4월 2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5월 23일 전라감사 박윤수(朴崙壽)의 장계에 “본도는 기사년 이후로 거듭 흉년이 들었는데 나주는 더욱 심하고 극심한 가뭄이 한달이 넘었다.”고 하면서 광주목사 홍양묵과 서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다. 1851년 전라도 수군절제사를 역임했다. 『금성읍지』에는 “갑술(1814년) 4월 25일 부임하였고 같은 해 5월 23일 광주목사와 서로 바꾸어 근무하게 하였다.”라 기록되어 있는데, 광주 목사로는 1814년 5월부터 1817년 4월까지 재임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185
  • 이발(李潑, 1544~1589)
    이발(李潑, 1544 ~ 158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菴), 본관은 광산이다. 제학 이중호(李仲虎)의 아들이며, 네 형제 중 둘째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중후하고 엄정하였으며, 질박하고 성실하였다고도 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어 경연에서 왕도를 진달하고, 기강을 진작하고, 정도와 사도를 분별하려 하였으나, 시비를 가리고 인물을 비판하기를 좋아하여 원망을 사기도 했다.윤의중의 사위로 고산 윤선도의 고모부였다. 문과 알성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고, 동생 이길(李洁)도 별시 을과에 아원(2등)으로 급제하여 응교에 이르렀으나,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둘 다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이발은 동인 강경파의 영수였고, 또한 북인에 속했다. 정여립을 편들고 친하게 지낸 것이 기축옥사에 연루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형제의 죽음에 이어 80대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고문으로 죽어 동인들이 원망하였고, 이는 동인의 남북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발과 그의 형제들이 과거에 급제할 때 마을사람들은 이 아름드리나무에 북을 걸어두고 축하연을 열었다. 하지만 축하의 노래가 울려 퍼지던 괘고정수의 가지는 수십 년 후 모두 말라 죽고 만다. 이발이 기축옥사에 휘말리면서 멸문지화를 당했기 때문이다.호남사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기축옥사는 1589년 선조에게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올라가면서 시작된다. 전주의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선조2년(1570년)에 문과에 급제해 예조좌랑과 수찬자리에 올랐던 정여립은 동인이었지만 선조의 눈 밖에 나서 낙향해있던 처지였다. 낙향한 후 그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계원들과 토론을 자주 하고, 활을 쏘거나 무술을 연마했다. 1587년에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했을 때,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왜구를 물리치는 데도 공을 세웠다. 이 사건은 대동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게다가 정여립은 당대 성리학적 가치관을 넘어서는 진보적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라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을 주장했다고 한다. 급진적 사상과 광범위한 조직을 지닌 정여립의 움직임은 모반으로 엮을 좋은 구실이 됐다. 동인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는 사실에 서인들은 술렁거렸다. 동인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고 있다는 우려가 서인들 사이에 퍼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조 역시 동인의 정치력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관찰사의 고변을 받은 선조는 곧바로 체포령을 내리고, 정여립은 체포 직전 아들과 함께 칼을 품고 자결을 한다. 혹자는 자결이 아니라 군졸에 의해 살해됐을 것이라고도 추측한다. 도망갈 의향 이었으면 군졸이 어디로 닥칠지 뻔히 아는 상황에서 왜 죽도에 있다 자살을 했겠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정여립의 집터는 파헤쳐지고, 그 자리에 못을 만들어버렸다. 그 땅에 풀 한포기도 자라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곧이어 역모에 가담한 자를 발본색원하기 위한 대규모 국문이 시작됐다. 역모사건수사의 총책임자는 낙향하여 정치적 복귀만을 학수고대하던 서인의 영수,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이었다.“사형과 단근불로 매우 참혹하게 국문하였다.”- 『기축록』“정철이 기축년에 많은 그물과 함정을 만들었다.”- 『선조실록』“(정철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일망타진했다.”- 『선조실록』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수많은 가사와 시문을 지은 문학인으로 기억되는 송강 정철, 하지만 정치인 정철은 기꺼이 피바람의 칼잡이가 됐다.정여립의 집에서 나온 서간, 정여립과의 평소 교류 등을 이유로 수많은 선비들을 국문했다. 자그마치 3년에 걸친 대대적인 색출작전이었다. 동암 이발도 끌려가 고문을 당한 끝에 유배를 간다.본래 이발과 정철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동서 당쟁의 한복판에서 앙금이 쌓였다고 한다. 칼자루를 쥔 정철과 정치적 갈등 관계는 물론 사감까지 좋지 않았던 이발의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동생 이길, 이급도 체포가 되고, 백유양, 조대중, 유몽정, 최여경, 윤기신, 이진길 등 당대 내노라하는 선비들이 모조리 정여립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죽어나갔다. 영의정 노수신과 우의정 정언신, 홍종록 등 동인에 속하는 관료들도 파직이 됐다.고문 중에 다른 이를 발고하면 살려준다고 해서 국문장에서는 마구잡이 발고가 계속 됐다. 누군가 이발을 역모가담자로 발고하면서 유배지에서 국문장으로 이발이 압송된다. 온 몸의 살이 발려나가는 극형 끝에 이발은 죽음에 이르고, 그의 팔순노모와 여덟 살 아들도 극형을 당한다. 최희남 등 성균관 유생들이 이발은 ‘무고를 당했다’며 상소를 올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발의 형제는 물론 아들과 사위, 사촌동생까지 죽어나가면서 집안은 거의 멸문에 이른다. 기축옥사가 마무리되던 1591년, 이 살육의 광풍에 죽어나간 선비의 수는 무려 천여 명에 달했다“대단한 죄가 아닌데도 백성들이 연좌되어 감옥이 가득차고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 김천일 상소 중정철을 앞세워 동인 세력을 주저앉힌 선조는 그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죄를 정철에게 전가하기 시작한다.“사독한 정철은 천고의 간흉이라, 간악한 정철로 인해 어진 신하를 잃었다”- 『선조실록』정철이 광해군 관련 건의를 한 것을 핑계삼아 선조는 정철을 파직하고, 위리안치형에 처한다. 빈곤과 질병에 신음하던 정철은 유배지에서 비참한 생을 마친다.호남 인재가 죽어나가고 향촌사회가 찢겨나가는 기축옥사는 이발 가문의 불행이었을 뿐 아니라 호남의 인재가 모조리 죽어나간 아픈 역사였다. 중앙에서 벌어진 권력쟁탈전과도 양상이 달랐다. 복수가 복수를 부르고, 향촌사회를 증오와 갈등으로 갈갈이 찢어버렸다. 끝을 모르는 증오의 정치는 그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아픈 교훈을 전해준 끔찍한 일이었다.한편 종의 아들과 옷을 바꿔 입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길의 아들 원섭은 본관을 숨긴 채 살아남았다. 광해군 때에 이발의 죄는 정여립과 친한 것뿐이라 하여 여러 차례 신원을 요청하였으나 선대 임금의 결정이라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인조 2년(1624년) 동생인 이길과 함께 죄가 면해지고 관작이 복원되었고, 몰수한 재산은 되돌려졌다. 숙종 26년(1694년)에는 이발과 이길의 절개와 행실을 기려 그 옛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1694년 이발의 멸문지화가 모함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지고, 신원이 회복되자 이발의 후손들은 비로소 제 이름을 밝힐 수 있었다.놀랍게도 죽은 듯 보였던 괘고정수에서도 새로 잎이 났다고 한다. 현재 괘고정수는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어있다.
    2021-04-09 | NO.184
  • 이방주(李邦柱)
    이방주(李邦柱, 1542~1597)의 본관은 함평이며, 자는 임중(任重), 여경(汝擎), 중경(重卿)이다. 증조부는 이종우(李從愚),조부는 이정전(李庭荃), 부친은 성균진사(成均進士) 이준(李俊)이다. 첫째 부인은 송붕표(宋弸彪)의 딸 신평송씨(新平宋氏)이고, 둘째 부인은 송정수(宋廷秀)의 딸 홍주송씨(洪州宋氏)이다.이방주는 1542년(중종 37)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 중봉마을에서 태어났다. 이방주는 1558년(명종 13) 불과 17살의 나이로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1570년(선조 3) 식년시에서 갑과 3위 탐화랑을 차지하여 문과에 급제하였다. 과거에 급제하고 6년 뒤인 1576년(선조 9)에 대동찰방(大同察訪)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무장현감(茂長縣監)과 고부군수(古阜郡守) 등에 발탁되어 주로 외직에서 활동하였다.이방주가 무장현감으로 있을 때, 호조에서 무장 지역의 창고를 살폈는데 황조(荒租) 1만여 섬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나추(拿推)[죄인을 잡아들여 조사하는 일]되었다. 그 뒤로 이방주에 관한 자세한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다.《광주읍지(光州邑誌)》에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무고함을 변호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송강 정철과도 내왕한 것으로 보인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방주는 아들과 함께 피난을 가다가 도중에 왜적을 만나 순절하였다.이방주는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과 가깝게 지내며 교유하였다. 유희춘의 문집 《미암집(眉巖集)》에 이방주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방주는 유희춘이 지은 《헌근록(獻芹錄)》이라는 책을 교정하였다. 《헌근록》은 유희춘이 왕의 정사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편찬한 책이다. 
    2024-11-18 | NO.183
  • 이백춘(李百春)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순절한 이백춘(1537∼1592)은 병사 이종우(李從愚)의 증손이다. 자는 영경(榮卿), 본관은 함평이다. 광산구 등임동 방혜마을에서 태어나 1558년 용봉택지개발지구로 편입된 중봉마을(저불)로 이사했다.천성이 강직하고 문학절행(文學節行)이 뛰어난 그는 용봉동으로 옮긴 그해 사마시에 급제한 뒤, 마을에 읍취정(挹翠亭)을 짓고 세심천(洗心泉)을 만들어 후학을 양성하고 봄과 가을 향약을 강학(講學)하였다.1590년(선조 23)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로 임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중앙 관리로부터 지방 아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임금을 호종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직분을 지켜 죽으리라.”하고 끝까지 항거하다가 적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조금도 얼굴빛을 변하지 아니하고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다가 그해 9월 23일 순절하였다.1997년 보령 호국사에 위패를 봉안하였고, 그의 묘는 1980년 어린이대공원이 조성하면서 일곡동 호항동(虎項洞)으로 옮겼다. *《광주읍지(1879)》,《함평이씨 광주종친회지(2001)》
    2020-03-06 | NO.182
  • 이보욱 李普昱 영조 15년(1739) 8월 4일∼영조 16년(1740) 12월 20일
    이보욱 李普昱 영조 15년(1739) 8월 4일∼영조 16년(1740) 12월 20일이보욱(1688∼?)의 본관은 용인(⿓仁)이며, 자는 휘백(輝伯)이다. 아버지는 광주목사 이의저(李宜著)이며, 1663년 9월에 부임한 나주목사 이하악(李河岳)이 증조할아버지다. 1719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아들 이명조(李明祚)도 문과 급제자이다.1722년 지평, 1723년 정언, 1727년 상의원정·집의, 1730년 영광군수, 1733년 성균관 사성, 1734년 홍천목사, 1735년 종성부사, 1737년 우부승지·삼척부사를 역임한다. 1739년 6월 9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8월 4일 부임하고 1740년 11월에 죄인들이 배소(配所)를 마음대로 벗어나는 것을 막지 못한 죄로 파직된다. 1743년 공조참의, 1745 년 의주부윤, 1746년 곡산부사, 1749년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기미 (1739년) 8월 4일 도임하였고 경신(1740년) 11월에 대간의 계에 의하여 파직되고, 을해(1755년)에 역률(逆律)의 죄를 추가로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1755년의 죄는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역적의 가문과 연이어 혼인을 하므로 그 죄가 큰데 아직도 관작을 보존하고 있어 그 관작을 추가로 삭탈관직 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계에 의하여 사후(死後)임에도 추탈을 당하게 된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9 | NO.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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